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 오늘의 역사
2019년 영화 ‘어벤저스-엔드게임’ 개봉(4.24) 11일 만에 관객 1,000만 돌파
2019년 북한 원산 호도반도에서 발사체(신형 전술유도무기) 발사
2013년 숭례문 5년 3개월 만에 복구 준공
2009년 한국해군, 해적에 쫓기던 북한 상선 구조
2009년 5월 4일 청해부대의 문무대왕함은 한국시간으로 오전 11시 40분 경, 소말리아 해역에서 우리나라의 선박을 호송하는 임무를 마친 후, 아덴항 인근 국제권 교통항로 상에서 감시와 정찰활동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이 때, 아덴만 남방 37km 해상에서 북한 국적의 6,399톤급 화물선인 ‘다박솔(DABAK SOL)’호가 해적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긴박한 구조 신호를 포착하였다. 당시 다박솔호는 문무대왕함으로부터 96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하여 링스헬기가 다박솔호 상공에 낮 12시 20분에 도착하였을 때, 해적선에는 북한 화물선에 올라타기 위한 사다리와 보트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박솔호를 불과 3.2km까지 추격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링스헬기는 경고 사격자세를 취했고, 이에 놀란 해적선은 약 10분 뒤 방향을 틀어 마침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후 링스헬기는 오후 1시 30분에 문무대왕함에 복귀하기 전까지 110분여 동안 다박솔호를 안전지대로 인도하는 작전 비행을 펼쳤다. 이렇듯 이 날의 청해부대가 펼친 구조 활동은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상선을 해적으로부터 구조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2008년 보령 바닷물 범람사고 발생
2003년 미국 우주비행사, 러시아 우주선 타고 첫 귀환
지난달 말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했던 러시아 소유즈 우주선이 임무를 마친 3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4일 지구로 귀환했다고 러시아 우주통제센터가 밝혔다.
러시아 우주통제센터는 지난달 28일 ISS에 도킹한 소유즈 TMA-1호가 이날 새벽 2시43분 ISS로부터 분리에 성공했으며 오전 6시19분에 낙하산을 이용,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에 착륙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미국의 케네스 바워삭스, 도널드 페팃, 러시아의 니콜라이 부다린 등 3명의 우주비행사는 5개월여간의 ISS 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게 됐다.
또 바워삭스와 페팃은 외국 우주선을 통해 귀환하는 첫 미국인 우주비행사로 기록됐다. 이들은 당초 지난 3월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었으나, 지난 2월 발생한 미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사건의 여파로 귀환 일정이 늦어졌다.
2001년 시인 이성선 타계
평생을 고향에서 머물며 청정무구한 언어로 ‘설악산’과 자연을 노래한 ‘설악의 시인’ 이성선씨가 2001년 5월 4일 60세의 나이로 강원도 속초 자택에서 숨졌다.
시인 최명길은 “그는 온몸을 붓대로 하여 시를 썼던 사람”이라면서 “생명의 불꽃을 시에 다 주어 버리고는 그가 경배하는 대상이었던 설악산 품속으로 들어갔다”고 추모했다.
그는 강원도 고성 출생으로 고려대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내며 산, 달, 별 등과의 교감을 노래해온 ‘자연의 시인’이었다. 1970년 ‘문학비평’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 ‘시인의 병풍’ ‘빈 산이 젖고 있다’ ‘산시’ 등을 발표하며 정지용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속초, 양양, 고성 지역 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해 공동의장을 역임하는 등 남다른 자연사랑을 실천해 왔다.
1999년 세계최고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 하라파 유적서 발굴
인류가 기록한 최고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가 파키스탄의 고대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됐다고 1999년 5월 4일 영국 BBC방송이 전했다. 문자가 새겨진 도기들은 4천500년전에 번성했던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유적지대에서 발견된 것으로 표면에는 용기안의 내용물을 나타내거나 혹은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호가 새겨져 있다.
도기조각에 새겨진 나무 모양의 삼지창 무늬기호가 약 5천500년전의 것으로 추정돼 1998년 이집트 남부 전갈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BC3200-3300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고 리처드 메도우 하버드대학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고대 문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어느 문자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BC 31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리아인들이 기록한 문자가 최고의 문자로 알려져 왔다.
1999년 뉴욕 대형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 창사 130년 만에 첫 뉴욕증시에 상장
1994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예리코시에 대한 자치협정 서명
앙숙관계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94년 5월 4일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점령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시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출범시키는 역사적인 협정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시 자유를 돌려주는 첫번째 조치가 된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 점령 가자지구와 예리코시에서 지난 1967년 중동전 이후 27년간 계속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정은 부분적으로나마 막을 내리고 제한된 범위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시대가 열리게 됐다.
