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전시
어린이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전시에 관한
안내문
디지털 숲으로 경험하는 자연
디지털 숲으로 경험하는 자연에 관한
안내문
어린이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전시실
작품 [숨은 산]의
작가 노트
작품 [숨은 산]
하나이기도 넷이기도 한
산의 얼굴
어린이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전시실에 있는
휴식 공간
움직이는 자연을 소재로 꾸민 작품
움직이는 자연을 소재로 꾸민 작품에 관한
안내문
보이지 않는 면을 탐구하는 실험실
산의 모습
어린이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전시에 관한
안내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연못에 있는
조각작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조각공원
2024년07월03일(수요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탐방기
탐방지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과 세계 미술의 시대적 경향을 동시에 수용하는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으로 1969년 경복궁 소전시관에서 개관하여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국제적 규모의 시설과 야외 조각장을 겸비한 과천으로 신축·이전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은 청계산의 수려한 경치와 잘 어울리는 옛 성곽과 봉화대, 전통마을의 담장과 계단 등 전통양식을 가미한 건물 외관이 독특하다.
미술작품 및 자료의 수집·보존, 전시 및 조사·연구와 이에 관한 국제교류 및 미술활동의 보급과 교육을 통한 미술문화의식 향상 등 명실공히 국립미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백남준, 이중섭, 천경자 등의 국내 거장들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있다. 수도권지하철 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미술관까지 셔틀버스가 있고, 코끼리열차를 타고도 미술관으로 갈 수 있으며, 근처에 서울대공원이 있다.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10시~18시
휴관일 : 일요일, 매주 월요일, 1월1일
기획전시 및 공공기획전시 관람요금 : 만 65세 이상은 무료
기획전시 및 공공기획전시 무료 관람일 : 매월 마지막 수요일]
탐방코스: [대공원역 4번 출구~(셔틀 버스로 이동)~국립현대미술관 과천~(셔틀 버스로 이동)~대공원역 4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7월03일(수요일)
날씨 : 높은 구름이 낀 날씨 [과천시 막계동 최저기온 22도C, 최고기온 29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40분 소요)
10:56~11:49 구산역에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대공원역으로 이동 [53분 소요]
11:49~11:54 대공원역 4번 출구로 나옴
11:54~12:00 대공원역 4번 출구 근방에 있는 셔틀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으로 태워다 줄 셔틀 버스 승차 대기
12:00~12:08 셔틀 버스를 타고 대공원역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으로 이동 [8분 소요]
12:08~14:48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옥외 조각장~2층 제3전시실([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2층 제4전시실([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2층 제2 원형전시실(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3층 옥상정원(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1층 제1 원형전시실(MMCA, 사진 소장품展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1층 어린이미술관([다섯 발자국 숲] 전시실~옥외 조각장]의 동선으로 관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막계동)
1986년 문을 열었고 이후 서울관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심을 담당했다. 과천관은 국립 미술관 본관이 수도 서울이 아닌 과천에 있다 보니 접근성 문제로 욕을 많이 먹었다. 게다가 서울대공원 안에 있지만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서 서울동물원 옆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보로 한참을 걸어가거나 대공원 내에서 운행하는 코끼리열차를 타고 가야하는 등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이로 인하여 많은 시민들과 평론가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반드시 도심에서 동떨어진 풍경좋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사고로 지어 놓았다고 비판한다. 그래도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풍경이 좋은 건 사실이고, 도심지가 아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지을 수 있었다. 주변에 조각공원도 마련되어 있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운치 있다.
서울대공원의 주(主) 건물인 대공원 표본전시관 입구에서 코끼리열차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동물원 및 식물원 정차장에서 하차할 수 있으며, 코끼리열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대공원 동편에 있는 스카이리프트를 통해서도 갈 수 있다. 또한 대공원역 4번출구 뒷편의 승강장에서 출발하여 미술관으로 직행하는 셔틀버스로도 갈 수 있다. 가격은 무료이며 배차간격은 20분이다. 그러나 주말에 주차장 인근의 교통정체가 심하면 배차간격이 5~7분 정도 늘어나 미술관 입구에서 200m 떨어진 임시 승강장에서 하차하거나. 아예 결행되는 경우도 있으니 사전에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확인해야 한다.
주차장도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큰 전시회가 있는 날이면 주차 입구가 헬게이트로 변한다. 특히 서울랜드나 동물원이 가장 붐비는 어린이날이나 방학철에는 굉장히 복잡하다. 생각없이 차를 가져 갔다가 한참동안 기다리다 지쳐서 차를 돌리기 일수이니 가능하면 지하철을 이용해서 오는게 좋다. 또는 넓은 서울대공원 주차장에 (승용차 5,000원, 경차 2,500원) 주차하고 코끼리 열차를 이용 하는 편이 훨씬 정신적으로 이득이다.
