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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1:7-15절) 말 탄 자의 환상 온 땅이 얼어붙었던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찾아옵니다. 예전에는 봄이 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이 시냇가였습니다. 아낙네들이 빨래하러 가면, 얼음 속으로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냇가에는 버들강아지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봄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의 금등대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금 등대는 살구나무 꽃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살구나무는 광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었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은 신문사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본부 내지는 편집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 뉴스를 듣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보다 훨씬 더 먼저 세상의 움직임을 느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곧 성전(聖殿)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기도가 응답되며,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이 땅을 축복(祝福)하시며, 큰 부흥(復興)의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지(認知)하게 됩니다. 이 축복(祝福)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감지(感知)할 만큼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는 줄거리를 몰라서 가슴을 졸이면서도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때는 실제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사회에 큰 사건이 터지거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 곧바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각본이 있듯이, 세상에서 일어서나는 일에도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각본(脚本)을 미리 안다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각본(脚本)을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묵시(默示)’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묵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묵시의 환상(幻想)이 여러 가지 나오고 있습니다.‘묵시(默示)’라는 말에는‘장막을 걷어서 내부를 보여 준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연극 무대에는 큰 막(幕)이 있어서 내부(內部)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와 스탭들은 그 막(幕)뒤에서 무대장치나, 그 밖의 공연 준비를 합니다. 그 막(幕)뒤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막(幕)뒤로 돌아가서 준비상황을 보는 것인데, 관계자 외에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막(幕)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공연되는 연극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시(默示)는 첫 번째 방법에 해당합니다. 즉 막(幕)이 오르기 전에 살짝 뒤로 돌아가서 미리 준비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처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이지는 하지만, 그래도 누가 주인공이며, 연극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건이 터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구나, 라고 깨닫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의 막(幕)이 오르기 전에 이미 누가 주인공이며, 어떤 식으로 역사의 드라마가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은 다 여유를 부릴 때, 다음에 올 일을 미리 생각하고 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이야말로 하나님의 묵시(默示)가 대단히 필요한 때입니다. 모든 상황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아서 도저히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무대 막(幕)뒤로 살짝 돌아가, 지금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가랴 당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聖殿)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채, 회복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성전(聖殿)을 짓다가 페르시아에 반역(反逆)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혀서 또다시 멸망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성전 재건을 진행하지 못한 중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직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자칫 독립운동이나, 페르시아에 대한 반역행위로 비칠 수가 있었습니다. 정치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할 때는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분리한 상황에서 굳이 성전(聖殿)을 짓다가 페루시아의 의심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무려 여덟 가지의 환상(幻想)을 보여 주십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 이면(裡面)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며,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를 계시(啟示)된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페르시아가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페르시아도 하나의 배우에 불과합니다. 무대 뒤에서 모든 역사를 감독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는 조용히 엎드려 있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을 때는 한낱 배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연출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과감하게 앞장서야 합니다.
이 묵시(默示)를 보지 못한 사람은 성전(聖殿)을 짓는 일이 페르시아에 대한 반역(叛逆)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묵시를 본 사람은 성전을 짓는 자신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며, 페르시아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공과 엑스트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깨달을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Ⅰ.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말 탄 자 지금 유다 백성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은 과연 성전 재건(再建)이 자신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겠느냐, 오히려 해가 되겠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말 탄 자의 환상(幻想)을 보여 주십니다.
1:7-8절)다리오 왕 2년 11월 곧 스밧 월 24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리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가장 먼저 보이신 것은 골짜기 속에 서 있는 화석류(花石榴)나무였습니다. 화석류는 우리나라에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화석류는 펠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관목(灌木)으로서 일 년 내내 푸른 잎이 달려 있는 상록수(常綠樹)입니다.
