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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바 무공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그는 도검이 불침하는 금강불괴지신에 만독이 불침하는 만독불침지신이었다 자신이 죽고자 해도 죽을 수가 없는 그를 암산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어쨌든 그 위대한 무공의 신은 죽었고, 그 죽음에 대한 문제를 지금 세 사람은 입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세사람의 입은 굳어지고 있었다.
한데 이때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던 서궁수가 눈을 뜨며 무심한 음성을 흘려냈다.
[일인으로서는 그분을 암살할 상대는 없지만... 최소한 사인이상 칠인 이하의 인물이 힘을 합쳤을 때 암살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있습니다.]
[아...]
철류향이 탄성을 발했다. 그녀의 두 눈에 강한 이채가 떠오른 것은 이 순
간이었다.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
[그런 인물들이 누구입니까? 서궁오라버니...]
부드러운 호칭이었다. 기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서궁수와 사마운, 철류향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매일을 함께 지냈던 다정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어린 철류향은 서궁수와 사마운을 각별한 정으로 대했다.
상하관계를 떠나서 그들을 오라버니라 칭했음은 물론이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인해서 철류향은 두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비록 나이는 어리나 그 지혜와 자질이 군협천의 으뜸이라는 사실도. 그래서그녀는 오늘 당연히 이 자리에 청해야 할 군협천의 서열 높은 인물들을 제쳐두고 두 사람을 청한 것이었다.
서궁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소생은 지금부터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군협칠대무황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실질적으로는 대과헌주인 천엽성승과 군협천주이기에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으나... 그들이 힘을 합쳤을 때의 무공만으로 논하자면...]
이때다 서궁수의 말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사마운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천주를 암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할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서궁수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을 인정했다. 이어 철류향의 표정을 더듬
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은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가장 무서운 적사도에 있습니다. 지난 이백년의 세월동안 적사도에 투옥된 죄인들은 모두 삼십삼인. 그러나 그들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의 짐작대로라면 적사도에 살아남아 있는 인물들은 일곱에서 열 명 사이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 살아남은 거마들이 힘을 합쳐 천주를 암살하려 한다면 그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때 사마운이 입을 열었다.
[그 가능성은 팔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적사도는 한번 들어가면 돌아나올 수 없는 죽음의 땅이기에 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철류향이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가능성이야 어찌 됐든 군협칠대무황이나 적사도의 인물이 자신의 부친을 암살할 수는 없다. 비록 나이가 어린 철류향이나 그것은 확신이었다. 이제,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서궁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궁수는 잠시 침묵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하려는 말이 하기 어려운 것인듯. 이윽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가능성은... 군협천 내부의 인물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를 가까이에 두고 있고... 천주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앞서 말한 두 부류의 인물보다 무공이 훨씬 떨어지는 인물일지라도 그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너무도 엄청난 말이었다. 하나 정작 이 말을 듣고 난 철류향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것은 그녀 역시 이런 가능성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어쩌면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 이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궁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궁오라버니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소녀 역시 서궁오라버니의 세 번째 의견에 그 가능성을 높이 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오히려 세 사람이 놀랐다. 철류향의 말은 이어졌다.
[내부 인물에게 가장 높은 가능성이 있는 이상... 소녀는 전심전력으로 그 인물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세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아버님의 암살에 대한 일은 당분간 철저히 비밀로 유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암살은 잠시나마 평화로운 무림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있고... 군협천에 무서운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말은 조리가 있었고 명료했으며 한 가닥 항거할 수 없는 무게와 위엄마저 함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세사람의 얼굴에는 은은히 감탄의 빛이 서린다.
철류향의 음성은 이제 속삭이듯 나지갛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장로 사마헌.
묵묵히 위패를 주시하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아... 어찌됐거나. 군협천의 내분은 필연적이다. 내부의 인물 가운데 암살자가 있다면? 이미 내분은 상당히 깊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그런 엄청난 짓을...)
이렇게 군협천의 풍운은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군협천주 철군무라는 위대한 인물의 죽음과 함께. 오늘은 한 위대한 거인의 죽음과 어린소녀가 위대한 거인으로 탄생하는 순간이 있었던 날이었다.
