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소개>
ㆍ2000년 《조선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문단 데뷔
ㆍ시집: 『하얀 침묵이 되어』 『강물은 머문 자리를 돌아보지 않는다』 『달빛, 홀로서다』 『사람을 만나다』 『여정』 『고구마껍질에게 고함』 『이름빛깔』
ㆍ수상: 충남문화예술상, 충남문학 작품상 조선문학작품상, 제3회 매헌문학상, 충남시협 작품상, 국제문학 올해의 탑작가상, 충남펜문학상, 제15회 한국문학백년상
ㆍ활동: 한국문인협회 인문학문화콘덴츠개발위원회 위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충남문협 부지회장, 충남시협 이사, 충남펜문학 운영위원, 조선문인회 부회장, 서안시문학회, 예산시인협회 회원 등
<시인의 말>
찰나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며
흐르는 물을 본다
구름의 기지개를 보며
새벽안개의 미소를 바라본다
계절이 오고 가는 발자국을 보며
새들의 노래를 듣는다
삼라만상이 깃든 경전을 읽으며
희.노.애.락을 배운다
너와 나, 우리가
웃으며 때론 울고 있는 찰나
소중한
시간이여!
2022년 8월
진명희
<평설>
시인의 영혼이 담긴 시가
독자의 영혼에게 다가가는 시가 되기를
김명수(시인, 충남문인협회 회장, 효학박사)
1. 들어가는 말
시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바라는 것은 좋은 시 한 편 빚어내는 일일 것이다. 그건 시를 쓰는 사람이 시에 대해 얼마나 진솔하게 접근하고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서 쓰고 있으며, 얼마나 지속적으로 쉬지 않고 시를 쓰느냐에 달려 있다. 또한,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좋은 시를 빚어내기 위해선 시에 대한 치열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심금을 울리는 시가 되기 위해선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의 영혼이 독자의 영혼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일찍이 좋은 시를 써 온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했고 시인에 따라서는 시 하나만 바라보며 올인하는 인생을 살았기에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시를 사랑한 김소월이 그랬고 일제하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면서도 감옥의 벽에 시를 썼던 윤동주가 그랬고 일본 순사에 쫓기면서도 백담사에 숨어 들어가 「님의 침묵」을 완성시킨 한용운이 그랬다.
시인 중의 시인이었던 천상병은 중정에 끌려 들어가 모진 고문 속에서 살아 나와 나머지 인생을 시 속에서 살면서 「소풍」이란 좋은 시를 남겼고 눈물의 시인 박용래도 시가 삶의 중추적 역할을 해 주었기에 「저녁 눈」이란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기에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평생 시詩를 생각하면서 시와 연애하고 시와 결혼하고 시와 동거하면서 살아왔기에 좋은 시들을 남길 수 있었다. 이토록 좋은 시는 잠깐잠깐 생각날 때만 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 자체가 시 속에 몰입되는 삶을 살게 될 때 점지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최근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나태주 시인의 삶 속에서도 그 부분을 본받을 수 있다. 나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든 순간까지도 온통 시 속에서 산다고 했다. 지난 번 전라남도 영광의 도서관에서 강의를 다녀올 때 동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시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데 평소 시 속에서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모든 시간을 시 속에 할애하고 산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나 시인은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남의 차를 타는 차 속에서는 물론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는 중에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메모하고 시 한 줄을 쓴다고 했다. ‘나의 24시간은 온통 시 그 속에서 존재한다고, 풀꽃문학관에서 꽃을 가꾸면서도 풀을 뽑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떠오르는 한 줄의 시를 놓치지 않고 메모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때로는 밤을 새워 몇 편이고 메모하면서 시를 완성 시킨다.’고 했다. 바로 시에 대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평소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즐겨 쓰는 줄은 알았지만, 숨 쉬고 잠자는 시간까지도 시라고 생각하는 나태주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과연 하루 24시간 동안 시를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얼마나 시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얼마나 시를 공부하고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시가 과연 나의 밥이고, 삶이고, 생활이었던가. 좋은 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태주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충남문협과 충남시인협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진명희 시인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열심히 글을 쓰는 그가 서정성 짙은 작품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작품들을 보며 오랜만에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을 만났다는 것에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최근 그의 시집 『고구마 껍질에게 고함』이 《제15회 한국문학백년상》을 타게 됨으로써 그가 실력 있는 시인이란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게 되었다. 앞으로 진명희 시인의 시적 이미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며 추구하는 시의 세계가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서정성 짙은 시를 더 많이 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시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리라고 믿는다.
