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시와소금 여름호 지리산 문학인 강희근 특집
왕산, 지리산이 달려가다 멈춘 그 서정의 모향
-강희근 시인을 찾아서
박해림(시인 ․ 본지 편집실장)
5월의 신록은 어찌할 수 없는 가슴앓이다. 저 깊고 먼 시간을 건너온 이야기들이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어 천 길 낭떠러지를 단숨에 거슬러 오르는 것을 어쩌랴. 지리산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함께 한 푸르름은 한 가슴앓이를 보내면 두 가슴앓이로 다가왔다. 부풀었다 잦아지고 잦아졌다 싶으면 다시 부풀어 오르는 사방 초록덩이로 눈부셨다.
경부고속도로의 차량 소통이 원활해 남으로의 행보는 생각보다 빨랐다. 서대전 IC를 빠져나가자 승용차들만 간간이 오고갔을 뿐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차창너머 나지막한 산들을 무연히 받아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수도 없이 반복할 즈음 멀리 함양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곧 그 큰 어깨를 흔들며 지리산이 달려왔다. 지리산을 업고 진주에 진입할 때는 햇살이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졌다.
‘강희근 문학연구소’간판을 머리에 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강희근 시인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반갑게 맞아주신다. 시인의 안내를 받아 이층 연구소에 들어섰다. 사방이 온통 책이었다. 그 안에 놓인 소파 역시 어디로 빠져나갈 수 없이 촘촘한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 자리를 잡고 멀리서 달려온 일행에게 강희근 시인의 위로가 이어진다. 하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시인의 호의에 더한 감사를 드렸다. 연구소는 책만 빼곡한 것이 아니었다. 칠순의 작은 거목이 채운 문학공간은 지난 시간들의 흔적으로 도도했다.
시인은 경남 산청 출신이다. 1965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경상대국문학과 교수로 봉직하다가 2008년 정년퇴직을, 지금은 명예교수로 지내며 그간 소홀했던 시창작과 시창작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학자로서 바쁜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작에의 의욕을 보이는 시인의 모습은 5월의 햇살처럼 밝고 투명했다. 철부지소년처럼 웃음 지으며 파란 많은 지난 시간을 양파껍질처럼 한 꺼풀 두 꺼풀씩 벗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의 맑은 심성을 엿볼 수 있었다. 여직 소년 특유의 호기심과 장난기 어린 그때의 모습을 간직한 ‘일흔 소년’이었다.
시인과는 인터뷰의 형식을 취했지만 딱딱한 구술에 의존하기보다 시종일관 대화로 이어져 물 흐르듯 잔잔하다. 지리산을 가보셨느냐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지리산의 가장 으뜸봉인‘천왕봉’을 거론하며 시인은 정색을 한다. 직접 걸어서 오르지 못했노라고. 그래서 늘 마음 한쪽이 무겁다는 것이다. 30대 들어 신장하수현상으로 몹시 힘들어했던 이후 지리산 등정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계속 공부에 전념한 것과 대학교수로 부임하면서 철저히 감성적 사고체계에서 논리적 사고체계로의 전환을 해야 했던 일은 시인에겐 꽤 부담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철저한 준비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시인에게 끝내 병을 불러온 것이다. 혈뇨현상, 신장 파열의 진단을 받은 후, 등산은커녕 걷는 것조차 조심하라는 의사의 엄명을 받으며 지리산 등정은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 당뇨까지 겹치면서 평지만 조심스레 걸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을 코앞에 두고 한 번도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시인에겐 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을 짓눌렀던 모양이다. 어느 날 우연히 산불진화용 헬리콥터를 탈 기회가 있어 딱 한 번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겸연쩍어 했다. 그때 본 지리산은 시인에게 어떤 감흥으로 왔을까.
‘산의 꼭대기는 전체 산의 일부일 뿐, 왜 꼭대기를 선호하는가.’