<성명 : 수음마희 담야교
나이 : 일백삼십세
신분 : 천마교의 천마삼비 가운데 일비
성격 : 천성적으로 요사
죄업 : 무려 일백 년의 세월 동안 정파무림의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구백 구십 구명의 순양지기를 채양, 천마교 사상 가장 무서운 무공인 천마삼절학 가운데 수음마공을 연성키 위해 그들을 재물로 사용, 무림칠대 뇌옥 가운데 두 번째의 만겁뇌로 보내야 한다는 천하인의 여론이 있음.>
[아미타불...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나직이 외며 수음마희 담야교에 대한 자료를 덮는 피부가 극히 희고 청수한 중년승인. 그가 대소림사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천엽성승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처럼 크게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일찍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세수 일백하고도 삼십.
그동안 그가 쌓은 불심은 이미 속세의 번뇌 따위는 초월한 것일 진데. 그가 이토록 번뇌하는 것은 왜인가? 이곳은 대과헌의 한 내전. 천엽성승은 장엄한 불존상을 앞에 두고 합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흐른다.
[아미타불... 노납 한 사람의 명예가 실추됨은 하찮은 일이나 이일로 인해 대소림사 전체의 명예가 실추됨은... 아아.]
염주를 손에 쥔다. 그러나 솟아오르는 고뇌로 인해 그는 염주를 굴릴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이었던가...)
아미타불... 십여년 전 어느 날이었다.
중원을 돌며 고행을 쌓던 중 갑작스럽게 무서운 폭우를 만났고 노납은 어쩔 수 없이 그 폭우를 피하기 위해 한 동혈을 찾아 들었다.
한데, 거기에서 노납은 참으로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여인은 노납의 일백 이십년의 불심을 흔들만큼 아름다웠다.
아아... 그날, 그 자리에서 노납은 여인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것으로 노납의 불심은 깨어지고 말았다.
후에야 여인이 희대의 요부인 수음마희 담야교임을 알게 되었다. 남을 심판할 자격을 상실한 노납이 여전히 대과헌의 헌주로 머무르고 있는 지금, 그 여인이 노납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인과응보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미타불... 이제 필연적으로 노납이 그녀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노납과의 관계는 드러날 것이고 그것으로 노납은 물론 대소림사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막아야 한다. 대소림사의 명예가 실추됨은 죽음으로써 막아야 한다.
천엽성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미타불...]
이어 그는 불존상을 향해 숙연히 일배를 올렸다. 그런 그의 표정은 비장하다.
무엇을 결심했는가? 스스로 샘영을 끊는다 해도 여전히 수음마희 담안교는 대과헌의 심판대에 올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대소림사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다.
[아미타불... 대소림사를 위해 그 여인을 죽여야 한다. 노납이 뿌린 씨앗을 노납이 스스로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번복될 수 없는 결심. 천엽성승은 천천히 내전을 빠져나갔다.
어둠. 보이는 것은 칠흑의 어둠뿐이었다. 이곳은 대소림사의 한 지하뇌옥.
두 쌍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범한 용모의 소동과 퇴폐적이며 관능적인 미를 지닌 여인이었다.
바로 단엽과 수음마희 담야교이다.
[콜록콜록!]
수음마희 담야교는 심한 기침을 토했다. 요즘 와서 그녀가 기침을 하는 횟수가 크게 늘었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 문득,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아비는 반드시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이 어미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입을 막아?]
단엽은 의혹의 눈빛을 발했다.
[이 어미는 네 아비에게 큰 죄를 범했고... 네 아비는 씻을 수 없는 실수를 낳고 말았다. 돌이켜 본다면 모두가 이 어미의 잘못이다. 그는 대소림사 사상 가장 위대한 성승이다. 그런 그가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대소림사의 전통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니...
아마 그는 이 어미를 죽여서도 대소림사를 구하려 들 것이다.]
[엄마를 죽여?]
단엽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수음마희 담야교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엽성승이 스음마희 담야교를 죽일 것이라는 말에는 흠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는 이곳에 온다. 반드시... 그리고 그것으로 너의 운명은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 어미의 마지막 바램은 네가 그 변화하는 운명에 절대 굴함도 없이 대처해 나갔으면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네가 자란 환경이 이곳 대소림사의 환경과는 너무 다른 것이기에...]
단엽은 모친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모친의 얼굴이 전에 없이 엄숙함을 느낀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들에게 가장 슬픈 일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도 희미하게 느낀다. 이때 문득, 수음마희 담야교는 단엽의 가녀린 손을 소중하게 잡았다.
