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794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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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치명적 결함인 위선의 극복>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주 질타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위선자들입니다. 위선이란 말의 뜻은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겉치레로 보이는 선행’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들로 손꼽히는 부류가 있었는데,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제관들, 이른바 고위층이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같은 경우 원래 유다인들 가운데서 유다 전통이나 관습, 율법 준수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도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의 성실한 전달자들이었으며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성전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지식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가까이 살아갔던 그들이 나중에 하느님과 가장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핵심을 외면한 채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집착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정신이나 영성은 망각한 채 오직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이며 지엽적인 것들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다의 한 랍비의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선적인 것 중의 십 분의 구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유대 사회는 강한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한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었어야 할 제관들과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나 자선, 기도, 금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에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한 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에 투신하고 있는 이들이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꿰뚫고 있으면서 영적인 삶과 세상에로의 투신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형식주의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선의 극복, 그것은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위선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본래의 나약함과 한계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위선자들이 득실거렸는지 모릅니다. 돈푼이나 만지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고 아첨을 하던 율법학자들과 사제들이 많았습니다. 아예 철저하게 바닥을 기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기는커녕 부와 권력과 명예를 섬겼던 것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이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 앞에서는 얼마나 거드름을 피웠는지 모릅니다.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던 그런 이중적인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 만무합니다. 올바른 사람이라야 찬미가 어울립니다. 그들의 기도와 가르침은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거룩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비로소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결국 말씀 선포자들이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성화되지 않는다면 야바위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은 힘을 잃을 것이며 우스개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금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치명적인 결함인 위선과 이중성, 언행의 불일치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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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힘없을 땐 바리사이, 힘 있을 땐 율법학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학생 때 저는 바리사이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산 사람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느라 모든 시간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심지어 한 동기에게 혼자 하늘나라 갈 거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1년 동안 함께 공부한 수도회 신학생을 신부 되어서 봤는데 못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는데도 친분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 신부가 같은 반이었다는 것을 말해서 알았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기도 잘 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킬 건 다 지켰지만 그러면서도 힘들어하는 신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랑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아마도 일반 신자들은 결혼해 자녀를 낳기 전에 바리사이로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리사이는 무언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로서는 열심히 살지만 부모를 심판합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학생이라면 선생님을 심판하는 학생이 바리사이입니다. 직장에서는 말단 직원들이 바리사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하면서 시켜먹기만 하는 상사를 비판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키지만 남을 판단하며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죄인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 탓만 하니 정의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이 막상 힘을 얻어 누군가 위에 서면 율법학자로 바뀝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난 다음부터는 율법학자였습니다. 율법학자는 타인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위치에 선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이고 직장에서는 상사입니다. 자신도 부족하면서 또 남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서니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들을 판단하며 가난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돈도 많이 받고 선물도 많이 받으며 가난을 잊어갔습니다.
주위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들이 잘 해 주어서, 혹은 사목 상 어쩔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했습니다.