갑자기 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일반적으로 산꼭대기에 대한 사람들의 철없는 열망에 일침을 놓는다. 정작 그 속에 놓인 길과 진정한 속내를 알기보다 겉모습에 집착하는 아둔함을 힐난하는 것일 게다. 김지하는 ‘지리산을 그대로 두라’외치고, 지리산 지키기 운동을 하는 지리산국민연대도 있다는데 주변 경계의 의미를 알고 시를 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도 일리 있다. 이 땅의 많은 산이 그렇겠지만 지리산만큼 많은 것을 품은 산도 그리 많지 않다. 역사의 공간, 피해의 공간, 아픔의 공간, 생사의 고락이 수없이 교차한 공간으로서의 이념적 공간의 의미가 더 큰 지리산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제 가진 것을 선뜻 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삶의 터전을 고향 산청에서 지금의 진주로 옮기면서 시인은 지리산을 또 다른 각도로 만나게 된다. 진주 중학교에 진학한 후, 120리 길 산청에 갈 때마다 만난 지리산은 ‘시퍼런 공간’으로 각인된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을 거쳐 6 ․ 25 전쟁발발은 어린 시인의 기억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다시 바라본 지리산은 온통 시퍼렇기 짝이 없다. 지리산을 바라볼 때마다 근원적 아픔이 시인의 삶을 관통한 것이리라. 도시의 공간지향이, 산간지향이 끊임없이 상충하던 시인의 성장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서 시인은 스승 서정주를 만나면서 또 한 번의 지리산을 만나게 된다.
“너는 지리산에서 잣을 따먹다가 날아온 새다.”
스승 서정주의 이 말은 강희근 시인을 되돌려놓을 수 없는 역사적 공간의 도정에 올려놓았다. 대학에서 토, 일요일에 작품을 써서 서정주의 집으로 찾아가면 온통 산청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산청 그 자체가 단군신화와 유사한 공간, 마늘과 곰의 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향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지리산이 역사의 공간, 전쟁의 공간으로 더 인식되고 있지만 서정주는 다르게 보았다. 근원적 공간과 민족의 원형적 이미지로 보고 있었다. 이제 시인은 그때 스승이 인식한 모향의 공간으로 산청을 다시 되새기고 있다. 모향, 모성으로서 공간은 곧 옛 선비의 문화를 간직하고 계승한 저장된 공간을 새롭게 열어 그것을 계승 발전시킬 책무를 느끼고 있음이리라.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남강 부근의 진주비빔밥 집으로 옮겨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인의 문학연구소에서 두어 시간 머문 후 기왕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어 시인의 생가로 옮겨갈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진주에서 산청 가는 3번국도, 그 길에서도 시인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던가,
소고삐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열매 신물이
이 길가 산풀에 취한 내 어린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해 기운 오후에 이미 하늘 구름에
가 영 안 오는
맘의 한 술잔에 가득 가득히 넘친 때 있었나니
내려다 보아, 매가 도는 허공의 길 멀리에
때 알아, 배먹은 새댁의 앞치마 두르듯
연기가 산빛 응달 가장자리에 초가를 덮을 때
또 내려가곤 했던 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산에 가서」전문
시 「산에 가서」를 줄줄 외고 있는 시인은 어느 새 고향 산청의 집 앞 당그레 산에 가 있었다.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산청, 함양 사건 추모 공원’ 팻말이 당그레 산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곳이 비극적인 그 때의 현장이었다니 가슴이 떨려왔다. 당그레 산을 올려다보는 시인의 모습은 6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을 불러내고 있었다. 집 뒷산이며 마당에서는 앞산이기도 한 해발 100여미터 정도 높이의 당그레 산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선명한 곳이다.