[이 어미는 믿는다. 넥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훌륭히 대처해 나갈 것임을... 이곳은 위대한 역사를 지닌 대소림사다. 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이상의 온실은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네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 그들 속에서 네가 말썽 없이 자란다면... 너로인해 이 어미의 죄업은 모두 씻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툭... 단엽은 자신의 손등 위로 뜨거운 무엇인가가 떨어짐을 느꼈다.
모친의 눈물이었다. 단엽은 의아했다. 그는 모친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왜 우는 거지? 아버지가 이곳의 위대한 인물이고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거지...왜?)
단엽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친의 다른 한 결심을.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단엽에게는 또 하나의 의혹이 있었다. 자신과 모친이 왜 이런 캄캄한 방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곳은 좋지 않은 곳이야. 훌륭한 사람들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접대하는 것인가? 만훼루의 누나들은 손님들을 제각기 훌륭한 방으로 안내하던데...)
단엽의 사고방식. 그것은 모두가 만훼루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곳이 그가 자란 환경의 모든 것이기에. 어쨌든 어린 단엽은 모친의 죄를 모르고 있었다. 모친이 죽어 마땅한 희대의 요부임도. 한데, 단엽의 의혹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아...]
단엽은 나직이 탄성을 토했다. 그런 그의 눈망울엔 한 가닥 놀라움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람이었다. 그의 면전에는 도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고요히 서 있었다.
그가 어찌 알 것인가? 자신의 면전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천엽성승이라는 자신이 부친으로 선택한 인물임을.
드디어 천엽성승이 소리 없이 이 지하뇌옥에 나타난 것이다.
한데 문득, 단엽은 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천엽성승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는다.
[이상하다. 아저씨는 왜 머리털이 하나도 없지....]
천엽성승은 단엽의 천진한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실소
를 흘린다. 그는 잠시 단엽을 살피며 물었다.
[아이야... 너의 이름은...?]
단엽은 대답했다.
[단엽... 단엽이라고 해.]
[단엽이라..좋은 이름이로구나. 네가 바로 수음마희 담야교의 아들이지?]
[응.]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 수 있겠느냐?]
[뭐지?]
[나는 지금 네 어머니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너는 한쪽에 물러
나 줄 수가 있겠지?]
천엽성승의 음성은 시종일관 부드럽다. 한데 천엽성승의 말이 여기에 이
르렀을 때였다.
[그럴 필요가 없다. 단엽...]
한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수음마희 담야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단엽, 그분이 바로 네 부친이시다. 인사드려라.]
순간, 단엽의 얼굴에 한 가닥 경이로움의 빛이 스쳐 지났다. 그것은 반가움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분이 천엽성승이야?]
[그렇다.]
수음마희 담야교는 단엽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엽은 천엽성승을 향해 날아갈 듯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소자 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단엽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경어까지 썼다. 아마도 이 말만은 그동안 수음마희 담야교로부터 교육을 받은 듯싶었다.
한편, 이런 단엽의 행동에 경악한 것은 천엽성승이었다.
[아버지라니...? 아미타불...]
그의 전신이 무섭게 떨렸다. 갑자기 천엽성승의 머리는 텅비어 버린 듯 멍해진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자신의 세수 일백 삼십이다. 한데 이런 자신의 앞에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어린아이가 나타났으니... 그것도 그 어린아이의 모친은 수음마희 담야교이다. 만약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면... 그야말로 천하인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 아닌가?
그는 이 사실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 수음마희 담야교의 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네놈은 아비를 대하면서도 가짜 얼굴을 하고 있느냐?]
순간, 단엽은 당황하여 황망히 무면천환기로써 자신의 진면목을 회복했다. 그러자 그의 본래의 아름다운 용모가 드러났다. 조각품처럼 섬세하면서도 수려한 얼굴, 기이하게도 그 얼굴은 수음마희 담야교의 모습을 판에 박았다. 요기로움까지도...
(아아...)
천엽성승은 그 기이한 아름다움에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마저 망각한 채 탄성을 발했다.
어쨌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거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탄성을 발하듯 아름다운 소동을 보고 탄성을 발한 천엽성승.
그러나 그가 지금 탄성을 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생애 이처럼 뛰어난 근골의 어린아이를 처음 봤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와... 완벽하다. 저 요부에게서 이런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군.)
