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조씨 선적지(청송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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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정(望雲亭) 망운정공(望雲亭公) 조 지(趙 址)께서
서식(棲息)하시던 정자(亭子)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동 안덕지서 옆에 있다.
망운정공(望雲亭公) 조 지(趙 址) 銅虎-淵(7)-庭彦-址(2)
1) 행장(行狀) <망운정>
자(字)는 극립(克立) 호(號)는 망운정(望雲亭)이다. 중종 36년(1541년)에 출생(出生)하여 선조 32년(1599년) 1월 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8세이며, 증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하였다. 슬하(膝下)에 수도(守道), 형도(亨道), 순도(順道), 준도(遵道), 동도(東道의 5형제와 딸 셋 등 팔남매를 두었다. 둘째아들 형도(亨道)는 백부 만호공 諱 우(?)에게 출계(出系)하였고, 넷째아들 준도(遵道)는 재종숙(再從叔) 사직공 諱 개(介)에게 출계(出系)하였다.
2) 묘소(墓所) 묘소(墓所): 조고묘 우 간좌(祖考墓 右 艮坐) 배 정부인 안동권씨 묘(配 貞夫人 安東權氏 墓)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금대산 묘좌(金臺山 卯坐)
3) 선적(先蹟) 망운정(望雲亭): 망운정공(望雲亭公) 휘(諱) 지(址)께서
서식(棲息)하시던 정자(亭子)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동 안덕지서 옆에 있다.
우모정(寓慕亭): 배 정부인 안동권씨 묘각(配 貞夫人 安東權氏 墓閣)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동 속곡(束谷) 금대정사 내에 있다.
4) 언행록(言行錄) <우모정>
공의 천자(天資)가 명수(明粹)하여 겨우 7세에 할아버지 내헌공(耐軒公)에게 가르침(學)을 받을 때 조손(祖孫)이 책상을 마주하여 읽는 글소리가 낭랑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덕성(德性)이 한집에 모였다.”고 하였다. 15세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하구정(下鷗亭)에 갔을 때 어른들이 퇴계선생의 초당운(草堂韻)을 따내어서 부(賦)하라고 명령(命令)하니 문득 소리를 응해 말하기를, “안계(眼界)가 물가에 아득하니 희롱하여 어자(魚子)가 금사(金沙)에 뛰노는 것을 볼레라. 어린나이로 즐겁게 담소(談笑)하고 갈매기 내리기를 종용(從容)하니 물결이 출렁이더라.”하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망운공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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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커서 경전(經傳)에 전의(專意)하여 정미한 지결(旨訣)이 심목(心目)에 요연하고 왕패(王覇)의 경계가 가슴에 정하였다. 일찍 크게 덮을 뜻과 선견의 밝음이 있어 비록 출사(出仕)하지 않고 집을 다스리면서도 조리가 정정(井井)하여 조정보다 엄하였다. 공(公)은 할아버지 내헌공(耐軒公)의 명령(命令)에 따라 청송안덕(靑松安德)에 복거(卜居)하셨다. 고향(故鄕) 함안까지 삼백여리 길을 매양 삼일에 한 번씩 귀근(歸覲)하셨다. 공(公)이 거(居)하신 남쪽 미륵원(彌勒原)에 정자(亭子)를 건축(建築)하고 망운정(望雲亭)이라 이름 하였다. 외내상(外內喪)을 당하여 6년을 시묘(侍墓)하시면서 우소(寓所)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으시니 그때 함안군수로 계시던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이 매양 오시면 반듯이 안정(顔丁)이라고 칭찬하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행(行)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통탄(痛歎)하시면서 분의직전(奮義直前)코자 하셨으나 연로(年老)하시어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아들 형도(亨道)와 동도(東道)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에 보내면서 경계(警戒)를 말씀하시길 “주욕신사(主辱臣死)는 의(義)이니 너희들은 힘써라.”고 하셨다. 일찍 학봉 김선생(鶴峰 金先生)과 계의(契義)가 심히 두터웠다. 선생(先生)이 우백(右伯)에 계실 때 편지 왕복에 매양 국사(國事)로서 정성을 기울였고 선생이 일찍 남에게 말하기를 “조모(趙某)는 참으로 의인(義人)이다.”고 하였다.
선조 1년(1568년), 공이 처음으로 일록(日錄)을 쓰셨는데
선조32년(1599년)에 마치니 무려 36책(冊)이었다.