팔레스타인 경찰은 5월 12일 가자지구의 자치권을 넘겨받았고 아라파트 PLO 의장이 7월 1일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했으며 10월 26일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맺어 시리아에 대한 골란고원의 반환의사도 밝혔다.
1989년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에서 금성궤도선 마젤란 발사
1986년 일본 동경서 제12회 서방7개국 정상회담 개막
1984년 폴란드 주교단 정치범 석방촉구
1983년 이란 공산당 해체
1982년 아르헨티나 공군 엑소세미사일로 영국 구축함 격침
1982년 이철희, 장영자 부부 구속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82년 5월 4일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으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를 구속했다. 권력의 후원을 내세워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어음사기행각을 벌인 이들 부부는 대화산업이란 회사를 차려놓고 자금이 필요한 기업을 대상으로 연리 20-22%로 비교적 낮은 금리에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견질어음을 대출액의 3-4배 요구, 이를 다시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또 다른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등 거액의 사채놀이를 해왔다.
건국후 최대규모의 금융사기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사회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켜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의 기업이 도산하는가 하면 조흥은행장, 상업은행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 등 30여명이 구속됐다. 또한 이 파동으로 국무총리 등 4부장관이 모두 해임됐다.
재판결과 이철희,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에 미화 40만달러, 일화800만엔 몰수, 추징금 1억6,254만원이 선고됐다.
1980년 네팔관광성 한국의 동국대산악회가 세계 5번째로 마나슬루봉 정복(4월 28일)했다고 발표
1980년 티토 유고대통령 사망
35년간 유고를 통치해 온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이 1980년 5월 4일 87세를 일기로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2차대전 후 동서냉전시대 비동맹의 창시자이며 탈소공산주의 독자노선을 추구해온 티토의 죽음은 티토이즘의 종말과 함께 동서양진영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온 유고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의 금속 노동자 출신인 티토는 제1차 대전에 참전, 러시아의 포로가 된 뒤 혁명에 투신했다.
2차 대전 때는 독일에 대항하는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유고가 독립하자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유고는 티토의 화합적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안정된 국가를 유지했다. 티토는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펼치며 냉전시대 양극대결에 휘말리지 않는 지혜를 보였다.
소련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바람에 유고 공산당은 1948년 코민포름에서 제명됐지만 티토는 오히려 자주관리제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 사회주의를 추진하며 비동맹 중립 외교 정책을 굳건히 지켜 나갔다.
그의 죽음 후에 장기화된 분쟁으로 희생자가 늘어나고 생활이 피폐해지면서 세르비아인들조차 나라를 통일했던 그의 치적을 재평가하고 있다.
1979년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사무총장 내한
1977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 폐쇄 및 국내 배포 금지
1974년 엑스포74 미국서 개최
1970년 미국 주 방위군, 반전운동 시위를 벌이던 켄트대 학생들에 발포해 4명 사망
1970년 5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방위군이 월남전 반대 시위를 벌이던 켄트대학 학생들에게 13초동안 61발의 기총사격을 가해 4명의 학생이 숨지고 9명의 학생들이 크게 다쳤다.
당시 켄트대를 비롯한 미국 전역 250개 대학에서는 격렬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베트남전이 점차 확대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학마다 들불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켄트대학에는 학군단 건물이 불에 타는 등 반전시위가 사흘동안 치열하게 진행됐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 캠퍼스에 진입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날의 사태는 미 전역에 학원분쟁을 불러왔다.
1966년 북경 시장 팽진, 일체의 공직에서 해임
1961년 폼페이 유적 발견
1960년 정부 일본인 기자의 무제한 입국 허용
1958년 서머타임제 실시
1955년 영국-프랑스 원자력 정보교환 협정 조인
1951년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 발표, 전시연합대학 설치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발표하여 `전시연합대학`을 부산, 전주, 대구, 광주, 대전, 제주 등에 설치 운영하는 한편 대학생에 대한 징집연기 조치를 취했다.
전시연합대학은 1950년 11월과 12월 두 달간 500여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운영된 적도 있었으나 학생들의 징집,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계속되지 못했었다.
1951년 2월 18일 다시 부산에서 문을 연 전시연합대학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 이날 발표된 특별조치령이었다.
"전화로 인해 정상 수업이 불가능한 대학생은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고, 정상 수업이 가능한 대학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 학교 소재지로 옮겨온 타 대학 학생의 취학을 허락해야 한다."는게 그 요지였다. 경비는 서울과 부산의 국립대 예산에서 충당했다.
부산, 광주, 전주, 대전에 설치된 4개 대학에 수용된 학생은 6,455명, 동원된 교수는 444명이었다. 전시연합대학은 가교사를 짓고 점차 자리를 잡아갔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1952년 5월 31일자로 해체됐다.