어린 외동아들이 산에 가서 꼴을 베는 것이 싫었던 아버지. 어린 아들은 소고삐를 쥐고 산으로 오를 때 길가에 씹어낸 망개 열매가 그 얼마였던가. 내 커서 뭐가 될까 수도 없이 되뇌던 어린 아들의 부푼 소망은 대학 2학년 때 비로소 가슴에 발아하고 있음을 알았다. 6 ․ 25 때 빨치산 소탕작전에 걸림돌이 되었던 산의 나무들을 다 베어내어 군용차에 실어 날랐던 선연한 그 때의 기억들 속에서 아직도 쑥쑥 자라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시 「산에 가서」를 30분 정도 단숨에 써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체험이 20여년 가슴에 고여 있음을 그때 알았다. 어느 날 산의 나무가 내 키를 훌쩍 넘어 슬픔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산길은 여전해 칠순의 시인은 지금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여름 저녁때는 산에서 두 번 연기가 올라오는데 오후 5시 무렵과 6시 무렵이다. 5시에 보리쌀을 푹 삶아내면 6시에 쌀과 삶은 보리를 한데 섞어 비로소 저녁을 짓는 것이다. 당그레 산에서 내려다 본 마을은 ‘배먹은 새댁의 앞치마’를 발견한다. 임신한 새댁의 배를 ‘배 먹은’산청 사투리로 엮어낸 것은 놀랍다. ‘내가 이 지역을 노래하고 시를 쓰는 것에 자기 확신이 서야 가능한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통해 출생과 성장,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서 생성된 시인의 감성은 당그레 산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았다.
사실 시인의 집 뒷산인 당그레 산은 그 뒤에 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뒤를 지리산이 떠받치고 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으로부터 힘차게 뻗어내려오던 기운이 모인 곳으로 그 끝이 미처 멈추지 못하고 한 번 더 달려가다 멈춘 곳이 왕산이라 한다. 지리산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의 모든 기운이 한데 모인 곳 왕산. 그 앞이 당그레 산이며 당그레 산 아래 시인의 생가가 있다. 진주 강씨 5대조 선조들의 선산과 삶의 터전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왕산 아래 마을이라는 것을 보면 작은 체구의 시인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 만 했다.
아직 지리산 능선이 운다
가을 단풍 때 도도라진 것이거나
눈이 얹히다가 바지춤처럼 흘러내리는
방실 골짜기의 코 높은 것이 더 살을
굵고 운다
산청이나
거창사건 때 찌그러졌던 능선이
제 코 높이로 솟글러 오르면서
부엉이, 살쾡이 울음에다 소리를
맡기는 듯하더니
외공마을 사람 뼈다귀들
차떼기로 드러나면서
살이 물로 풀리어 흙으로 들어간 캄캄한
반백 년
그 세월을 볏가리 훑듯 훑어내린다
운다
억울하여 산발한 귀신이 되어
사람 세포 숫자 소름으로 붙어
능선이 운다
때로 육군 11사단 9연대
대원들 지고 다니던 항구 뚜껑 달그락
달그락 이빨 부딪는 소리로 운다
(중략)
울거라
노고단 삼성재의 신작로 굽이굽이
동자스님 머리 같은 바위 만지작
거리며 내리는 계곡 물살 이랑이랑
접으며
접으며
아직 더 울어야 할 능선은 울거라
(중략)
이제는 차라리
독경으로 울 차례
늙은 능선이 먼저 목탁 하나 들고
(하략)
-「지리산 능선이」부분
중학교 시절 3번 국도는 학교와 집으로 오가던 길은 지리산을 옆으로 끼고 가는 큰 길이었다. 시인이 가는 길마다 지리산은 함께 따라왔으며 멀리 서 있기도 하였다. 그러다 달아나기도 했을 것이었다. 그 길은 진주 강씨 5대조가 모여 살던 터전과 묘가 모여 있는 용산리의 길이었다. 그 앞을 오갈 때면 지리산 천왕봉은 늘 구름에 가려있었으며 봄이면 길가에 찔레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지금은 평생교육원과 경남 공무원 교육 강의를 가면서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문득 문득 지리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안개 속에서 속삭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태의 「남부군」(지리산 빨치산 수기. 6.25 전란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 한 체험적 수기)이 그것을 증언하기도 한다.