일생일용(一生日用)에 비록 세미(細微)한 것이라도 모두 기록(記錄)하였다.
동계정(東溪亭) 동계공(東溪公) 휘(諱) 형도(亨道)께서 서식(棲息)을 취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재리에 있다.
동계공(東溪公) 휘(諱) 형도(亨道) 1) 행장(行狀) 함조 십삼충(咸趙 十三忠)의 한분이며,
망운정공(望雲亭公) 諱 지(址)의 둘째아들로
숙부 만호공(萬戶公) 諱 우(?)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자(字)는 대이(大而) 또는 경달(景達),
호(號)는 동계(東溪)로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하였다.
명종 22년(1567년)에 출생하여 선조 16년(1583년) 첨지(僉知) 민추(閔樞)에게 수학하고,
선조 20년(1587년)에 정구(鄭逑)를 사사(師事)한 뒤
3년간 향시(鄕試)에 연이어 장원(壯元)하였다.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었다.
선조 27년(1594년)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실시한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겸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었고 이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청하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경산현령이 되었다.
선조 39년(1606년)에는 고성현령에 임명되었고,
선조 41년(1608년)에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인 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광해군 1년(1609년)에는 본영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 옥(獄)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광해군 6년(1614년),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9년(1617년),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의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있게 되었고,
토포사를 겸행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광해군 14년(1622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이 해에 청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순변사 유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호위하였고,
이 공으로 보성군수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키고
미납되어 온 4,000여 석의 세미(稅米)를 감사에게 진정하여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동계정>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본도 중군을 겸하고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하였다. 인조 3년(1625년),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으로 차송(差送) 되었다. 인조 7년(1629년)에는 경주영장이 되어 3년간 재직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恥辱)을 듣고 울분이 폭발, 등창이 터져 분사(憤死)하시니 그때가 인조 15년(1637년) 2월 8일이며 향년 71세이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과 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 기록되었으며, 청송 덕봉사(德峯祠)에 배향되었다. 문집(文集)에는 동계집(東溪集)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선조 28년(1595년)에 비변사 낭관, 선조 39년(1606년)에 고성현령을 지내셨다.
2) 묘소(墓所) 및 선적(先蹟) 묘소(墓所):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총정 후록 해좌(叢亭 後麓 亥坐).
배 숙부인고창오씨묘(配 淑夫人 高敞吳氏 墓).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前 칠곡군 인동면 신월동) 천산성 간좌(天山城 艮坐).
동계정(東溪亭): 동계공(東溪公) 조형도(趙亨道)께서
서식(棲息)을 취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재리에 있다.
동계공유허비(東溪公遺墟碑): 상동(上同).
3) 언행록(言行錄) 공은 어려서부터 영수(穎秀)하였다.
장성(長成)하여 문명(文名)이 적심(籍甚)하여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동계공유허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공이 분개(憤慨)하여 말하기를 “남아(男兒) 사업(事業)은 반드시 문묵(文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올라 비국랑(備局郞)이 되었다. 그때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매양 문부(文簿)와 계의(啓議)를 초(草)하면서 구호(口號)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공이 부름을 받아 서취(書取)의 역(役)을 맡았는데 필한(筆翰)이 나는 듯이 하여 보는 사람이 칭상(稱賞)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거활(巨猾) 이경기(李景祺)의 변(變)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병사(兵使) 이시형(李時英), 영천군수(榮川郡守) 유배급(柳斐及) 공(公)으로 하여금 설기(設機) 포획(捕獲)하는데 공의 소획(所獲)이 많았다. 간당(姦黨)을 모두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官階)에 올랐다.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있을 때 그 곳 풍속(風俗)이 무(武)를 숭상(崇尙)하고 문학(文學)을 모르므로 공이 흥학(興學)을 목표(目標)로 하여 학교(學校)를 중수(重修)하고 날로 읍중(邑中) 자제(子弟)를 공부(工夫)시키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포정(南浦亭) 남포공휘순도(南浦公諱純道)께서 서식(棲息)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동 선고(先考) 정자인 망운정(望雲亭) 옆에 있다.
남포정(南浦亭)은 한국전쟁(6.25동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1965년에 중건하였다.
