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파도> 촬영지로 주목받는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 동백마을. 풋풋한 인정이 넘쳐나는 ‘가슴속에 묻어둔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시골 마을이다.
마을이 왠지 위태로워 보인다. 뒷산을 깎아낸 해안도로는 마을 뒤를 관통하고, 집들은 바위산이 만들어낸 비탈에 쏟아질 듯 걸터앉았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 물은 마을을 쓸어내고, 해안가 절벽에서 떨어진다. 절벽 끝 계곡은 음습하고, 양옆으로 동백나무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바가지에 든 쌀을 조리로 한 움큼 들어낸 것 같은 이 마을 전경은 그래서 ‘조리곡(谷)’이라는 이름을 낳았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 동백마을. 시원한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다 동백마을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내려간 뒤, 해안가까지 걸어가 보면 <마파도> 촬영팀이 왜 이곳을 ‘오지게 빡센 섬’으로 점찍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수십 겹 절벽이 내리꽂고, 배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거친 파도가 밀어닥친다. 백암리는 동백마을, 답동, 순아골 등 해안선을 따라 작은 부락 네댓 개가 모여 있는 한적한 어촌 마을. 그러나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마파도>가 롱런하면서 전국에서 여행객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여행지가 됐다. 물론 그전에도 동백마을은 영광군이 첫 번째 관광 자원으로 내세우는 백수해안도로에서도 ‘전망 좋은 곳’이었다. 더불어 영화를 보고 찾아오는 이들은 그곳에서 회장댁(여운계), 진안댁(김수미), 여수댁(김을동), 마산댁(김형자) 같은 섬마을 할머니의 풋풋한 삶을 엿보고 싶은 마음을 내심 갖게 될 것이다. 구불구불한 돌담을 돌아 마을 가운데에 자리한 당산나무 앞에 섰다. “또 사진 찍으러 왔구마?” 은순애 할머니(72)와 김정님 할머니(68)가 당산나무 밑 시멘트 와상(臥床)에 앉아 낯선 여행객을 맞았다. “뭐 볼 것이 있다고. 엊그제도 에스비씨(SBS)에서 찍어 갔어. 엠비씨도, 케이비씨(KBS)도 찍어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 오구마!” 일행 중 가장 젊은 김정님 할머니가 마을 자랑인지, 귀찮다는 얘기인지, 모호한 인사말을 건넨다. “옛날부터 여그를 동백금(金)이라고 했어. 농사믄 농사, 갯것이믄 갯것, 귀한 것이 많이 났제. 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백합이나 동죽 같은 조개는 뻘밭에서 맨손으로 그냥 주워부렀어. 주꾸미, 돔, 민어, 숭어 같은 큰고기도 그물만 매노믄 겁나게 잡혀부렀응께. 남자들만 좋았제. 소주 한 병만 들고 나가면 천지가 안주거리였응께.” 일촌댁 은순애 할머니가 마을 내력에 대해 일장 설명을 늘어놓는다. “나 시집올 때만 해도 좋았제. 영광에서도 여그가 고기가 젤 마니 잡혔거등. 그만큼 옛날에는 마을에 사람이 많이 살았제. 근디 한 30년 됐으까? 쩌그 바다 보이는 이짝 저짝으로 아름드리 당산나무, 팽나무가 그렇게 좋았는디, 남자들이 그 놈을 다 쪄다가(베어서) 팔아묵어부렀어. 그 뒤로 동네에 남자들이 하나 둘씩 안 좋게 되부렀당께. 그 전에 인공(한국전쟁) 때도 징했어. 이 마을에서도 피해 본 사람이 많고, 저 뒷산에서는 영광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드만.” 동백마을엔 열세 명의 할머니가 산다. 이들 모두가 과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혼자 산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영감 없는 것보다 아픈 몸이 더 신경 쓰인다. “영감은 있으나마나, 나 혼자 살믄 그것이 더 편하제. 영감 있어 봤자, 평생 갯일 하랴 밭일 하랴. 골병 들어서 인자는 아무 쓸모도 없소.” 마을 여자들은 밀물엔 밭에서 일하고, 썰물엔 갯벌에서 백합을 잡았다. 백합은 ‘그랭이’라는 끌개를 갯벌 속에서 끌어 잡는데, 허리에 줄을 칭칭 동여매고 뒷걸음치면서 갯벌을 헤집고 다닌다. 연신 허리를 구부리고 갯벌을 헤집고 다니는 백합잡이는 어촌 마을 아낙에겐 천형과 같은 고된 밥벌이였다. “옛날에는 진짜 많이 잡혔는디. 그래도 다 헐값에 팔아부렀어. 그때는 암것도 모르고 그랬제. 크나큰 꽃게도 10원, 20원에 팔아부렀응께.