은근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들으라고 강론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부족함 없이 살며 나눔과 가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상징으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으로 여기는데 본인만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너나 잘 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 신경 쓸 에너지 있으면 자신 먼저 들여다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 먼저 들여다보되 ‘사랑’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가득차면 바리사이가 되지도 않고 율법학자가 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남을 심판하지 않고, 또 사랑은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이 될 때 바리사이, 율법학자에서 벗어나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 안에 죽은 시체나, 뱀, 혹은 자아로 가득 차 있는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으로 가득 차 있는지 항상 살펴야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만 하고 싶다면 이미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들어계신 것이고 그래서 무덤이 아닌 생명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무덤 아니면 성전입니다. 이는 그 안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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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42-46 :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 동안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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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사랑과 기쁨의 열매,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욕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시기와 질투, 분쟁과 격분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우리는 욕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의로움, 사랑과 진실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의 불행을 지적하십니다. 타인에게 엄격하지만 자신에게 관대하면서 여러 가지 일탈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위선의 탈을 벗고 진솔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 분입니다. 성인은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 사도, 에보디오를 잇는 세 번째 주교입니다.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성인은 폴리카르포와 함께 요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자신을 ‘테오포로’, 곧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로 불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밀알’이 되고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성인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대에 일어난 박해로 로마로 압송되어 110년경에 순교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냐시오 성인이 사자의 먹이가 되었다고 언급하고,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그의 순교 장소가 콜로세움이라고 전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 준 성인은 ‘가톨릭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며 보편 교회의 진면모를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희생을 기꺼이 주님께 바친 성인의 삶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리국장/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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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세례자 신부님]
<성령님을 따라갑시다>
【삼국지에 보면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인생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따를 만한 주인을 선택하지 못했구나!’ 그러고 죽습니다. 영웅 자신의 능력과 포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능력도 있고 포부도 대단하고 의도도 좋지만, 섬길 주인을 잘못 선택해서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별 볼일 없는 인생인데, 주인 잘 만나서 길이 열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 같은 사람은 IMF 이후에 샐러리맨들에게 우상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97년까지 증권회사 샐러리맨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나와 독자적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뮤추얼 펀드라고 하는 간접투자 방식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판도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뮤추얼 펀드는 소액 자본들을 많이 모아서 한꺼번에 거액으로 투자하는 새로운 유형의 투자 방식인데, 요즘에는 여러 펀드에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펀드에 수익률이 좋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박현주 회장이 투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했어도 큰 수익을 얻을 게 아닌가? 내가 잘 따라가기만 했어도 좋았을걸.. 내가 그 펀드를 들걸..’】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따르고 주인으로 섬기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가르치는 것은 육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육에 따라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구체적인 모습이 다음의 모습들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세 사람이 해양경찰 체력시험을 보는데 드링크를 마시고 모두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친구 넷이서 시험을 봤는데 세 명은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한 명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필기 시험에 떨어진 한 사람이 ‘다같이 떨어지자.’ 는 심보로 체력시험 직전에 약을 탄 드링크제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또 수년 전에 이런 신문 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남대문 시장에 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급히 빠져나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엉엉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까, 가게에 손금고를 두고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에 수천만 원이 들었는데, 그것을 두고 나왔다고 하면서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소방관들이 말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화재가 다 진압 된 후에 보니까, 그 아주머니가 손금고를 부둥켜안고 타 죽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에 따라 살면 모두 망하고 죽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육의 길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끌어 주시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오늘 독서에 나오는 대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그리고 절제와 같은 열매를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성령님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따라 미소로 인사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 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고, 작은 선행을 실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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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교만, 허영, 위선을 꾸짖으시는데, 이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신앙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말씀을, 옛날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역사 공부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옛날의 바리사이들과는 다르다.”라고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그런 자만심은 위선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내 안에도 바리사이 같은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면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이 말씀은,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는 채소들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자기들은 지극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과 ‘사랑 실천’은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잘 보입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사랑 실천은 잘 안 보이고, 그래서 빛이 나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일은 잘하고, 안 보이는 일은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인데,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받기를 바라시는 것을 드려야 하고, 정말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드리지 않고, 자기가 바치고 싶은 것만 바치고, 이웃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자기가 주고 싶은 것만 준다면,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그냥 자기중심주의적인, 또는 이기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여기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십일조 내는 일도 중요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헌금이었습니다.(신명 14,29)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교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교만한 언행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교만한 언행을 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만일에 자기 입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퍼센트 교만한 사람이고, 위선자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는 말씀이 있다. 이렇게 예수님도 자신이 겸손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마태오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인 말로 해석합니다. 또는 후대에 누군가가 주석으로 덧붙인 말일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이 말씀은 “너희는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무덤이라고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들을 부정 타게 만드는 무덤입니다. 구약 율법에 무덤이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민수 19,16)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꾸짖으신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언행을 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따라하다가 죄를 짓게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 많습니다. (글자 그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남을 죄짓게 하면서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그렇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어떤 직책을 맡은 사람들도 그렇고,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과 행동을 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따라 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을 죄짓게 만드는 경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모두 ‘드러나지 않는 무덤’입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신자들에게는 성경 공부를 하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성경 공부를 하지 않는 본당 신부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기도하지 않고, 사랑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자기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또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지도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제들을 모두 크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남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는 하지 않는 것도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의 진짜 모습은 끝까지(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서는 그날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은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지금’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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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사랑만이 율법의 정신이다>
목욕재계라는 말이 있다. 큰일을 앞두고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깨끗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몸을 깨끗이 닦는다고 항상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몸을 씻는 일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목욕을 못해 몸이 더러운 사람이 무조건 더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겉이 깨끗하면 속도 깨끗할 것이고, 겉이 더러우면 속도 더러울 것이라고 믿는 우리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깨끗한 그릇 속에 담긴 더러운 착취와 사악함을 보셨다. 그래서 정결예식의 참뜻을 내세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이다.