남포공(南浦公) 諱 순도(純道) 淵-庭彦-址(2)-純道(3)
1) 행장(行狀) 자(字)는 경일(景一), 호(號)는 남포(南浦)이다.
선조 6년(1573년)에 출생하여 행의(行義)로 문(聞)하여 부정(副正)에 제(除)하시고
인조 2년(1624년)에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에 승(陞)하셨고,
인조 4년(1626년)에 지사(知事)에 제(除)하였다.
효종 4년(1653년) 12월 2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1세이다.
2) 묘소(墓所) 및 선적(先蹟) 묘소(墓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소근동 비봉산 갑좌(飛鳳山 甲坐) 배 정부인 의성이씨 묘(配 貞夫人 宣城李氏 墓).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화현 갑좌(火峴 甲坐)
남포정(南浦亭): 남포공(南浦公) 조순도(趙純道)께서 서식(棲息)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동 선고(先考) 정자인 망운정(望雲亭) 옆에 있다.
남포정(南浦亭)은 한국전쟁(6.25동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1965년에 중건하였다.
남포공휘순도신도비각(南浦公諱純道神道碑閣) : 남포정(南浦亭) 내에 있다.
3) 언행록(言行錄) <남포정>
공은 어려서부터 총식(聰識)이 영오(穎悟)하기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재능과 도량이 커서 뭇 사람을 용납하고,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여 양친(兩親)을 봉양(奉養)함에 유유(油油)하고 익익(瀷翼)하여 일 없이는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고, 비록 가까이 수리(數理)를 나가도 반드시 기약(期約)을 어기지 않았다. 문학(文學)이 숙취(夙就)하여 항상 사문(師門)에 종유(從遊)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멀리 계시므로 곧 행하지 못하고, 만일 행하면 그믐에는 돌아와 뵈오니 이백옥(李伯玉)이 벼슬을 그만두고 봉양(奉養)을 맞이하는 뜻과 같이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 공이 중형 동계공과 같이 의사를 창기(倡起)하여 죽음을 원수와 같이 하기를 맹세하고 출진(出陣)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계공과 지악공(芝嶽公)이<남포공 신도비>
함께 공의 창의(倡義)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같은 위난(危難)을 당하여 양친이 당(堂)에 계시니 불가불 누군가는 남아서 잘 모셔야 하지 않는가.”하고 울면서 동행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니 공이 더욱 감격(感激)하였는데 형을 따르는 것 또한 충효(忠孝)이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잘 모시는 것 역시 충효(忠孝)로다.
공(公)은 정성(定省)하는 여가(餘暇)에 매양 국사간난(國事艱難)할 것을 염려(念慮)하여 글(書)을 사방에 보내어 의사(義士)를 격려(激勵)하여 핍절(乏絶)하지 않도록 원후수조(援後輸調)하니 세상 사람들이 좌원사(座元師)라고 불렀다. 망운정공(望雲亭公)께서 동당(同堂)이 순절(殉節)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경도(驚悼)하시며, 조묘(祖廟)에 요분악(妖?惡)한 것이 미칠까 염려하여 공을 함안으로 급히 보냈다. 공(公)은 함안에 가서 어계선조 이하 4대 신주(神主)를 모시고 당친(堂親) 10여인과 함께 밤에는 길을 걷고 낮에는 쉬어가면서 오던 차에 적(敵)을 만나자 의(義)로써 꾸짖으니 적이 감히 범(犯)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적(敵)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편히 돌아오니 망운정공(望雲亭公)이 그 승순이험(承順夷險)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셨다. 폐아(廢莪)에 이르러 계씨(季氏) 주부(主簿) 준도(遵道)가 풍수당(風水堂)을 어머니 묘 아래에 수무허(數武許)에 짓고 공이 일형(一兄)과 이제(二弟)로 더불어 같이 올라 혈루(血淚)로써 울면서 더욱 백형(伯兄)이 일찍 돌아갔음을 슬퍼하였다. 남포고로(南浦古廬)에 후학들을 면장(勉장)하니 당세 만신(晩臣)들이 향리(鄕里)의 저귀(著龜)로 질문하였다.
송포정(松浦亭) 송포공휘종악(松浦公諱宗岳)께서 서식(棲息)을 취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재리에 있다.
송포공(松浦公) 諱 종악(宗岳) 1) 행장(行狀) 만호공(萬戶公) 諱 우(우)의 아들로
공의 나이 3살 때 부친 만호공이 세상을 떠났다.