시인의 눈은 이미 눈앞의 지리산에서 역사의 뒤 쪽으로 넘어가 있다. 일상에 매몰돼 이제는 잊었는가했는데 고개를 들면 결코 잊히지 않은 비극적 일련의 일들. 어린 시절을 관통한 동족상잔의 역사적 현장을 고스란히 겪은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전율은 이 시를 통해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직 지리산 능선이 운다/가을 단풍 때 도드라진 것이거나/눈이 얹히다가 바지춤처럼 흘러내리는/방실 골짜기의 코 높은 것이 더 살을/긁고’울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모친 택호가 방실댁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방실에서 산청으로 시집을 와 이곳 구성원이 된 것이다. 지리산 부근의 사람은 결코 피해갈 수 없었던 ‘울기’는 가족들의 비극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방곡리에는
사건*때 죽은 수백명 억울한 주검들이
살아난 유족들 눈물에 얹혀 있었다
머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오장이 없거나
다 따로 떨어져 박살이 났거나
다 타버린 주검들
아직 고단한 떠돌이로 유족들 눈물 다음,
머리 속 비탈에 얹혀 있었다
다음엔 가재도구 아무것도 없는 주검들
유족들 입에, 입거품에 풀 죽은 채로 섞여 있었다
방곡리에는
땅 치고 하늘 치고 심장,
머루열매로 닦아내던 주검들
이제 겨우
유족들 발등에 얹혀, 밖으로 나가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이 태산이다
아, 법 몇 줄의 위로가 들어왔지만
군인들이 들어오던 길로 글귀들 동네로 들어왔지만
주검들은 글귀를 믿지 않는다
그날 '작명5호'作命五號도 글귀였으니까
-「방곡리에는」전문
둘째 행의 ‘사건’뒤 ‘※’는 1951년 2월 7일 일어났던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이다.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토벌 명목으로 작명5호라는 작전 명령에 따라 어린이 노인 부녀자를 포함한 705명의 인명을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리, 함양군 휴천면 점촌, 유림면 서주리 등에서 살상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거창사건보다 이틀 전에 일어났고, 거창에서도 같은 부대가 719명을 살상했다고 확인하고 있다. 시의 하단에 설명한 이 글을 통해서 앞의 시 「지리산 능선이」와 동일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국군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 산청 함양 일대의 비극적 사건은 지금도 그 후손들에게는 앙금으로 남아 있다. 시인의 눈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이 비극의 사건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아, 법 몇 줄의 위로가 들어왔지만/군인들이 들어오던 길로 글귀들 동네로 들어왔지만/주검들은 글귀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방곡리’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그 원통한 상처를 달래줄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단지‘글귀’만으로 위로가 되어줄 뿐 그 이상이 아님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글귀’마저 믿지 않는 원혼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시인은 결코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고 시구로 조용히 외치고 있을 뿐이다.
자치기 제기차기 집어던지고
우리들 놀이
탄피치기로 시종했네
해 지는 줄 모르고
금 밖으로 탄피를 쳐내고 쳐내었네
나무하다 유탄에 죽은 시체
지게에 지고 지나가도
토벌하러 나간 주둔소 순경
가마니 때기에 덮여 바지게에 종 종 종
실려와도
금 밖 탄피 쓸어 모으고 모았네
까치만 울던 울 안 감나무에
까마귀 날아와 조르르 똥을 싸며 울음
내질러도
장하게 쳐낸 탄피 그냥 쓸어 모으고
모았네
-「탄피놀이」전문
방실댁으로 불리던 모친 뒤에 꼭꼭 숨어 멀리 달아난 뒤 집안 마당엔 포탄이 떨어져 바위가 조각조각 났다. 빨치산 소탕에 혈안이 된 국군과 보급 투쟁하러 온 인민군이 밤낮으로 패권을 바꿔치기 할 때 집으로 돌아온 어린 시인은 탄피를 가지고 놀게 된다. 지리산을 닮은 앞마당의 바위가 파손되어 지금은 형태는 이지러져 웃자란 풀에 뒤덮여 그 모습을 잃고 있지만 그때의 상처는 남아 있다. 생가 마당에서 인민군이 밥을 해 먹을 때 상급 인민군의 구타로 하급 인민군이 기합을 받으며 죽기 직전까지의 단말마를 너무 들었던 공포의 그 모습은 지금도 끔찍하다. 부엌에서 불을 때던 어머니가 거의 초죽음이 된 인민군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는‘저런 놈, 전쟁이 끝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어린 시인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던 것이다.
