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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음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구절과 전절을 잘 연결하여 살펴 보라. 복음이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전파되었다. 이 축복은 우리가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5, 26)는 말씀에서 배우는 바와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의의 축복을 말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어느 사람에게도 아브라함이 받는 복외에 다른 축복이 있을 수 없으며 아브라함에게 전파된 복음이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유일한 복음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예수의 이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죄의 용서는 동시에 모든 축복을 가져다 준다.
저주 아래 있음
9,10절을 대조하여 살펴 보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복을 받느니라.” 그러나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믿음은 복을 가져다 주지만 율법의 행위는 저주를 가져다 준다. 아니 오히려 저주 아래 머무르게 한다. 저주가 모든 사람 위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믿음은 저주를 제거한다.
누가 저주 아래 있는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영문번역: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라는 말씀에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속한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이 복이 있고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계명을 행한다.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므로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의 본성을 행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의에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 멀리 떠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믿음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벧후 1:4)며 그러므로 모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0-33).
저주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저주는 율법을 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그 자체가 저주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롬 5:12)이 왔기 때문이다. 죄는 그 안에 사망을 품고 있다. 죄가 없으면 사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이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왜 그러한가? 그것은 율법이 저주이기 때문인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그러면 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가? 그것은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유의하기 바란다. 율법을 행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한다는 말은 율법을 행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롬 8:7). 모든 사람이 다 저주 아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로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자는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저주는 율법에 기록된 모든 일을 계속 행하지 않는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축복은 율법에 완전히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너무나 분명하다.
축복과 저주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이 말씀은 우리 개개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롬 4: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할 뿐이다(엡 5:6 참조). 만일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면 정죄를 받지 않고 오직 믿음이 율법에 일치되게 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을 뿐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선한 일
성경은 선한 일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선한 일을 높힌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불신하는 자들을 책망하여 말씀하면서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고 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 18)고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단언하였다.
주님이 몸소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예비하시고 이루셨으며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쌓아 두셨다(시 31:19 참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선한 일은 행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행할 수가 없다. 오직 선하신 분만이 실행할 수 있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히 13:20, 21).
누가 의인인가?
우리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의 말씀을 자주 읽을 때에 “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 5:17) 또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므로 모든 불의는 불법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모든 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의롭게 되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의는 우리가 얻어야 할 목적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그 표준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기 때문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롬 3:23; 엡 5:6; 롬 4:15)한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이러한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게 될까? 그 답으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밖에 없다. 오직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행위로는 전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여하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어디에서 이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만일 의가 행위에서 온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 5). 예외는 있을 수 없으며 중간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다른 의인은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단순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했으며 이것은 곧 그들의 행위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이루어지고 지탱된다. 이것은 율법이 그렇게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느 일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 예수를 영접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완전히 율법을 이루신다.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않음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물론 이것은 책에 쓰여져 있건 돌비에 새겨져 있건 간에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며 이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율법은 단순히 “이것을 행하라” 또는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이 말씀은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 생명을 제시하는 조건이다. 율법은 행위, 오직 행위만을 권한다.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은 율법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사람은 전혀 없으며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생애에 완전한 순종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는 것이다.
생명은 움직이는 행위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그러나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 생명을 지닌 유일한 분이며 그분만이 의를 행하였고 행하실 수 있다. 그분을 부인하고 거절하지 않고 시인하고 영접할 때에 그의 모든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치며 살아 계신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되고 그러므로 살아있는 율법이 우리의 생명이 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당면한 실제 문제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하나 혹은 하지 않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논난이 없었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어느 누구도 율법이 폐지되었느니 혹은 변경되었느니 혹은 그 효력을 상실하였느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서신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어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율법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칭의―의롭게 되는 것―을 중요 문제로 삼고 있다.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되느냐 혹은 행위로 되느냐 하는 것이다.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었지만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이러한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죄인에게 더욱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의 참된 의로 제시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았으며 그러므로 그가 이와같이 가르친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이름이 바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하였다.
사망의 쏘는 것
사망은 저주라는 것이 13절 뒷부분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 바 되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원인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러므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을 계속하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 10절의 요지이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과 같다. 죄에는 사망이 들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다. 생명이 충만한 것같이 행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였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이다(롬 7:24 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저주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여기서 잠간 멈추고 앞으로 연구할 구원의 도를 염두에 두고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을 매우 주의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줄곧 읽고는 이내 광적으로 외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며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나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지금까지 본 바와같이 저주는 불순종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 불순종하는데서 구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다.
