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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이 확증됨
언약 곧 인간이 저주로부터 벗어난 후에 완전히 새롭게 된 땅을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이었다. 그는 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의 보증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 안에서 우리는 기업을 얻었다(엡 1:11 참조). 왜냐하면 성령은 기업의 첫 열매들이며 성령을 소유할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이 마음 안에 거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행 3:25, 26)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의 죄에서 돌이키도록 보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하나님의 맹세로 확증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13-20; 창 22:15-18 비교).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하나님의 맹세로 확증되었다. 아브라함 앞에 하신 약속과 맹세는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며 강력한 위로가 되며 맹세는 그리스도를 보증과 담보로 제시하고 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튼튼하고 견고하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그러므로 하나님이 “맹세로 보증하셨”을 때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동시에 온 우주를 담보로 주셨다. 이 맹세는 죄를 피하여 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 언약을 폐지할 수 없음
언약과 약속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 곧 새롭게 창조된 모든 땅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며 또한 오직 의만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에 영원히 있을 것이므로 이 약속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이 약속이 확정된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갈 3:15)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이 일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러므로 완전하고 영원한 의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보장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맹세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어떤 새로운 것을 소개할 수가 없다. 약속에 의하여 유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으므로 만일 430년 후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유업을 얻어야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약속은 효력이 없을 것이며 언약은 무효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전복과 그의 존재의 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를 들어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유업과 그 유업에 필요한 의를 주시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복음은 과거와 미래의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완전하고 충만하였다. 그 조항이나 조건의 가감이나 변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후에는 있을 수가 없다. 이와같이 완전한 복음에서 어느 하나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어떤 사람에게 요구할 수가 없다.
율법의 유익은 무엇인가?
이것은 19절에서 바울이 하는 질문으로써 율법 폐기론자들의 반대를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율법의 위치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 질문은 매우 당연한 질문이다. 기업은 완전히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며 확정된 언약은 변경될 수 없고 조금이라도 가감할 수 없는데 왜 430년 후에 율법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더욱 글자 그대로 말한다면 그러면 왜 율법이 생겼느냐? 여기에서 율법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율법은 무슨 역할을 행하는가?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질문의 대답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시내산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롬 5:20)은 그 율법이 그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있었고 또 그가 지켰었다(창 26:5 참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기 한달여 전에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가 또는 지키지 않는가를 시험하셨었다(출 16:1-4, 27, 28 참조).
“더한 것이라”
여기서 “더한 것이라”고 번역한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9절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에서 “말씀하다”로 번역된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명기 5장 22절의 칠십인 역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큰 소리로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더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답은 “범법함을 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라”이다. 이것은 곧 죄를 책망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범법함을 인하여”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3)이다. 율법은 가장 두렵고 엄숙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불신으로 약속된 유업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경고로 주셨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을 믿지 않았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그러나 유업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롬 4:13)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 유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유업의 소유에 필요한 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말씀하셨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가 율법에서 오지는 않지만 의는 율법의 증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롬 3:21).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며 그런고로 유업을 상실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믿었더라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새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면서도 여전히 약속된 후사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의 불신은 죄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었다. “범법함을 인하여” 율법을 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이다.
자기 신뢰는 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스라엘의 백성은 자기 신뢰와 하나님 불신으로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불평하고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있고 그분의 약속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라고 물은 그들의 자손들과 동일한 정신을 가졌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것으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롬 10:3 참조). 만일 그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면 약속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율법을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천사의 섬김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시내산에 있었던 천천만만의 천사들(시 68:17 참조)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 복음의 전파가 위탁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에 관련된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기초가 놓일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7S=Job/38/7e)으며, 인류의 구세주의 탄생이 알려졌을 때에 수많은 천군들이 찬양하였다. 그들은 왕중 왕을 시중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시 103:20)기 위하여 기다린다. 율법이 선포되었을 때에 왕의 시위대로서 참여하였을 것이며 물론 화려한 시위나 행진만을 위해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스데반은 그를 죽이려는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고 말했다. 지금은 악마가 된 사단에 대해서 “너는 완전한 인이었”(겔 28:12)다고 말씀하고 있다. 불란서 성경은 이 말씀을 “너는 마무리하는 인을 쳤도다” 덴마크 성경은 “너는 법령에 인을 쳤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타락하기 전에 인의 보관자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모든 통과된 법령에 인을 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천사들은 “능력이 있”(시 103:20)으며 그들이 모두 율법을 선포하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이 율법의 선포는 가장 크고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보의 손을 빌어”
지금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는 구절에 관련된 시간 문제에 대해서 지나쳐야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하는 연구는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해서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중보의 손을 빌어” 시내산에서 사람에게 주어졌었다. 이 중보는 누구인가? 단 한 가지 대답밖에 없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갈 3:20). 하나님이 한편이고 사람들은 다른 한편이면 그리스도 예수는 중보자가 되신다. 하나님이 이 거래의 한편이신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로서 다른 이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반역하였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6)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나누어 놓았다(사 59:1, 2 참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리스도는 이런 원수됨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때문이다(엡 2:14-16 참조). 그리스도는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되었다(롬 5:1, 2; 엡 2: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반역하는 마음인 육신의 생각이 없어지고 그 대신에 성령의 마음이 주어져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롬 8:4)게 된다. 그리스도의 일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고 부서진 것을 회복하고 나뉘어진 자들을 재연합시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된다.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중보가 되는 것은 중개사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중보가 되셨었으며 우주에 죄가 없고 속죄가 필요없게 될 때에도 중보자가 되실 것이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며 생명이 되신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피조물에게 흘러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하는 중보이며 길이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처음으로 중보자가 된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중보자였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가지 못한다. 천사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므로 어떤 새로운 능력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을 얻는다(골 1:14-17 참조). 우주를 충만하게 하고 붙들고 있는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 21).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아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율법이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손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고후 1:20 참조). 그러므로 율법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언약에 새로운 사항을 더 넣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확증을 했으므로 더 넣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문제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이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으며 또 새로운 사항으로 율법을 부가하여 넣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것은 율법이 언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성령의 약속에 이 율법이 내포되어 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행 7:8)을 때에 그에게 행하여진 것을 가리킨 것이다(롬 4:11; 2:25-29; 빌 3:3 참조).
율법은 약속을 높임
이미 본 바와같이 율법은 약속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세상을 유업으로 상속받으리라”는 약속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롬 4:13)이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이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사 51:7) 말씀하시는 바와같이 의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가 된다. 그러나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지 못하고 믿음에 의해서 얻는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롬 9:30-32 참조).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약속도 더욱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로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불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신 5:22) 율법을 선포하셨을 때에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함께 하였고 여호와의 모든 천사들 앞에서 온 땅이 흔들렸으며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과 위엄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위대함을 계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을 선포하신 “큰 음성”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큰 음성이다(사 40:9 참조). 하나님의 계명은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계명은 반드시 이와같은 약속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그의 보증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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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늘본향님은 복음을 받은거예요?
하늘본향님은 율법을 받은거예요?
님은 도대체 무엇을 받은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