세계교육사상 전례가 없는 전시연합대학은 백낙준 당시 문교부 장관이 "전쟁 중이라해서 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오늘날의 지방 국립대학은 대부분 전시연합대학이 모체가 되어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6·25전쟁 중에도 교육열은 식지 않았고, 피란지의 노천학교, 야외학교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지 보도. "남한에서는 정거장, 약탈당한 건물안, 천막, 묘지에서 까지 수업을 하고 있다. 어느 시골에 가도 나무 밑에 학생들이 모여 앉아 나무에 흑판을 걸고 책을 돌려가며 공부하고 있다."
1951년 이란, 석유 국유화법 성립
1949년 `육탄 10용사`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전면전을 예고하는 소규모 전투가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일어났고, 특히 6.25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는 그 횟수가 잦았다. 1949년 4월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은 인민군 1사단 제3연대 병력 1천여 명을 개성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월 3일 새벽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 38선 남방 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1949년 5월 4일, 한국군은 빼앗긴 송악산 고지의 재탈환을 수십 차례 시도했으나 수적열세와 적의 토치카(tochka, 지하 참호)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공격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피해만 늘어갔다. 결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송악산 능선에 버티고 있는 북한군의 토치카 10개소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했다.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과 직접 맞바꿔야 하는 작전이었으므로, 공격대원을 지정할 수가 없는 문제였기에 지원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이에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는 9명의 군인들이 용감하게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박격포탄과 폭약을 안고 스스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하늘을 뒤덮는 폭음과 함께 적의 토치카는 박살났고, 한국군은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무사히 탈환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낮 12시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몸에 지니고 돌진하다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아홉명의 용사에 박하사를 포함한 열명의 용사를 '육탄 10용사'로 명명하고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부덕 상사는 소위로, 다른 9명은 상사로 특진시키는 동시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44년 휴일에도 학교수업 실시하기로 함
1929년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출생
1929년 일본군 산동 철수
1928년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무바라크 출생
1919년 중국 5.4운동 발발
중국 북경의 13개 대학교 학생 약 3천명이 1919년 5월 4일 천안문 앞에서 집회를 가진후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4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들의 시위는 1차 대전이 끝난 후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이 파리 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산둥성에 대한 특권을 일본이 계승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했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징벌하자` `21개조 취소`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베이징의 군벌 정부가 군경을 파견하여 학생 30여명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이에 항의, 총파업을 결의하고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벌였다. 파업은 천진, 상해, 남경, 무한으로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다시 대규모 탄압을 감행, 학생 약 1,000명이 체포됐다.
1918년 전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 출생
대규모 정치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의 핵심인물
1912년 성(性)이 특정 염색체에 의해 결정됨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생물학자 스티븐스 사망
1904년 파나마 운하 (길이 81km 폭 30∼60m) 착공 1914년완공
1899년 국내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식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과 흥화문 사이로 전기를 먹는 수레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전차가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정부의 고관귀족들이 멋을 한껏 부린 채 시승했고, 갑남을녀들이 홀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철로 주변에는 군인 3백명과 순경 2백50명이 행여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경계를 서는 풍경이 펼쳐졌다.
전차는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이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설치가 허락됐다. 궁에서 출자액의 반을 부담하기로 하고 첫 구간은 동대문에서 흥화문까지로 정해졌다.
장안 한복판으로 시속 8km로 들어온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갑오경장 이래 소개된 인력거나 자전거는 전차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40인승 두칸으로 연결된 이 전차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유리창을 달았고 내부는 방과 마루로 구성됐다.
전차는 개통 후 보름동안 점검을 마친 뒤 20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오전 8시부터 오후6시까지 `땡땡`거리며 운행한 전차는 어느 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주었다. 물론 청량리까지 엽전 닷돈 등 구간에 따라 요금의 차등이 있었고 차장도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전차를 한번 타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 평균 승차인원이 2천1백70명(당시 서울인구는 약 2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통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26일 첫 사고가 일어났다. 파고다 공원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이다. 그해 봄 유난히 극심했던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고있을 무렵이었다. 흥분한 군중들은 사고 전차의 운정원을 끌어내려 몰매를 가했고 전차는 뒤엎어 불살라버렸다.
반대편에서 오던 전차까지 파괴한 군중들은 동대문의 발전소까지 몰려갔으나 콜브란이 직원들을 무장시키고 발전소 주변 철조망에 600V의 전류를 흘려보내며 방어한 덕에 무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인 운전원과 기관사가 귀국하는 바람에 한동안 전차운행은 중단되었다.
이후 전차 운행이 본격화 되며 노선도 늘어나 그해 말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다시 이듬해 1월 남대문에서 구 용산(원효로 4가)까지 선로가 연장되었다.
1825년 영국 생물학자 T.H.헉슬리 출생
1814년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유배
1776년 과학적 교육의 창시자인 독일의 헤르바르트 출생
1654년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