이 나무는 흰 꽃을 피우며, 상처를 입을수록 좋은 향기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석류는 고난(苦難)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상징(象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사독재(軍事獨裁)시대에는‘안동초’라는 풀이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안동초는 얼어붙은 동토(凍土)에서도 푸른빛을 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풀로서, 무서운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민중(民衆)내지는 민주화(民主化)에 대한 열망을 상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골짜기 같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 밟히면 밟힐수록, 꺾이면 꺽일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내는 하나님의 백성을 화석류나무에 비유(比喩)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징(象徵)으로 양(羊)을 치던 모세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사막의 가시 떨기는 들 수 있습니다. 이 가시 떨기는 볼품없는 앙상한 나무로써, 아마 모세는 사막을 지나다니면서 그 나무를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나무는 고난(苦難)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비숫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무에 불이 붙어서 꺼지지 않는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된 모세는 그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러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깊은 골짜기에서 자라는 화석류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 하(下)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그 화석류나무 가운데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백마가 서 있었습니다. 11절은 이 말 탄분을‘여호와의 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천사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제 2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인공이 다름 아닌 화석류나무 가운데 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이 어디 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역사는 주인공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이신 여호와의 사자(使者)는 페르시아의 왕궁에 계시지도 않았고, 애굽의 대학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성전을 짓다가 포기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祝福)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은 곧 이곳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화석류나무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의 고난(苦難)을 친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는 것과 누군가 내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고생입니다. 마치 끝없는 광야를 혼자서 걸어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고생을 알아주면, 마음의 짐이 절반으로 줄어들 뿐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어떤 신실한 성도가 알게 되어‘제가 그 문제를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당장은 도와주지 못해도 기회가 생기면, 틀림없이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이‘네 고생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를 건져 낼 계획 또한 세우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배 중에 듣는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어려움을 기억하고 계시며, 능력의 손길로 나와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이 어려움으로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자기 혼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석류나무를 보여 주심으로써 유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친히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나무만 보여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 서 계신 하나님의 사자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자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단 하룻밤에 죽이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말을 타고 그들 가운데 서 계시다는 것은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로마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독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 일이 행여나, 페르시아에 반역행위로 비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좌정하고 계시다는 것, 따라서 페루시아는 절대로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환상(幻想)을 통해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붉은 말을 타고 서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전쟁(戰爭)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보잘것없는 유다 백성들을 사용해서 원수 마귀를 뒤엎으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전쟁(戰爭)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 마귀를 직접상대해서 그 세력을 쳐부수고 그의 종으로 얽매어 있던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이 사자(使者)의 뒤에는 또 다른 홍마와 자줏빛 백마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한 차례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이 보잘것없는 화석류나무를 통해서 온 세계의 판도(版圖)를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Ⅱ.스가랴의 질문과 사자들의 답변 스가랴는 화석류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말 탄 분이 누구신지,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세 마리 말의 정체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9-10절)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이 장면을 보면 세 사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천사는 스가랴의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고 나서는데, 실제로 대답을 해 주는 이는 그 천사가 아니라, 말을 타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使者)입니다.
원래 묵시에는 사회자가 등장해서 묵시 받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갑자기 극중 인물이 튀어나와서 묵시 받는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난해(難解)한 연극을 보던 사람이 옆 친구에게‘저게 무슨 뜻이냐? 고 물었는데, 갑자기 배우가 튀어나와서‘그건 이런 뜻’이라고 대답해 준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배우는 관객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 탄 분이 직접 스가랴에게 대답해 주신 데는 스가랴를 더 이상 관객의 위치에 두지 않고, 연극의 주역(主役)으로 초청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환상(幻想)가운데로 초청하시며, 역사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지고 계신 책의 인봉을 떼야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텐데, 아무도 뗄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큰 소라로 통곡합니다. 그러자 묵시 속의 인물인 장로 한 사람이 튀어나와서 그를 위로하면서 계5:5절)...다윗의 뿌리가 그 일곱 인을 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 순간 사도 요한은 관객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묵시 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입니다. 스가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더니, 말 탄 분이 직접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의 내용이 좀 실망스럽습니다. 10절)...