2. 시의 굴레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서정성
진명희 시인의 시를 읽다 보니 앞에서 말한 온통 시 속에 몰입하여 사는 시인들이 생각난다. 진 시인 역시 자신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뭔가 하나쯤 참 좋은 시 한 편 쓰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대개의 경우, 시인들은 자연을 보고 자연적으로 감성적인 시를 쓰는가 하면 어떤 시를 쓰면서 기교적이고 논리적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다’라고 하는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 감정에 솔직하게 쓰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적으로 감성 위주로 써지게 되면 시가 정형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의 형태를 좌우하게 된다. 기존에 나와 있는 시들을 보면 많은 부류의 시들이 진보를 가장한 이질적 언어를 사용해서 시를 쓰기 때문에 부자연스런 표현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sonet를 한국어로 옮겨졌을 때 서구처럼 거대한 교향악적 느낌이나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구라는 심리적 과정이 언어의 표현에서 간과되는 것이 동양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명희 시인의 시어들을 보면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히 쓰는 언어들을 활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다음 몇 편의 시들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찰떡처럼 시가/ 찰찰 감긴다
맛나다
시에도/ 맛이 있다는 걸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맛난다는 것을
우체통에 시집이/ 가득 꽂힌 날,
진수성찬을 받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 「시의 맛」 전문
바로 이 시의 맛에서 보는 것처럼 ‘찰찰 감긴다’ ‘맛나다’ ‘맛난다’ 등의 낱말은 우리가 음식을 하거나, 먹을 때 흔히 쓸 수 있는 말들이다. 이것을 시와 접목시킴으로써 또 다른 참맛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이런 것들의 예가 위에서 말한 언어의 이질적 표현으로 시를 오히려 이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에 반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는 언어들이 또 다른 시 속에서 살아 숨 쉴 때 공감을 가져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집을 받고 시를 읽다 보면 단숨에 쭉 읽어 내려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쉬엄쉬엄 읽어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시집이 있다. 그런 때는 슬그머니 저만치 밀어 두고 다른 시집을 꺼내 읽는다. 여기서 말하는 찰떡처럼 시가 넘치고 맛이 있다는 것은 읽는 이가 공감이 간다든지, 시 속에 의미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던지 아니면 언어적 표현이나 풍자하는 것들이 시대에 잘 어울려 글자 그대로 맛나기 때문에 단숨에 주욱 읽었을 것이다.
시집을 받아 시를 읽을 때 도대체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면, 읽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참을성을 갖고 읽게 될까? 만약 혼자만의 기분에 취해 읽는 시라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는 사람들로부터 많이 읽혀져야 좋은 시가 아닐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모두가 읽고 공감하며 애송하고 싶어지는 시가 좋은 시이다. 이를테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나태주의 「풀꽃」 등, 우리에게 쉽게 읽혀지고, 생각나게 하고, 상대방에게 권할 수 있는 그런 시들이 정말 좋은 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시의 맛이 나는 시, 너도나도 함께 애송할 수 있는 시가 정말 좋은 시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 한 편쯤 건지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시를 쓰고, 읽고,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진 시인도 지금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시작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맛나는 시 한 편을 얻기 위해서.