서울/덕수궁관과 함께 관람하려는 이용객들을 위한 아트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운행횟수는 1일 4회로 요금은 무료. 단 주말과 공휴일, 휴관일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코스는 '서울관-덕수궁관-과천관'.
2021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소장 미술품 '이건희 컬렉션'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호암미술관이 있는 삼성의 용인 수장고에서 과천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세부적으로는 이중섭의 '황소', '흰소'를 포함한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작가들의 명작, 그리고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대표작 총 1,488점으로 알려졌다. 한국 고대미술부터 서양 동시대의 현대미술까지 다양하게 망라돼 있으며, 세기의 기증으로 인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세계적인 미술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숨은 명소
3층 옥상정원, 2층 원형정원과 동그라미 쉼터 등 세 공간으로 이뤄진 '원형구역'.
과천관의 숨은 명소인 2, 3층 정원 일대는 내·외부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관람객에게 전시 관람과는 다른 휴식과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전시 프리뷰] 국립현대미술관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
여성조선 기사 입력 : 2024.06.18. 21:53
기자명 임언영 기자
주목 덜한 1960-70년대 구상회화
이건희컬렉션 104점 포함...‘기증’의 의미 되새기는 자리
2021년 이건희컬렉션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미술품 기증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개인 소장가나 작가 유족 등 미술품을 기증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렇게 양과 질이 확장된 미술품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최근 5년간 기증된 작품 중 한국 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 1960-70년대 구상회화를 재조명하는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 전시다. 추상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아카데믹한 그림이 구시대의 미술로 여겨지거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포착해서 기획한 자리다. 출품작들은 최근 기증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 많다.
전시는 1부 ‘한국 구상미술의 토양’과 2부 ‘새로운 의미의 구상’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1부는 국전을 통해 아카데미즘 미술의 초석을 다진 1세대 유화 작가들을 중심으로 근대 서양화 양식의 사실주의 작품을 다수 소개한다. 자연주의적 발상을 토대로 엄격한 사실성을 보인 이병규, 도상봉, 김인승, 이종무, 김숙진, 김춘식 등의 작가들이 포함된다.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인상주의적 색채를 구사하여 주변 풍경과 인물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병규의 <고궁일우(古宮一隅)>(1961)와 <자화상>(1973), 작가의 취향이 스며든 정물을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화면에 채워 나간 도상봉의 <국화>(1958), <포도와 항아리>(1970), 어촌 풍경이나 노동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상을 한국적인 인상주의 화풍으로 담아낸 김춘식의 <포구(浦口)>(1977)등이 대표적이다.
2부에서는 구상과 비구상의 완충지대에 속했던 작가들을 망라한다. 자연에 바탕을 둔 조형적 질서를 추구했던 윤중식, 박수근, 황염수를 시작으로 황유엽, 이봉상, 최영림, 박고석, 홍종명 등 1967년 구상전을 발족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대담한 요약과 강렬한 색채의 구사를 특징으로 하는 윤중식의 <금붕어와 비둘기>(1979), 모래나 흙을 화면에 첨가하여 독특한 질감을 만들며 민담이나 설화로 해학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최영림의 <만상(滿想)>(1975), 특유의 마티에르와 대담하고 거친 화풍으로 전국의 명산을 다뤄 ‘산의 화가’로도 불렸던 박고석의 <도봉산>(1970년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장 복도 공간이 흥미롭다. ‘기증, 모두를 위한 예술’을 주제로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보고자 마련된 복도 공간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최근 5년 여간(2018년-2023년) 기증받은 작품의 경향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동시대 회화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대량 수집되어 소장품의 양과 질이 상향된 부분을 도식화하여 보여준다. 이병규, 윤중식, 김태 유족들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기증의 뜻과 공유의 과정을 만나볼 수도 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예술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기증자의 뜻이 전시장을 찾은 수많은 국민들에게 향유의 즐거움을 주고 한국 미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이번 전시가 다채롭게 전개되어 온 한국 구상회화의 바탕과 여정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
관람기간 : 2024. 5.21~2024. 9.22
관람시간 : 화~일: 10:00-18:00(월요일 휴관)
전시실 : 과천 2층, 3, 4 전시실
관람료 : 2,000원
문의 : 02-2188-6000]
[이건희 컬렉션 그 후···대중의 품에 안긴 역사적 작품들
서지혜 기자
서울경제 기사 등록 : 2024. 6. 5. 21:36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
국현에 기증된 구상작 중 153점 엄선
2021년부터 기증품 비중 급격히 늘어
전시 다양화 등 공익적 순기능 이어져
1960년대 이후 추상화가 현대 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구상화는 구시대 미술로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도 구상화의 영역에서 착실하게 독자적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소중한 작가들이 많다. 어렵고 난해한 추상화 대신 현실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구상 작품으로 자신의 취향을 채우는 컬렉터들도 여전하다. 공공 미술 기관은 추상화 일색인 미술계에서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한 기획을 통해 소개해 전시의 다양화에 기여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쉽진 않다. 학술적 가치를 가진 구상 작품은 대개 가격이 비싸 대여나 구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와 소장자들의 작품 ‘기증’이 중요한 이유다.