어떤 사람은 경솔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옳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율법으로 볼 때에 옳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한다. 그러나 구속은 만인을 위해서 있다. 그리스도의 귀하신 피 곧 생명으로 모든 사람을 샀다. 그러므로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다. 그 피로 우리는 “망령된 행실”(벧전 1:18)에서 구속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잠깐 멈추고 생각을 해 보자. 이 말씀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보다 선한 삶을 살기 위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실현되지 않은 희망을 헛되이 후회하는 데에 우리의 생애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짓된 소망에 마음을 부풀게 하지 않으시고 죄의 포로들에게 오셔서 “자유다. 너희의 감옥문이 열렸다. 나오라”고 외치신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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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늘본향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DA)는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이단이니, 그곳에서 어서 빨리 나오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이단이라니요?
하늘본향님은 도대체 어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까?
@CRYSTAL™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시 19:7)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의 그 단순성, 포괄성 및 그 완전성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가! 율법의 내용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계명을 쉽게 암기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너무나 원대하며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외형적인 행동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사상, 의도, 욕망 및 정서까지도 살핀다. 인간의 법률은 이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법률은 다만 외형적인 행동만을 제재할 수 있다. 인간은 범죄자이면서도 자신의 악행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길 수 있다. 또한 도둑질, 살인, 혹은 간통죄를 범한 형사상(刑事上)의 범인이 되고서도 발견되지 않는 한 법률이 그를 범죄자로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 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의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注視)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전 12:14)실 그날에
@하늘본향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늘본향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말씀하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님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늘본향 예수님은 "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라고 하셨는데 님 속에 계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늘본향 126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하늘본향 그러니까 님은 지키는 율법이 없나요?
다시 질문합니다. 님은 어떤 율법을 지키고 있나요?
@CRYSTAL™ 십계명의 율법이지요.
@하늘본향 님은 십계명(율법)을 100% 지키고 있습니까?
@CRYSTAL™ 십계명의 율법을 100%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이지요.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지요.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행사함으로 죄사함과 평강을 위해 주님께 피하게 한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100% 순종하여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 내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100% 순종하신 예수님을 100% 영접했더니 내 속에서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 이것이 복음진리의 전부라는 것....그리스도가 내 속에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성령은 생명의 호흡으로서 매순간마다 성령을 호흡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지요
@하늘본향 십계명의 율법을 100%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하는 하늘본향님은 심각한 율법주의 빠져있네요. 성경 그 어디에서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짬뽕수준으로 만드는 SDA 사람들은 정말 문제가 심각하네요. 안식일교에는 율법만 있고 복음이 없어 보입니다. 큰일입니다.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음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구절과 전절을 잘 연결하여 살펴 보라. 복음이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전파되었다. 이 축복은 우리가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5, 26)는 말씀에서 배우는 바와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의의 축복을 말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어느 사람에게도 아브라함이 받는 복외에 다른 축복이 있을 수 없으며 아브라함에게 전파된 복음이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유일한 복음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예수의 이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
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죄의 용서는 동시에 모든 축복을 가져다 준다.
저주 아래 있음
9,10절을 대조하여 살펴 보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복을 받느니라.” 그러나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믿음은 복을 가져다 주지만 율법의 행위는 저주를 가져다 준다. 아니 오히려 저주 아래 머무르게 한다. 저주가 모든 사람 위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믿음은 저주를 제거한다.
누가 저주 아래 있는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영문번역: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라는 말씀에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당면한 실제 문제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하나 혹은 하지 않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논난이 없었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어느 누구도 율법이 폐지되었느니 혹은 변경되었느니 혹은 그 효력을 상실하였느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서신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어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율법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칭의―의롭게 되는 것―을 중요 문제로 삼고 있다.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되느냐 혹은 행위로 되느냐 하는 것이다.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었지만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이러한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죄인에게 더욱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의 참된 의로 제시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았으며 그러므로 그가 이와같이 가르친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이름이 바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하였다.
사망의 쏘는 것
사망은 저주라는 것이 13절 뒷부분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 바 되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원인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러므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을 계속하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 10절의 요지이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과 같다. 죄에는 사망이 들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다. 생명이 충만한 것같이 행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였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이다(롬 7:24 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저주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여기서 잠간 멈추고 앞으로 연구할 구원의 도를 염두에 두고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을 매우 주의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줄곧 읽고는 이내 광적으로 외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며 이 구절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나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지금까지 본 바와같이 저주는 불순종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 불순종하는데서 구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다.
어떤 사람은 경솔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옳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율법으로 볼 때에 옳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한다. 그러나 구속은 만인을 위해서 있다. 그리스도의 귀하신 피 곧 생명으로 모든 사람을 샀다. 그러므로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다. 그 피로 우리는 “망령된 행실”(벧전 1:18)에서 구속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잠깐 멈추고 생각을 해 보자. 이 말씀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보다 선한 삶을 살기 위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실현되지 않은 희망을 헛되이 후회하는 데에 우리의 생애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짓된 소망에 마음을 부풀게 하지 않으시고 죄의 포로들에게 오셔서 “자유다. 너희의 감옥문이 열렸다. 나오라”고 외치신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