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 폭우로 438명 사망 5000명 실종
정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시신이 가장 많이 발견된 지역은 폭우가 최고로 심했던 남 키부주의 부슈슈 마을과 니야무쿠비 마을이다.
패트릭 무야야 정부대변인은 실종자는 너무도 많지만 아직 숫자가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유엔 집계에 따르면 이번 폭우와 산사태로 약 3000세대의 주택이 피해를 입었고 그 가운데 1200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역 당국은 현재 실종자가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22년 북한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로 평양 봉쇄
북한은 코로나 환자가 없고 코로나의 전파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실상은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평양에서 직장인들의 조기퇴근을 실시하고 가정에만 머물라는 사실상 통제에 들어 갔다 또한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13일에는 전국 도시 봉쇄령을 내렸다 또한 간부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이 마스크를 쓴 모습이 포착 되기도 했다
2011년 CNN 초대회장 버트 라인하트 별세
라인하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 사진기자로 태평양 전선을 취재하며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UPI방송 부회장까지 지내다가 1979년 미국 언론재벌 테드 터너를 도와 뉴스채널 CNN 설립에 참여했다.
1983년 CNN 개국과 함께 초대 회장에 임명된 그는 "24시간 뉴스 방송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을 깨고 CNN을 미국의 주요 언론사 중 하나로 이끌었다. 터너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라인하트는 우수한 언론사를 만들고자 했고,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말했다.
2011년 '마지막 조선총독부 박물관장' 아리미쓰 별세
마지막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이었으며 광복 후에도 호우총·은령총 발굴에 참여했던 일본 원로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03) 전 교토대 교수가 11일 오후 별세했다.
1907년 태어난 아리미쓰씨는 193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936년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고적조사연구회 조수로 일하며 평양과 경주 지역 고적 조사에 주력했다.
1941~1945년에는 총독부 박물관 주임이라는 직함으로 박물관 관장 역할을 했다. 해방 후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1946년 6월까지 경주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을 도왔다. 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인수해서 국립박물관을 출범시킨 초대 관장 김재원(1909 ~1990) 박사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1957년 교토대 교수가 됐고, 1980~1984년에는 나라(奈良)현립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89년부터는 교토시에 있는 조선 미술 전문 고려미술관 연구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마제석검의 연구’, ‘조선고고학 75년’ 등이 있다.
2009년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대표 사퇴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문제로 인한 여론의 사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2009년 5월 11일 결국 물러났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6~7월경 새 대표를 뽑아 총선체제로 들어가게 된다.
오자와 대표는 올 초까지만 해도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했다. 작년 9월 취임 후 실책을 연발한 아소 다로 총리를 개인 지지율에서 압도했다. 민주당도 정당지지율에서 자민당과의 거리를 계속 벌렸다. 그래서 민주당은 1955년 자민당 집권체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정당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상황은 지난 3월 도쿄지검 특수부의 정치자금 수사 한방으로 바뀌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3월 24일 오자와 대표의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비서를 불법정치자금 모금 혐의로 기소했다. 1976년 록히드 스캔들, 1992년 사가와규빈 스캔들 등 대형 정치자금 사건 수사로 자민당 거물들을 퇴장시켜온 도쿄지검 특수부가 오자와의 비서를 기소했다는 것은 거의 '퇴장선고'나 다름없었다.
2007년 법원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서울중앙지법 이광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1일 검찰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국내 재벌총수가 폭행사건에 연루돼 경찰에 구속수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부장판사는 “피의자들이 영장 청구서에 적힌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법원은 당시 현장에 동행한 한화그룹 진모 경호과장에 대한 영장도 함께 발부했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는 지난 10일 김 회장과 진씨가 김 회장 차남(22)이 서울 북창동 S클럽 종업원 윤모씨 일행과 시비가 붙어 상처를 입자, 경호원과 사택 경비업체 직원 등 인력을 동원해 청계산으로 끌고 가 윤씨 등을 폭행한 혐의 등으로 사전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2004년 프랑스 첫 영어 상업 라디오 방송 등장
자국어를 고수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 영어로 방송하는 상업 라디오방송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파리 라이브는 뉴스와 음악방송으로 구성되는데, 뉴스는 주로 프랑스 통신사 AFP로부터 제공받는다.