지난달 2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은 미술관에 기증된 1960~70년대 구상회화 153점을 작가별로 소개하는 기증의 순기능이 잘 드러난 의미 있는 전시다.
전시된 작품 153점 중 104점은 2021년 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소장작이다. 지난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증품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이건희 컬렉션에 영향받은 작가, 소장자들이 연이어 기증 행렬에 나선 덕분이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195점, 한운성 등 작가들의 기증 173점, 작가 유족의 기증 183점 등 2021년 한 해 총 2134점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3년 12월 기준 전체 소장품 1만1560점 중 절반이 넘는 6429점(55.6%)을 기증품으로 채웠다. 이병규와 윤중식의 유족들은 이건희 컬렉션에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된 것을 알고 같은 해 하반기에 각각 13점, 20점을 추가 기증하기도 했다.
전시의 1부는 ‘한국 구상 미술의 토양’, ‘새로운 의미의 구상'으로 구성된다. 해방 전에는 서양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 기관이 없었다. 국내 1세대 유화 작가들은 일본의 근대식 미술학교에서 배운 서양 미술을 국내에 전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1950년대 한국 화단에 추상 미술을 표방하는 서구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작가들은 불안을 느끼지만, 구상 회화가 한국의 사회적 토대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을 채운다고 여기며, 고집스럽게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1부에 전시된 작품에는 이 같은 작가들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있다. 세밀한 관찰과 데생을 바탕으로 ‘여인좌상’을 완성한 김인승은 “무엇보다도 인물화의 본질은 인간 성격의 표현에 있다”며 얼굴 묘사에 정성을 쏟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붉은 원피스의 여인’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물이나 정물에서 벗어나 당대의 현실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며 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도 있다. ‘그림은 생활에서 우러나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며 풍경을 과장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김형구(어부의 가족)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특색이 담긴 산천초목의 모습과 각 지역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상을 화면에 담아낸 김춘식(포구)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2부 ‘새로운 의미의 구상’에서는 학술적 화풍의 구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주를 통해 구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은 강한 자의식 아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척하며 주체적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BTS의 멤버 RM이 여러 점의 작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윤중식(1913~2012)의 작품에서 특히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난다.
재료비가 부족해 미군 천막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김태의 회화도 기증 덕분에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김태는 생선을 줄에 엮어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즐겨 그렸다. 생전에 그는 “어촌에서는 서당 수업료를 어물로 대신하곤 했다. 펴서 말리는 물고기가 새가 날아가듯 신기해 보였다”고 말했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국립현대미술관으로의 미술품 기증은 1971년에 시작되어 2023년 12월 기준, 전체 소장품 11,560점 가운데 기증 작품은 6,429점으로 전체 대비 55.6%를 차지한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최근 5년 여간(2018년-2023년) 기증받은 작품의 경향을 분석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21년 이건희컬렉션을 기점으로 미술품 기증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개인 소장가나 작가 유족 등이 미술품을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예로, 이병규와 윤중식의 작품은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되어 각 5점, 4점이 기증된 후, 유족들에 의해 2021년 하반기에 각 13점, 20점이 추가 기증으로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최근 5년간 작가, 유족, 개인소장가 등으로부터 2,400여 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 회화, 조각, 사진, 판화, 공예 등 전 장르를 망라한 기증작들은 미술관의 부문별 소장품 보강뿐만 아니라 한국미술사의 심화 연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미술관은 이병규(1901~1974), 윤중식(1913~2012), 김태(1931~2021) 등의 작품을 수증함으로써 한국 구상회화를 보강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기증작 중에서도 비교적 미술사에서는 소홀히 다루어진 1960~70년대 구상회화를 소개한다. 아카데미즘의 초석을 다진 이병규, 도상봉, 김인승을 비롯하여, 현대미술의 조류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 형식을 보여준 박수근, 황유엽, 박고석, 김태, 김영덕 등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주요 작가 및 작품을 선보이고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제고할 것이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 1부. 한국 구상미술의 토양
일본의 근대식 미술학교는 한국의 서양화 양식의 유입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전까지 조선에는 서양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전문 교육기관이 없었고, 이에 일본 유학생들은 서양 화단의 도입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 1세대 작가들은 일본에서 배운 서양미술을 국내에 전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석고상 연습, 나체 연구, 해부학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도쿄미술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5년간의 사생 기술을 습득하여 아카데믹한 화풍을 구현했다. 1부 초입에 선보이는 이병규, 도상봉, 오지호, 김인승의 정물, 풍경, 인물 작품에서는 이들이 일본에서 체득한 자연주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대상에 비치는 미묘한 빛의 변화를 포착해서 온화한 표현과 색상을 사용하고, 그림자는 보라색, 청색으로 보색효과를 냄으로써 대상의 색채를 강조하고 선명히 보이게 만들었다.
