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에세이
가볍게 돌아오기 위해
홍인우(시인)
흐드러져 春雪로 날리는 벚꽃이거나 핏빛 칸나
와와 함성으로 몰려다니는 낙엽만으로
시간을 채우던 때 있었다
영판 미로 같은 앞날 터무니없이 만만해
시시했던 인생
가슴보다 발바닥이 뜨거워
무한정 뛰어오르고 싶던 남중고도의 그 때는
시간이
청년의 오줌발처럼 흐르는 걸 몰랐다
엄지손가락만한 뻐꾸기 세 번을 울고
들어간 고요한 벽에
시간이 직각으로 꺾였다
지나온 발자국 온통 드리워진
화장기 없는 얼굴이 부끄러워
거울 앞에 오래 머무는 일 많다
오후 세 시쯤
- 졸시「오후 세 시」전문
세 시가 지난 지 한참 후인데 나는 지금 몇 시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건지. 뜨거웠던 발바닥 식은 지 오래고, 세상살이는 날이 갈수록 어설 퍼지고 자신 없는데 나의 시계는 언제쯤 멈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걸까.
먼 데로 가서 다른 공기로 호흡하고 눈빛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걷다 보면 눈앞의 미로들이 좀 쉬워 보이려나.
11시간 30분을 하늘에서 보내고 내린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에는 제법 굵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0월 초순인데 여긴 서늘하고 축축했다. 오래전「불꽃처럼 사랑하고 사랑하며 죽어가리」를 쓴 전혜린의 음울한 독일 풍경 묘사가 그대로 내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비까지 내리니 공연히 우울해졌다.
고색창연한 건물 풍경들로 이루어진 이국의 첫 밤을 지내고 베를린에 갔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콘크리트 장벽의 두께는 채 2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땅따먹기 하던 것처럼 거리에 쳐진 이 심상한 콘크리트 벽을 가운데 두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어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 되었으나 그들은 그 벽을 허물었지만, 우리는 아직 팽팽하고 견고하다. 동베를린 쪽 담장에 가득한 총알 자국이 자유를 향하던 위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위험한 순간을 이 야기하고 있다. 아랫쪽에 타일 벽의 조그마한 방들이 일정하게 있어 알아보니 전기고문실로 쓰던 곳이란다.
등이 시린 현장이지만 현재진행형의 우리에겐 부러운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에 도착한 이튿날도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연결되어 있는 프라하에도 고풍스런 건물이 많아 건물 구경만으로도 볼거리가 넘쳐나는데 특히 구시가 지의 오래된 틴 성당은 이 도시의 온갖 영욕을 지켜보며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따뜻한 커피 마시며 빗속의 틴 성당을 오래 올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소곤소곤 한국 노부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화가인 부인이 십오 년 전에 이곳에 와서 저 멋 진 성당에 매료되어 그렸는데 배경 하늘을 붉은 색으로 칠했다 고 한다. 이후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어떤 사업가가 그 그림을 사 고자 몇 번이나 청을 했는데 끝내 안 팔고 가지고 계신다고 했다. 처음 만난 부부의 편안한 모습과 자신의 작품에 갖는 애정이 틴 성당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시가지의 바닥이 보도블록이 아니라 네모난 돌을 타일처럼 깔아놓아 운치는 있었지만 울퉁불퉁하고 비로 미끄러워 피로가 배가되었다.
가까운 곳에 프라하의 봄의 역사적인 현장 바츨라프 광장이 밤비에 젖고 있었다.
다음 날엔 일찍 움직여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볕 잘 드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온통 가을이 한창이라 가로수들이 예쁜 빛깔로 물들고 테라스마다 내건 붉고 하얀 제라늄이 햇빛에 환했다. 길가에 떨어진 마로니에 열매를 몇 개 주워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차안에서 영화 ‘Gloomy Sunday’를 괜히 봤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왕과 귀족이 살았다는 언덕 쪽의 부다 지역과 평민들이 산페스트 지역이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었다.
얼마 전 이곳에 여행 왔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분들께 잠깐 극락왕생을 기도하며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 지역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랐다. 강물은 무심히도 넘실거리고 하늘 저리 화창한데 나는 자꾸 잦아들고 있었다.
왠가……오늘은 Gloomy Thursday. 두고 온 일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돈다.
체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슬로바키아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헝가리에서 점심을 먹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정은 저녁에 언덕에 올라 헝가리가 자랑하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옐로우라 명명되는 노란색 쉔부른 궁전에 들어설 때 비엔나의 가을은 제법 깊었다.
오래전 영광의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주거지였던 이 궁전은 너 무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키 큰 나무들이 잘 관리되어 있고 갖가지 색의 장미가 가득가득 피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껏 턱을 올리고 자만에 찬 마리아 테레지아나 곱슬거리는 금발에 분홍색 볼이 예뻤을 마리 앙트와네트의 발자국을 찾았겠지만, 나무 사이사이에서 혹은 방의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을 이 궁전의 정원사나 하녀들을 생각했다. 사치와 영화의 그늘 속에서 그들에게 이곳은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인데 그들 인생의 주인공은 과연 자신이었을까.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에곤 쉴레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으로 가는 길은 사뭇 떨리기도 했다.
키스를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이토록 더 설렐 줄이야. 여러 개의 호화스런 방을 거쳐 명화 ‘키스’와 마주섰을 때 나는 차분해졌고 처음 만났으나 반가웠고 만지고 싶었다. 물끄러미, 그저 물끄러미 보고 또 보고 돌아설 때는 아쉽고 가슴이 쓰렸다. 궁전을 나오니 저물녘이었다.
비엔나 로얄 오케스트라 극장의 저녁 공연은 8시부터였다.
춤과 연주와 발레 등 여러 장르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모차르트의 나라답게 모차르트의 곡이 많이 연주되었다. 여유롭고 편안하게 즐기는 현지인들과 섞여 아는 건 아는 대로 즐기고 모르는 건 또 그것대로 즐기는데 인터미션 시간에 마신 와인 한 잔에 2부 공연은 더 즐거웠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긴 여행 동안 낯선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쳐 잠깐씩 미소 주고받으며 살짝 손을 흔들기도 하며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을 붙잡기도, 누르기도 했다.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후략
- 류근 「새」일부
돌아가면, 저무는 숲의 저녁 새떼처럼 집으로 돌아가면 ‘바람보다 먼 울음’은 속으로 삭일 일이다.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을 일이다. 가뿐하게 내려놓는 만큼 내 세상이 따사로워질 테니까.
ㅡ『우리詩』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