파리에 영어 라디오방송을 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는 호주의 변호사 출신인 렌지 던칸 사장이 1994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떠올렸다. 던칸 사장은 2001년 말부터 본격적인 라디오방송 설립 준비에 들어가 30여명의 인력을 채용했다. 스튜디오는 파리 물랭루즈 카바레 옆에 마련했다. 던칸 사장은 “국제 뉴스뿐 아니라 프랑스와 파리의 일상 뉴스를 집중 내보낼 계획” 이라고 밝혔다. 다만 프랑스 라디오방송은 불어로 된 음악을 40% 이상 틀어야 한다는 법 규정 때문에, 이 영어방송에서도 프랑스 음악을 상당 시간 틀어준다.
2001년 동아건설 파산 선고
서울지법 파산4부는 2001년 5월 11일 동아건설의 파산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동아건설에 대한 1조원 이상의 금융단 협조융자와 2년 이상의 기업개선작업에도 불구하고, 채무가 자산을 1조5000억원 이상 초과해 청산하는 것이 계속 운영하는 것보다 낫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파산결정의 지연에 따른 공사 착수·재개 결정이 늦어질수록 회사 수익성이 악화돼 수익성 있는 공사마저 포기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어 조기에 파산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파산결정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와 용인 구성 솔레시티 등 수익성이 높은 공사들의 경우는 계속 진행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아파트의 1만여 가구가 입주에 차질을 빚었고, 직원 2800명이 해고돼 파장이 컸다. 동아건설은 채권단이 2000년 10월 3일 자금지원과 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된 상태였다. 동아건설 주식도 6월 7일 마침내 주식시장에서 퇴출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0년 인도인구 10억 돌파
인도 인구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이어 10억을 넘어섰다. 인도에서는 평균적으로 매분 29명, 하루로 치면 4만2천명씩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출생기록도 명확치 않아 사실 인도의 정확한 인구는 아무도 모른다. 이때문에 유엔개발계획(UNDP) 같은 기구는 1999년 8월 15일로 10억명으로 넘어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정부와 유엔인구기금(UNFPA)은 2000년 5월 11일을 ‘D데이’로 설정했다. 이날 낮 12시 20분 뉴델리 사프다랑 병원에서 출생, 10억번째 인구로 공식 지명된 여자아기는 힌두어로 믿음을 뜻하는 ‘아스다’란 이름이 지어졌다.
1901년 지금의 파키스탄-방글라데시 지역까지 포함해 2억3800만이던 인도 인구는 100년 만에 5배로 늘어나면서 세계 인구 60억중 6분의1을 차지하게 됐다. 1년에 1500여만명씩 새로 태어나고 있는 인도는 현 추세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50년내에 인구 15억명에 달해 중국을 앞지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99년 만민중앙교회 신도 200여명, MBC 본사건물에 난입해 방송중단사태
1999년 5월11일 밤 만민중앙교회 신자들의 MBC 강제 점거로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번 사태는 ‘PD 수첩’이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의 이단 시비와 비리의혹을 다룬데서 비롯됐다.
제작진은 지난달 중순 교회 신도였던 A씨 제보를 받고, 이목사 신격화, 신도를 보증인으로 세운 융자금 편취 의혹 등을 취재했다.
교회측은 5월4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프로그램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11일 ‘성추문 관련 내용은 방송하면 안된다’고 판정했다.
‘PD 수첩’은 이에 따라 성추문 부분을 삭제한 채 프로그램을 방송하려다 물리적 힘에 의해 방송중단 사태를 맞았다.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버스를 타고 문화방송(MBC)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1일 밤 10시 45분쯤. 신도들은 5분여 만에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11시 5분쯤 신도 300여명은 방송사 1층 로비를 점거하고 항의를 시작했고, 50여명은 곧 2층 주조정실 앞 중앙기기실에 난입했다.
주조정실은 방송 송출의 핵심 관문. 50여평에 불과한 이곳이 장악되면 방송은 곧 중단되었다.
이 주조정실로 통하는 메인 출입구는 바코드가 입력된 카드키로열고 들어가거나, 초인종을 눌러 청원경찰에 신분을 확인시킨 후 출입할 수 있다.
당시 신도들은 메인출입구를 통한 진입이 어렵자 옆 중앙기기실 폐문을 부수고 진입했다고 MBC는 밝혔다.
중앙기기실에 들어간 신도들은 방송전파를 남산송신소로 송출하는 주전원스위치를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 방송이 수차례 중단되게 만들었다.
방송전파가 남산 송신소로 날아오지 않자 송신소에 근무하는 MBC 직원은 방송사고임을 직감, 비상시에 대비해 보관하고 있던 자연다큐멘터리 테이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규방송과 자연다큐가 번갈아 방송되는 파행이 계속됐다.