금서 국민학교 운동장에
노영호 부대 앉았다
도토리 알만한 소년들이 총 멘 채로
앉아서 도토리알 구르는 소리
군가를 불렀다
울타리 밖에서 누군가
노영호 부대 도토리 부대라 하였다
-「도토리 부대」전문
파르티잔은 귀순하라
정찰비행기가 삐라를 뿌렸다
한 가마니 분량
비행기 옆구리에서 빠져 나오면
넘실 넘실 출렁거리다가
산과 들에
지붕과 나무를 거쳐 한 장 한 장
아래로 내려 앉았다
아이들 우루루 신나게 주우려 내닫고
어른들 뚫어져라 귀순하라 귀순하라
글귀를 들여다 보며 고개 갸우뚱거리다가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다음 날 이 삐라
아이들 손을 거쳐 하자 없는 딱지로
모조리 바뀌었다
-「삐라」전문
죽음의 현장은 금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벌어졌다. 시인은 이곳 초등학교 26회 졸업생이라고 일러주신다. 생가를 둘러본 후 근처 초등학교를 둘러보며 비극의 현장임을 일깨워주신다. 예전의 화려했던 벚나무가 베어져 없어진 것을 시인은 아쉬워했지만 눈부신 5월의 햇살이 가득한 지금은 무연한 이 공간에서 비극적 심판이 벌어진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 하신다.
관심법을 동원해 마을 주민들 사이에 숨어든 빨갱이를 잡기 위해 안달이 난 국군이 밤 깊도록 마을 아낙을 다그치던 소리. “ 니 남편 어디갔노?”“일본에 갔어예.”, “산에 갔제?”, “어데예.”손 끝에서 파리 목숨들이 왔다갔다할 때 필사적으로 한 아낙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안면 있는 국군에게 달려가“니 통영에 있던 갸 아이가?”하면서 구사일생 살아난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이 죽어갈 때 빨치산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국군도 지쳐 “여기 오줌 누고 싶은 사람?”하며 의도적으로 마을주민의 탈출을 도운 사례도 있다는 것은 시인의 가슴에 따뜻한 인간애로 남아 있다.
이 와중에 참으로 운 좋게 살아남은 시인은 어느 때부터인가 온갖 상처로 얼룩진 사람. 이쪽저쪽 어느 쪽에도 발을 딛지 못하고 죽어간 한 맺힌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싶은 거다. 따뜻한 기억을 되살려 그 비극적 공간과 화해하고 싶은 거다. 지리산 아래 벌어진 피비린내를 이제는 날려버리고 싶다.
지리산을 건너다보며
비로소 한 세대의 전사가 되어
그 뒷등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집으로
삼을 수 있겠다
두고 온 처자나 아들이나 딸,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 어진이들
잊겠다는 약속 한 줄 건넬 수 있겠다
(중략)
아, 이쯤에서 지리산을 건너다 보며
비로소 한 세대의 혁명을 일기에 적는, 이룸이요
증언인 삶을
흐르는 물과 능선의 칡넝쿨 그 아래 곰이나 살쾡이들
더불어 메아리로
첫새벽 같은 가슴으로, 봄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
-「금대암에서」전문
‘거창사건’이라 불리는 막대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아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국군이 공비토벌을 이유로 작전을 수행하는 가운데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1996년 김영삼 정권 때 사망자와 유족을 결정하고 명예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아직도 물질적 보상은 받지 못하고 있다.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희생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국가의 막대한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02년 국무회의에서 거부되었다. 지금은 추모공원만 조성되어 있다. 함양, 산청에서 705명, 거창에서 719명이 희생된 이들의 뼛가루만 8가마니가 나왔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전사로 사상가로 살다가 죽어간 이들을 위하여, 그 눈물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통해 화해의 장(章)을 마련하고 싶다. 강희근 시인은 지금까지의 삶을 다 놓아버리고 이제는 지리산을 다시 볼 때임을 역설한다. 영롱한 현실개혁을 지리산을 통해 새롭게 이루고 싶은 열망에 놓여 있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의 지리산은 무거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지난한 역사의 현장은 그대로 두고서 새로운 기운으로 새롭게 일어서야만 지리산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빨치산의 존재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지만 내 삶에서 함께 가는 존재, 즉 필요악의 존재로 그대로 두고 지리산은 이 시대에 걸 맞는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시대에 정의롭지 못한 것을 걷어치우는 서릿발 같은 위엄을 드러내며 삶의 쇄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민중적 사고를 한 인자 속에는 뭔가 바르게 펴려고 하는 정신을 있음을 노래한 많은 지리산 시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포부가 큰 사람,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지리산에 들 수 없음을 말하는 시인은 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자 하는 것임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왜 차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노?’
