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다헤파' : 지금으로부터 약 3300여 년 전에 살았던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스 3세'의 왕비. 지적이었고 외교에 뛰어났다.
- 히타이트인의 고향은 (흔히 ‘팔레스타인’이나 ‘블레셋’으로 불리는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가나안' 땅인가?
- 히타이트인은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지 4세기가 흐른 뒤에도 수리야(영어 이름이 ‘시리아’인 땅의 바른 이름 – 옮긴이)에 살아남았다(히타이트 양식으로 새겨진 시리아의 사자 상이 그 증거다).
-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카데시 조약'이라는 평화조약을 맺은 뒤,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조약으로 평화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 히타이트의 법은 '조약', 특히 나라와 나라 사이의 조약을 중요하게 여겼다.
- 히타이트의 법 : "만약 어떤 사람이 실수로 옆집에 불을 내면, 그는 이웃에게 새 집을 지어줘야 한다." (셈족의 한 갈래인 바빌로니아의 법인 「 함무라비 법전 」 과는 달리 '보복'이 아닌 '배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비교적 진보한 - 그리고 온건한 - 법이다)
- 히타이트는 다민족 사회였고,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기꺼이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여 그들을 달래려고 했다(이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히타이트인들을 '1천이나 되는 신을 모시는 사람들'로 불렀다).
- 이상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인 <사라진 문명 - 히타이트 제국>에서 발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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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2003년 5월 8일 : 튀르키예에서 히타이트 제국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 히타이트인 >이 개봉된 날. 이 영화는 튀르키예와 미국의 합작 영화다.
- 서기전 1190년 : 히타이트가 유럽(지중해 세계인 남유럽)에서 쳐들어온 해양 민족에게 무너진 해.
- 재미있게도 히타이트 역사 연구에 앞장서는 나라 중에는 일본이 있다.
- 서기 1870년 오토만 제국의 땅이었던 시리아를 여행하던 'A.존슨'과 'S.제섭'이라는 두 미국인이 히타이트 제국이 남겼던 기념비 세 개를 발견했다. 그들은 탁본을 뜨려고 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작은 그림과 기호가 들어 있는 기념비가 병을 낫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와서 만져보고 탁본 뜨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 실패했다.
- 서기 1872년 수리야에 온 에이레(Eire. 영어권에서 ‘아일랜드’로 부르는 나라의 바른 이름. ‘에이레’는 ‘아일랜드’의 켈트어 이름이고 에이레 사람들은 켈트인이다 - 옮긴이) 선교사 '윌리엄 라이트'는 오토만 제국의 도지사와 현지 주민들을 설득하여 겨우겨우 기념비를 이스탄불로 보냈고, 탁본을 떠서 그 탁본을 대영 박물관으로 보냈다.
- 사실, 히타이트인은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하티'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을 한 번도 히타이트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 "누닌다 - 안 에자테니 바다르-마 에쿠테니."는 히타이트어로 "당신은 빵을 먹을 것이며, 물을 마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 닌다ninda : 수메르어로 '빵'이라는 뜻(하티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9 ~ 10세기 전에 활동했던 문명인인 키엔기르[흔히 ‘수메르’로 알려진 땅의 바른 이름] 사람들의 낱말을 빌려 썼다는 증거다 – 옮긴이).
- 히타이트인들이 청동으로 만든 '태양의 원반'(사슴과 황소가 붙어 있는 원반)은 오늘날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 시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 히타이트로 알려진 '네샤'라는 민족은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원주민인 하티의 말과 종교, 문화를 (그들을 정복하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였고, 곧 하티 인에게 동화되어 '하티'인으로 불리게 되었다(단, 그들의 언어는 계속 유지했다!).
- 히타이트의 지배 계층은 아카드어와 수메르어(키엔기르어 – 옮긴이)를 배웠고, 히타이트의 서기들은 아카드어를(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우듯이) 꼭 배워야 했다. 히타이트인들은 왕실 내부의 기록은 설형문자로 썼지만, 백성들에게는 상형문자로 쓴 글을 보여주었다.
ー 히타이트 인들은 문자뿐만 아니라 외부에 좋은 것이 있다면 다 들여왔다. 그래서 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즉 남의 것(예컨대 수메르의 설형문자나 서기 제도)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들의 재창조, 재융합 능력은 탁월하였다.
- 서기 1948년부터는 튀르키예인인 '타흐신 외즈귀치' 교수가 히타이트 유적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 작업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지금으로부터 3958년(이제는 3978년 – 옮긴이) 전, 아시리아인들이 장사를 할 때에는 철이 은보다 40배나 비쌌다.
- 히타이트의 점토판에는 결혼 문서가 남아있는데, 이 문서에는 아시리아인 남자인 '이디 - 아다드'와 아나톨리아 여인인 '아와나'가 결혼할 때의 계약이 적혀 있다. 이 문서에는 남자가 두 번 결혼하지 못하며, 만약 결혼한 여자와 이혼하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은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 서기전 700년까지는 아나톨리아 남부와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러니까 하티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 지 490년이 흐른 뒤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 히타이트의 왕인 '텔리피누'가 만든 법전에 따르면, "만약 어느 누가 형제자매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수장인 왕이 책임을 지고 귀족 의회를 소집하라. 만약 나쁜 일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면 사형으로 벌을 받을지니라! (그러나 그를) 아무도 모르게 죽이지 말지니라! 그 사람의 집이나 아내, 아이들에게 해를 주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왕자가 죄를 지으면 사형으로 벌을 받을지니라! 그의 집이나 아내, 아이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왕자가 죄를 지어 사형에 처해진다면, 왕자의 죄 때문에 그의 집, 농지, 시종, 소, 염소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느니라!"라고 적혀 있다. 쉽게 말해 함무라비 법전과는 달리 연좌제를 폐지하고 복수를 금지한 것이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은 텔리피누 왕이 법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며, '시대의 휴머니스트'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텔리피누 왕은 지금으로부터 3524년 전인 서기전 1500년의 사람이다).
