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창작교실 8기-후 10차시 합평작 (10월 21일 용)
단어와 문장 단락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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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첨삭
1. 존엄한 죽음 / 남경수
1 조부모님들이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아주 어릴 때 다 돌아가셔서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다.
2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처음 경험한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약해서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고 거동도 불편하셨다. 그런데 외출을 나갔다 집으로 오시는 길에 넘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지게 되어 결국 병원에 입원하셨다. 더 이상 치료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요양 병원으로 가셨다. 집이 주택이라 병간호하기에 어렵고 엄마도 무릎 관절이 안 좋아서 간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 큰오빠는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자기 집 가까운 곳에다 아버지를 모셨다. 아마도 엄마나 형제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객지에서 바쁘게 살고 있었고 아버지의 상황을 정확히 몰랐다. 찾아가기 너무 멀고 외진 곳에 아버지를 모신 것에 화가 났다. 그래서 둘째 오빠랑 의논해서 형제들이 모두 찾아가기 좋은 위치로 요양 병원을 옮기자고 했다가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4 아버지는 늘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집에 가고 싶다고. 결국 아버지는 한 달도 계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5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를 보러 갔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3월인데다 학교 일도 바빴는데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갔다. 아버지는 누워 계셨는데 음식을 먹지 못해 맞은 수액으로 손발이 많이 부어 있었다. 호흡을 잘하지 못해 입을 벌리고 있었고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 의식은 있어서 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계속 눈을 번득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계셨다.
6 “주말에 또 올께요” 하고 왔는데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죽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 보니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지 못했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둘째 오빠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의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도 오고 싶어 했던 집은 마지막 가는 길에 들러서 가셨다.
7 임종 1주일 전까지도 집에 간다고 했고 우리도 몸이 나아지면 집으로 가자고 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마지막 작별의 인사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불효자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이고 몰라서 후회가 많이 남았다.
8 둘째 오빠는 작년 9월에 돌아가셨다. 간암 말기였다. 7년 만에 다시 재발하여 결국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요양 병원으로 갔다. 우리는 통증만 없게 해달라고 했고 연명치료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연명치료를 포기한다고 할 때 이렇게 하는 게 맞는가 싶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낯선 환경에 옮겨진 오빠는 집 근처 병원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했지만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죽음이 가까워졌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9 오빠의 죽음은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이라는 책은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했던 의사의 이야기였다.
10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게 죽음이다. 어떤 순서도 없이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죽음 자체를 회피하고 살았던 것 같다. 장례식장은 외진 곳이 많았고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가 싫어서 가는 것조차 불편한 마음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몰랐다. 내 차례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식들이 나의 죽음을 자기들 생각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야겠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생각은 자식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부모가 원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또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12 책을 읽으면 가장 많이 공감했던 내용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병명을 본인에게 밝히지 않고 좋아질거라는 희망의 말만 한다고 한다. 충격을 받아서 더 나빠지거나 돌아가실 것을 염려해서라고 하지만 나는 이런 행동이 오히려 그 사람을 이미 죽을 사람이라고 포기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3 또 약물 중독이 된다고 진통제를 못 주게 해서 육체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가는 것이다.
14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진실을 말해 달라고 가족한테 말했다. 자신의 병명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고 싶지 않고, 거짓 희망을 안고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15 마지막 시간을 알아야 행복한 이별의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초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통증의 원인을 본인이 알면 통증 조절이 훨씬 더 쉬워진다고 한다.
16 그래서 힘겨운 하루 일과를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안식하고 싶다. 물론 갑자기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지만, 그 또한 내 운명이리라.
17 그다음은 죽어감과 죽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첫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다. 두 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제대로 잘 준비해야만 한다. 내 삶의 과정과 다른 마지막은 나의 인생을 내가 아닌 누군가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18 가족이 모여 있는 가운데 마지막 유언을 하고 숨이 멈추어지는 임종은 영화나 드라마에나 있는 환상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입관 때는 죽음에 대해 몰라서 충격 속에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많이 힘들었다. 누군가 영혼이 떠난 내 육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면 슬플 것 같다. 이제는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여전히 따뜻한 손을 잡아 줄 것이다.
