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신문뉴스 라이브러리들을 검색해보면,
58년 미군이 핵탄두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abm 미사일,
어네스트존 지대지 미사일을 들여오기 전에
북한이 정전협정을 어기고 600대의 비행기를 들여오고,
핵무장을 하고, 500km 중거리 미사일을 도입했고,
5개사단을 동원해 전술 핵훈련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여러 뉴스에서 시간 차를 두고
확인됩니다. 이승만, 국방장관, 주미대사 정일권 등이 주장합니다.
미국이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과 만주 산동성에 핵폭격을
위협했기 때문에 공산진영은 핵배치가 가장 시급한 곳이
바로 북한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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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최초의 핵미사일은 SS-4 1200KM MRBM이고
56년부터 실전배치됩니다. 주로 동독 등 동유럽에 배치된 것으로
나오지만 그 당시 미국으로부터 가장 현실적인 핵위협을 받던
동북아시아의 북한에도 공여됐다고 보는게 합리적인 추론이겠죠.
후에 브레진스크의 언급에서보면 소련은 동구권의 핵미사일에 대해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에 공여한 미사일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58년에 미군이 핵병기를 들여오자 유엔에서
중국이 한국에 항의를 하는데 이에 대응하여 정일권 주미대사의
기자 회견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미군의 핵반입은
북한핵무기 때문이므로 중국이 소련에게 따질 일이라고 힐난합니다.
이는 북에 핵중거리 미사일이 존재한다는 걸 당연시한
발언으로 봅니다.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은 수소폭탄을 싣은 전략폭격기이나
전폭기 대대를 요격하기 위해 핵탄두를 장착했고,
핵미사일을 저고도에서 요격하는 미사일이기도 하죠.
57년 소련이 먼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성공하는데 ,
R-7 ICBM 발사와 이를 기반으로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니크 로켓 발사를
성공시키죠. 55년 소련이 진성 수소폭탄 RDS-37을 시연한 뒤라
미국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미국은 1년 뒤에 아틀라스 ICBM발사에
뒤따라 성공합니다. 58년에 미국이 한국에 허큘리스와 어네스트존을
배치하고 이어서 유렵의 영국, 이탈리아, 터키에 중거리 핵미사일 주피터 등을
배치한 것은 소련이 R-7 수소폭탄 ICBM 발사에 대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력이 우월했던 미국은 62년에 ICBM 숫자 175기, 소련은 12기 이하였고,
핵탄두갯수는 미국이 2만7천개, 소련이 3천6백개의 현격한 차이였다.
미국은 50년대 후반 트랜지스터의 급속히 발달하면서 미사일의 정확성도
압도적으로 우위였었죠.
미국의 코 밑인 쿠바에 2000KM SS-4, 4500KM SS-5를 배치할려는 이유는
소련의 이러한 전략적 열세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50~60년대 뉴스를 보면, 56년에 북에 중거리핵미사일이
도입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거리 미사일 기지를 이미 2, 3곳을
건설했거나 보유하고 있다는 기사들이 보입니다.
미국이 그 당시 오끼나와에 핵을 비축했기 때문에 이를 타격할 수 있도록
북에 SS-3 사거리 1200KM짜리 핵미사일을 공여했을 가능성이 있죠.
비공식 뉴스지만 61년에 중국이 북한 2군대 미사일기지, 중국의 6군대
미사일 기지에 핵미사일을 약속대로 공급하라고 요구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중국은 자체적인 핵시험과 무장의 길로 나아겠다고 소련에 최후 통첩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소련이 블라디보스톡에 IRBM을 배치하자 중국은 소련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극력비난합니다.
즉 중국에 약속대로 핵미사일을 안넘겨주고 소련 자신들의 영토에다 배치해서
미 태평양 핵전력에 맞서겠다는 뜻이었던 셈이죠.
소련은 62년 쿠바 핵위기 이후에 제한핵협정, 우주핵협정, 해저핵시험협정,
헬싱키 조약, SALT 조약, 그리고 ABM 조약을 거치며 미국과 데탕트 상태로
나아갑니다. 67년부터 본격화된 미 소의 ABM 협상은 그 목적이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공동의 야합이라는 점이죠.ㅣ
ICBM보다 유도장치, 레이다 시스템 등으로 훨씬 고비용인 ABM을
엄청난 개수의 ICBM에 맞춰 생산하는걸 미소 간에 중지하고 대신
중국핵을 억제하기 위한 공동의 이익에 따라
ABM
100기 이하로 소량 서로 갖추자는게
ABM조약의 전략적 의미이죠.