① 어느 날/ 시라는 것이
자유롭게 날아/ 미끄러지듯
내게로/ 온다면
-「횡재」 전문
② 팝콘처럼/ 팡! 터진 꽃
웃음 같은/ 꽃잎
한 방에 팡!/ 터지고 싶은
나의/ 시 한 편
꽃잎 같은/ 웃음
-「벚꽃 1」전문
①「횡재」와 ②의 「벚꽃 1」 모두 좋은 시가 내게 오기를 염원하고 쓴 시이다. 앞서 말했듯 시인이라면 누구나 불후의 명작 같은 시 한 편이 나에게 오기를, 내 머릿속에서 탄생 되기를,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기를, 열심히 읽고 쓰기를 반복할 것이니 바람처럼 나에게 와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시 공부도 열심히 할 것이고 누구보다도 더 시를 사랑할 것이기에 나에게도 정말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시 한 편 잉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하고 기도할 것이다.
정말 어느 날, 시가 미끄러지듯 팝콘처럼 팡 터지는 좋은 시가 내게 온다면 행복할 것이다.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따뜻한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시, 어둠과 절망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시, 아름답고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인 시, 무엇이 되었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읽으면 행복해지는 시, 그래서 그런 시가 써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면 제목이 말하듯 시인은 횡재한 것이고 독자 또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 시를 갖기 위해서 시인은 오늘도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시를 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구름에 달 가듯이 좋은 시가 자연스럽게 내게 올 것이다.
②에서 보는 「벚꽃」은 한술 더 떠서 그런 시가 팝콘처럼 팡 터지게 왔으면 하고 있다. 그러면 꽃잎처럼 환하게 웃을 것이고, 그 꽃잎의 향기에 취해 벌과 나비들이 오듯이 많은 독자들이 내 시를 사랑할 것이다. 좋은 시는 많은 사람이 즐겨 읽는 것이고, 그 시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을 것이다. 때로는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고,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갖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 한 편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많은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다른 힘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윤동주의 시들이 그랬다. 그리고 김소월을 비롯해서 심훈이나 백석, 정지용의 시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희망을 주고,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난 수많은 사람에게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읽으면서 행복해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시는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원하면 얻는다고 했듯이 진 시인의 끝없는 시 사랑은 그가 시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머지않아 지용이나 소월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시가 탄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3. 시의 예술성, 언어의 예술성, 시인의 예술성
일반적으로 시는 언어예술이라고 했다. 미술이 선이나 색깔, 무용이 동작을 통하여 음악이 소리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라면 시는 언어를 통해 시인의 생각이나 경험을 승화시켜서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시는 언어예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세련된 시적인 형성을 창조해야 좋은 시로 평가받는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언어를 다룸에 있어 능숙한 언어의 기술자여야 한다. 시인이 언어를 아름답게 갈고 닦아 만든 작품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흩어진 공기를 모아
곧추세운 몸이
단풍잎 한 장의 무게로
쓰러진다
휘어지지 않고서는
타협할 수 없고
어깨에 내려앉은
힘을 빼지 않고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바람이 던져주는
차가운 시선이
한 장 남은 달력에
말없이 꽂힌다.
- 「바람, 불다」 전문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람, 불다』를 자세히 읽어 보면 세련된 언어적 표현이 눈에 띈다. ‘단풍잎 한 장의 무게로/ 쓰러진다’, ‘바람이 던져 주는/ 차가운 시선’ 등의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움직여진다. 또한, 현재 시인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낙엽 한 장의 무게만큼 나약해 있다. 지난 일 년간 겪어 왔던 크고 작은 수많은 일을 잘 견뎌 온 대신 몸과 마음이 힘들어 달력 한 장 남은 시간 속으로 꽂혀 쉬고 싶어 한다. 재충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때 표현한 언어들이 시인이 처한 현상을 이해하게 하고 측은지심을 갖게 한다. 이것은 비단 시인만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일이다. 지난 일 년간 코로나19가 몰고 온 현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방황했으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바람이 던져 주는 시선 속으로 간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눕히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내일을 위해 새로운 충전을 하고 싶은 것이다.