19 자식이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우리의 인생이 돈과 사랑으로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진실도 마주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의 편안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지만 자식은 조금만 힘들어도 생색을 내고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자식인가 보다. 자식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맡겨 놓지 말고 미리 준비하고 알려서,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리지 않아야겠다.
20 마지막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다운 죽음을 가능케 하는 핵심이라고 한다. 결국 남은 자의 몫이 크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따라 존엄한 죽음의 완성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2. 반려 공간 /장미
1. 예전부터 ‘반려 동물, 반려 식물’ 이 인기이다. 보통은 생명이 있는 것에 ‘반려’ 를 붙인다. 그러나 이젠 반려의 개념을 꼭 호흡하는 것들에게만 부르지 않기로 했다. 공간에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2. 공간이란 참 희한하다. 어떤 공간은 아늑함을 느끼게도 해주지만 어떤 공간은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또 그 공간에서 무슨 기억들이 있었는지에 따라 머물고 싶게도, 벗어나고 싶게도 한다.
3. 그런 의미에서 집은 더욱 특별하다. 원래의 목적은 몸을 보호해 주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에게 부의 상징으로도 여겨지게 되었다. 하나의 재산 목록이 된 것이다.
4. 결혼하고 남편과 나의 첫 공간을 맞이했다. 그 때만해도 호기롭게 ‘단칸방에서도 즐거울 수 있어야 청춘이다!’ 를 외치며 집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장에 가는 노선과 가까운 어느 주택 2층에 전셋집을 얻게 되었다. 처음엔 무척 좋았다. 독립한 것도 신이 났고, 부모님의 간섭이 없는 것도 좋았다.
5. 비슷한 시기에 친구들이 결혼을 했었는데 다들 새 아파트에서 보금자리를 열었다. 그 때부터 그들과 슬슬 비교 되기 시작했다. 집들이를 하는 것이 꺼려지고, 괜스레 좋은 아파트에 집들이를 다녀오고 나면 질투가 났다. 그제야 왜 사람들이 좋은 자리에 신축 아파트, 내 집 마련에 목숨을 거는지 알게 되었다.
6. 한 여름의 2층 꼭대기 주택 방 안은 아지랑이가 보일 듯 지글지글 데워졌다. 겨울에는 웃풍이 들어 벽에서 한기가 느껴지기 일쑤였다. 2층을 올라가는 계단은 가파르고 미끄러워 만삭일 때는 늘 불안 불안했다. 우리 집을 오는 사람들도 계단에 대해서 한 마디씩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밝히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집이 싫어진 것이다. 집을 구할 때만해도 직장에 가는 버스 정류장이 가장 가까운 곳을 고른 것이었는데, 그것 하나만 보고 들어온 게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7.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전세 만기가 되면 우리도 남들처럼 버젓한 새 아파트를 가자고 말이다. 그리고 전세살이에서 벗어나자 했다. 난 여태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며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서 해탈한 사람처럼 굴어왔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결국 별 수 없구나.’ 란 생각에 씁쓸함을 느꼈다.
8. 그렇지만 나름의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살던 주택은 계단 밖에 없어 비싼 유모차는 써보지도 못 했다. 장을 한 번 보면 아기띠를 하고, 양 손에 장바구니를 든 채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갔다. 여름엔 죽을 맛이었다. 그럴 때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편안하게 올라가고 싶었다. 또 한 번은 나눔을 받으러 주택 바로 옆에 있는 신축 아파트로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내 또래의 여자가 나왔다. 나와 나이도 비슷한데 왜 사는 곳은 이렇게 다른가란 생각에 조금 서글펐다. 사실 무엇이 한 번 싫어지니 싫은 이유는 많았다.