자(字)는 성준(成峻), 호(號)는 송포(松浦)로
선조 7년(1574년)에 출생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군공(軍功)을 세워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지냈고
선무원종이등훈권(宣武原從二等勳券)에 록(錄)하였다.
인조 6년(1628년)에는 별시위(別侍衛)를 제(除)하시고
인조 9년(1631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陞)하셨다.
인조 19년(1641년) 8월 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다.
2) 묘소(墓所) 및 선적(先蹟) 묘소(墓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대곡 비 묘하 사좌(大谷 비 墓下 巳坐).
배 정부인 경주김씨 묘(配 貞夫人 慶州金氏 墓): 묘부
송포정(松浦亭): 송포공(松浦公) 조종악(趙宗岳)께서
서식(棲息)을 취하시던 곳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재리에 있다.
송포공기적비(松浦公紀蹟碑) : 상동(上同).
3) 언행록(言行錄) <송포정>
공은 어릴 때부터 골상(骨相)이 풍위(豊偉)하고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홍원(弘遠)하여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 능히 효해(曉解)하고 선조 22년(1589년)에 향해(鄕解)에 맞았다. 공의 나이 19세인 임진년(壬辰年)에 섬나라 도적(盜賊)이 육지(陸地)를 침경(侵倞)하여 열군(列郡)이 연이어 함락(陷落)되니 공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모친에게 아뢰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죽으면 마땅히 나라에 죽을 것이니 영양백리(永陽百里)를 날로 삼성(三省)은 못할지라도 신혼(晨昏)의 직분은 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모친이 쉽게 허락지 않았다.
공이 재삼 간청(懇請)을 하고 또 망운정공(望雲亭公) 숙부께 고하니
숙부가 칼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격려하였다.
천지회회유차인(天地恢恢遊此刃) 일검능당백만사(一劒能當百萬師)
천지가 회회(恢恢)한데 이 칼을 놀리면 능히 백만사(百萬師)를 당하리라.
또한 백형(伯兄) 동계공(東溪公)이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어 격려하였다.
적입하남북(敵入河南北) 신분아제형(身分我弟兄) 제경년우천(弟輕年又淺) 신물역언병(愼勿易言兵)
적은 하수(河水) 남북(南北)에 들어오고 몸은 우리 제형(弟兄)이 나누어지도다. 지조(志操)가 경(輕)하고 나이 또한 어리니 적병을 업신여기지 마라,
<송포공 기적비>
공은 곧 화산(花山) 권응수공(權應銖公)의 의막(義幕)에 달려가 기모(機謀)를 찬성(贊成)하면서 매야(每夜)에는 돌아와서 어머니를 뵈오니 권공이 탄식(歎息)하며 말하기를 “충(忠)을 효문(孝門)에서 구한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공이 근친행(覲親行)으로써 밤에 법화령(法華嶺)에 이르니 큰 호랑이가 길을 막으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의 이 걸음은 어머니를 위함이니 충효(忠孝)의 도(道)를 다하지 못하게 할 것이냐”고 하자 호랑이가 곧 꼬리를 낮추고 사라져버렸다. 조금 있다가 권공을 따라 영양성(永陽城)에 역사(役事)를 도와서 회복(回復)하였다.【간와태호찬비명(艮窩泰祜撰碑銘)】 공이 이로부터 진취(進取)할 뜻을 두지 않고 문을 닫고 글을 읽었다. 선조 34년(1601년)에 여헌(旅軒) 장선생 문하(門下)에서 경의(經義)를 강토(講討)하면서 권공(權公)과 더불어 심경(心經)과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비명(碑銘)】
선조 33년(1605년) 모친 병환(病患)이 심하여 항상 진미(珍味)를 생각하자 공은 약탕기(藥湯器)를 안고 울며 말하기를 “고인(古人)은 어버이를 섬길 때 황작(黃雀)이 막(幕)에 들어왔다 하거늘 나는 무슨 물건이 가져 어머니의 병환을 낳게 할꼬.”하였다. 마침 시랑(豺狼)이 노루를 쫓아 들어오기에 이를 공양(供養)하여 효험(效驗)을 얻으니 사람들이 모두 효감(孝感)이라 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서궁(西宮)의 변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빠졌도다.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가 있으리오.”하고 마침내 작은 정자(亭子)을 지어서 종로(終老)의 계(計)를 삼고 스스로 송포거사(松浦居士)라 호(號)하고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었다.