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지금 유다 백성들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꼭 지어야 한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형편을 알아보게 하려고 이 말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일분일초가 급한 이때, 무슨 형편을 또 알아보신다는 것일까? 당장 무슨 역사라도 일으켜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보는 것과 하나님이 알아보시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보는 것은 말 그대로 알아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알아보신다는 것은 이미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알아보기 위해 찾아가는 곳에는 곧바로 심판(審判)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천사들이 방문한 다음날 불길에 휩싸이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지금 하나님이 보내시는 천사들은 말까지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속하게 심판(審判)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스가랴의 환상이 보여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이 올 때, 자신들이 짓고 있는 성전(聖殿)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는 하나님이 좌정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세계를 심판하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이 작은 성전(聖殿)을 통해 원수 마귀 세력을 쳐부수며, 전 세계 사람들을 건지는 위대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볼품없는 화석류나무에 숨어있던 천사들도 이 성전 문을 열고,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갈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괜히 성전을 짓다가 페르시아 왕의 오해를 사서 공격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은 엑스트라에 불과하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민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우리 눈에는 부자(富者)와 권력자(權力者)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고, 우리는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復興)을 위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향방에 대해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즉 주인공만 제 역할을 잘 감당하면, 나머지 엑스트라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들의 색(色)이 각기 다른데, 주목하게 됩니다. 한 말은 붉은 색이고, 한 말은 자줏빛이고, 한 말은 흰색입니다. 아마 자줏빛 색는 붉은 색과 흰색의 중간인 갈색 또는 회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여러 단계의 다양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페르시아 이후 세계는 격동기(激動期)를 거치게 됩니다. 즉 알렉산더라는 엄청난 정복자가 세운 제국은 그의 사후(死後)에 넷으로 분할되고, 그 후 로마가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여‘팍스 로마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바로 그 로마를 복음(福音)으로 정복하심으로써 전 세계를 정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나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와 싸우고, 알렉산더와 싸우고 톨레미 왕조와 싸우고, 그러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은 전부 나서서 싸우게 하신 후에 마지막에 남는 최강자(最强者)를 단숨에 때려눕히십니다. 마치 다윗이 블레셋의 여러 장수들과 싸우는 대신 골리앗 한 사람을 쳐 죽임으로써 승리를 거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악(惡)하고 강(强)한 자들이 줄줄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장 강(强)한 원수 마귀를 쓰러뜨림으로써 단번에 온 세상을 정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즉 이자율이 얼마며, 환율은 얼마인지, 주가(株價)는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공채(公債)율은 어떻게 되는지, 시시한 것에 불안하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럴 때, 하나님의 묵시(默示)와 환상(幻想)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누가 계시며, 그의 의도가 무엇이냐? 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시련(試鍊)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살면서도‘과연 이런 식으로 살아도 될까? 불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짜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면 IMF 같은 어려움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신 것 자체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런 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의 조처(措處)로 정치나, 경제가, 회생(回生)할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1,2년 안에 예전처럼 잘살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면, 안 됩니다. 즉 아무런 변화 없이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면 이 고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계기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벌겠다는 생각, 집이나 땅을 사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땀 흘린 만큼 벌어서 살 결심을 해야 하며, 참으로 가치(價値)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생각을 해야 합니다. IMF를 넘겼다고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懲戒)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자세부터 뜯어고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기업의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부실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밝히는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즉 사람들의 죄(罪)를 치료하고, 가치관(價値觀)을 치료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나라에 소망(所望)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방관자(傍觀者)가 아니라, 주역(主役)으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Ⅲ.너무 평안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은 세상을 돌아본 후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11절)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여기에서‘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고,‘정온 하다’라는 것은 조용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은‘정말 이상하네요 세상이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하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너무너무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네요.’라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끄럽고, 요란한 것을 좋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의 가책이 있다면, 결코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전부 다른 나라를 약탈(掠奪)하고, 도둑질해서 잘살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이 있다면, 갈등을 하거나, 뉘우치는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너무나 행복하고, 평안하게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4-15절)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를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은 바벨론과 주변 강대국들의 손에 예루살렘의 심판(審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보다 더 크게 진노해서 엄청난 보복(報復)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무자비하게 예루살렘을 파괴했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해하는 눈치도 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처사(處事)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유다를 사랑하신다면, 처음부터 바벨론에게 심판을 맡기지 마시든지, 이왕 바벨론에게 맡겼으면, 뉘우치지 마시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야 바벨론이 너무나 심하게 굴었다고 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신 것은 그들을 사랑해서이지,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을 보고 다 계셨습니다. 