9. 결국 우리 부부도 준 신축 아파트에 입성하게 되었다. 처음엔 집 내부가 매우 더러웠다. 그렇지만 이제는 내 집이 되어 어떻게든 깨끗이 가꾸어야겠다 다짐했다. 나의 소일거리는 이사한 바로 뒷날부터 시작되었다. 청소 업체가 두 번이나 왔다 갔지만 집 안의 찌든 때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었다. 온갖 검색을 하며 욕실, 주방 등의 찌든 때부터 제거해 나갔다.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해져가는 모습을 보며 더욱더 나의 공간이 완성되어 간다는 기분에 뿌듯함과 보람까지 느껴졌다.
10. 거의 한 달은 청소와 짐 정리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나 나나 이 집에서 죽기 전까지 평생 살 생각이었다. 몇 십 년을 살 집이니 매일 매일 광을 내고, 아껴주고 싶었다. 집 안이며, 아파트 외부며 애정이 가지 않는 공간이 없었다. 불편을 느끼던 곳에서 이사를 가니 전부 편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주택엔 없던, 이웃 주민도 많이 생겼다. 아파트 주민들도 친절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11. 그러던 중 우리 부부의 계획에 변경이 생겼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이의 초등학교 거리문제나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따져보면 빚을 더 내더라도 옮겨야 했다. 평생 살 거라고 생각한 집을 떠나려니 마음이 이상했다. ‘정말 이사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사를 결정했다.
12. 몇 달 뒤, 이사를 한다고 짐을 다 뺐다. 그 때 마음이 정말 이상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인데, 곳곳마다 우리 집 가구들이 겹쳐 보였다. ‘저기는 우리 애가 좋아하는 공간이었지, 저기엔 티비가 있었지, 저 식탁에서 늘 도란도란 밥 먹었었지…….’
13. 특히 화장실은 노고가 가장 많이 들어간 공간이었다. 매일 락스물로 박박 문지르며 광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집 안에서 제일 신경 썼던 공간이었다. 혼자서 화장실 청결이 그 집안의 청결 수준이라며 물기 제거부터 시작해 매일을 바지런히 청소했었다. 집을 떠나기 전 내부를 쓱 둘러보는데 자꾸 마음이 일렁였다. 아직도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를 못 내리겠다.
14. 갑자기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모님이 신혼 때 구입했던 중형차를 15년 타고 폐차를 하게 됐었다. 그 때 찌그러지던 차를 바라보며 엄마는 눈물이 나왔다 했다. 그 당시는 형편에 안 맞게 비싼 차를 샀었지만 덕분에 우쭐한 마음도 들었었고, 이 차로 우리 가족이 어디든 여행을 다녔던 시절이 생각나서라 했다. 차한테 매우 고마웠다 하셨다.
15. 그 때는 그 말을 들으며 ‘고철 덩어리를 버리는 게 뭐 그리 슬픈 일이람? 게다가 돈 주고 산 물건한테 고마울 것까지야…….’ 라 생각했다. 그런데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드는 감정이 이 때 엄마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호흡이 없는 것들에도 나의 추억과 정성이 깃들면 살아 숨 쉬나 보다. 즉, 나의 반려 공간은 나와 함께 계속 호흡하며 살아 있었다.
3. 시련과 선물/문성미
1.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폐 결절이 발견되어 추가 검사를 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감기를 심하게 앓은 기억조차 없는데 결절이 발견된 사실에 놀라는 나에게 남편은 CT에서 발견된 폐 결절 중 대부분이 단순 결절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2. 담당 의사는 결절의 원인을 3가지 가능성으로 설명하고, 추가 검사를 통해 가능성을 줄여가자고 했다. 첫 번째 원인이었던 박테리아나 기생충 감염 여부는 3주 정도 소요되는 혈액검사를 거쳐 결과가 나왔다. 이왕 결절이 있으니,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감염이 원인이기를 소망했지만, 나의 경우는 감염이 원인이 아니라는 결과였다.
3. 다음 검사는 어렵고 힘들었던 세침흡인 검사였다. CT 영상으로 결절 위치를 확인하면서 갈비뼈 사이로 긴 바늘을 몇 차례 찔러서 결절 조직을 채취한다고 했다. 바늘을 찌를 수 있는 각도가 나올지 시도해 봐야 알 수 있고, 적절한 위치에 침이 들어가도 조직이 바늘에 묻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설명에 불안감이 솟구쳤다.