그는 새삼스레 단엽을 바라본다. 이때, 수음마희 담야교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일깨웠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의 자식일 수도 있고 아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를 임신하기 이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홉 사람과 맺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아홉 사람 가운데 당신도 포함이 되어 있지요.]
[아미타불...]
[나는 저 아이로 하여금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어미보다 부친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미타불... 그래서 저 아이는 노납을 선택하였단 말이오?]
천엽성승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수음마희 담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나는 당신이 선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그 아이가 선택한 것이니...]
[아미타불...]
[당신이 여기에 온 목적은 하나일 것입니다. 나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아미타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당신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라 저 아이가 선택한 당신으로 하여금 저 아이를 거두어들이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저 아이의 진면목을 숨긴 것도... 그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저 아이를 대소림사에 둔다 해도 저 아이가 이 수음마희 담야교의 아들임을 알아볼 사람은 없습니다.]
수음마희 담야교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수십 번도 더 생각했던 말이기에 막힘이 있을리 만무했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마지막 이 몸의 바램은 당신이 저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당신이 굳이 나를 죽이지 않아도 당신과 나의 관계는 영원히 비밀에 묻어질 것입니다.]
그녀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그 순간이었다.
피...
돌연 수음마희 담야교의 칠공으로부터 검붉은 선혈이 터져 나온다. 그녀 스스로 심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무거운 탄식을 토했다.
(업보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는 다분히 연민의 정이 담긴 눈빛으로 단엽을 주시했다. 단엽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자신의 모친이 왜 저래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
이때, 수음마희 담야교는 더듬더듬 말을 잇고 있었다.
[헉헉... 이것으로써 다... 당신과 나의 관계는 처...청산된 것... 부디... 저... 저 아이를 부탁... 부... 불쌍한 아이...]
그녀의 눈길이 단엽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눈물이었을까? 선혈이 흐르는 그녀의 두 눈에 투명한 빛이 반짝 한 것은... 그녀는 단엽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단엽이 다가서자 여린 단엽의 손을 굳게 잡는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의 손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으며, 그녀의 고개는 애처롭게 떨구어지고 있었다.
[...]
단엽은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모친의 회색빛 얼굴을 주시한다. 그리고 모친의 눈에 어린 피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친다.
(안녕... 어머니.)
죽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것이 이별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눈물을 훔치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천엽성승의 음성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음마희 담야교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언뜻 보일듯 말 듯 떠오른 단엽의 두 눈에 아련히 맺힌 투명한 줄기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왜인가? 왜...
저 어린아이의 눈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이렇듯 아프게 와 닿는 것이란 말인가?
(모를 일이다. 진정 모를 일이다. 아미타불...)
숭산 소실봉. 불도성지 대소림사는 황혼의 노을을 받아 오늘도 장엄한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뎅.... 뎅.... 뎅....
범종소리가 계곡과 계곡 사이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은 대소림사에 작은 소동이 있었던 날이다.
수음마희 담야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자식이라는 평범한 용모의 소동이 흔적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어야 할 사람이 죽었고 또 떠나는 편이 오히려 편한 사람이 없어졌기에 이 작은 소동은 곧 산사에 묻혀 버리고 만다.
장경각.
보리달마 이래 역대 대소림사의 고승들이 다듬고 손질한 칠십 이종의 불문기학들이 소장된 곳.
뿐인가. 십만 팔천권의 불경과 무림을 떠도는 천여 권의 비급들이 있는 중지인 것이니...
이곳은 특별히 선발된 십팔 명의 소림천경승들이 지키며 이들은 함부로 장경각에 침입하는 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다.
주지는 명경처럼 고요한 성품의 무경신승. 현소림장문인인 무운선사와 같은 항렬의 고승이다.
노승. 언제부터인가 장경각의 한 서실에서 불경을 정리하는 흰 배경이 허리 밑까지 흘러내린 노승이었다.
아아 불존의 화신이련가.
실로 노승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깊고 무한한 기도는 불도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바로 이 노승이 장경각의 주지인 무경신승이다.
나이 칠십. 오직 불도에만 전념해 온 세월이다. 속세의 근심걱정 따위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
한데, 이 명경처럼 고요한 성품의 무경신승에게 요즘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지금으로 부터 한 달 전, 천엽성승이 한 어린아이를 무경신승에게 부탁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실로 요사스런 아름다움을 지닌 십여 세의 소동.