또 바벨론이 유다를 짓밟고, 예루살렘을 때려 부술 때, 자기 백성들이 느꼈을 고통을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허락으로 바벨론이 유다를 점령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멸망시킨 죄(罪)는 결코 면제(免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 백성이 범죄 해서 너희 손에 심판을 당하게는 했다마는, 그래도 그들은 너희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 의로운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짓밟아 놓고서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느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고생할 때,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기 바라십니다. 또 도와주지는 못한다 하라도 고생하는 그들 앞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흥청망청 살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도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결혼이 늦어질 수 있으며, 아기를 낳지 못할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해서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만 고생시키려고 하시지만, 세상은 아예 잔인하게 밑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고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교만(驕慢)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혹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을 인격적(人格的)으로 무시하거나, 멸시하지는 말아야 하며,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고생하는 성도들에게 사소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기를 바라시며, 작은 물질이라도 나누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城)을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쓰러진 자기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면, 쇠사슬을 채워서 끌고 가면서도 도중에 냉수이라도 주면서 쉬게 해 주었다면, 망(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서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며,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너희는 이제 끝났다. 너희는 계속 살 가치가 없다’라는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능성 있는 나라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 본인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든, 연단을 받느라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듣, 말이라도 따뜻하게 걸어 주고,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서 존귀하게 대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 앞에서 고기 냄새 피워 가면서 실컷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는 멸망(滅亡)을 선고하십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어려운 성도들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건네주십시오. 절대로 직장이 없다고 멸시시하거나, 가난하게 산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쓰레기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축복(祝福)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우리나라를 돌아보았다면, 어떤 보고를 드렸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약자들의 재산을 강탈(强奪)하고, 불의한 뇌물(賂物)로 평안하고, 행복하면 안 되는데, 너무나 마음 편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고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나라 전체에게 IMF라는 어려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哀痛)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적인 혼란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만약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다면, 굳이 이런 어려움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은 엑스트라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곳임을 알고, 모든 것의 주인(主人)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Ⅳ.여호와의 사자가 드린 기도 너무나도 평안한 세상을 보면서 여호와의 천사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2절)여호와의 천사가 응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혼자 힘으로 185,OOO명을 죽일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직접 말을 타고 뛰쳐나가서 거짓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일까? 즉 말 위에 올라탔으면, 칼을 뽑고 달려 나가야 할 것 아일까? 왜 말 위에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을까?
이것을 신학적으로 대단히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메시아는 원래‘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면, 대개 다윗의 계보에 속하는 왕(王)을 가리켰습니다. 물론 선지자와 제사장도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직책은 왕(王), 특히 다윗 계보애 속하는 왕(王)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이 기울어 가면서 선지자들은 고난의 종에 대해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예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할까? 그 놀라운 능력으로 백성들을 구원하면 될 텐데, 왜 채찍을 맞고, 무시를 당해야 할까?
고난의 종이 오시는 목적이 멸망(滅亡)이 아닌, 구원(救援)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난의 종이 곧바로 뛰쳐나가서 심판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전부 다 죽을 것입니다. 고난의 종이 가진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은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악(惡)한 사탄의 세력만 멸망시키느냐? 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한 순간에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택한 백성들을 한 명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경제력(經濟力)이나, 군사력(軍事力)이 아니라, 성령(聖靈)의 능력(能力)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불같이 임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백(自白)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칼과 총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일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는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의 압제에서 구하거나, 가난에서 건지거나, 육체의 행복을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罪)에서 건져 내어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오셨으며, 하나님의 힘으로 죄(罪)를 미워하고, 의(義)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먼저 자발적으로 고난(苦難)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신문이나,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소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당신의 교회들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이제라도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셔서 구원해 주옵소서! 즉 '다시 한 번 교회가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사자에게 어떻게 대답해 주셨습니까? 13절)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하나님은 답답한 중에서 부르짖는 사자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서 있으며,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14절)...