4. 검사 당일이었다. 어려운 검사인만큼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고 검사실로 향했다. 기침을 참아야 침을 찌를 기회라도 있으니 참으라는 당부를 들어서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바늘이 들어간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 아래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침이 몰아쳤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침을 힘겹게 참으며 두 번을 성공했지만, 세 번째는 터지는 기침에 피까지 토했다. 의지를 다지고 애를 써도 누르지 못하는 것이 있다, 터져 나온 기침처럼. 채취된 조직이 적어서 결과를 확인할 수 없었다.
5, PET-CT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단순 결절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건강이 증명되리라는 희망 사이를 매일 오갔다. 결과가 나온 날, 최종 진단이 폐암으로 수렴되었다는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라는 답을 찾고 싶었지만, 영상 속 선명한 결절 부위는 다른 답을 찾지 말고 보이는 문제를 풀라는 당부처럼 빛나고 있었다.
6. 수술하는 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나를 위한 도움과 응원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건강해야 한다는 기대를 벗고 나니, 금식과 관장으로 비워진 속만큼 머리는 차분했다. 수술실로 이동하는 동안 남편은 새벽 기차로 아들이 내려오고 있다며, 힘내라고 손을 잡아주었다. 수술대에 오르자 곧 잠이 들었다.
7. 소란함에 잠이 깨었을 때는 중환자실에 누워서였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에게 조직검사 결과를 물었다. 마음과 달리 무거운 혀는 발음조차 쉽지 않았다.마취에서 깬 순간에 결과부터 묻는 환자는 처음이라며 간호사는 결과를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의심하고 싶었던 진단은 수술이라는 대면 과정과 조직검사 결과로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전환되었다. 갈등을 해결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술 전에 보지 못한 아들을 볼 수 있겠다는 안도에 눈물이 흘렀다.
8. 마취에서 깨면 심호흡부터 하라는 당부가 떠올랐다. 통증 탓에 심호흡은 고사하고 얕은 숨도 힘들었다.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힘껏 숨을 쉴 것이다. 병실로 돌아온 후에는 회복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운동을 시작했다. 걷기를 할 때는 흉관을 끌면서 통증과 만났고, 기침과 심호흡을 할 때마다 달려드는 통증과 싸워야 했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9. 보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탔다. 조수석에는 핑크빛 고운 수국꽃다발이 놓여있었다. 평소 색깔 구분도 어려운 남편은 이 고운 꽃다발을 준비하느라 온 기억과 지혜를 짜냈을 것이다. 결혼하고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운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없는 집에서 덩치 큰 남편은 혼자 어떻게 지냈을까.
10. 남편이 차린 식탁에 앉았다. 김치와 밑반찬,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다. 상추쌈이 맛있게 잘 넘어간다. 잠도 잘 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왔다!
시련이라는 상자를 연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남편과 가족, 아니 온 세상을 선물로 받았다. 어쩌면 내 속에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받고도 뜯지 않은 선물상자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하나씩 뚜껑을 열고 선물을 확인해야겠다.
4. 카카오(스마트) 선물 /이선옥2
1. 카카오톡에 생일 축하 메시지가 떴다.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아무거나 열면 낭패를 본다던 아이들의 경고를 잊은 채 클릭했다.“저, 시현이예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더운 날 건강 조심하세요.”라는 내용과 함께 선물도 보내왔다.