천엽성승은 그 어린아이를 자신의 제자라 소개했다. 헌데, 그분의 제자라면 무경신승에게는 소사숙 뻘. 바로 이것이 고민거리의 시작이었다.
천엽성승은 무경신승에게 간단한 부탁을 했다.
- 이 아이에게 하루에 백 권의 불경을 읽게 하시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잡일을 시키고 당신의 불법을 들려주면 좋겠소. 앞으로 오 년 동안이오.-
단지 이것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의 부탁인가?
대소림사의 최고의 배분인 천엽서승의 부탁이 아닌가. 무경신승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낸 그 아이와의 한 달 세월.
무경신승은 십년은 더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지금도 조마조마하다.
(웬일인가? 지금쯤 무슨 사건인가 벌어지고도 남는 시간인데...)
물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병도 근래
에 들어 생긴 것이다.
이때다.
와르르... 쿠당탕...
요란한 굉음이 무경신승의 중얼거림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터져 나온다. 순간,
(마...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무경신승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소리가 들려 온 곳은 장경각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 일만 권이 들어 있는 방이었다.
비명... 무경신승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부르짖음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소...소사숙!]
손에 든 불경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져 버린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하다. 신법을 전개한다면 한 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이건만 그는 보통사람처럼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빠르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반복한 덕분이다.
콰당---
[어이쿠!]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인가? 무경신승은 무엇엔가 다리가 걸려 그야말로 볼쌍사납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섬뜻한 차가움이 그의 전신을 덮친 것은 그때였다.
커다란 물통이었다. 장경각의 바닥을 청소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물통, 그것과 함께 나뒹군 무경신승은 그야말로 물레 빠진 생쥐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방바닥을 보자니 줄잡아 일만 권의 불경이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위로 더러운 물이 쏟아진 것은 너무도 뻔한 것. 그것을 바라보는 무경신승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이...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다. 이것들은 이 장경각에 비장된 십만 팔천권의 불경 중 가장 중요한 것...)
한데 그 중한 것들이 바닥에 흉하게 널브러져 있고, 거기다가 물벼락까지 맞았으니... 대소림사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으으...]
무경신승은 갑자기 뒷골이 쑤심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뒤로 까뒤어지는가 싶더니 기절을 하고 만다.
이때다.
[이건 분명히 내 잘못이 아닌데...]
낭랑한 음성과 함께 먼지투성이의 소사미가 무경신승의 곁에 다가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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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십여 권의 불경을 아무렇게나 움켜쥔 이제 십여 세 가량의 소사미. 일신에는 백색가사를 헐렁하게 걸쳤다. 한데, 파르라니 깎여진 계두 아래의 피부가 투명하리만큼 희고 깨끗하다.
이목구비가 지극히 선명했으며, 눈빛은 물처럼 고요했다. 도대체 대소림사 내에 이처럼 아름다운 어린 중이 있었을까 싶은데... 용모만으로 따지자면 이 어린 소사미는 역대 소림의 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천진함과 장난기가 가득 담긴 두 눈 깊숙한 곳에 꿈틀거리는 요기, 그것이 이 소사미를 기이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었다.
바로 단엽이었다.
삭발한 모습이다. 수음마희 담야교가 죽은 그 이후 그는 천엽성승의 뜻에 따라 애지중지하던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버린 것이다.
아무튼 단엽은 이때 기절한 무경신승을 보며 난처한 기색을 짓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정신없이 무경신승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찰싹... 찰싹...
뭐 이런 일도 처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달 전서부터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는 이렇게 무경신승의 얼굴을 때려야 했다.
만약 이런 광경을 다른 대소림사의 인물이 보았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누가 감히 무경신승의 얼굴을 때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무경신승
은 생애를 통틀어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 따귀를 요 한 달 사이에 수차례나 열심히 맞아보고 있었으니 무경신승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이유를 알만 하다.
[너무 심했나...?]
단엽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때려 보았지만 무경신승은 정신을 차릴 기미를 전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엽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그는 반쯤 쏟아진 물통을 집어들었다. 물통 안에는 땟국물이 반쯤 들어 있었는데 단엽은 그것을 그대로 무경신승의 얼굴에다 부었다.
