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우수건축자산은 역사적·경관적·예술적·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축자산 중 가치를 살려 활용하고자 하는 소유자에게 지원을 해 주고자 '소유자의 신청에 의한 등록개념'이다
서울공예박물관 직물관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안국동 175-2)
1960년대, 건축 구조와 재료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김정수 건축가(1919-1985)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도입하여 지은 (구)풍문여고 과학관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한 건물로 우리나라 초기 공업화 건축의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 안동별궁
원래 이 자리는 명당으로 유명해 세종 때에는 왕자 영응대군의 대저택이 있었고 1471년(성종 2)부터는 연경궁(延慶宮)으로 불리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이를 사들여 막내 아들 연령군의 집으로 삼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고종은 원자의 왕세자 책봉 및 가례소를 마련하기 위해 1879년(고종 16년) 11월에 이곳을 본격적으로 왕실 직속 별궁으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완공하였고 안국방 소안동에 있다 하여 '안국동 별궁'이라 하였으며 일상에서는 줄임말인 '안동별궁'으로 많이 불렀다
1882년(고종 19) 2월, 왕세자 이척(순종)과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의 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하지만 순명효황후는 1904년(광무 8) 사망했고, 1906년(광무 10) 황태자 이척은 새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와 두 번째 가례를 치뤘는데 그때 가례도감을 설치한 곳 역시 안동별궁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잠시 상궁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가 1936년 큰 길에 면해 있는 768평이 최창학에게 15만원에 낙찰되었다
1937년에는 명성황후의 먼 일족이자 휘문고등학교 설립자 민영휘의 아내 안유풍이 당시 돈 30만환으로 부지 4천여평과 함께 부속 건물을 매입한 뒤, 이 자리에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웠다
7년 뒤(1944년) 증손자 민덕기가 폐교된 다른 여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증조모의 이름 '풍' 자와 휘문의 '문'을 따 풍문여학교로 개편했고 해방후 풍문여중과 풍문여고로 나누었다
1992년 풍문여중은 폐교되었고, 풍문여고는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2017년 강남구 자곡로로 이전한 뒤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서울시에서 부지를 매입해 공예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몇몇 건물들은 풍문여고가 들어선 뒤에도 한동안 대부분 제 자리에 남아있었으나 학교의 부지확보와 건물 신축을 위해 남아있던 정화당과 경연당, 그리고 현광루를 해체해 다른 곳으로 매각했다
정화당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옮겨갔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요정 '선운각'으로 변했고 김성곤(전 쌍용그룹 회장)이 별장으로 쓰기도 했다
1975년 김성곤 사후 '쌍용중앙연수원'이 되었다가 1997년 동양화재로 매각돼 현재 메리츠화재 연수원으로 존속 중이다
(선운각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애인 장정이가 마담으로 있었다는 곳으로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곳이다)
현광루와 경연당은 풍문학원 이사장 만병도의 개인 별장과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골프장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양컨트리클럽 신코스 18번 홀로 옮겨져 수영장 관련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6년 무렵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후 문화재청에서 매입 후 복원하여 현재는 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에 있다
민병도가 설립한 또 다른 관광지 남이섬 유원지 동쪽 끝에 있는 ‘정관루’라는 목조 건물이 안동별궁의 건물 일부라는 설이 있다
(남이섬 유원지 측은 이 건물이 1965년 남이섬을 구매 할 무렵 서울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2006년 당시 강우현 남이섬 사장은 풍문여고에서 옮겨왔다는 얘기를 들었다했지만, 당시 공사에 참여한 한 목수는 포도청 건물을 옮겨와 지었다고 주장해 아직 확실하게 결론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안국동에 있던 풍문여자고등학교는
2017년 3월 서울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며 교명을 풍문고등학교로 바꾸고 남녀공학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