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윤석중 선생의 <우산>이라는 동요입니다.
가난한 시절이라 학교 가는 길도 좁았나 봅니다.
찢어진 우산을 들고 가지만 친구들과 학교 가는 길은 즐겁고 정겹습니다.
촘촘히 붙어서 우산을 들고 걸으면 비도 조금은 덜 맞을 것 같습니다.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간다는 표현에서 서로 사랑하는 친구들의 정이 묻어납니다.
각자 다른 우산을 쓰고 가지만 마치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동요에는 우산이 세 개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셋(3)이라는 숫자는 피해 갈 수없는 친근한 수 입니다.
기미년 3월 1일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이날 대한독립 만세를 수 없이 불렀겠지만, 만세는 삼창(三唱). 세 번 합니다.
모든 일은 삼세번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시합을 해도 삼세펀을 하고
의사봉도 세 번을 두드립니다. 사진 찍을 때도 하나, 둘, 셋을 헤아립니다.
술자리에 늦게 오면 '후래자삼배(後來者 三盃)'라고 해서 벌주를 내립니다.
고추장, 간장, 된장, 이 셋 없이 만들어지는 우리 음식은 없습니다.
장례도 보통은 삼일장을 합니다. 자식을 낳아 삼 년은 키워주셨다 해서
부모님 돌아가시면 3년 상(喪)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셋이라는 숫자는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셋은 전체인 하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이라는 하나와 연결됩니다.
싱증히(上中下)는 공간이라는 하나와 연결됩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 것은 인생이라는 하나와 연결됩니다.
미스코리아 진, 선, 미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신망애(信望愛)를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세 가지 덕이라는 말인데, 이 향주삼덕도 하나의 통일체를 이룹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 셋을 따로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 없는 희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희망과 사랑 없는 믿음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셋이 하나 되는 이야기는 차고도 넘칩니다.
삼위일체 교리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죠.
삼위일체 교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토마스 사도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느님에게만 사용되던 칭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에게도 그 칭호가 적용 됩니다.
성령강림절에 제자들은 또다시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또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과 묵상이 쌓이고 쌓여 삼위일체 교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죠.
하느님은 고정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신비는 우리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하늘 위의 하늘이고, 우리가 아는 하느님을 넘어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신비를 조금씩 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분과 더 친하게 지내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기꺼이 드러내식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렇게 친교의 하느님이며 관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홀로 외따로 독불장군처럼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간의 깊은 사랑 안에서 존재하십니다.
그 사랑은 차고 넘쳐 밖으로 흘러나오고 우리는 그 사랑 안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는 교회는 삼위일체 공동체입니다.
신자들 간에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친교를 맺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향의 신자들이 모이지만, 믿음으로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너와 내가 하느님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비록 우산이 찢어졌다 하더라도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가는 공동체 입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성당깅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박신부의 묵상 산책
ㅡ모든 것 안에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ㅡ5권 중에서
서울 대교구 상도동성당 주임사제이신 박성칠 미카엘 신부님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