① 어디에선가/ 날아 온 새
먹이를/ 낚아채어
날아가는/ 뒷모습
- 「찰나 1」 전문
② 하루를/ 깁고
시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 「찰나 2」 전문
③ 맞잡았던 손/ 아직 따스한데
어느새/ 떠나버린
- 「찰나 3」 전문
④ 순간이/ 영원처럼/ 다가서는 것,
깊은/ 마음의/ 소리일 뿐
- 「찰나 4」 전문
⑤ 모기 앉았다 간/ 자리
발그레 익어가는/ 앵두
- 「찰나 5」 전문
한자 말에 ‘백구간극白鷗間隙’이란 말이 있다.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삽시간에 세월이 지나간다는 말을 얘기하는 것이다. 젊어서는 인생이 꽤 길게 느껴지지만 나이 들면 화살처럼 달리는 백마를 문틈으로 얼핏 본 것처럼 인생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찰나’라는 말을 썼다. ‘찰나’라는 말 역시 순간을 나타내는 말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출전 ‘찰나刹那’는 산스크리트어 ‘크샤나(ksana)’의 음역으로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진명희 시인은 참으로 시간을 누구보다 아끼고 소중하게 보내는 시인이다. 순간의 시간, 그 찰나의 순간조차도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놓치지 않고 짧은 시 속에 담고 있다. ①의 시가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새가 순간 이동을 통해 먹이를 낚아채 가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면 ②는 하루가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빠르게 갔다는 것과 ③은 아직도 그와 맞잡았던 손은 따스한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 ④는 ‘순간이/ 영원처럼/ 다가서는 것’, 그건 어쩌면 깊은 마음의 소리라는 것, 「찰나 4」에서 그리고 ‘모기 앉았다 간/ 자리/ 발그레 익어가는/ 앵두’ 「찰나 5」의 전문에서 보는 것처럼 ①③④가 행위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느끼는 순간적인 것을 표현했다면 ②⑤는 시간적 요인을 두고 세월의 빠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이 마음에 있던 시간 속에 있던 분명한 것은 모두 인간이 느끼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지금 이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맞이하고 보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은 시는 몇 자 안 되는 짧은 언어 몇 개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를 깊고 넓게 생각해야 하는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시가 짧다고 해서 의미마저 짧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시는 짧을수록 긴 여운을 남긴다. 짧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그 몇 개 안 되는 단어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시인들은 길고 긴 설명적 시어들보다 스타카토처럼 끊어진 단어들 속에 자기 말을 넣으려 할까. 요즘은 짧고 명료할수록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짧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 말하는 진명희 시인도 의도적으로 짧은 시를 선보임으로써 자기 시의 새로운 세계를 실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은
생각이 범람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고요하다는 것,
또한 스스로 나를 가두는 일
유월의 마곡사 계곡엔 소리가 없다
산속의 계곡이 뭐 그리 소란스러울까마는
세상 등졌는데 뭐 그리 고뇌일까마는
올려다본 하늘에 구름이 멈춰 섰다
위로의 인사처럼 내리쬐는 햇살,
계곡은 반짝, 눈인사를 건네지만 여전히
말이 없다
어설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히는
내 시詩를 닮았다
- 「마곡사 계곡에서」 전문
우리는 가끔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할 때, 걱정이 많고 불안할 때, 그냥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질 때, 교회나 산사를 찾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산사를 택했고 산사 중에도 마곡사의 계곡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의 늪 속에 빠져 있음을 본다. ‘춘마곡 추갑사’라고 일컫는 마곡사의 유월은 녹음이 짙어 초록빛 숨소리가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와 어울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평안한 마음의 휴식을 준다. 거기에 아침저녁 들리는 스님의 독경과 목탁 소리, 계곡 깊숙이까지 번지는 범종과 북의 울림은 내 생각의 고요를 깨면서 기도하는 마음에 동참하게 만든다. 수년 전 함께 했던 템플스테이에서의 기도와 말씀, 명상과 독립투사 김구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갔던 산행은 매우 뜻깊은 경험이었다. 이는 비우는 연습을 계속했음에도 마곡사의 분위기를 모두 껴안고 하산하는 것 같아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진명희 시인의 마곡사 계곡의 경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시인이 마곡사의 계곡에 머무르는 동안 그 짙은 초록의 순결과 맑은 물소리의 조합이 하나가 되어 깊은 생각의 늪에 빠지고 짙은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 그 하늘 주변에 멈춰 선 하얀 구름의 조화 그 모든 것들이 한 장의 수채화처럼 가슴에 안기면서 시인은 잠시 명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속세에서의 온갖 잡념과 수다스런 소리까지 계곡의 맑은 물속에 흘려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어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아프고 속상해서 속으로만 삭혔던 순간들을 이 고요와 순결한 초록과 깨끗한 물 속에 씻어내면서 치유의 순간을 맛보면서 잠시 평안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이토록 마곡사의 계곡은 그 어느 곳을 찾았을 때보다 시인에게 평안한 마음의 쉼터를 만들어 주었기에 시인이 사랑하는 마음속에 담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다는 것은 ‘고요하다’라고 하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이 마곡사의 계곡을 찾지만, 그 누구보다 시인의 마곡사 계곡은 소중하고 사랑스런 곳임을 말하고 있다.
