대구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 훌쩍 가버렸는데 하고 싶은 공부는 고사하고
먹는 것도 해결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내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새어보는 돈도 야금야금 축나갔다.
세든 그 주인집에는 제법 부모 속께나 썩히는 내 또래의 언청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경산 사과밭에 사과도 사먹고 놀러 가자하여 따라 나섰는데
그날이 마침 경산 장날이라 읍내에 내리니
시장이 시끌벅적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파지성냥
(공장에서 성냥을 만들다가 개비가 두 개 세 개 이어진 것, 인이 잘못 발라진 것 등)을
됫박으로 팔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일전에 취직을 하려고 대명동 쪽 성냥공장에 가본 기억과
장사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대강 시장조사를 해두고
그날은 그 친구를 따라 경산외곽에서 실컷 놀고 영화구경까지 마치고 귀가하였다.
다음날 일찍부터 서둘러 대명동 지역의 상표가 대덕표(?)이던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성냥공장에 들러 공장도 가격을 물어 보니
어제 장판에서 팔던 가격이면 이 성냥은 정품이면서
이윤을 덜 남기고 많이 판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
100통들이 한box를 덜렁 사 가지고는 인근의 5일장을 수소문하여
이튿날 반야월 이라는 곳의 장에 도착했는데
장돌뱅이들의 텃세가 어찌나 심하던지 반평도 되지 않는 노점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고
장터 한켠에 근근히 비집고 앉았으나
가만히 앉아있으면 누가 찿아 와 사줄 리도 없고
성냥이 헐값이니 사가라고는 해야겠는데
쉼 호흡을 몇 번씩하고 시도를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거의 한나절은 보냈는데도
도대체 어느 누구하나 무엇이냐고 물어 보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한통의 성냥도 팔지 못한 주제에 점심요기도 할 수 없는 처지라
시장기는 점점 더하고 온몸에 맥 다 빠질 무렵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두 눈을 꼭 감고
-성냥 사이소 헐값에 팝니다- 라고 내 생각에는 크게 외쳤으나
아마 모기소리 만큼밖에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기 소리도 자꾸 자주 해보니 점점 목청이 틔어
-성냥 사이소 두 통에 15원 입니더- 까지 나오고
나중에는 -한 통에 10원 짜리 정품 성냥이 두 통에 15원 공장도 가격으로 팝니더-라고
수식어까지 섞어 가며 술술 나왔다.
땅거미 지는 파장이 되어 물건을 보니 100통 중 30여통 밖에 팔지 못했다.
성냥은 부피가 커서 나머지 70여통 남은 것을
아침에 올 때도 차장 아가씨에게 사정사정하여 왔는데 이 애물단지를
또 통사정을 하여 다시 가져 갈려니 꿈만 같았다.
그 고생을 하며 돌았는데도 내가 가는 첫 장은 가는 곳마다
매상이 영 신통치 않아 다른 것을 해볼까 하다가도
어떤 물건을 어디서 도매로 구해 오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장사로 쉽게 바꿀 수 없어 그 덩치 큰 성냥을 메고 다녔는데
속아만 살아온 사람들인지 너무 헐값에 파는 성냥이라 아무리 정품이라 해도 믿지 않고
꼭 뚜껑을 뜯어보고 사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경산, 자인, 하양, 화원, 성서, 월배 장을 두어 바퀴 돌고 나니
정품 성냥이 일반 상점보다 싸다는 소문이 나고
신용도 쌓여 매상이 점점 올라가고 무엇보다
매일 차장 아가씨와 승강이도 버릴 필요도 없이
하루 장날에 몇 BOX씩 장차로 보낼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떼돈 벌 것 같았다.
장사도 제법 되고 생활도 차츰 안정이 되어
대구로 간지 두 달여 만에 내가 작정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 당시 유명학원이던 삼덕 학원에 등록하여 주경야독을 시작하였는데,
호사다마라던가 장터 한켠에 반평도 근근히 차지하여 쭈그리고 앉아 시작했던 장사가
제법 목 좋은 곳에 서너평 차지하고
매 장마다 밑천은 있는 데로 물건을 떼어 팔아왔는데
추석이 임박할 무렵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
그날은 경산 장이었는데 장마철이 지난 지라 비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여름 잘도 챙겨 다니던 천막 조각도 없이,
위로는 양동이로 퍼붓는 소나기와 바닥은 온 장판이 물바다이고
미처 손쓸 수 없는 그 악몽 같은 순식간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튿날 마냥 어둠침침했던 골방 밖이 훤한 것을 보면
한나절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도 꼼짝 하기 싫었다.
조금 더 과장하면 영원히 눈도 뜨지 말고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미리 주어놓은 방세와 물난리 통에서도
겨우 피난시킨 성냥 두어 박스뿐이었다.
늘상 그래왔지만 간장하나에 맨밥을 먹는다해도 보름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세끼를 내리 굶고 또 잠이 들었으나
잠결에도 허기에 못 견디어 양은 냄비에 선을 그어 먹다 남긴 식은 밥덩이를
정신없이 퍼 넣고 나니 식은땀이 주루루 흐르면서
제정신이 돌아오고 이미 날이 새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추스리고
지금까지 성냥을 떼어오던 공장에 가서 전후 사정 얘기와 외상으로 물건을 주면
꼭 갚는 것은 물론이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통사정을 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사정은 딱하지만 아무리 단골이라도 고정적인 점포를 가진 것도 아니고
무얼 믿고 주겠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나를 믿지만 누가 나를 믿겠는가?
아마 어른이고 그 정도 단골로 다녔다면 몰라도 이제 나이 겨우 열 여섯인데-
처음 시작할땐 그래도 가진 돈도 있고 경험 삼아 시작했지만
지금은 한 두 박스 팔아 가지고는 차비도 되지 않는 장사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인근 가게에다 본전 밑지고 처분한 것이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의 장사,
그것도 밑바닥의 장돌뱅이 경험이었다.
첫댓글 왠지 눈물이 날려고 한다.
고생했구나.
항정가 미래의 대박을 얻기위해 어찌알고 미리 성냥에 불을 짚일려고
예견된 일이였나 싶기도 하고...
초년고생이 말년이 편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헛튼 얘기가 아니였구나
그 삶의 여정에 자손들도 잘 자라서 부모의 길을 함께 하리라 믿는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항상 넘치기를 비네..
네 글솜씨가 많이 up grade 됬구나
항정가의 미래까지 내다 보다니
그기다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까지 대단하다 이도성
네말대로 항정가가 대박을 얻었으면한다
남자친구들은 그 당시 고생이 많았네
우리 나이때 사람들은 고생과 배고픔을
경험했지만 요즘 아이들
이런 경험이 없으니...
모든건 경험과 연륜이 말해 주듯이 우리들
아이들도 이런 경험을 좀 해보면 험한세상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
좋은글 마음을 적시네..;
고생 많이 했구나
미안하다 친구야 할말이없다
네 자서전을 통해 네 아팠든 과거를 위로 받았으면 한다
고생했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용기 또한 대단하다.
속으로만 감추고 살아가는 나를 뒤 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