1950년대는 한국 화단에 불어닥친 새로운 경향의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서구화 물결이 정통적 화법을 지켜나가던 작가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고조시켰다.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구상계열 작가들은 자기 작품을 다시 돌아보며 하나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1958년 이종우, 이병규, 김인승, 도상봉, 이동훈, 김형구 등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미술은 아카데미즘의 토대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뜻을 같이하면서 목우회 창립에 이른다. 목우회는 한국의 구상화단을 본격적으로 가꿔간 단체로 초기부터 한국적인 아카데미즘을 계승하였다. 목우회의 결성은 우리나라 구상회화가 체계적으로 성장하고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실제적 형태를 지향하는 구상회화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과 시선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해하기 쉽고, 상식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을 재현하는 예술로 주목받았다. 때로는 ‘국전 스타일’로도 불리며 당시 한국의 사회적 토대 위에서 살아가던 대중의 취향을 채우고 아카데미즘의 초석을 굳혔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전] 2부. 새로운 의미의 구상
다른 한편 1960년대에 작가들은 종래의 고식적인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벗어나 구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자연, 사물의 형태, 인간의 이야기 등을 왜곡과 변형을 통해 심상적인 풍경으로 그려나갔다. 뿌리는 구상 영역에 두되, 비구상의 중간 영역을 취하는 절충적 작품들이었다. 이 영역의 작가와 작품들은 하나의 특정한 범주에 집어넣기 어려울 만큼 여러 복합적인 요소의 상보관계로 얽혀있다. 2부를 구성하는 작가들은 도쿄미술학교의 초창기 유학생들과는 달리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대부분 미약하나마 한국에서 기초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이미 강한 자의식 아래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척해 가는 주체적인 사고가 밑바탕에 있었다. 이들의 그림은 대개 사실성을 추구하되, 풍경화에서는 인상주의의 빛의 효과를, 인물화나 정물화에서는 후기 인상주의 혹은 야수주의의 형태 왜곡을 보인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한국화단에서는 갖가지 새로운 미술사조가 전개되었고, 특히 추상미술이 확산하였다. 이제 국내 화단은 추상회화라는 새로운 회화 양식에 몸을 실었고, 다수의 구상계열 화가도 속속 이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1967년, 그들 중에는 추상양식과 결코 혼혈되지 않는 자신의 구상주의적 체질을 깨닫고 돌아서는 작가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창작미술협회, 모던아트협회 등에 가담했던 중견, 기성 작가와 신예들은 ‘새로운 의미의 구상을 지향한다’는 목표로 구상전을 결성하게 된다. 김영덕, 박성환, 박고석, 박돈, 박항섭, 이봉상, 최영림, 홍종명 등이 창립 작가이다. 이들은 특별히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구상’이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고 추상미술의 범람으로 그 입지를 위협받던 구상계열의 화풍을 진작하는 한편, 수동적 태세를 지양하고 내면의 이미지를 독자적으로 표출하였다.]
[이병규(李昞圭)
서양화가. 경기도 안성출신으로 일본동경미술학교를 나와 ‘목일회(牧日會)에 참여하고 선전에도 출품하였으며 양정학교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927년에 서화협회에 가입하였고 해방 후에는 초기부터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66년에 예술원 회원이 됨. 화풍은 사실적인 온실 정경으로 유명하여 이러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한때 ‘양정파(養正派)’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온실 속의 여인」(1963),「온실 일우(一隅)」(1971) 등이 있다. 1971년 문화예술상을 받다.]
[이병규(李昞圭)
1901∼1974. 서양화가.