이젠 거짓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나의 거짓 몸짓도 새들이 다 알아 버렸어요
남루한 옷자락은
한 줄기 바람에도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어요
아무것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 들녘에
저녁노을만이 나를 다독이네요
괜찮다 괜찮다
때가 되면 다 사라질 거야
- 「허수아비」 전문
세상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참여해야 되는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위의 시를 보면 이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체면 때문에 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나는 없고 나와 비슷한 허수아비가 있게 마련이다. 시인은 아마도 이런 것을 염려해서 이런 경험을 통해 어느 날 나를 찾으면서 이 시를 썼는지 모른다. 억지로 참여하다 보면 나 아닌 내 모습이 보여주기 때문에 진실한 모습보다는 건들건들한 내 모습이 보여서 상대방이 알아차려 버리고 그러면 서로 미안해지고 어색해져서 그다음 행동이 어정쩡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거짓이 없고 변함이 없다. 나의 그 어정쩡한 모습도 해지는 저녁노을이 변함없이 나를 감싸주고 다독여주기 때문에 위로를 받고 나는 다시 옷깃을 여미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설사 실수가 있더라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지금 이 어정쩡한 기분이 사라지도록 다독여준다. 사람 산다는 것이 모두 그럴진데 그것도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해서 다독이는 것은 운문이 갖는 세련된 리듬을 질서 있고 아름답게 미화시키려는 정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운문에는 미화되는 심미의식이 필요하다. 그건 아무 때나 등장시키는 것이 아닌 꼭 필요할 때 목마를 때 등장시켜 시의 맛을 더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시인이 단순히 사실적 기술만이 아닌 인위적 기술로 리듬을 자연스럽게 배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시를 쓰는 사람들만의 몫이다. 위에서 거짓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산문적 요소로 출발한 시가 종결에 와서 ‘괜찮다’라고 위안을 보낸 것보다는 ‘괜찮다 괜찮다’라고 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시인이 갖고 있는 고도의 리듬감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킨 것이 된다. 때문에 위에서 산문적 요소로 일관한 시가 끝부분에 와서 한 번에 모두 살아나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최남선의 ‘처얼 썩 처얼 썩 때린다 부순다 무너져 내린다’라고 쓴 신체시에서 보듯 거기서 ‘처얼 썩’ 한 번만 섰더라면 시가 조금 맹한 기분이 들었을 텐데 ‘처얼 썩 처얼 썩’ 하고 반복함으로써 훨씬 리듬감을 살리고 파도와 바위에 부딪히는 느낌을 더 한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운문의 미가 되는 시의 형태에 질서와 세련된 언어의 배열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의 질적 요소에 운문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로 세련된 언어를 어디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로 따진다. 그래서 자칫 소홀히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명희 시인의 「허수아비」 중 끝부분의 ‘괜찮다 괜찮다’의 반복이 위의 산문적 요소를 모두 업고 가는 세련된 언어의 기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고도의 테크닉 중 하나라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따라서 시가 감정의 이입을 떠나서 세련된 언어를 활용하기 위해선 시를 쓰는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비가 내리는데
땅을 적시고
몸을 적시는데
가려줄 잎도 없는데
빗물이 눈물처럼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빗소리 울음처럼 들리는데
우산조차 없는데
- 「상사화」 전문