쏴아아...
그것이 효과가 있었음인지 이윽고 무경신승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허공을 향해 있는 눈빛은 여전히 몽롱했다. 한데 다음 순간, 의식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이 생각나게 한 것인가?
[부... 불경들...]
그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에 젖은
불경을 정신없이 집어 들었다. 그 광경을 영 한심스럽다는 듯이 주시하는 단엽.
돌연 그의 입에서 한 소리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경... 이게 웬 경망스런 짓이지?]
단엽은 양손으로 턱하니 허리를 짚은 채 혀를 찼다.
[도대체가 말이지...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지... 청소를 하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무경신승은 멍청해지고 만다. 이 정도면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닌가.
그러나 무경신승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나이는 어리나 엄연히 자신보다 한 항렬 높은 소사숙의 위치에 있다.
다른 소사미 같으면야 성질난김에 박살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시뻘게진 안색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소... 소사숙... 누가 청소하라고 했지... 불경을 이 지경으로 만들라 했소?]
[불경?]
단엽의 양눈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말,
[무경, 당신은 바닥이 중요한가? 아니면 불경이 중요한가?]
[그야 불경이...]
[그렇지. 당연히 불경이지... 그렇다면 바닥에 쌓인 먼지부터 털어야 하
겠는가? 아니면 불경에 쌓인 먼지부터 털어야 하겠는가?
[그... 그것은...]
[물론 불경이겠지? 아까운 불경에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끼었다면 바닥
보다는 당연히 불경을 청소해야 하지 않겠나.]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입은 있으되 무경신승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다. 잘못은 단엽이 하고 꾸중은 무경신승이 듣는 것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리고 매번 무경신승은 팔자타령을 해야 하고...
단엽은 말했다.
[그래서 불경을 잠시 서가에서 꺼내놓았을 뿐인데... 이렇게 물벼락을 맞
고 말았으니... 당신은 정말이지 사고뭉치야.]
[아미타불...]
무경신승은 씩씩 거리며 불호를 외더니 한말을 던졌다.
[좋소. 소사숙이 모두 잘했고... 이 몸은 모두 잘못 했소.]
[그래서?]
[한데 문제가 있지 않소?]
[무슨 문제?]
[이것들을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꺼내놓았으니 어찌 본래의 자리에 정
돈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일만 권의 불경이라면 그 제목만을 외는 데도 몇날 며칠이 걸릴 판이다.
그것도 기억력이 상당히 우수한 사람에 한해서. 그러니, 이 일만 권의 불경
을 제자리에 놓자면 장경각의 목록을 다 뒤져야 하고 차례대로 정리하자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물론, 이 장경각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무경신승으로서도 일만 권의 불경 가운데 불과 백여 권의 제목을 외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단엽은 그 일이 무엇이 어렵냐는 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심한 사람이로군. 그 머리로 어떻게 장경각의 주지가 되었지?]
그리고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려 거침없이 바닥의 불경들을 서가에 차례로 꽂아 넣기 시작했다.
빠르다 불경을 꽂아 넣는 그 손놀림은 무경신승의 눈이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그것이 순서가 맞는 것이오.]
무경신승의 두 눈이 점차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있었다.
단엽은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정 의심나면... 이따 목록을 들고 와 대조해보면 되는 것이 아니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무경신승은 망연자실하고 만다. 기가 막혔다. 단엽이 서가에 정돈한 불경
의 순서는 기가 막히게 목록과 같은 것이었다.
[이... 인간의 기억력이 아니다.]
무경신승은 전신을 떨었다. 일개 어린아이가 일만권의 불경의 목록을 완벽히 외우고 있고 그것이 놓여진 위치까지 기억해서 서가에 정리정돈하였으니 그가 이렇듯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순간, 그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품고 있었던 의혹이기도 했다.
대소림사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천엽성승이 어이하여 단엽을 제자로 두었는지, 지금 그 의혹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몰랐도다. 진정 몰랐도다. 그 어린아이가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것을 지니고 있을 줄은...]
그는 한동안 굳어진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격동인가? 그의 얼굴에 잔물결처럼 일고 있는 떨림은. 그는 문득 고요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내 대장로가 위대한 줄만 알았지... 또 하나의 위대한 인재
가 소림에 있는 줄은 몰랐다니...]
세월.