중국의 64년 핵실험 전후로 소련은 중국의 핵시설 등을 선제 공격하겠다고 위협할 정도로
중소 관계가 험악했었고,
이러한 틈부구니를 파고든 미유대의 전략적 이간질에 넘어가 중국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베트남전 전쟁을 종전시키는 선물도 받고 미국 수교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78년 친소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중국은 군사기술의
낙후성을 절감하고 소련이 베트남 캄란만에 전략 기지로 조차하자
중국은 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시에 CIA와 협력하여 지하드를 지원하고
미국은 전략경어뢰 MK-46과 하픈 미사일 기술을 중국에 지원하고
그외의 기술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조기경보기, 레이다, 미사일 통제장치, 터보엔진
첨단 현대 군사 기술들을 넘겨줍니다.
중국은 이 후로 90년대 접어들어 북미전략 대결전이 벌어지면서
항상 친유대의 앞잡이 역할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러시아 친미파 엘친 전에 소련의 고르바 쵸프시절부터
소련은 북을 무시무시하게 위협합니다.
1991.5.2
蘇,고르비방문 전후 동해(東海)에 미사일 발사
(워싱턴=연합(聯合))박정찬특파원=소련(蘇聯)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일본(日本)방문을 전후해
무력과시를 위해 동해(東海)를 목표로 하는 두차례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SLBM) 시험발사를 했다고
워싱턴 타임스가 1일 미국(美國)관리들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 미사일 발사 시험은 고르바초프가 일본(日本)을 방문하기 직전과 직후에 이루어 졌으며 일본정부는
미사일 추락 지점이 일본(日本)본토와 너무 가까왔던 점에 대해 항의를 했다고 워싱턴 타임스는 전했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 미사일들이 소련(蘇聯) 서북쪽에 있는 바렌츠海에 있는 잠수함에서 발사돼
수천마일을 비행, 동해(東海)로
날아가는 것을 탐지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방미(訪美)중인 이께다 유키히코 日방위청 장관은 30일 딕 체니 美국방장관과 회담하는 가운데
북한(北韓)의
핵개발계획이 이 지역 안정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이 신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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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였다.(끝)
고르바쵸프가 발틱반도 옆의 북극해에서 전략핵잠의 SLBM을 발사하여 일본을
국빈방문하기 전과 후에 동해에 탄착시킵니다. 극단적인 위협이자 경고인 셈인데
이미 북이 89, 90년에 연거퍼 발사시험하는 미사일들이 위협적이었고
핵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고 보여 집니다.
91년 3월에 탈북 외교관 고영환(요즘 종편이 자주 나오는 분)이
말하길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이 반고르비세력의 쿠데타을 적극지원했다고
증언했다는 정보도 이러한 소련의 SLBM 위협사격과 밀접하리라 봅니다.
1991.
9.13
북한(北韓) 3년내 핵무기 개발<귀순자 폭로>
(서울=연합(聯合)) 아프리카 콩고주재 북한(北韓)대사관 1등서기관(참사대우)으로 근무중이던
북한외교관 高英煥씨(38)가 지난 5월 우리정부에 귀순해왔다고 관계당국이 13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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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씨는 북한이 소련에 개방정책에 대해서는 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김정일은 지난해 6월 소련에
있는 김희수공사에게
소련내 反고르바초프동향을 보고 하는 한편 군부의
구데타가능성을 타진해
가능하면 측면에서
지원해보라고 지시했다는 얘기를 소련에 출장갔다 들은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소련은 90년초 미국과 함께 군사적인 대북 압박과 공세에 나서고
소련과 러시아 집권 세력은 미국이 부족한 MD 로켓기술과 VHF레이다 기술을
공여했었고 2001년 쌍둥이빌딩 자가테러 이후에 미국이
72'ABM
폐지할 때 동의해준 대신에
SORT(공격전략핵폐기협정)을 선물로 받습니다.
부시의 대북 공략전략에 적극 공조한 셈이죠.