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세상에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의 생활은 힘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성령을 불같이 부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가 망(亡)하지 않도록 평안을 빼앗아 가시고, 풍요로운 삶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 축복(祝福)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둘수록 점점 더 악화(惡化)되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소식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그곳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잘되는 것보다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것이 수백 배, 수 천 배, 더 큰 축복(祝福)임을 깨닫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모여 성령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정직과 성실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슥1:7-15절) 말 탄 자의 환상 2-44. 온 땅이 얼어붙었던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찾아옵니다. 예전에는 봄이 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이 시냇가였습니다. 아낙네들이 빨래하러 가면, 얼음 속으로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냇가에는 버들강아지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봄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의 금등대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금 등대는 살구나무 꽃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살구나무는 광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었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은 신문사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본부 내지는 편집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 뉴스를 듣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보다 훨씬 더 먼저 세상의 움직임을 느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곧 성전(聖殿)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기도가 응답되며,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이 땅을 축복(祝福)하시며, 큰 부흥(復興)의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지(認知)하게 됩니다. 이 축복(祝福)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감지(感知)할 만큼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는 줄거리를 몰라서 가슴을 졸이면서도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때는 실제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사회에 큰 사건이 터지거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 곧바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각본이 있듯이, 세상에서 일어서나는 일에도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각본(脚本)을 미리 안다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각본(脚本)을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묵시(默示)’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묵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묵시의 환상(幻想)이 여러 가지 나오고 있습니다.‘묵시(默示)’라는 말에는‘장막을 걷어서 내부를 보여 준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연극 무대에는 큰 막(幕)이 있어서 내부(內部)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와 스탭들은 그 막(幕)뒤에서 무대장치나, 그 밖의 공연 준비를 합니다. 그 막(幕)뒤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막(幕)뒤로 돌아가서 준비상황을 보는 것인데, 관계자 외에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막(幕)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공연되는 연극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시(默示)는 첫 번째 방법에 해당합니다. 즉 막(幕)이 오르기 전에 살짝 뒤로 돌아가서 미리 준비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처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이지는 하지만, 그래도 누가 주인공이며, 연극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건이 터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구나, 라고 깨닫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의 막(幕)이 오르기 전에 이미 누가 주인공이며, 어떤 식으로 역사의 드라마가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은 다 여유를 부릴 때, 다음에 올 일을 미리 생각하고 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이야말로 하나님의 묵시(默示)가 대단히 필요한 때입니다. 모든 상황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아서 도저히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무대 막(幕)뒤로 살짝 돌아가, 지금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가랴 당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聖殿)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채, 회복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성전(聖殿)을 짓다가 페르시아에 반역(反逆)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혀서 또다시 멸망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성전 재건을 진행하지 못한 중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직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자칫 독립운동이나, 페르시아에 대한 반역행위로 비칠 수가 있었습니다. 정치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할 때는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분리한 상황에서 굳이 성전(聖殿)을 짓다가 페루시아의 의심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무려 여덟 가지의 환상(幻想)을 보여 주십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 이면(裡面)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며,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를 계시(啟示)된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페르시아가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페르시아도 하나의 배우에 불과합니다. 무대 뒤에서 모든 역사를 감독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는 조용히 엎드려 있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을 때는 한낱 배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연출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과감하게 앞장서야 합니다.
이 묵시(默示)를 보지 못한 사람은 성전(聖殿)을 짓는 일이 페르시아에 대한 반역(叛逆)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묵시를 본 사람은 성전을 짓는 자신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며, 페르시아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공과 엑스트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깨달을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Ⅰ.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말 탄 자 지금 유다 백성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은 과연 성전 재건(再建)이 자신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겠느냐, 오히려 해가 되겠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말 탄 자의 환상(幻想)을 보여 주십니다.
1:7-8절)다리오 왕 2년 11월 곧 스밧 월 24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리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가장 먼저 보이신 것은 골짜기 속에 서 있는 화석류(花石榴)나무였습니다. 화석류는 우리나라에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화석류는 펠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관목(灌木)으로서 일 년 내내 푸른 잎이 달려 있는 상록수(常綠樹)입니다.