2. 카카오톡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프로필도 저장되어 있어서 그 사람의 생일까지 알려 준다. 생일을 맞는 사람이 하루에도 여럿이 뜨지만 그 중 모르는 사람도 많다.‘선물하기’메뉴와 함께 생일을 알려 주는 카카오톡의 저의가 얄밉지만, 어떤 때는 이 사람이 내 주소록에 숨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일날이면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아 당황하기도 한다. 고맙다고 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가 걱정이 되어서다. 그러가 하면 더러는 잊었던 사람으로부터 축하를 받으면 미안하고 부끄럽고 쑥스럽기도 하다. 내가 먼저 손 내밀어도 좋을 사람인데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3. 오늘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난감하다. 어디서 들은 이름 같기도 하여 조심스레 톡을 보냈다. 혹시 아버지 성함이 *** 이냐고 했더니 맞단다. 친정 조카의 딸이다. 친정에 가서 시현이가 어릴 때는 몇 번 보았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커서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지만 이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선물을 확인해 보니 커피 두 잔과 컵 케익 두 개다. 요즘 세상에 고모할머니에게까지 선물을 보내다니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고 놀랐다.
4. 시현이 아비는 올케언니의 막내였다. 제 엄마를 빨리 여의어서 항상 마음이 쓰였는데 딸을 잘 키워 놓아서 기쁘기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조카가 교육차원에서 할머니에게 선물을 보내라고 한 건 아닐까. 어릴 때 서너 번 용돈 준 것을 돌려받은 기분이라 다소 불편하지만 고맙게 받기로 했다. 2만원 조금 넘는 선물이 아이의 예쁜 마음과 합해져서 이십 만원을 능가하는 기쁨이다.
5. 선물을 받는다는 건 기쁜 일이다. 공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 잊히지 않았다는 면에서 그렇다. 별 교류가 없던 아이가 준 선물이라서 감동은 더욱 크다. 오래 예쁜 아이로 기억될 것 같다.
6. 지난해 추석 즈음 이었다. 예전에 모시던 분에게‘카카오 선물하기’로 커피를 보냈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 가까이 모실 때는 제법 근사한 선물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드렸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해관계가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닐까. 거기다 거주지도 천리로 나누어졌으니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가 보다. 그때 아껴 주시던 생각을 하면 자주 인사드리지 못함이 많이 미안하다.
7. 그 분 입장에선 허망할 것이다. 현직일 때는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사람이 직장이 끝나자 언제 봤던가 하는 식으로 안면 몰수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실까. 그분은 팔순을 훌쩍 넘겼고 나도 일흔 중반이라 몸도 말을 잘 안 들으니 사는 재미도 별로다. 어쩌다 명절 때 전화 한 통화로 때우는 배은망덕을 일삼다가 스마트하게 선물을 보내는 법을 활용하게 되었다.
8. 카톡으로 선물을 하는 법을 딸내미로부터 처음 배울 때는 공책에다 순서를 적어 놓고 연습까지 했다. 남편에게 선물 보내는 실습을 여러 차례 한 결과 이제는 숙달이 되었다. 내 손으로 선물을 보내는 것이 재미있고 한 가지 새로운 기능을 보유한 것 같아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9. 딸은 계절마다 커피나 케익 등을 매장에 가서 찾아 먹으라고 보내온다. 아마도 부모가 늙은이로만 있지 말고 뽈뽈하게 돌아다니며 젊어지라는 뜻일 게다. 머리 하얀 노인네가 커피 집을 찾기엔 어색하고 점원으로부터 눈치를 받는 느낌이다. 설사 그들이 그리 생각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꾸만 움츠려 든다. 그러나 카톡으로 전달된 창에 선물확인을 눌러서 나온 바코드를 내 밀면 요술처럼 커피와 케익이 우리 앞으로 나온다. 아이들의 마음이 휴대폰에서 톡 튀어나오는 것 같아 무척 반갑다. 매장 아가씨들에게도 공연히 어깨가 우쭐해진다.‘우리 딸이 이런 걸 다 보내줘요!’라고 자랑하고 싶어서다. 누군가가 나에게 커피를 보내주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운 일이다.