율리청풍도자위(栗里淸風陶自謂) 동산은의동무주(桐山隱義董無?) 백수청포전봉사(白首靑袍前奉事) 소요정상득한휴(逍遙亭上得閒休)
율리의 청풍은 도연명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오. 동산에 숨은 의(義)를 동자(董子)는 짝 할리 없다. 흰머리 푸른 도포로 전봉사(前奉事)는 소요정(逍遙亭) 위에 한가롭게 쉬도다.
정묘적란(丁卯翟亂)에 장선생의 부름을 받고 서사(書寫)의 역을 받아서 항상 대좌(待坐)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의 재조로서 창의(倡義)하면 임진(壬辰)의 공이 선무록(宣武錄)에 실릴 것이니 조씨(趙氏)의 정충(貞忠)과 탁절(卓節)이 세세로 바꿈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인조 11년(1633년)에 병이 침중(沈重)하여 제자(諸子)에게 이르기를 “고인(古人)인 전귀(全歸)로서 효도를 삼았는데 나는 죽령(竹嶺) 싸움에서 일지(一指)를 상하여 흔적(痕跡)이 있으니 가위(可謂) 전귀(全歸)라고 할 수 없으니 그 유모(孺慕)함이 쇠(衰)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랴.”고 하였다.
지악정(芝嶽亭) 지악공휘동도(芝嶽公諱東道)께서 서식(棲息)하시던 정자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동 속곡(束谷) 금대정사 안에 있다.
지악공(芝嶽公) 諱 동도(東道) 淵-庭彦-址(2)-東道(5)
1) 행장(行狀) 자(字)는 경망(景望), 호(號)는 지악(芝嶽)으로
선조 11년(1578년)에 출생하여 유일(遺逸)로서
곡산훈도(谷山訓導)을 배(拜)하시고 또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을 제(除)하셨다.
현종 9년(1668년) 7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91세이다.
2) 묘소(墓所) 묘소(墓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금대 안산 유좌(金臺 案山 酉坐) 배 영인 월성이씨 묘(配 令人 月城李氏 墓).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소지내 오좌(小池內 午坐).
3) 선적(先蹟) 지악정(芝嶽亭): 지악공(芝嶽公) 조동도(趙東道)께서
서식(棲息)하시던 정자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동 속곡(束谷) 금대정사 안에 있다.
지악공기적비(芝嶽公紀績碑) : 상동(上同)
사암(思庵) : 신당공(新堂公), 지악공(芝嶽公) 형제분묘각(兄弟分墓閣)-상동(上同)
4) 언행록(言行錄) <금대-지악정>
공(公)은 어려서부터 탁락(卓?)하신 기절(奇絶)이 있었다. 효우(孝友)에 돈독(敦篤)하사 한 번도 부형(父兄)의 뜻을 어김이 없고, 굉심(宏深)한 도략(度略)은 멀리 범아(凡兒)에 뛰어나니 고(考) 판서공(判書公)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로 인해 우리집안이 크게 창대(昌大)할 것이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 중형(仲兄) 동계공이 강우진(江右陣)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공(公)이 분연(奮然)하여 말하기를 “백형(伯兄) 신당공은 노친(老親)이 계시니 부모 곁을 떠날 수 없으나 중형(仲兄)이 진(陣)에 나가니 이 아우 또한 마땅히 따라가야 한다.”고 하면서 따라나서니 이 때 공(公)의 나이 15세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공은 향의장(鄕義將)이 되어 대구의장(大邱義將) 서재겸(徐再謙), 울산의장(蔚山義將) 윤홍명(尹弘鳴), 안동의장(安東義將) 유복기(柳復起), 밀양의장(密陽義將) 손기양(孫起陽), 영천의장(永川義將) 정세아(鄭世雅), 경주의장(慶州義將) 김응택(金應鐸) 등과 더불어 대구 팔공산(大邱八公山)에 모여 맹서(盟誓)하였다. 선조 29년(1596년) 9월 9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에 들어가서 32장(將)과 더불어 자(字)를 불러 연구(聯句)를 각각 부(賦)하니 당시에 강좌우(江左右) 명현(明賢)과 정우복(鄭愚伏), 박대암(朴大庵), 조지산(曺芝山), 김금계(金琴溪),<지악공 기적비> 유지봉(柳岐峰), 김호수(金湖?) 