지방 MBC의 경우, 자체 주조정실에서 다른 다큐 테이프를 방송했다.
방송사 경비실 직원들은 신도들이 몰려오자 영등포경찰서에 신고했으나, 30분 가량 지난 밤 11시 19분쯤 기동타격대 20여명이 처음 출동했다. 이때는 신도 50여명이 중앙기기실에 난입했고, 1000여명이 1층 로비에 몰려든 뒤였다. 이어 11시 29분쯤 전경 1개 중대 120여명, 밤 12시쯤 5개 중대 600여명이 MBC에 도착했다. 밤 12시 40분이 돼서야 27개 중대 3000여명의 병력이 MBC에 도착, 신도 수 보다 경찰 병력이 많아졌고, 경찰은 신도 해산과 주동자 검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1998년 조지프 에스트라다, 13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
1998년 5월 11일에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선거에서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코믹 액션배우로서 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절인 1972년에 메트로 마닐라의 산 후안 시장으로 당선되면서였다.
에스트라다는 재임기간 동안 범죄가 들끓던 도시를 활기찬 공동체로 만드는 데 수완을 발휘했으며 1987년 상원에 진출한 뒤 관개법과 물소 보호법 등 빈곤층 관련 입법으로 중하류층의 인기를 모았고, 1992년에 라모스 대통령보다 높은 득표율로 부통령에 올랐다.
콧수염을 기른 조지프 에스트라다는 영화배우에서 시장, 상의원, 부통령을 거쳐 최고 권자에 오른 대중 정치인이다. 야당 후보인 그가 대선에서 역사상 두번째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룬 것도 도시 빈민과 농민을 사로잡은 `로빈 후드`의 이미지 덕분이었다.
1996년 전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 행정관 최승진씨 외무부 문서 변조로 구속
1996년 마이애미 공항 부근서 DC-9 여객기 추락 - 109명 몰사
미벨류젯 항공사 소속 DC-9 592편 여객기가 1996년 5월 11일 오후2시25분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약 30km 떨어진 늪지대 에버글레이즈에 추락, 승객 1백4명과 승무원 5명 등 109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이날 오후 1시43분 마이애미 국제공항을 이륙해 애틀랜타로 가던 사고 여객기가 마이애미 서쪽 1백60km 상공에서 조종실에서 연기가 나는 등 이상을 발견한 뒤 회항하던 중 늪지대에 추락했다고 말했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 주민들이 소형 공기부양선을 제공해 수색작업을 도왔지만 기체 일부와 어린이들의 옷가지만 발견했을 뿐 모든 것을 삼켜버린 진흙더미로 인해 1구의 시신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번 항공기 추락사고는 `정비불량-기체노후화`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사고기가 1969년에 제작된 노후기로 지난 2년 동안 7번이나 회항한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1995년 인도, 24년 만에 지하 핵실험 실시
1982년 영국 함대 대 아르헨티나전서 포클랜드 해협 진입
1981년 뮤지컬 `캣츠` 런던서 첫 개막
뮤지컬의 시대를 연 `캣츠`가 1981년 5월 11일 런던 뉴런던시어터에서 개막했다. 1982년 대서양을 건너 뉴욕 윈터가든 극장에서 막올린 `캣츠`는 1997년 6월 브로드웨이의 롱런 기록(코러스 라인· 6137회)도 갈아치웠다. 폐허같은 창고를 재현한 스펙터클한 무대, 실제 고양이를 빼닮은 듯한 생생한 안무, 타이틀곡 `메모리`로 빛나는 웨버의 뛰어난 음악…. `캣츠`는 런던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필수코스가 됐다.