해마다 어머니의 장독대 옆에는 상사화가 피어올랐다. 어느 날 홀연 긴 몸둥이 하나 쑤욱 올라오더니 그 화려한 잎을 활짝 펼치면서 나약한 꽃술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본다. 왜 어머니는 그 상사화 한 가지만을 장독대에 심어 놓았을까. 서른다섯에 혼자 되면서 해마다 유일하게 만나는 꽃, 상사화! 필자는 해마다 상사화를 볼 때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는 항상 먼저 가신 아버지 대신 일 년에 한 번 그 상사화를 만나는 것으로 그리움을 대신하고 살았던 것이다. 진명희 시인의 상사화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오래전 어머니의 상사화 곁으로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장독대 옆에는 나무도 없고 지붕도 없었기에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몸을 흠뻑 젖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무도 가려 줄 사람도 없고 가릴 수도 없었다. 비가 내린다는 핑계로 상사화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얼마나 그리우면 빗물처럼 내리는 눈물일까, 그때는 누구에게 들킬까 봐 소리 내어 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빗소리를 핑계로 마음껏 소리 내어 운다. 그렇게 뼛속까지 차 있는 눈물을 흘리고 나면 좀 시원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눈물은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세상 사는 게 너무 버거워서, 나 혼자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꼭꼭 싸 두었던 울음보를 빗소리에 맞춰 터뜨려 놓고 우는 것이다. 시인의 눈은 참 예리하다. 어떻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저 상사화 하나만 보고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꿰뚫고 있는 것인지. 똑같이 상사화를 보고 있지만 진 시인의 눈에는 오랜 과거와 현재가 함께 클로즈업되어 마음을 읽는 힘이 있다. 그게 진 시인의 힘이고, 영감이고, 능력이다. 이런 공감대가 넓고 깊어질 때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① 기운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각도를 생각하지 않는 움직임,
뒤를 돌아보지 않는 발길
햇살의 방향 따라 기우는 나뭇잎처럼
따스한 곳으로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망처럼
기대고 싶은 마음
바람결에 기운 빗줄기처럼
새들도 마음 가는 곳에 깃을 턴다
- 「기울기」 전문
② 누구나 사랑 하나쯤 품고 살지
부끄럽지 않은 마음 여미어
길섶마다 새겨놓고 가슴앓이하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바람 냄새를 맡았지 뭐야
낯설고 먼 길을 떠났지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 줄
아무도 몰랐지
- 「길상사에서」 전문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에 여기서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자 한다. 길상사 역시 평생을 사랑한 한 남자에게 바치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이기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백석을 사랑한 자야는 평생 모은 돈을 법정 스님에게 가지고 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 했고, 절이 완성되자 자야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첫눈 내리는 날 그이의 영혼이 살아 있는 이 길상사에 뿌려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더 훌륭한 이야기의 하나는 스님들의 경우 거의 자기만의 절을 갖는 게 소원이라 하는데 법정 스님은 그 많은 돈을 들여 길상사를 지었음에도 이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에 내 임무가 다 되어 이제 본래의 내 거처로 돌아간다고 하며 강원도의 오두막집에서 더 깊은 곳에 오두막을 다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님 중 한 분이 아닐까 한다. 진정으로 비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스님이다.