10. 카페에 가면 신이 난다. 무료한 늙은이들을 젊음이 넘치는 공간에 합류하게 해 준 아이가 너무 고맙다. 젊은이들이 싱싱한 모습으로 풋풋한 대화를 하며 더러는 책을 읽는 모습은 보기 좋다. 카페 주인이 물 흐린다고 싫어할지 모르지만 억지로라도 카페에 드나들며 젊은이들과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아파 누우면 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11. 사모님께서 내가 보내드린 커피 한잔을 받고서 곧바로 반응을 보내왔다.“어머나! 신선한 충격입니다. 전 미쳐 그런 걸 몰랐는데요. 잠시 젊어진 느낌입니다. 풍성한 추석과 다복하심을 빕니다. 감사합니다.”소녀가 뱅글뱅글 돌면서 하트를 확확 뿌리는 이모티콘도 함께다. 후일 다시 통화를 했응때,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생전 처음 그런 선물을 받았다고 선물을 찾아 먹는 것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더라고 씩씩하고 솔직하게 말씀 하셨다. 내가 아이들에게 받았던 기분 그대로 같아서 가식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무지 큰 선물도 받으셨던 그분에게 커피 한 잔이 뭐 그리 대단할까. 아마도 선물이 기쁜 게 아니라 사람 냄새가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을 고마워한 것은 아닐까. 작은 선물을 보내고 그리 기쁜 적도 드물다. 꼴랑 카페라떼 두 잔에 컵 케익 두 개로 말이다.
12. 시현이가 준 기쁨이나 자식들이 보내오는 기프티콘 들이 내가 사모님께 드렸던 기쁨과 같았으리라. 이번 추석에는 몇 분을 추가하여 주는 기쁨을 더 많이 얻고 싶다. 그러면 끊어진 관계도 복원되고 남은 생도 심심하지 않으리라.
5.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박희곤(3)
1 선생님 저를 치료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오늘 스위스로 떠납니다.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휴대폰에 문자가 와 있다.
그는 708호에 입원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폐암 환자였다. 처음 입원하여 검사가 끝나고 삶에 희망을 가지고 두 번이나 수술했지만 재발했다. 폐암의 평균 수명은 3-6개월인데 그는 벌써 기대수명을 수개월을 넘긴 상태였다.
2 그는 나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의사로써 할 말만 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산사람은 죽음을 정의 할 수 없다고만 했다. 그는 조용하고도 과감하게 결단을 했다. 편안한 죽음을 맞고 인생을 마무리 하겠다고 결코 자살은 아니라고 하면서 안락사를 위해 그는 스스로 스위스 행을 택했던 것이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으며 현대의학의 한계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 인도의 바라나시에서는 한해 수십만명이나 죽기위해 이 도시로 몰려온다. 물론 종교적 의식이나 신앙적 신념 때문에 갠지스 강에 목욕을 하고 죽기 위해 몰려오는 이유도 있다. 그들 또한 평생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금전적, 시간적 수고를 아끼지 않고 스위스 행과 마찬가지로 이 행렬에 참가하는 것이다.
4 그들이 처한 환경이 어떠하던 죽음을 재촉하는 행렬에 동참한다는 것이 신을 위한 마지막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이 도시로 몰려와 죽음이 도착하자마지 마른장작 더미에 태워져 갠지스강물에 벼려지는 것이 일상이다.이것이 인도 인들이 생각하는 생노병사의 마지막 단계이다.
5 내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들도 현대판 고려장인 요양병원으로 간다. 물론 늙어서 죽을 때에 자녀와 같이 집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요양원에서 생명을 연장하며 고통스럽게 살다 가는 것이 현실이다.
6 싸워서 이길 수 없는 병마와 싸우며 금전적 손해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한다. 특히 금전 문제는 자식 간의 갈등은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로 남는다. 부모가 죽어도 눈물도 흘리지 않는 생을 계속 살아야 하는가? 세월은 흘렸고 고려장 시대와 생각이 달라졌다.