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못 벌고 그랬제.” 동백마을 앞바다에는 그 유명한 ‘일곱뫼’가 산다. “쩌그 저 섬 보이요? 저것이 일곱뫼, 칠뫼, 칠산이요. 물이 빠지믄 시 개나 니 개로 보이고, 물이 적당이 들믄 칠산이제라. 큰 섬이 밀물에 잠겨 봉우리가 시니 개로 보일 때, 칠산바다라고 하제라.” 일곱뫼 근방의 바다는 한국 조기의 보금자리다. 먼바다에서 올라온 조기가 칠산 근방까지 당도해야 알이 차고 기름져, 제대로 된 영광굴비로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 해안선은 육지 쪽에 바위산이 딱 들어 막고 있어서, 근방에 저수지가 없어. 그래서 염도가 일정하고, 고기들이 산란하기 좋제. 조기 말고도 숭어, 민어, 농어, 감성돔, 넙치가 겁나.” 순아골에서 30년째 고기 잡는 어부 백석태 씨의 말이다. 동백마을 갯벌은 여전히 살아 있다. 동백과 답동 갯벌은 요즘 백합이 한창이다. 백합 맛을 아는 여행객은 백수읍내 철물점에서 끌개를 사와 직접 잡기도 한다. 날이 따뜻하고, 파도가 잔잔해 갯벌이 고와지는 5월이 되면, 답동 갯벌에서 백합을 잡아 해안가에서 불을 피워 구워 먹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동죽과 맛조개는 호미나 소금만 있어도 그날 먹을 만큼은 잡을 수 있다. ▒ 13명의 외할머니들과 3일 <첫째 날> [#1 와상 미팅] “뭣 하러 왔어?” “어디서 오신 양반들인고?” “동백마을 구경 왔습니다. 마을 나오셨나 봐요?” “잉, 우리는 여태까지 노인정에서 수제비 묵고, 인자 운동 나왔제. 다들 환자들이라 운동해야 써. 병원에 가도 의사들이 별 얘기는 안 하고, 적게 먹고 운동하란 소리밖에 안 하드만.” “요즘 동백마을에 사람들 많이 찾아옵니까?” 전에 식목일 날, 잔뜩 왔다 갔제. 요즘은 별것 아니여. 전에 영화 촬영 할 때는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꾸들꾸들했제.” “영화 찍을 때 구경들 잘 하셨어요?” “구경 잘 했지. 굿도 그런 굿이 없어. 여름에 비 칠칠 온디, 그놈을 다 맞고 찍드만. 그렇게 헌께 성공할 수밖에 없어. 딱 본께 성공하것드만. 무지하게 고생하대. 조 앞에 우물이 즈그들이 만들어논 우물이여. 저그서 애기들(이정진, 이문식) 옷 벗겨놓고, 등목하고 그랬제. 정미소는 예전부터 있던 것인디 보수해서 쓰고, 그 바로 앞에 전빵(가게)은 새로 만든 것이고. 그 너머로 집 세 개 있는 것이 김을동이 집, 김형자 집, 김수미 집이여. 지금은 많이 부서져부렀구만. 여그는 바람이 워낙 시게 분께.” “근데 여기 정말 할머니들만 살아요?” “영감들도 있어. 다 있는디 여그 안 살고 서울 자식네들 집에 가 있고, 그래서 그렇지. 동네에 남자들 많어. 잘 안 보여서 그렇지.”
[#2 해안가 동백 산책] “저렇게 흐드러진 동백꽃은 처음 보네.” 동백나무가 많지는 않다.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작은 도랑을 이루는 습한 지역에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아름드리나무의 밑둥치가 잘려 나갔다. 개체 수는 많지 않지만, 동백꽃은 무척 화사하다. 동백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나 강진 백련사의 동백보다 훨씬 화사하고,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동백꽃의 개체 수가 유난히 많다. 동백꽃의 꿀물을 따 먹는 동박새의 움직임도 부산스럽다. 이곳의 동박새는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절벽 위에서 해안 바로 위까지 동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다. 숲이라고 하기엔 작은 공간이다. 하지만 해안가로 내려오면 바다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전경이 그만이다. 저렇게 많은 동백이 피기도 어려운데…. 바닷가에서 와서 굉장한 동백 구경을 했다. [#3 대결] “10점에 100원씩이여!” 저녁 시간에 다시 들렀다. 식사를 마치고 갔지만, 극구 ‘같이 들자’는 말씀에 저녁 식사를 한 번 더 했다. “우리는 고스톱은 못 하고 민화투만 치는디, 어때? 한번 할란가? 10점에 100원씩이네!” “할머니들 돈 따도 될지 모르겠네요?” “할머니들 돈 따 묵을라고? 젊은 사람이 못 쓰겄구마. 할머니들하고 치믄 돈을 좀 잃어줄 생각은 안 하고…. 하하하! 그러나 저라나 누가 따갈지는 해봐야 알제. 자, 기리나 얼른 떠 봐!” “할머님들 실력이 만만찮으신가 봐요?” “실력은 무슨. 우리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이것도 잘 못해.” “그래도 용돈은 다 있으시네요?” “아들 딸들이 보내주니까. 노인네들이 할 일 없으니까 재미로 하는 거지. 이것도 눈이 안 보여서 못 하는 노인들도 많아. 화투 치는 노인네가 그래도 나은 편이여.”