이 나무는 흰 꽃을 피우며, 상처를 입을수록 좋은 향기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석류는 고난(苦難)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상징(象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사독재(軍事獨裁)시대에는‘안동초’라는 풀이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안동초는 얼어붙은 동토(凍土)에서도 푸른빛을 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풀로서, 무서운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민중(民衆)내지는 민주화(民主化)에 대한 열망을 상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골짜기 같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 밟히면 밟힐수록, 꺾이면 꺽일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내는 하나님의 백성을 화석류나무에 비유(比喩)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징(象徵)으로 양(羊)을 치던 모세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사막의 가시 떨기는 들 수 있습니다. 이 가시 떨기는 볼품없는 앙상한 나무로써, 아마 모세는 사막을 지나다니면서 그 나무를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나무는 고난(苦難)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비숫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무에 불이 붙어서 꺼지지 않는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된 모세는 그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러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깊은 골짜기에서 자라는 화석류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 하(下)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그 화석류나무 가운데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백마가 서 있었습니다. 11절은 이 말 탄분을‘여호와의 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천사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제 2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인공이 다름 아닌 화석류나무 가운데 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이 어디 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역사는 주인공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이신 여호와의 사자(使者)는 페르시아의 왕궁에 계시지도 않았고, 애굽의 대학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성전을 짓다가 포기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祝福)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은 곧 이곳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화석류나무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의 고난(苦難)을 친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는 것과 누군가 내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고생입니다. 마치 끝없는 광야를 혼자서 걸어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고생을 알아주면, 마음의 짐이 절반으로 줄어들 뿐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어떤 신실한 성도가 알게 되어‘제가 그 문제를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당장은 도와주지 못해도 기회가 생기면, 틀림없이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이‘네 고생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를 건져 낼 계획 또한 세우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배 중에 듣는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어려움을 기억하고 계시며, 능력의 손길로 나와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이 어려움으로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자기 혼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석류나무를 보여 주심으로써 유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친히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나무만 보여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 서 계신 하나님의 사자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자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단 하룻밤에 죽이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말을 타고 그들 가운데 서 계시다는 것은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로마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독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 일이 행여나, 페르시아에 반역행위로 비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좌정하고 계시다는 것, 따라서 페루시아는 절대로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환상(幻想)을 통해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붉은 말을 타고 서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전쟁(戰爭)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보잘것없는 유다 백성들을 사용해서 원수 마귀를 뒤엎으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전쟁(戰爭)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 마귀를 직접상대해서 그 세력을 쳐부수고 그의 종으로 얽매어 있던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이 사자(使者)의 뒤에는 또 다른 홍마와 자줏빛 백마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한 차례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이 보잘것없는 화석류나무를 통해서 온 세계의 판도(版圖)를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Ⅱ.스가랴의 질문과 사자들의 답변 스가랴는 화석류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말 탄 분이 누구신지,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세 마리 말의 정체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9-10절)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이 장면을 보면 세 사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천사는 스가랴의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고 나서는데, 실제로 대답을 해 주는 이는 그 천사가 아니라, 말을 타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使者)입니다.
원래 묵시에는 사회자가 등장해서 묵시 받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갑자기 극중 인물이 튀어나와서 묵시 받는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난해(難解)한 연극을 보던 사람이 옆 친구에게‘저게 무슨 뜻이냐? 고 물었는데, 갑자기 배우가 튀어나와서‘그건 이런 뜻’이라고 대답해 준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배우는 관객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 탄 분이 직접 스가랴에게 대답해 주신 데는 스가랴를 더 이상 관객의 위치에 두지 않고, 연극의 주역(主役)으로 초청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환상(幻想)가운데로 초청하시며, 역사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지고 계신 책의 인봉을 떼야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텐데, 아무도 뗄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큰 소라로 통곡합니다. 그러자 묵시 속의 인물인 장로 한 사람이 튀어나와서 그를 위로하면서 계5:5절)...다윗의 뿌리가 그 일곱 인을 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 순간 사도 요한은 관객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묵시 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입니다. 스가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더니, 말 탄 분이 직접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의 내용이 좀 실망스럽습니다. 10절)...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지금 유다 백성들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꼭 지어야 한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형편을 알아보게 하려고 이 말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일분일초가 급한 이때, 무슨 형편을 또 알아보신다는 것일까? 