진명희 시인도 이 사실을 알겠지만 여기서 시인은 자기만의 사랑을 숨겨 놓고 살아온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고백, 누구를 얼마만큼 사랑했기에 지금도 가슴앓이하고 있는지, 그러나 언제까지 가슴에 안고 살 수는 없는 법, 과감하게 버리고 떠날 줄도 알아야 하기에 시인은 그 길을 떠났고, 떠난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고백이면서 길상사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기도 하다. 1연과 2연 사이 행간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더 궁금하다. 그러나 시인은 과감히 그 모든 것을 상상속에 맡긴다. 이것도 이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시적 테크닉이다. 물론 궁금한 것들을 사실적 이야기를 많이 섞어 쓸 수도 있지만 이렇게 과감한 생략을 통해 독자들에게 맡겨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4. 이름하나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행의 길
이름 하나 얻는 게 뭐 대수라고 그 추운 겨울 대관령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황태라고 하는 진정한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대관령에 갔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명태들이 한 줄로 꿰어 매달린 채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명태 말리는 주인이 말하길, 겨울이 추워야 하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야 우수한 품질의 황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혹독한 겨울을 그렇게 견뎌내야만 황태라는 이름 하나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온화한 겨울 날씨가 아닌 정말 춥고 견디기 어려운 겨울날이 계속되는 삼한사온을 좋아하나 보다.
우리 주변에는 평생을 오로지 한 가지만을 위해 몸 바쳐 그 분야에 달인이 되어 이제 장인이 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산모시의 장인을 비롯하여 접는 손부채의 명인, 은장도의 명인, 벼루의 명인,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숨어 있는 명인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 같이 평생을 그 일에 몰두하면서 살아왔기에 명인이란 이름 하나 얻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어느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투철한 장인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점점 야위어가는 명태
콧물마저 얼음이 되는 추위에도
꾸덕꾸덕 몸을 비틀며
견딜 수 있는 것은
황태라는 이름 하나 얻기 위함이다
목이 쉬도록 부르짖는
선거 후보자들,
또 하나의 이름 얻기가
겨울 칼바람만큼이나 매섭다
- 「욕망」 전문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황태라는 이름 하나 얻기 위한 치열함이 겨울 칼바람만큼이나 매섭고 힘든 일이란 것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도 그 분야에 인정받기 위해선 일곱 여덟번의 강추위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명태처럼 그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그게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선거 같은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명분은 그럴듯하게 지역을 위해 봉사한다고는 했으나 일단 뽑히고 나면 시민들이 그 뽑힌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어렵고 또 힘들다고 한다. 이는 하는 일이 많고 만나는 사람들 또한 많기 때문이라 하지만 정작은 하는 일도 많고 위치도 달라졌으니 무언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이 시는 선거에 승리해서 이름 하나 얻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춥고 매서운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 얻는 황태라는 이름을 얻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시는 그 어떤 것보다 어려운 정신문화의 하나이다. 그냥 한글 문장 몇 줄 썼다고 시가 아니라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진정한 울림이 있어야 하고 진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사람들의 숙명이며 필연적인 일이다. 때문에, 진정한 시인은 오늘도 이름 하나 얻기 위한 혹독한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① 아이야,
포실포실한/ 너의 눈빛이란다
아낌없이 쏟아주는/ 따스한 웃음이란다
아이야!
- 「햇살」 전문
② 빛나는/ 눈빛,
나의/ 시 한 편
그 언저리에/ 맴도는 온기
- 「시, 사랑」 전문
③ 산자락에 걸터앉은/ 태양의 수줍은 미소
이제 황홀한 것은/ 오로라의 몫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붉은 그림자
- 「노을」 전문
최근에 많은 시인들이 호흡이 짧은 시를 통하여 시인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시인은 단 한 줄의 언어로, 또 다른 시인은 두 줄로 또는 세 줄 네 줄로 일정하게 정해 놓고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줄에서 서너 줄까지 짧은 단상을 통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신문광고의 카피가 단어 한두 개 또는 단 한 줄로 강렬한 인상을 주듯 시도 어쩌면 그런 것을 닮아가는가 보다. 그러나 짧더라도 잔잔하고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며 독자에게 은은하게 전달해 주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어떤 형태의 시를 쓰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고 그것을 읽고 느끼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든 시는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언어의 나열에 그치고 만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할지 그것 또한 시인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진명희 시인 역시 이 시집 속에 짧은 시 여러 편을 소개하고 있다. ①은 햇살을 아이의 눈빛과 접목시킨 점 ②의 짧은 시 한 줄에 담긴 따스한 마음의 온도 ③의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내려 주던 태양의 수고로움이 마지막 서산을 넘어가면서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운 노을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동안 살아오면서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는 노을처럼 아름답게 가고 싶은 마음을 표출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바로 그런 것이다. 시인이 어떤 의도로 썼든 독자는 더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도 있고 더 아프게 주저앉을 수도 있다. 때문에, 시인은 사용하는 단어 하나, 한 줄의 시, 한 연의 시적 감성 속에서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언어의 사용, 시적 표현이 아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①②③ 세 편의 시가 짧으면서도 편편마다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가 갖고 있는 의미가 우리들 사는 것들과 관련이 있기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겨진다는 것이다.