진정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자선과 봉사라고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불행선포가 보도된다.
어제 복음을 통하여 언급하였듯이 마태오복음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함께 묶어 그들에 대한 7번의 불행을 선언한다.(마태 23,13-32)
그들이 불행한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자. ①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다.(13절) ② 갖은 노력으로 한 사람을 개종시켜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15절) ③ 성전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나 황금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16-22절) ④ 십일조 율법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정작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 한다.(23-24절) 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25-26절) ⑥ 겉으로는 옳은 듯 하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27-28절) ⑦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며놓고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29-32절)
루카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셋과 율사들에 대한 불행선언 셋을 보도하고 있다.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를 보자.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
그 다음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를 보자. ① 남에게는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 불행선언과 율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당대에 모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통상 율사들은 바리사이들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이를 양심적이고 전적으로 따르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이라면 마지막 가장 사소하고 작은 것까지도 지키도록 요구하였고, 자신들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과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율법보다 귀중한 인간에 대한 참다운 정의와 사랑이 떠나버렸고, 하느님 스스로도 율법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율법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정작 하느님은 잃어버리고 일만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복음을 선포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배령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예식에 치중한 나머지 복음과 성사의 원초적인 선포자요 집전자이신 예수님을 망각하고, 마치 사람에 의해 모든 일이 성사(成事)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그렇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A엄마가 있다고 하자. 하루는 엄마가 갓난아기를 업고 고객잔치를 한다고 선착순 100명의 엄마들에게 신형 밥통을 공짜로 준다는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이미 백화점 정문 앞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가까스로 A엄마는 100명 안에 들어 고대하던 밥통을 탔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A엄마, 밥통을 품에 안고 버스를 탔다. 그제야 뒤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고 있던 갓난아이가 없어진 것이었다.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나 잘 대변해 주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빈껍데기와 같은 율법에 믿음과 의리, 즉 신의(信義)를 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율법과 사랑을 대립시키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빈껍데기 율법에 다시금 사랑과 정의를, 즉 하느님 스스로를 채워주시려 하신 것이다.
사랑만이 율법의 참 정신이며, 사랑의 실천만이 율법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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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축복의 통로를...}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길 옆에서 한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를 불러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길을 계속 가는데...이번에는 큰 길에서 큰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공자가 그에게 불벼락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본척만척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들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더 잘못을 했는데 왜, 그냥 치시나요?” 그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 인간은 야단쳐도(책망을 해도) 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아하! 책망은 들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책망을 받을 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받아들이며 책망을 들을 때 감사로 여기는 사람을 들어 축복의 사람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단을 맞는다는 것”은 “그 야단맞은 나쁜 마음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율법 교사들도...!” “어찌하여 너희들 속에 탐욕과 사악이 가득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들 속에 사랑이 없느냐?” “어찌하여 너희들 속에 교만이 가득하느냐?”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야단하시면서도 “나쁜 마음을 이겨내라고요.”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압니다. “많이 넘어지고 실망하고 힘들어할 것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넘어지는 것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으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나쁜 마음”을 이겨내는 은총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코린토 2서 4장 13-15절에 보면...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저 스스로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과연 사제인 너에게 들을 귀가 있었다면 주님의 뜻대로 살았을 텐데... 하지만 주님 뜻대로 사는 것보다 반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더 재미있어 한 적이 너무 많았겠지. 그래도 잘 살아왔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이... 너가 나약하고 허약한 지도 모르고, 부끄럽고 죄스러운 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떡하니?”