당장 무슨 역사라도 일으켜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보는 것과 하나님이 알아보시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보는 것은 말 그대로 알아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알아보신다는 것은 이미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알아보기 위해 찾아가는 곳에는 곧바로 심판(審判)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천사들이 방문한 다음날 불길에 휩싸이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지금 하나님이 보내시는 천사들은 말까지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속하게 심판(審判)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스가랴의 환상이 보여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이 올 때, 자신들이 짓고 있는 성전(聖殿)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는 하나님이 좌정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세계를 심판하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이 작은 성전(聖殿)을 통해 원수 마귀 세력을 쳐부수며, 전 세계 사람들을 건지는 위대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볼품없는 화석류나무에 숨어있던 천사들도 이 성전 문을 열고,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갈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괜히 성전을 짓다가 페르시아 왕의 오해를 사서 공격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은 엑스트라에 불과하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민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우리 눈에는 부자(富者)와 권력자(權力者)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고, 우리는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復興)을 위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향방에 대해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즉 주인공만 제 역할을 잘 감당하면, 나머지 엑스트라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들의 색(色)이 각기 다른데, 주목하게 됩니다. 한 말은 붉은 색이고, 한 말은 자줏빛이고, 한 말은 흰색입니다. 아마 자줏빛 색는 붉은 색과 흰색의 중간인 갈색 또는 회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여러 단계의 다양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페르시아 이후 세계는 격동기(激動期)를 거치게 됩니다. 즉 알렉산더라는 엄청난 정복자가 세운 제국은 그의 사후(死後)에 넷으로 분할되고, 그 후 로마가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여‘팍스 로마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바로 그 로마를 복음(福音)으로 정복하심으로써 전 세계를 정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나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와 싸우고, 알렉산더와 싸우고 톨레미 왕조와 싸우고, 그러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은 전부 나서서 싸우게 하신 후에 마지막에 남는 최강자(最强者)를 단숨에 때려눕히십니다. 마치 다윗이 블레셋의 여러 장수들과 싸우는 대신 골리앗 한 사람을 쳐 죽임으로써 승리를 거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악(惡)하고 강(强)한 자들이 줄줄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장 강(强)한 원수 마귀를 쓰러뜨림으로써 단번에 온 세상을 정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즉 이자율이 얼마며, 환율은 얼마인지, 주가(株價)는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공채(公債)율은 어떻게 되는지, 시시한 것에 불안하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럴 때, 하나님의 묵시(默示)와 환상(幻想)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누가 계시며, 그의 의도가 무엇이냐? 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시련(試鍊)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살면서도‘과연 이런 식으로 살아도 될까? 불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짜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면 IMF 같은 어려움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신 것 자체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런 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의 조처(措處)로 정치나, 경제가, 회생(回生)할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1,2년 안에 예전처럼 잘살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면, 안 됩니다. 즉 아무런 변화 없이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면 이 고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계기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벌겠다는 생각, 집이나 땅을 사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땀 흘린 만큼 벌어서 살 결심을 해야 하며, 참으로 가치(價値)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생각을 해야 합니다. IMF를 넘겼다고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懲戒)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자세부터 뜯어고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기업의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부실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밝히는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즉 사람들의 죄(罪)를 치료하고, 가치관(價値觀)을 치료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나라에 소망(所望)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방관자(傍觀者)가 아니라, 주역(主役)으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Ⅲ.너무 평안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은 세상을 돌아본 후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11절)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여기에서‘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고,‘정온 하다’라는 것은 조용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은‘정말 이상하네요 세상이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하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너무너무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네요.’라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끄럽고, 요란한 것을 좋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의 가책이 있다면, 결코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전부 다른 나라를 약탈(掠奪)하고, 도둑질해서 잘살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이 있다면, 갈등을 하거나, 뉘우치는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너무나 행복하고, 평안하게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4-15절)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를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은 바벨론과 주변 강대국들의 손에 예루살렘의 심판(審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보다 더 크게 진노해서 엄청난 보복(報復)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무자비하게 예루살렘을 파괴했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해하는 눈치도 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처사(處事)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유다를 사랑하신다면, 처음부터 바벨론에게 심판을 맡기지 마시든지, 이왕 바벨론에게 맡겼으면, 뉘우치지 마시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야 바벨론이 너무나 심하게 굴었다고 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신 것은 그들을 사랑해서이지,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을 보고 다 계셨습니다. 또 바벨론이 유다를 짓밟고, 예루살렘을 때려 부술 때, 자기 백성들이 느꼈을 고통을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허락으로 바벨론이 유다를 점령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멸망시킨 죄(罪)는 결코 면제(免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 백성이 범죄 해서 너희 손에 심판을 당하게는 했다마는, 그래도 그들은 너희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 의로운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짓밟아 놓고서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느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고생할 때,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기 바라십니다. 