어젯밤 살짝 다녀간 빗줄기에
새들은 젖은 다리로 깃을 턴다
발등에 내려앉은 물방울 하나
살짝 내민 햇살에 반짝, 눈웃음이다
아침은 나무와 풀에게 두 손을 모은다
오랫동안 소식 없는 너에게도 안녕을 빈다
점점 붉어져 오는 산자락,
내 몸도 점점 뜨거워진다
- 「아침 인사」 전문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시는 언어예술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장르의 하나다. 때문에, 시인은 그 누구보다 시를 쓸 때 시어의 선택에 주의해야 한다. 그냥 생각난다고 해서 쭈욱 써 내려가는 것은 모습은 시적 형태를 취했을지 모르나 내용은 산문적 읽을 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걸 독자들이 안다. 그래서 독자가 무서운 것이고 시인은 독자를 끌고 가는 사람이기에 시인이 쓰는 시어들은 항상 독자보다 한발 앞서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세련되어야 하며, 리듬감이 있어야 하며 또한 비유나 상징 또는 이미지와 같은 시적 기법이 다양하게 활용되었을 때 비로소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진명희 시인의 「아침 인사」는 이런 것들을 잘 짚어서 쓴 시이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우연의 일치든 언어의 적절한 활용은 시의 맛을 더 내게 하고 시의 예술성을 높인다. 다만 읽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젖은 다리로 깃을 턴다’, ‘햇살에 반짝 눈웃음이다’ 등의 이런 표현들은 신선해서 아침의 이미지로 조용히 다가온다. ‘점점 붉어져 오는 산자락, 내 몸도 점점 뜨거워진다’에서 보듯 시인은 벌써부터 오늘 하루 할 일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마음이 분주해져 옴을 느끼고 움직이기도 전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뛰는 것이다.
시는 「아침 인사」를 통하여 차분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시인은 신호가 오기도 전에 하루 일에 대해 동적이다. 이는 그만큼 시인이 희망적이고 부지런하며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생활전선이든 시를 쓰는 일이든 무엇이든 간에 시인에게 있어서는 모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해가 붉어져 오는 만큼 내 몸이 뜨거워져서 나를 바쁘게 만든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동력이 상실되면 희망을 잃는다. 때문에, 스스로 할 일을 찾고, 매듭을 풀어나가며 탑을 하나 둘 쌓아서 나만의 성을 만들어야 한다. 시를 쓰는 것도 그렇다. 시인이라면 시를 쓰는 것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 시를 읽고, 시를 그리며, 시를 여행하고, 시를 연구하고, 시의 깃발을 휘날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뛰지 않으면 운동선수가 아니듯이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연구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 관객일 뿐이다.
앞으로 진명희 시인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시와 함께 살면서 시와 함께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또한 진 시인은 가지고 있는 시적 감성을 더욱 살리고 아직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그걸 찾기 위한 노력을 더 할 것이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시적 재능도 기부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진명희 시인은 시적 영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질 것이다. 올해는 시로 인해 좋은 상을 탔듯이 그걸 채찍으로 삼아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