그래서 공자님께서 오늘 큰 잘못을 저지른 인간을 보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신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저희 지난 날을 보시고 그냥 지나쳐 가시지는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예전에는 예수님께서 제 큰 잘못에 대해 야단치시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시는 것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나쁜 마음은 계속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요, 마침이다.”이라는 진리를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 사제로서 야단맞을 준비, 책망 받을 준비를... 그래서 야단맞고 책망받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 속에 나쁜 마음을 이겨낼 수 있는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사제로 변화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 살다가 여러 모양으로 야단맞을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 여러 모양의 야단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총이 시작되는 축복의 통로를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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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하여라, 불행하여라>
루카 11,42-46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불행하여라>
행복하여라, 보이는 사람 불행하여라, 보이려는 사람
행복하여라, 자신을 밝히는 사람 불행하여라, 자신을 숨기는 사람
행복하여라, 속과 겉 하나인 사람 불행하여라, 속과 겉 갈라진 사람
행복하여라,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 불행하여라, 행동 없이 말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불행하여라, 틀 속에 갇힌 사람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 불행하여라, 사랑받기만 바라는 사람
행복하여라, 기쁘게 하는 사람 불행하여라, 기쁨을 강요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윗자리가 어울리는 사람 불행하여라, 윗자리에 안달난 사람
행복하여라, 먼저 기꺼이 고개 숙이는 사람 불행하여라, 고개 숙이라 다그치는 사람
행복하여라, 살맛 내는 사람 불행하여라, 살맛 앗는 사람
행복하여라, 짐을 메주는 사람 불행하여라, 짐을 지우는 사람
행복하여라, 하느님이 되어주는 사람 불행하여라, 하느님을 설명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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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중학교 때,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느 스포츠 브랜드 회사의 흰 양말을 신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이 흰 양말을 신은 아이들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양말을 신고 있는 아이들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유행을 따라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이 양말을 사기에는 저의 용돈이 너무 부족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어느 집 빨랫줄에 이 양말들이 걸려있다면서 훔치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면서, 그리고 친구들에게 흰 양말을 신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자면서 말이지요. 물론 훔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저에게 그 유혹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한동안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복장은 정말로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웠습니다.
아마 지금 이 복장이 유행이라면서 따라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할 것만 같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 그러나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 큰 유혹이 되었고 죄를 범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요. 이처럼 자신을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할수록 고통이 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때로는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또한 이를 기억해야 일관성 있게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큰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쉽고 편하게 사는 법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이를 보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크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단점도 또 장점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을 받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힘겨운 짐을 지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 이 땅에 직접 오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간직하면서 내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향해 주님께서는 어떤 선언을 하실 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행복 선언일까요? 불행 선언일까요?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삶. 나의 지금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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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신유박해 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가 토굴에 숨어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고, 1855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가 설립된 곳입니다. 또한 신유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황사영 순교자가 순교하고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이 교우촌도 파괴되었습니다.
황상영은 1791년에 진사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천주교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되어 벼슬길도 마다하고 배론으로 숨어들어 왔습니다.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황사영 알렉시오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조선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탄원서(백서)를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 썼습니다.
하지만 이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혀 황사영은 대역무도의 죄인으로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1855년 초 장주기 요셉 성인의 초가집에 한국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성요셉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학문을 교육했으나, 병인박해 때 장주기 요셉과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 신부가 순교하면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은 후, 12년 동안 불같은 열정과 놀라운 판단력으로 사목에 힘쓰다가 1861년 6월 과로로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고 약 5개월간 배티에 가매장되었다가 배론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하여 ‘배론’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으며, 이곳과 어울리도록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건립하였습니다.