중학교를 다니던 때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오던 길. 버스로 진주, 산청 120리 길을 달려와서는 또다시 생초에서 집까지 30리를 산길로 질러오면서 슬퍼했던 소년은 이제 지난했던 개인적 역사적 시간을 휘휘저어 지난 시간을 무연히 들여다보고 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 그 길은 꽤 먼 길이었으므로 눈물깨나 흘렸을 법 했던 길. 시간이 훌쩍 흘러 이제 칠순의 시인이 손수 운전하는 차에 올라 슬픈 그 길을 되짚어보니 소년 시인을 키운 것은 바로 이 길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아들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던 아버지는 그저 집으로 오고가는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절벽 쪽에 서야 한다고 조용히 일러주시기만 했다. 그 속내는 모진 목숨 잘 부지하고 끝까지 공부도 열심히 하여서 부디 성공하여 이 땅에서 당당히 다리 쭉 펴고 살아가기를 염원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이때부터 산 쪽에 붙어서면 호랑이가 공격을 하지만 절벽 쪽에 서면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 사냥감을 노리려다 자칫 절벽으로 떨어질 것이 두려워 그냥 가버린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긴 소년은 산청, 진주, 서울 그리고 발 닿는 절벽마다 떨어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72년 진주로 이사 가기 전까지 부친이 솜공장을 하면서 논 20마지기를 사들여 중농의 살림을 일구며 아들을 끝까지 공부시키기로 아버지의 결심은 두고두고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필자는 발길을 돌리기 전 시인의 생가 마당에 서서 지붕 뒤의 당그레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왕산을 올려다보았다. 지리산의 생성의 기(氣)가 그곳에 모여들어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는 산이었다. 옅은 구름에 가려 얼핏 지리산이 흐려보였는데 곧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자 웅장한 지리산의 능선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 후 무거운 지리산은 이제 놓아야만 했다. 완만한 생성의 기운이 지리산의 능선을 타고 왕산으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따스하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부지런하고 또한 열정적이며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선생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선생님이 계신 곳이 바로 문화의 중심부가 되었습니다.’ 32년 4개월을 근무한 경상대학을 퇴직하면서 만든 『강희근 시 비평으로 읽기』의 책머리 말 마지막의 한 부분이다. 시인의 말씀 하나하나에 깃든 치열한 시대정신과 문학에의 열망은 언제까지고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시대의 질곡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않은 시인으로서의 운명은 그가 스스로 개척하고 노력한 바도 컸겠지만 ‘왕산, 지리산이 달려가다 멈춘 그 서정의 모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리산을 등에 지고 품에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아니 우리 모두 이제는 시인의 염원대로 지난 상처는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상처 위에 튼실한 열매가 맺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는 강희근 시인의 모습에서 환골탈태한 지리산의 모습을 얼핏 본 듯도 했다.
시인, 1996년《시와시학》(시),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으로 《바닥경전》,《저물 무렵의 詩》외
첫댓글 저 생가 마당에 포탄이 떨어졌던 바위와 할무니가 되어있는 석류나무와 보라색 붓꽃...참 아름다운 날이었어요.
작약이 또 곳곳에 얼마나 많이 피어있는지....황홀 자체였네요. 저야 사진기자(?)로 참석하지만...
카메라를 만지는 덕분에 몇년째 시인들을 이렇게 취재하러 따라댕깁니다. 사진도 잘 찍어드리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