- 히타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존칭과 타고난 이름이 따로 있었다. 예를 들어 자기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무르실리'는 본명이 '우르히테슙'이었다. 무르실리는 왕이 되고 나서 얻은 이름이다(이는 동아시아의 임금들이 성명과 묘호/시호가 따로 있었던 사실과 비슷하다 – 옮긴이).
- 히타이트는 이집트(당시 이름으로는 ‘케메트’ - 옮긴이)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이집트의 앞선 의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또, 히타이트는 이집트의 곡물을 수입한 뒤 대신 은을 보냈다.
- 히타이트의 왕인 '하투실리스(하투실리) 3세'는 자서전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 히타이트 제국에서는 왕이 곧 국가이기는 했지만, 신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 히타이트의 왕비는 다른 나라의 왕비와는 달리 나랏일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공식적인 알현이나 종교적 제의에 참석하였고, 국가의 공식 문서나 조약에도 왕과 함께 도장을 찍고 서명하였다.
- 히타이트는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정복한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이건 아케메네스 왕조와 닮았다 - 옮긴이).
- 히타이트인들은 인간이 죄를 짓고 태어나는 존재라고 보았다. 순자보다 훨씬 전에 성악설을 주장한 셈이다(다만, 이것도 하티인들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키엔기르인들이 훨씬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 히타이트인들이 흑해에서 아나톨리아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이건 히타이트인 자신들이 남긴 점토판의 신화를 바탕으로 풀이한 학설이다(사실, 나는 가나안 기원설보다, 이 학설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 히타이트 신화 중 일부분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로 계승되었다.
# 히타이트의 법 조항을 몇 가지만 읽어보자 :
-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자유인)의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렸다면, 피해자에게 은을 보상금으로 주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자나 남자 노예의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렸다면, 피해자에게 자유인에게 주는 은의 절반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 노예도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자유인과 결혼할 수 있다.
- 약혼한 여자는 예비 신랑으로부터 받은 약혼 선물을 그대로 돌려주면 파혼할 수 있었고, 그 뒤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 과거에는 황소 한 마리를 훔친 자는 소 30마리를 배상금으로 내놓아야 했지만, 이제는 소 15마리만 내놓아도 된다(법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변했음).
- 범인의 집이나 형제, 아내, 가족, 일가 친척, 인척들로부터 빵이나 맥주를 선물받았다고 해서 판결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히타이트의 왕이 지방 재판관에게 내린 훈령에서).
- 히타이트의 법은 함무라비 법전과는 달리 사형이나 보복을 최대한 억제하고, 대신 돈이나 재물로 피해를 보상하도록 권장함으로써 훨씬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그러니까 보다 인간적이고 온건한 법률이었다는 얘기다.
-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맺은 평화조약의 복사본은 지금 뉴욕에 있는 유엔(국제연합 – 옮긴이) 본부에 걸려 있다.
- 튀르키예 사람으로서 히타이트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에 최초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러니까 '케말 파샤'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최초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던 그는 '히타이트 박물관을 만들라'고 명령했고, 터키인들은 그의 명령을 좇아 앙카라 시에 '히타이트 박물관(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또 터키 학자들에게 '히타이트가 터키인의 시조라는 것을 밝히는 연구를 하라'고 지시했다(비록 학자들이 반대하긴 했지만 말이다).
-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의 튀르키예인 운영자들이 자랑하는 유물은 히타이트 제국의 시조인 '아니타' 왕의 청동검이다.
"튀르크인들은 (서기 – 옮긴이) 10세기경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왔으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인으로서 그 이전에 나타난 문화와 문명에 대해서도 인류 공동의 문화와 역사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부인 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고고학 유적지에 관심을 갖고 대학에 고고학 관련 학과를 설치하게 하고, 아나톨리아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튀르키예 역사 위원회를 설립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히타이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하티 인들이 남긴 동물상을 둘러싼 원반 태양의 조형물은 내가 몸을 담고 일했던 앙카라 대학교 문과 대학의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관광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앙카라 시내 '스히예' 광장에는 이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히타이트의 숨결이 앙카라 시민과 함께 하고 있다. (오늘날 – 옮긴이) 튀르키예 사람들은 히타이트를 '히티트'라 부르고 있지만, 이전에는 '에티'라고 불렀다. 거리나 동네 이름, 은행, 유명한 과자 회사 이름에 에티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 역시 히타이트가 튀르키예인들의 생활 속에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예 이기도 하다."
- 튀르키예의 고고학자인 '타흐신 외즈귀치' 교수의 말(그의 아내인 '니멧트 외즈귀치'도 히타이트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다)
: 이상 『 히타이트 - 점토판 속으로 사라졌던 인류의 역사 』 ( 이희철 지음, 리수 펴냄, 서기 2004년 )에서 발췌/인용
(용어나 숫자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서기 2024년]에 쓰이는 것으로 바꿨지만, 다큐멘터리나 글의 내용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 옮긴이)
- 단기 4357년 음력 5월 18일에,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