등의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모두 표덕(表德)으로써 서로 불러 서로 운(韻)을 얽는데 공(公)인즉 “도(道)를 닦는 것은 경망(景望)을 비긴다.”하니 경망(景望) 두자는 곧 공의 표덕(表德)이다. 바야흐로 적개(敵愾)하여 동성(同聲)하는 때에 오직 도의(道義)로써 서로 허여(許與)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해동천고(海東千古)의 기장회(寄壯會)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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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격전하는 날에 경주의장(慶州義將) 낙의재(樂義齋) 이공(李公) 눌(訥)이 적탄(敵彈)에 신음(呻吟)하고 일어나지 못하니 열군(列郡)의 의장(義將)들이 시(詩)로서 위로하고 면려(勉勵)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산하(山下)의 경중(輕重)은 장부(丈夫)의 몸이요. 우주(宇宙)의 배회(徘徊)는 광막(廣漠)한 나무라. 지하에 장순(將順)이 응당이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생각건대 공의 타일(他日)에 좋은 이웃이 되리라.”고 하였다. 공은 어질고 효사(孝思)가 있어서 정부인권씨(貞夫人權氏)의 묘(墓)를 금대산(金臺山)에 장사(葬事)지내고 견씨(甄氏) 사정(思亭) 행(行) 왕부(王?) 고사(古事)의 본을 받으니 후인(後人)이 그 의(義)를 숭상하야 선고(先考) 망운정공(望雲亭公)과 더불어 금대사(金臺祀)에 향사(享祀)하였다.
추모정(追慕亭) 신당공휘수도재실(新堂公諱守道齋室)로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손달에 있다.
신당공(新堂公) 諱 수도(守道)
淵-庭彦-址(2)-守道
1) 행장(行狀) 자(字)는 경직(景直), 호(號)는 신당(新堂)으로
명종 20년(1565년)에 출생하여 조유재행(早有才行)하시다가
선조 26년(1593년) 3월 16일에 돌아가시니 28세이며,
증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하였다.
2) 묘소(墓所) 묘소(墓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복동 화현 진좌(火峴 辰坐) 배 증 숙인 밀양박씨 묘(配 贈 淑人 密陽朴氏 墓): 쌍분(雙墳)
3) 선적(先蹟)
추모정(追慕亭): 신당공 조수도 재실(新堂公 趙守道 齋室)로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손달에 있다.
<금대-사암>
금대정사(金臺精舍)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349-1번지에 있는 이 건물(建物)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1993. 2. 25.)로 지정되었다. 금대정사(金臺精舍)는 함안(咸安) 조수도(趙守道)와 자(子) 함수(咸遂), 조동도(趙東道)와 자(子) 함신(咸新) 등 사부자(四父子)의 재궁(齋宮)으로 조선(朝鮮) 영조(英祖) 12년(1736년)에 건립하였다. 이 건물의 동편(東便)에 안덕(安德) 입향조(入鄕祖)인 조지(趙址) 공과 조동도(趙東道) 부자를 위한 묘우(廟宇)와 강당(講堂) 및 동(東), 서재(西齋), 문루(門樓) 등이 있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8년)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당과 동·서재는 훼철되고 묘우(廟宇)만 남아 있다. 금대정사 서편에 있는 지악정(芝嶽亭)은 조동도(趙東道) 공이 인조(仁祖) 2년(1624년)에 건립한 것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하였다. 배산(背山)한 고대(高臺)위에 남남동(南南東)으로 배치(配置)되어 있으며 안쪽 낮은 마당에는 동(東), 서재(西齋)와 대문채(大門采)가 튼 □자형(字形)을 이루고 있는데 금대정사의 지붕을 까치 구멍집으로 구성(構成)한 것이 특이(特異)하다.【문화재청】
사암(思庵):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동 속곡(束谷) 금대정사 내에 있는
신당공(新堂公), 지악공(芝嶽公) 형제분묘각(兄弟分墓閣)이다.
