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無名簫)]329-신지기인(神智奇人)과 천면기인(千面奇人)···(5)
밤.
무림맹 본청 옥현각 일층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경비무사들이 있었다.
벌써 세 명의 기인들이 이곳 옥현각에서 암습을 당했다는
사실은 무림맹 관리대 경비위 전원이 모두 참형을 당해도 변명할 수 없는
중대사안(重大司案)이었다. 허나 무림맹주 사마전은
그저 경비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지시만을 내렸을 뿐이었다.
옥현각 이층. 기인들의 처소(處所)가 있는 이 곳에도 전과 달리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사정은 삼층도 마찬가지였다.
이층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구룡방 출신의 만삼박은
지금 막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한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옥현각 이층에는 지금 천면기인이 묵언칩거 중이었다.
원래 이층에는 불검기인과 천면기인 환허기인과 신지기인이 머물렀는데,
불검기인과 환허기인이 피살된 후
이층에는 천면기인과 신지기인 두 기인만이 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층 경비를 서면서 만삼박이
알게 된 것은 천면기인은 방에만 공꽁 박혀 있고,
신지기인은 방에 머무르는 꼴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층의 경비는 오롯이 천면기인
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경비무사도 아니고 기인 중 한 사람도 아닌 인물을 발견했으니
만삼박이 긴장된 시선으로 유심히
그를 살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근무자세(勤務姿勢)였다.
날렵한 걸음으로 천면기인의 방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무영객 호금천이었다. 만삼박이
몰랐을 뿐 다른 동료무사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 그가 다가오자 목례조차 보내고 있었다.
"수고들 하십니다. 신지기인께서는 계신지요?"
무영객의 말에,
"아니오, 그 분은 도통 얼굴 보기가 힘들고 천면기인께서는
벌써 한 달 가까이 방안에만 계십니다. 근데 묵언(默言)중이시라서…."
만삼박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온 김에 천면기인께 인사라도 올려야겠습니다. 그럼…."
무영객이 만삼박과 동료들에게 목례를 하고선 천면기인의 방으로 다가갔다.
"기인어르신, 저 무영객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소리와 함께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삼박이 들은 소리는 이 세 가지가 전부였다. 잠시 후에 그는 교대를 했기 때문에.
(금방 인사만 하고 나온다더니 그놈의 인사 한 번 기네?)
교대를 하면서 그가 한 생각이었다.
만삼박이 근무교대를 하고 난 후 일각쯤 지났을까,
천면기인의 방이 열리고 무영객이 나왔다.
근무자가 잠시 무영객을 멈춰 세우고, 천면기인의 방을 한 번 두드린 후 말했다.
"잠시 확인차 들어가겠습니다."
방안에 들어갔던 근무자가 금방 나와서는 말했다.
"됐습니다. 가셔도 되겠습니다. 우리 당 부대주께서
필히 하라고 지시하신 사항이라서…."
무영객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근무자가 말했다.
"거 참. 굳이 묵언 중인 천면기인한텐 인사드리면서 삼층에는 왜 인사드리러 안 가누?"
또 다른 근무자가 대답했다.
"삼층에도 만음기인밖에 없어. 만독기인은
내가 근무서는 동안 꼴을 본 적이 없어. 아마 사건 전부터 다른 데로 간 것 같애."
"수련관에 쳐 박혀 있다더만. 이거 대외비(對外秘)거든."
자랑스레 다른 근무자가 말하자,
"젠장 우리가 대외냐? 그런 걸 자랑하게?"
모두가 지청구를 주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무영객의
귀에 이런 얘기들은 그대로 들려왔고,
무영객은 부딪히는 경비무사들에게 목례를 하면서 옥현각을 빠져나갔다.
신지기인이 옥현각에 돌아온 것은 무영객이 나가고 반 시진쯤 지난
후였다.
[무명소(無名簫)]330-신지기인(神智奇人)과 천면기인(千面奇人)···(6)
천면기인의 방 앞을 지키던 경비무사들이 신지기인을 보고 목례를 올렸다.
마주 고개 숙이고 신지기인이 천면기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천면기인은 명상에 잠겨 있다가
들어오는 기척에 눈을 뜨고 신지기인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천면기인의 표정은 담담했고,
신지기인의 눈길엔 웃음이 담겨있었다.
신지기인의 음성이 천면기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돌아오셨구려, 천면. 그래. 다니시던 일은 잘되셨소?”
천면기인의 담담한 표정에 웃음이 감돌았고,
그의 전음이 이번엔 신지기인의 귓전을 두드렸다.
“신지께서 굳이 하실 말씀이 있는듯 해서 부랴부랴 왔소이다.
아무튼 자리에 앉으시지요.”
천면기인이 몸을 일으켜 탁자에 가 앉자, 신지기인도 마주보며 의자를
당겼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음입밀로 된 대화(對話)가 시작되었다.
“굳이 그들을 제거해야 했소?”
신지기인의 질문에,
“일이란 것은 굳이 어쩌려고 하지 않다가도
그렇게 하게 돼 버리는 일도 왕왕 있지 않소이까?
어떤 이는 계획 속에 있었던 이였을 거고,
또 어떤 이는 상황의 변화 때문에 끌려들어간 경우가 되겠지요.”
느긋하게 천면기인이 대답했다.
“함께 이십오 년을 지내왔던 동료(同僚) 이전에 벗이었던 사람들이오.”
“신지(神智)도 참 딱하시오
. 이 몸은 이십오 년 전 그때에 이미 오늘을 생각하고
왔었는데 천하의 신지가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신지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와중에 그의 전음은 천면기인에게 꽂히고 있었다.
“천면(千面)이 무서운 사람인 줄이야 벌써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잔인(殘忍)에 철저한 사람인 줄이야 나도 몰랐었으니까요.”
“헛허허허허. 이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잃어버린 채 살다보니까
마치 지병(持病)처럼 달고 다니게 된 맹세가 하나 생겼소이다.
잃어버린 이십오 년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다시 찾은 세월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도 소홀하지 않으리라.
어떤 잔인에도 어떤 비정(非情)에도 철저하리라. 그런 맹세지요.”
“그랬구료. 그대들이 잃은 것이 그대들 뜻대로
세상을 더럽힐 수 있는 권력(權力)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들에게 그 권력은 바로 세월(歲月) 그 자체였구료.”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세상에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싫어하는 척 하는 인간들이야 우글거리지만 말이오.”
신지기인이 전음을 끊고 가만히 천면기인을 바라봤다.
천개의 얼굴을 가진 인간. 그리고 그 천개의 얼굴에
어울리는 천 개의 마음을 보여주는 인간. 천면기인.
그 천면기인이 신지기인이 전음을 보내지 않자 다시 자신이 전음을 보냈다.
“그래. 그 사마전. 우리들의 대협(大俠)말이오.
그 양반은 조금 다르지. 다르긴 해.
허나 그것 역시도 조금 변형된 권력욕(權力慾)에
다름 아니란 걸 적어도 신지 그대는 알거 아니오?
명예욕(名譽慾)이란 것도 실상은 권력욕의 일종이니까 말이오.”
신지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료. 그대들 같은 종류에겐
사마전 맹주님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료.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내가 그런 걸 당신처럼 생각할 거라는 거요?”
천면기인이 싱긋 웃었다. 묘하게 비틀린 웃음이었다.
“그대의 출신이 어딘지를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었던 거요? 천하의 신지가?”
눈빛을 반짝이며 천면기인이 신지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천면기인의 눈빛에도 신지기인의 표정은 별 변함이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