미사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1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이고, 전화는 043-651-452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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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수원에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여러 교구의 신부님들과 친교를 맺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매일 기도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가장 큰 즐거움은 연수원의 본질인 ‘배움’입니다. 지난주에는 ‘몸의 신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몸의 신학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정립한 신학입니다. 교황께서 가르치셨고, 성인이 되셨기에 교도권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몸의 신학의 출발점은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몸은 아담의 원죄를 시작으로 교만과 욕망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잃어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표징, 행동으로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지친 삶의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픈 몸은 치유되었고, 악에 물든 영혼은 하느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몸은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 영원한 삶에로 초대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봉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봉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혼인이며 가정입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를 알고, 가정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도록 도와주는 것이 몸의 신학입니다.
몸의 신학은 우리의 몸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기에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체의 장애가 문제될 수 없습니다. 정신의 장애가 문제될 수 없습니다. 피부색이 문제 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직업과 능력이 문제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몸으로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몸의 신학은 그러한 관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는 태아의 낙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피임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낙태와 피임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소중하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거룩한 존재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몸의 신학이 소중하기에 몸의 신학을 지키려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미혼모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지켰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십니다. 그들이 율법을 강요하지만 지키려 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단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의 몸도 상품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윤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간다면 우리들 또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예수님께 야단을 맞을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가치를 이 세상에서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따르는 이들을 단죄하기 전에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은 자본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무의 가지와 몸체를 보기 마련입니다. 예쁘고 화사한 꽃과 맛있는 열매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무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내는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도 견디기 마련입니다. 가뭄도 이겨내기 마련입니다. 스페어타이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식당 종업원이 화재를 진압하고 식사를 하러 온 소방관에게 고맙다는 쪽지를 주었고, 음식 값은 자신이 대신 냈다고 합니다. 그 종업원의 작은 선행이 알려져서 식당에는 많은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종업원은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버님을 위한 장애인 전용 차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종업원의 어려움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전에 선행을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선행을 보시고 평가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절망과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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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인생 가을 열매들> -성령의 열매들, 사랑의 열매들-
어제 인용했던 며칠 전 써놨던 자작시, ‘사랑의 열매’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감, 사과, 배, 대추 등 제 색깔로 익어가는 가을 열매들이 참 아름답고 탐스럽습니다.
-“서서히/익어가며 제 색깔 뚜렷해 지는/가을 열매들 사랑으로/ 익어가는 가을 인생 열매도/저랬으면 좋겠다”-
하느님은 최고의 농부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 90%와 인간의 노력 10%의 합작품, 은총의 열매,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인 가을 열매들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피정 오는 분들의 연령대를 보면 대부분 가을 인생에 속한 분들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여러분의 나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중 어느 철에 속합니까?”
물으면 대부분 웃음으로 답합니다. 가을철 인생에 속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에수님께 속해 은총의 열매,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 주렁주렁 달린 가을 인생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겠는지요. “행복하여라,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해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도 참 적절합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사실 배 수확이 끝난 후의 배밭은 그대로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통쾌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이처럼 바오로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덕virtue’이 아니라, ‘생명력vitality’에 의해 특징지어짐을 깨닫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생명을 나눔에서 오는 생명력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같지만 모두가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가을 과일 열매들처럼 다양한 색깔의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과연 이런 사랑의 열매들로 빛을 발하는 가을 노년 인생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겠는지요.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 육에 따라 살다 보니 육의 행실로 드러난 사람들입니다. 겉은 화려해도 속은 부정적 요소들로 가득한 표리부동의 사람들입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비슷한 것들입니다.."
가을 노년 인생의 열매들이 여전히 익지 않은 이런 풋열매들 같은 육의 행실 열매들 같은 인생이라면 얼마나 공허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이또한 엄연한 인간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의 대상인 일부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 “불행하여라!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 모르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은 자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 자들!”