4) 언행록(言行錄) <추모정>
공이 일찍부터 재행(才行)이 있어 유일재(惟一齋) 김언기 선생(金彦璣先生)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실 때 선생께서 여러 번 장허(?許)하여 말씀하시기를 “모(某)는 천자순수(天資純粹)하니 이성학문중인(已成學問中人)이라 하셨다. 공이 일찍 매형(妹兄)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와 도산사숙제현(陶山私淑諸賢)과 더불어 도산청량(陶山淸凉)에서 공부하여 진취(眞趣)를 영탄(永歎)하시며 명리(名理)를 강마(講磨)하시고 수년 만에 돌아오시니 이로부터 어진 소리가 더욱 들어났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중제(仲弟) 형도(亨道)와 함께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을 문경(聞慶)에 찾아가 뵈오니 선생(先生)이 그 구어(句語)가 청신(淸新)함을 보시고 탄식(歎息)하면 말하기를 “군의 문장이 내헌(耐軒) 할아버지의 격조(格調)가 있으니 오문(吾門)의 시학(詩學)이 또 그대의 집에 있다.”고 하였다. 선조 23년(1590년)에 정여립의 역모옥사(逆謀獄事)로 남토(南土)의 의관(衣冠)을 더럽힌다 했다. 또한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이 무고(誣告)를 당해 옥(獄)에 갇히게 되니 오랜 친구들과 종족(宗族)들이 화(禍)를 두려워하여 감히 묻지 못하는데 공이 홀로 분개(憤慨)하여 재종형(再從兄) 언도(毅道), 민도(敏道)와 같이 가 보셨다.
<신당공유허비>
부친 망운공(望雲公)이 함안에 계실 적에 낙마(落馬)하여 몸을 상(傷)해 피가 맺혀 성종(成腫)하여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함에 밤에는 하늘에 빌고, 낮에는 종기(腫氣)를 입으로 빨아서 낮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공(公)은 두아우 형도(亨道), 동도(東道)로 하여금 창의부진(倡義赴陣)하게 하시면서 “나는 노친(老親)이 계시니 같이 갈 수 없으나 군배(君背)는 모름지기 국사(國事)에 진력(盡力)하여 충효가성(忠孝家聲)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후에 양친(兩親)을 모시고 피란(避亂)하였다. 그 해 7월 함안에 가서 대소권속(大小眷屬) 14인을 모두 데리고 와서 일가(一家)를 보전(保全)하셨다.
방호정(方壺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정자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51 호(1984. 12. 29.)로 지정되었다.
방호공(方壺公) 諱 준도(遵道)
參-庭柏(2)-介-遵道
1) 행장(行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형인 형도(亨道), 종형인 준남(俊男) 등은 의병으로 나갔으나,
노친봉양 때문에 함께 나서지 못한 뜻을 시(詩)로 남겼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고을사람들과 함께 창의(倡義)하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하였고, 인조 7년(1629년)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거를 획책하였으나, 다시 화의가 성립됨을 전하여 듣고 그만두었다. 현종 5년(1664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어 부호군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선영 아래 풍수정(風樹亭)을 지어 늙도록 어버이를 사모(思慕)하니, 이민성(李民成), 이준(李埈) 등 고을선비들이 시를 지어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문집(文集)에는 방호집(方壺集)이 있다.
2) 묘소(墓所) 묘소(墓所):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대곡 임좌(大谷 壬坐) 배 숙부인 야로송씨 묘(配 淑夫人 冶爐宋氏 墓).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금대갑좌(金臺甲坐) 후배 숙부인 의성김씨 묘(后配 淑夫人 義城金氏 墓): 전배묘 쌍분(前配墓雙墳) 삼배 숙부인 월성최씨 묘(三配 淑夫人 月城崔氏 墓): 공묘하 임좌(公墓下壬坐)
3) 선적(先蹟) <방호정>
방호정(方壺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정자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51 호(1984. 12. 29.)로 지정되었다. 방호정(方壺亭)은 광해군 11년(1619년) 9월에 방호공(方壺公)이 지은 정자로, 낙동강 상류 길안천 절벽 위에 있다. 방호공(方壺公)이 44세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생모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墓)가 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자의 이름도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사친(思親)” 또는 “풍수당(風水堂)”이라고 하였다. 건물은 기역자형(ㄱ) 의 평면 구조이며, 측면은 팔작이고 전면은 맞배지붕이다. 이준(李埈), 조형도(趙亨道), 권익(權翊), 신집(申輯) 등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산수(山水)를 즐겼다. 정자 안에는 방호문집(方壺文集)의 판각(板刻)이 보관되어 있으며, 많은 학자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이 걸려 있다.