푸틴은 2004.4월 룡천역폭발사건과 9월 량강도 영저리 미사일 기지 4세대핵 시연 이후에야
친유대에서 벗어나 중립화됩니다.
2005.3월 러시아 중앙군사악단을 평양에 보내 김정일 찬양의
교향시 등을 연주합니다. 지휘자가 중장계급이죠.
미국은 뒤따라 9.19일에 "북미간의 균등한 비핵화"라는 잠정합의를
체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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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성택처형, 북중관계 소원, 북러 관계 유착, 북일관계 진전은,
지난 90년부터 지금까지 펼쳐온 동북아 전략맥락에서 보면
기획된 자잘한 쇼라고 봅니다. 90년 이후부터 핵전략논리에 기반해서
판단하면 미유대는 2004, 2007년에 완전한 굴복으로 강화상태에 들어가고
그 이후의 긴장은 실천한 강화조약 사항의 심화나 실행에 관한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장성택처형이 쇼이라는 저의 주장을대부분 믿지 않겠지만
저는 전체 맥락에서 오직 물리적 힘의 조건에서만
특정 시각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의미를 천착하기 때문에
이벤트 시점의 기만과 역기만을 쉽게 걸러내
좀 더 나은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뉴스를 볼 때 이미 그 뉴스는 흘리는 당사자의 의도에 따라 노출될 뿐이죠.
우리는 그 뉴스가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 맞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련 뉴스를 시간순으로 나열해서 맥락과 교차검증으로 읽어나가면
진실노출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이 대체 어떤 사회인지도 우리가 과거에 남한 주사파가 전해 준 지식이나
기만과 역기만이 판치는 횡적인 뉴스와 정보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보를 종으로, 연대로, 맥락으로 이해하면
북이라는 사회, 북수뇌부, 김정일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진실에 가까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남한에서 미국핵무기를 도입하기 위한 구실로 삼기 위해 일부러 조작해낸 허위기사일 겁니다. 설령 북한이 핵무기를 도입했어도 극비사항일 텐데 무슨 수로 그걸 남한에서 알아낸단 말입니까? 당시엔 남한의 정보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뒤져 있었습니다. 86년만 해도 김일성이 죽은지 살은지도 몰랐던 수준이었으니까요. 북한내부사정에 대한 얘기는 전부 지어낸 것들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59년까지 북파공작원 4만5천명이 파견되고,
그 중 1/3만 돌아왔다는 뉴스도
제기억에는 있었습니다.
뉴스를 검색해보면 북한은 이미 55년에 모스크바 인근에 동구사회주의국가가 공동으로 건설한
대규모 입자가속기 사업에도 참여했더군요. 그 규모가 유럽 공동가속기 (CERN)과 유사합니다.
53년 전쟁이 끝났지만 60년까지 비정규전의 전쟁이 지속됐고
60년대 중후반부터는 북의 대남 공세가
더 강하게 발생합니다.
북이 미국의 엄청난 핵무기를 갱도만 파고 들어가서 수십년동안
저항했다고 믿는건 상식적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죠.
북한에서 핵무기개발은 했을 수 있지만 한국의 국방방관이란 자가 그것을 알아냈다는 건 못 믿겠다는 겁니다. 전부 떨거지 엉터리 같은 자들이었고 지금의 김무성 같은 자가 그래도 준수한 편에 속했던 깡패 양아치들이었는데 그냥 지어낸 얘기이지 무얼 그들이 알겠어요?
분석관님의 주장에 동의 합니다
51년부터 시작된 휴전협정이 질질끌린 이유는 스탈린이 미국의 군사력을 유럽에 덜배치되도록하려는 속셈이었고
휴전과 그이후 북자체핵개발 까지의 역학관계상
핵의 균형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정전협상이 시간을 끈 가장 이유는, 미국의 51년 첫 수폭시험이 성공했지만,
전략폭격기로 운반하기에 너무 커서 실용성이 없었기 때문에
모호한 전략균형이 그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소련이 첫 수폭시험 1달 전쯤에
서로 정전에 합의하죠. 그런데 성능 미달이고 진성 수폭이 아니었죠.
중소냉전의 역사와 배경 등이 궁금했습니다만, 어느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중소냉전의 역사와 배경. 그리고 작금의 중소연대관련해서도 가르침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