모두 우리의 부정적 인간현실의 가능성입니다. 비단 일부 바리사이나 율법교사들뿐 아니라 이런 경향에 있는 모든 육의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안팎이 다른 표리부동의 진실이 결여된 과시와 허영의 사람들,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분별의 지혜가 결여된 사람들,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람들 모두를 지칭합니다. 성령이 아닌 육에 따른 삶의 결과입니다. 이런 이들에 대한 바오로의 비판이 매섭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대로 복음의 일부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은 물론 법지상주의자들을 향한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우리들은 모두 자기 육을 그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성령을 따라 삽시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 성 이냐시오의 서신중 감동적인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할 때의 성령은총의 열매입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 따라 살며, 성령의 열매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감사기도’ 전문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런 기도 역시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사랑합니다/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발견하는/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찬미와 감사의 삶으로/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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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에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 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 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 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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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양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여전히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벌어진 일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예수님을 보고 놀란 바리사이에게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을 자선으로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말씀하시며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와 율법교사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것 세 가지만 보고, 율법학자들에 대한 것 한 가지는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만큼 그렇게 율법의 정신에도 철저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며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라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불행한 까닭은 율법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 혹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할 뿐, 그 정신인 의로움과 당신의 사랑을 행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어쩌면, 종교교육의 길잡이들인 그들이 회당에서 상석에 앉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도 특권적 우월의식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들의 특권적 존재성을 확인받는 것으로 여기고, 의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인 까닭입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위선은 우리에게도 큰 경각심을 줍니다. 마치 선 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지만,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은 전부 이 ‘위선’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의로움과 주님의 사랑을 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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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이타마교구 사부까와성당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는 불행하여라!” (루카11,44)
행복과 불행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불행(不幸)이란 글자 그대로 ‘행복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대로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붙어있으니 거리는 ‘제로’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무척 큰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행복과 불행은 늘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은 조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채워지도록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은 무엇인가요? 조건이란 쉽게 말해서 “그렇게 된다면”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렇게 된다면’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요?
행복과 불행은 조건 이전에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한테 불행한 이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왜 예수님께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어야만 했을까요? 그들 역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믿는 길을 채우고자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얻고자 한 것들을 얻었을 것이고, 얻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이 틀렸기에 옳은 삶을 만들 수 없었고, 그럼에도 무엇이 틀렸는지조차 모르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불행하다”라는 말을 예수님께 들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참 행복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행복과 불행 중 당연히 행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복음적 가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선택하고 살 수 있을 때, 그 어떤 조건이나 환경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이미 행복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며, 어떤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해도 희망을 갖고 기쁘게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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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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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불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잘난체하며 이웃을 업신여기고 고고한 척하는 바리새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입니다.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과 육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분명 구분이 됩니다. 처음에는 분간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몇 번 만나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가치있는 삶을 같이 할 수 있기를! 마음, 시간, 건강, 돈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잘 나누고 사용할 때 예수님께서 미소 지으며 '너는 불행을 던져버리고 행복을 사는구나' 하실 것입니다.
육의 끈을 많이 잡을수록 불행해지고 영의 끈을 많이 잡을수록 행복해집니다. 예수님과 길동무되어 같이 걷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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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 43)
행복을 어디에 두어야할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됩니다.
행복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가슴 벅찬 우리의 삶입니다.
삶이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모순이며 위선입니다.
위선과 거짓의 시작은 커져버린 우리의 교만이며 교만과 자만의 시작은 감사를 잃어버린 매정한 우리 마음입니다.
행복은 아는 것이 아닌 행복은 우리 삶으로 살아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우리의 위선과 거짓을 과감히 버리는 것입니다.
가을나무도 가벼워지듯 잎을 떨구듯이
단순한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진실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해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높이는 것이 아닌 겸손되이 낮아지며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행복은 비워내는 단순한 감사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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