▒ 13명의 외할머니들과 3일 <둘째 날> [#4 외출] “약 없으면 하루도 못 살어.” “오늘 목욕하러 갈란디, 우리 좀 읍내까지 태워다 주쇼.” “태워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비바람이 많이 몰아치는데요.” “이렇게 비바람 분디 어디를 갈라고들 그란가? 내일 가, 내일….” “목욕은 나중에 해도 상관없는데, 약이 없어서 그래.” “그래도 이렇게 바람 분디 어디를 갈라고?”
[# 5 공부] “죽기 전에 책 한 자는 들여다봐야제.” “전에는 부모들이 별로 관심을 안 뒀제. 우리 때만 해도 학교 안 간 사람들이 꽉 찼어. 그때는 어렸을 때부터 일만 했지, 학교 갈 생각을 했당가?” “학교는 어디로 다니세요?” “읍에 가믄 공부 갈켜주는 교회가 있어. 월요일 쉬고 화요일, 수요일 쉬고 목요일, 1주일에 두 번 나가. 근디 첨에는 다섯 명이 같이 댕겼는디, 인자는 둘 떨어지고 싯밖에 안 댕겨. 늙어서 공부할랑께 영 안 되드마. 그래서 그냥 떨어져 부렀어.” “그런 학교가 많아요?” “학교는 안 많아도, 노인들은 많지. 공부하는 날은 교실 서너 개가 꽉 차는디? 바다에 나가서 일만 할지 알았지, 누가 학교를 당겨봤어야 말이지. 그래도 죽기 전에 책이라도 한 자 들여다봐야 될 것 아닌가!”
▒ 13명의 외할머니들과 3일 <셋째 날> [#6 파전 파티] “저 총각들이 쇠고기 사와 파전 부쳤소.” 아침에 읍내에서 동백마을로 들어오면서 매번 밥을 얻어먹은 게 죄송해 뭔가를 사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무얼 살까 고심한 끝에 할머니들께 가장 적절한 성의 표시로 쇠고기를 택했다. 이날 아침도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도 오고, 총각들이 고기 사들고 왔으니까 파전이나 부쳐 먹을까?” “비 오는 날은 이렇게 모여서 파전 부치시나 봐요?” “밤낮 하는 건 아니고, 여럿 모일 때만. 세 끼 같이 밥 먹고, 노인정에서 같이 자고 그란께. 근디 이거 배워서 뭣 할라고 옆에 딱 붙어서 보고 있소? 각시한테 해줄라고? 자, 어디 한번 해봐. 근데 장개들은 갔소?” “아직 못 갔습니다.” “이렇게 밤낮 싸돌아댕기면 연애할 시간도 없것구마.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애인은 다 있드만. 그러제?” “애인도 없어요. 할머니는 영감님 없이 적적하지 않아요?” “우리 영감? 서울에 있당께.” “그럼 왜 같이 안 사시고?” “콩 볶으러 서울 올라가서 아직 안 내려온다요. 콩을 몇 말이나 볶았을란가 모르겄네!” “네? 콩 볶으러?” “허허허. 저 총각 궁금해 죽네. 작은 각시 얻어서 서울에서 산단 말이요. 콩 볶으러, 하하. 그래도 별로 상관 안 해라.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제. 자식들이 용돈 부쳐 주고, 영감도 생활비는 줘! 하하.” “좀 있으면 동네분들 다 모이시나요?”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오제. 누가 나가서 방송 좀 하고 와!” 국거리용 양지를 부침개 반죽에 넣은 파전은 처음 먹었다. 사실 쇠고기 누린내가 배어나 파전은 썩 맛있지 않았다. 하지만 파전을 부친 할머니들은 노인정으로 들어오는 할머니들에게 파전을 내놓으며, ‘저 총각들이 쇠고기 사와서 그놈으로 파전 부쳤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둘 바를 몰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7 기념 촬영] “우리도 배우만큼 한당께!” “할머니들! 부탁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바닷가 세트에 가서 기념 촬영 하나만 할게요. 이제 사진 찍는 거 귀찮으시겠지만, 저희 책에 예쁘게 내드릴게요.” “협조해줘야지. 사진 워낙 많이 찍혀서, 인자는 우리도 김을동이나 김수미나 그런 사람들만큼 잘 해. 어디로 갈까? 어디 가! 저 걸음 느린 할머니들은 차로 태워다 드리고.” “오늘도 일요일이라고 많이들 오는구마! 요즘은 세트장 보러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구경하러 오드만. 놀러 오는 사람들이 즈그들끼리 얘기하면서 ‘저 할매들이 텔레비에 나온 그 할매들이다’ 그러고 가!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사람들 찾아와서 나쁜 것은 없어.” “할머니들, 저 동백나무 앞에서도 한 컷 찍을게요!” “그래? 동백마을이니까 동백나무 앞에서도 찍어야제.” “나는 동백꽃 따다가 얼굴 앞에 놓고 찍어야 쓰것다.” “그래? 그라믄 나도 할라네.”
▒ 칠산 바다 테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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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젊었을때 마니 부려먹어놓구 힘없어니 천대함 안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