또 도와주지는 못한다 하라도 고생하는 그들 앞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흥청망청 살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도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결혼이 늦어질 수 있으며, 아기를 낳지 못할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해서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만 고생시키려고 하시지만, 세상은 아예 잔인하게 밑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고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교만(驕慢)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혹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을 인격적(人格的)으로 무시하거나, 멸시하지는 말아야 하며,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고생하는 성도들에게 사소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기를 바라시며, 작은 물질이라도 나누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城)을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쓰러진 자기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면, 쇠사슬을 채워서 끌고 가면서도 도중에 냉수이라도 주면서 쉬게 해 주었다면, 망(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서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며,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너희는 이제 끝났다. 너희는 계속 살 가치가 없다’라는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능성 있는 나라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 본인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든, 연단을 받느라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듣, 말이라도 따뜻하게 걸어 주고,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서 존귀하게 대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 앞에서 고기 냄새 피워 가면서 실컷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는 멸망(滅亡)을 선고하십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어려운 성도들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건네주십시오. 절대로 직장이 없다고 멸시시하거나, 가난하게 산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쓰레기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축복(祝福)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우리나라를 돌아보았다면, 어떤 보고를 드렸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약자들의 재산을 강탈(强奪)하고, 불의한 뇌물(賂物)로 평안하고, 행복하면 안 되는데, 너무나 마음 편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고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나라 전체에게 IMF라는 어려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양심(良心)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哀痛)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적인 혼란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만약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다면, 굳이 이런 어려움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은 엑스트라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곳임을 알고, 모든 것의 주인(主人)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Ⅳ.여호와의 사자가 드린 기도 너무나도 평안한 세상을 보면서 여호와의 천사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2절)여호와의 천사가 응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혼자 힘으로 185,OOO명을 죽일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직접 말을 타고 뛰쳐나가서 거짓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일까? 즉 말 위에 올라탔으면, 칼을 뽑고 달려 나가야 할 것 아일까? 왜 말 위에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을까?
이것을 신학적으로 대단히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메시아는 원래‘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면, 대개 다윗의 계보에 속하는 왕(王)을 가리켰습니다. 물론 선지자와 제사장도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직책은 왕(王), 특히 다윗 계보애 속하는 왕(王)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이 기울어 가면서 선지자들은 고난의 종에 대해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예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할까? 그 놀라운 능력으로 백성들을 구원하면 될 텐데, 왜 채찍을 맞고, 무시를 당해야 할까?
고난의 종이 오시는 목적이 멸망(滅亡)이 아닌, 구원(救援)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난의 종이 곧바로 뛰쳐나가서 심판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전부 다 죽을 것입니다. 고난의 종이 가진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은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악(惡)한 사탄의 세력만 멸망시키느냐? 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한 순간에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택한 백성들을 한 명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경제력(經濟力)이나, 군사력(軍事力)이 아니라, 성령(聖靈)의 능력(能力)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불같이 임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백(自白)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칼과 총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일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는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의 압제에서 구하거나, 가난에서 건지거나, 육체의 행복을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罪)에서 건져 내어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오셨으며, 하나님의 힘으로 죄(罪)를 미워하고, 의(義)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먼저 자발적으로 고난(苦難)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신문이나,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소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당신의 교회들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이제라도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셔서 구원해 주옵소서! 즉 '다시 한 번 교회가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사자에게 어떻게 대답해 주셨습니까? 13절)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하나님은 답답한 중에서 부르짖는 사자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서 있으며,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14절)...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세상에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의 생활은 힘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성령을 불같이 부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가 망(亡)하지 않도록 평안을 빼앗아 가시고, 풍요로운 삶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 축복(祝福)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둘수록 점점 더 악화(惡化)되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소식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그곳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잘되는 것보다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것이 수백 배, 수 천 배, 더 큰 축복(祝福)임을 깨닫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모여 성령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정직과 성실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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