방호공유허비각(方壺公遺墟碑閣) : 방호정(方壺亭) 옆에 있다.
4) 언행록(言行錄) <방호공 유허비각>
공(公)이 어려서 두각(頭角)이 기억(岐?)하고 지취(志趣)가 있어 백형(伯兄)을 따라 학문(學問)을 유일제(惟一齊) 김공언기(金公彦璣)에게 받으니 김공(金公)이 심히 기중(器重)히 여기더라. 선조 20년(1587년) 공의 나이 13세에 사직공(司直公)의 상(喪)을 당하니 상(喪)을 거(居)함에 성인(成人)과 같고 약관(弱冠)에 매형(妹兄) 신오봉(申梧峰)를 따라 예안(禮安) 임소(任所)에서 도산(陶山) 사우(士友)들과 함께 공부한 지 3년 만에 돌아왔으나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조금 후에 또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우복(愚伏) 세 분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위기(爲己)의 학(學)을 얻어들었고, 붕배(朋輩)에 처함이 심히 준정(峻整)하여 사람들이 감히 오학(傲謔)으로써 더하는 이가 없었다.
성품(性品)이 효우(孝友)하야 외로운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맛 좋은 음식을 빠트리는 법이 없다. 형편이 어려운 형제(兄弟)와 자매(姉妹)들을 반드시 도와주고 또한 장획(藏獲)한 축물(畜物)도 다 나누어주었다.【행장(行狀)】
공의 나이 17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일가(一家)에서 창의(倡義)하여 성인(成仁)한 자가 많았으나, 어머니가 연세가 많은 관계로 충(忠)을 다하지 못하고 그 답답한 심정(心情)을 시(詩)에 담았다.
남아의 사업이 어찌 이 뿐이랴! 모름지기 괴수 수길(秀吉)의 목을 베어 와서 능연각(凌烟閣)위에 내건 후에 창주(滄州)로 돌아와 낚싯대를 드리우리라.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여헌장 선생(旅軒張 先生)과 우리 선조 우복공(愚伏公)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도내(道內) 의병장(義兵將)을 분정(分定)하는데 청송인(靑松人), 즉 공이 응(應)하여서 가저(家儲)를 기울여 의량(義糧)을 도왔다.
【입제정공종노찬(立齊鄭公宗魯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여(義旅)를 창기(倡起)하였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기별을 듣고 북향(北向) 통곡(痛哭)하고 대둔산(大遯山)에 들어가 몸이 마치도록 일록(日錄)을 기록하였는데 명(明)나라 숭정년호(崇楨年號)를 사용하여 반청(反淸)의 감정(感情)을 담았다.
공이 방호(方壺)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을 사랑하여 정자(亭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 위에서 보면 어머니 권씨(權氏)의 묘(墓)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당(堂)을 풍수(風樹)라고 명(銘)했는데 이는 고인(故人)의 사정(思亭)의 유의(遺意)를 담은 것이었다.【행장(行狀)】 인조 8년(1630년)에는 송(宋)나라 사마랑중(司馬郞中) 정태중(程太中)과 병오갑(丙午甲) 진솔회고사(眞率會故事)를 본떠서 정참의(鄭?議) 광성(廣成), 유교리(兪敎理) 성증(省曾), 신필선민일(申弼善敏一), 정찰방(鄭察訪) 운(?), 정부원(鄭副元) 수(帥) 등 충신(忠信) 제공(諸公)과 더불어 경계(庚?)를 장원서(掌苑署)에 닦으니 사람들이 청조(淸朝)의 승사(勝事)라 칭(稱)하더라.【출정금남광성년보(出鄭錦南廣成年譜)】
5)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현종(顯宗) 5년(1664년) 6월 13일[계유(癸酉)] / 전 주부 조준도에게 가자하다. ……전략(前略)…… 태화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법전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일찍이 선왕조 때에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는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당상으로 올려 주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 감사 홍헌(洪憲)은 나이 80세가 되었는데 아직 성대한 의전을 받지 못하였고, 청송(靑松)에 사는 전 주부 조준도(趙遵道)도 89세인데 그의 자제들이 소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준도가 금지하여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가자하도록 하고, 이들처럼 누락된 사람을 해조에게 수소문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36집 4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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