오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물처럼 흘러갔다.
긴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천하무림은 천마교의 잔당들이 속속 제거되는 와중에도 그런대로 평화롭다.
대소림사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대소림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던 대사건이 몇 차례 있었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 사건 모두가 한 사람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소악승. 대소림사의 인물들이 이렇게 부르는 어린 중. 그러나 그가 천엽성승의 하나뿐인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소림사는 최초로 큰 소란에 휩싸였다.
소악승이 천엽성승의 제자라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대소림사가 발칵 뒤집힐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거의 매일처럼 장경각의 지붕에 빨래처럼 널려 있는 수많은 물에 젖은 불경을 보면서 대사건은 시작되었고, 그 후 장경각을 수호하던 십팔 소림천경승이 술에 취해 삼일 밤낮을 인사불성이 되면서 비로소 대소림사에 소악승이라는 존재가 알려졌다.
뿐인가? 대소림사에서 가장 웅대한 석불상의 한쪽 귀를 박살낸 것도 소악승이었으며, 어느 날 대소림사를 예방한 남해 보타신니의 애제자를 하룻밤 동안이나 노송의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도 소악승이었다.
아무튼, 소악승은 대소림사의 절대악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천엽성승의 제자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가 저지른 모든 사건들은 쉬쉬하며 무마되는 것이 상례였고, 다만 속으로 비난할 뿐 겉으로 내놓고는 소악승을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니 비난하기는 커녕 배분이 높은 그를 대하면 우선고개부터 숙여야 할 판이다. 어쨌거나, 소악승이라고 불리는 단엽의 나이는 이제 열다섯이었는데...
이 아름다운 어린 중의 머릿속은 온통 사악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았다.
밤. 대소림사는 죽음과 같은 적막함에 휩싸여 있었다.
쿠르르르...
지금 막 대소림사의 지하뇌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어 뇌옥의 문턱을 조심스럽게 넘고 있는 인물.
중.
일신에 허름한 백색가사를 걸친 십오세 가량의 젊은 중이었는데... 파르라니 깎여진 머리 아래의 피부가 얼음처럼 투명하다. 희디흰 얼굴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도대체 사내인지 여인인지 언뜻 분간이 가질 않는 이중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요기마저 안개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단엽이다. 십 세의 어린 단엽이 아닌 이제 청년 티가 나기 시작한 단엽인 것이다.
천진함은 없었다. 대신 희고 반듯한 이마에는 귀풍과 더불어 은은한 성스러운 정기가 햇살처럼 일렁인다.
이것이 달라진 단엽의 모습이었다. 이때 단엽은 하나의 옥쟁반을 들고 있었다. 옥쟁반 위에는 술병과 몇 가지의 음식이 놓여 있었다. 한데,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심하게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는 심한 술 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엽은 만취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이것은 아뿔싸였다.
중의 신분으로서 술이 어디 말이나 될법 한 일인가.
[끄윽...]
그는 뇌옥에 들어서자 트림을 한 후 한곳을 주시했다. 취기 탓인지 그의 눈빛은 흐려져 있었고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술병과 음식을 뇌옥의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공손히 세 번의 절을 올린다.
이어 술병을 들어 벌컥 들이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그때 죽어버린 것이었더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꺼억... 그리고 또 알고 보니 어머니는 희대의 요부였더군.]
단엽으로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곳. 오 년 전 수음마희 담야교가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진했던 뇌옥이 바로 이 뇌옥이었고 오년 만에 단엽은 이곳을 처음으로 찾았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제사라는 것도 지내보았다.
그는 투덜거렸다.
[잘 죽었어. 그런 죄를 짓고서 살아있어 봤자...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만겁뇌행이었을 테니 말이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눈물인가? 단엽의 충혈된 눈에 투명한 물기가 반짝인 것은...
[또 알고 보니... 나는 사생아였더군. 아비 없는, 말이오. 생각해보면 당신이나 나나 참 불쌍한 중생들이었어. 덩신은 죽기 위해 이곳에 왔고... 나는 살기 위해 아비를 선택하여 이곳에 왔으니...]
한 모금의 술이 또다시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데... 당신이 죽어가면서 나를 이 중들의 서식처에 넘긴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 물론 내가 아비를 잘못 선택한 탓도 있었지만... 당신은 왜 당시 말리지 않은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