1978년 한국-과테말라, 문화협정 체결
1977년 중국 서안사건 주동자 장학량 연금 40년 만에 해제
장학량은 청 말기 동북 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의 동북변방군사령관과 서북비적토벌사령관 등을 지낸 비공산계 인물이다. 1930년대 중반 공산당과의 내전보다는 항일투쟁을 원하는 동북군의 열망을 업고 1936년 12월 서안을 찾은 장개석을 연금, 이듬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부터 궤멸돼가던 중국 공산당은 재기의 기회를 얻어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본인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서안사건후 귀주에 연금됐던 그는 1949년 이후 대만에서 평생을 연금과 감시속에서 살았다. 1977년 5월11일 이날 그는 연금이 해제됐고 이어 하와이로 망명해 남은 생을 조용히 보냈다
1973년 동-서독 기본조약, 서독하원 비준
1972년 ‘청산리전투’의 영웅, 철기 이범석 장군 서거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보낸 초대 국무총리 철기 이범석 장군이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 초대총리,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건군(建軍)의 기틀을 잡았고 오늘의 국방조직의 사실상 산파역할을 했다. 청산리 혈전의 영웅으로, 광복군 참모장으로 널리 알려진 그이지만, 사실 그는 시(詩)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장군은 15살 되던 해 한강 백사장에서 여운형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조국 광복’ 에 눈을 뜨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1916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 군사교육을 받은 뒤 기병장교가 되었고, 이어 북간도 항일독립군단인 북로군정서로 옮겨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과 함께 1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 일대에서 10여 차례 교전 끝에 일본군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그는 광복직후 이승만을 만난 뒤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단해 건국과 창군사업의 일꾼배양에 힘썼다. 그의 족청은 젊은 청년들의 호응이 커 창단 당시 공식 단원수만 2백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 귀국해 결성한 대동청년단과 함께 당시 청년운동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지도력을 경계한 이승만 대통령은 족청 해산령을 내렸으나 족청 인맥은 오랫동안 정계와 군 지도층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7년부터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증언(證言)’ 을 남기는 것이라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김좌진 장군을 늘 말했고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고 했던 그였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9년 ‘5월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했다.
1965년 한국-콩고 단교
1964년 정일권 내각 명단 발표
1960년 거창사건 유족 당시의 면장을 생화장
거창 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으로 불리며 6.25. 전쟁중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국군이 작전을 펼치나 빨치산 유격전술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오익균(吳益均) 연대장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이틀 간에 걸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다. 그리고,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산(朴山) 총살했다.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3월 29일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3부 장관이 사임하고 김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은 국회의 결의로 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재판 결과 오익균 대령, 한동석 소령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 (生火葬)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9년 샴국, 타일랜드로 국호변경
1939년 일본군,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충돌
1938년 작가 조명희 사망
1937년 일제 한국인 노동자 10만여명 만주에 강제이주 결정
1927년 한국 신소설 대표작가 이해조 사망
1926년 아문젠 비행선으로 북극횡단 성공
1924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휴이시 출생 - 펄서(pulsar)를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0년 조선총독부 우측통행 실시 발표
1918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출생
1908년 모더니즘 시이론을 세운 시인 편석촌 김기림 출생
1904년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 출생
1884년 프랑스-청나라 천진조약 성립 (안남을 프랑스 보호령화)
1871년 미국의 천문학자 슐레징거 출생 - 사진술을 처음 사용하여 항성위치도의 제작과 별의 시차를 측정
1868년 프랑스 신문발행의 자유등을 인정한 신문법 시행
1866년 영국, 금융 공황 발생
1862년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 출생
1833년 영국선 레이크호 빙산과 충돌 215명 사망
1686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사망
1610년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 사망
1398년 명 태조 주원장(홍무제) 사망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홍무제)이 1398년 5월 11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0세였다. 1368년 국호를 `대명`, 연호를 `홍무`라 짓고 황제에 오른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1328년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주원장은 어려서 기근과 한발, 돌림병으로 부모와 큰형을 잃고 형제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1352년 원나라에 대항하는 봉기군에 가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1356년에는 남경을 점령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1367년 강남의 마지막 경쟁자 장사성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주원장은 마침내 1368년 몽골(원나라) 제국의 수도 북경을 함락해 황제에 올랐다. 남경과 같은 강남의 도시를 거점으로 전국도시를 이룬 제국은 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군웅이 할거하는 가운데 지혜와 용기로 원나라를 폐하고 명나라의 창시자가 된 주원장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들을 축출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해 강력한 전제체제를 만들어 냈다. 1380년 `호유용(胡惟庸)의 옥(獄)`과 1393년 `남옥(藍玉)의 옥`을 통해 수만명을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일족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비잔티움 제국 건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5월 11일 비잔티움 제국을 건설했다.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로마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변경한 소도시 비잔티움을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은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에 자리잡은 삼각형의 반도에 위치해,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이어주고, 유럽과 아시아를 갈라놓는 경계에 자리한 요충지로, 수도로서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인 모에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 궁정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복무했고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환호리에 부황제로 즉위했다. 그후 6년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황제의 부황제로서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를 장악해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323년에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동-서 로마를 통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해체를 막고, 영토와 문화면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이 제국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속적인 토대와 영적 토대를 모두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로마의 위대한 정치적 유산과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유산,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융합시켰다. 그것은 향후 1123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여든 여덟 명이나 되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