7 우리들의 삶은 끝이 정해진 시한부 인생이다. 너무 걱정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아도 되는 것을 죽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인생은 누구나 공평하다.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당신도 그럴것이다. 이런 당면 과제에 부딪쳐 갈등을 겪고 번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8 좀 더 살고 싶어 외국으로 치료하러 갈까 아니면 연명치료거부 서약서에 싸인을 할까?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어떻게 받아드리고 어떻게 실천 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
9 안락사도 죽음의 한방법이며 의학적으로는 자살이 아니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윤리적으로 자살을 방조하는 것도 죄악시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그러나 집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던, 요양병원에 가서 죽던, 아니면 연면치료를 거부하던, 어찌되었던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맞을 준비가 필요하다. 더 늙은 것이 없는 지금. 특히 삶의 애착이 심한 나에게는.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6. 강구안 길을 걸어보다 / 유광목
1. 지난 일요일 아침, 삼형제가 고향에 가서 증조부 묘소에 벌초를 오전에 마쳤다. 오후에 시간이 있어, 초등학교 친구가 봄에 강구안 보도교와 거북선과 세병관이 있는 사진을 카톡에 올려 강구안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2. 해안가 근처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남방산 밑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강구안 길 약1.3km 거리를 걸어서 옛 생각도 하고 고향의 풍광과 맛과 색깔을 마음속에 담으려고 했다.
3. 여기 작은 항구를 고향 사람들은 옛적부터 강구안이라고 불렸다. 강구(江口)란 개울물이 바다를 흘러가는 어귀라는 뜻으로 이곳에 사람과 배가 왕래하고 어물과 물산이 모였다. 옛 통제영의 병선 마당이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부산과 여수 등을 있는 여객선과 근해의 유람선 터미널이었다. 크고 작은 어선들도 정박해 있었다. 어릴 때 일반 사람들은 뱃머리라고 불렀다.
4.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친구의 집은 강구안과 맞붙어 있는 부두에 다방 영업을 하는 건물이었다. 방과 후 부두에서 친구와 같이 놀고 바닷물고기도 보고 장난도 치곤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친구는 먼데 살고, 다방 건물은 강구안 보도로 편입되어 지금은 흔적이 없다.
5. 학교 다닐 때, 외지에 나가려면 버스로 포장이 안 된 울퉁불퉁한 도로를 이용하는 육상 교통보다, 배로 시원한 바다를 통해서 해상 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고 편리했다. 성묘 ·벌초 때, 조상의 묘소가 멀리 있는 삼봉산 부터 가기 위해 강구안에서 연안 여객선을 타고 견내량에 내렸다. 부산과 통영. 여수로 다니는 여객선은 금성호, 경복호, 갑성호 등이었다. 여객선에는 1,2,3등칸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 밑 바닥의 3등칸을 이용하였다.
6. 고등학교 3학년 때 은행시험을 치기 위하여 처음으로 통영에서 부산 가는 여객선에 주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같이 탔다. 배의 이름은 금성호로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때 쯤 부산에 도착했다. 강구안 뱃머리는 나에게 사회를 진출하기 위한 첫 출발점이었고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귀착점이었다.
7. 정량동과 항남동을 잇는 새로운 다리가 봄에 생겼다. 이름을 우선 강구안 보도교를 정하고 총길이 92.5m 높이 13m 연결교량으로 다리 위에서 강구안과 통영 시내를 바라 볼 수 있다. 통영시는 보도교 명칭을 공모 중이다. 다리위에서 보면 시내 위 중앙에 세병관과 여황산, 북포루, 오른편에 동포루, 동피랑 벽화마을 ,남망산. 왼쪽으로 서포루(서피랑), 강구 밖 남쪽 바다를 보면 미륵산(케이블카 타는 종점) 등이 한 눈에 보인다. 낮에 가장 아름다운 항구는 통영의 강구안이라고 한다. 비가 개인 후 강구안은 푸르고 황토색이 있어 살아 있는 그림 같았다.
8. 보도교기 없을 때는 항남동 동충에서 남망산 도선 머리를 왕래하는 나룻선이 있었다. 동충에는 철공소가 많고 새터 시장과 가까워 주민들은 여러 가지 물건을 사와 배에 실었다. 보도교를 내려오면 해안로 주위에 통영극장이 있어. 학생 때 일 년에 두 번 정도 단체 관람하여 영화를 본 기억이 났다.
9. 다리에서 내려와 강구안 길을 걸었다. 보도는 친수 시설 공사하기 전보다 깔끔하고 넓었다. 사람들이 여유 있게 다닐 수 있고 좌석도 많았다. 공사를 하기 전에는 고기잡이배가 정박하고 어구 등이 쌓여 있어 어수선 했다. 자리에 앉으면 강구안 바다와 거북선, 판옥선, 정박한 어선을 가까이 볼 수가 있었다.
10. 통영 김밥 거리 맞은편에는 문화마당이다. 한산대첩축제 때는 여기서 삼도수군 군점 및 수조도 재현하고 축제 개막식과 남해안 별신굿과 통영 오광대도 공연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원형으로 된 꽃탑, 꽃밭이 있어 사진 찍기에도 좋았다.
11. 그 옆에는 배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에 6편의 시가 적혀 있다. 조형물은 심문섭 작가의 ‘귀향지’이다. 작가는 강구안은 통제영의 병선, 근대의 여객선이 닿던 관문이며 역사적 장소라고 한다.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남기를 희망하며 범선의 돗대를 이미지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돗대의 양면에는 귀고- 유치환, 판데목 갯벌-박경리, 통영 5 -정지용, 귀향-김춘수, 삐비-김상옥, 통영3-백석의 시가 있다.
12. 그중 김춘수의 ‘귀향’ 시는 나에게 낯설었다. 친구(통영문화협회 회원)인 음악가 윤이상과 미술가 전혁림에 대한 시다. 각 예술인이 남망산, 명정리. 용화사에서 영감을 얻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귀향
윤이상의 가곡은 남망산 기슭에서 숨을 한번 돌리곤 했다.
전혁림은 명정리 우물가에서 뇌조(雷鳥)를 처음 봤다. 그날
뇌조는 뇌조의 몸짓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더라고 했다.
그건 구(球)도 원통(圓筒)도 원추(圓錐)도 아니라고 했다.
그건 빛色이며 빛光이 아닐까
전혁림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오랜만에 와보니 윤이상은 또 다시
촛대마냥 말라 있다.
길을 가다 울컥하고 길바닥에 각혈하던
그 시절.
전혁림은 용화사 단청만 보고 있었던
그 시절.
13. 또 유치환의 ‘귀고’에는 옛날의 강구안 주위 풍경이 나타나 있다.
귀고
검정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기빨처럼 다정하고
낯 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후략
14. 다음은 심아진의 ‘시간의 여울’ 조각 작품으로 남녀가 떨어져 있어 서먹함을 나타내지만 시간의 여울 속에서 만남이 이루워질 것 같다.
15. 강구안의 중앙에 오면 전라좌수영거북선, 통제영거북선, 한강거북선, 판옥선이 정박해 있어 관람할 수가 있다. 거북선실 안에는 병사들이 생활한 생활방과 수군복도 있다. 판옥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승선하는 대장선으로 거북선에 비해 크다. 2층으로 올라가서 강구안을 볼 수 있다.
16. 그 옆으로는 조선 고종 9년(1872년)에 그린 통영지도가 있다. 지도에 강구안 선소에 8전선(판옥선 7척, 거북선 1척)과 각종 군선과 지금의 통영 중앙시장 앞에 하동, 사천, 창원, 거제 등 4곳에서 쌀을 비롯한 각 종 물품을 실어 나르던 장(場)배인 사장선이 그려져 있다. 옆에는 임진왜란 때 사용한 천자총통 모형도 있고 새로 만든 누각도 만들어 올라 갈 수 있다.
17. 중앙시장 맞은편에 있던 공영 주차장과 공중변소, 건어물 가게, 어물 건조대 등이 무질서 하여 시에서 철거했다. 그 자리에 보도를 만들어 깨끗하고 너른 관광객의 휴식처가 되었다.
18. 강구안 주위에 중앙시장과 꿀방· 김밥 거리. 동피랑, 남망산, 세병관이 있어 먹을거리. 볼거리가 많다. 강구안은 시민들과 관광객에게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휴식과 활력을 불어 넣는 푸른 바다의 호수 같은 아름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