호 : 오하(梧下)
출생 – 사망 : 1901년 1월 24일 ~ 1974년 12월 10일
대표 작품 : 온실 속의 여인(1963), 온실 일우(1971)
경력 : 양정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및 교감, 교장, 국전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해방 이후 「온실 속의 여인」·「온실 일우」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호는 오하(梧下). 경기도 안성 출생.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병규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외면하면서 서화협회전람회, 도쿄미술학교 동문들의 동미전(東美展, 1930∼1932), 그리고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던 민족적 의식의 일부 젊은 서양화가들이 1934년에 조직한 목일회(牧日會)의 동인작품전 등을 통하여서만 작품을 발표하였다. 당시의 작품들이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정물」, 「백일홍」 등의 출품 기록이 밝혀져 있다.
목일회전이 일제의 탄압을 받아 중단되었다가 1937년에 목시회(牧時會)로 명칭을 바꾸어 재기동인전을 가질 때에도 참가하였다. 당시의 작품 기법을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후년기의 작풍과 연관되는 치밀한 사실주의의 범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복 후에는 1949년의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때부터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 등으로 줄곧 참여하면서 철저한 사실적 기법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소재는 주로 온실 속의 꽃과 설악산·가야산 등지에서 그린 자연미, 역사적인 사찰 주변의 풍정에 집중되었다.
1958년에 조직된 사실주의 계열의 서양화가단체 목우회(木友會)와 1968년의 한국사실작가회 창립에도 참가하여 그 연례회원작품전에 해마다 출품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온실 속의 여인」(1963), 「온실 일우(一隅)」(1971)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교육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 1964년에 서울시문화상, 1967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목관에 추서되었다.]
[도상봉(都相鳳)
서양화가. 호는 도천(陶泉), 함경남도 홍원(洪原)태생으로 1927년 동경미술학교를 나왔다. 해방이후 국전 창설때부터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48년부터는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함. 대한미협회장, 한국미협이사장등 미술행정에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아카데믹한 작품제작을 게을리하지 않아 10여 회에 걸친 개인전을 가졌다. 1964년 예술원회원이 되고 3 · 1문화상, 예술원상, 국민훈장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 대표작으로 『이조시대』, 『성균관풍경』, 『정물』 등이 있다.]
[김인승(金仁承)
일제강점기 「나부」, 「아틀리에 」, 「가락」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생 연도 : 1910년 1월 19일
사망 연도 : 2001년 6월 22일
본관 : 설성((雪城)
출생지 : 경기도 개성
대표작 : 나부(裸婦, 1937년, 캔버스에 유채), 화실(1937년, 캔버스에 유채), 봄의 가락(1942년. 147x207cm. 캔버스에 유채),
1910년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호는 지연(智淵)이다.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출신의 한국 서양화 1세대 화가로 구상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며 한국 아카데미즘 미술의 전통을 확립한 작가이다. 한국 근대 조각의 1세대 작가인 김경승이 그의 동생이다.
개성 제일보통학교를 거처 1925년 송도 고등상업학교를 입학한 그는 192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미술전에 「임진강철교」, 「뒷동산 풍경」이 입선될 만큼 이른 나이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32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学校〕 서양화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覧会)에서 「나부(裸婦)」로 입선하고 광풍회(光風會) 전람회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1937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참가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로 첫 특선을 차지했는데 제19회까지 연속 4회의 특선을 수상하면서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때 서양화 분야에서 추천작가가 된 심형구, 이인성과 함께 ‘추천 작가 3인전(三人展)’을 가졌다.
1943년에는 심형구,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과 함께 단광회(丹光會)를 조직하여 친일미술활동에 가담했다. 그해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기념하는 기록화인 「조선징병제실시」를 합작으로 제작했으며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개성여자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1947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55년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1957년 예술원 회원, 1960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서양화단의 구상 계열을 주도하는 작가로 활동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2001년에 사망했다.
김인승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49~87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김인승(金仁承)
출생 1910년 1월 19일 (대한제국 경기도 개성부)
사망 2001년 6월 20일(91세)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학력 도쿄 미술학교
분야 서양화
김인승(金仁承, 일본식 이름: 金城仁承(가나기 진쇼), 1910년 1월 19일~2001년 6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고 호는 지연(智淵)이며 본관은 설성이다.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명륜정(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김인승이 먼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에 3·1문화상을 수여 받았고, 1974년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렸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은 이같은 후기 작품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종무(李種武)
출생 1916. 9. 10.
사망 2003. 5. 26.
분야 회화/판화/평면
학력 동경 동방미술학원
수상 : 1997년 문화예술상, 1992년 보관문화훈장
경력 : 한국수채화작가회 고문, 상형전 명예회장
대표작 : <자화상>, 1955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향원정> 등이 있다.
우리 화단에서 서양화의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종무의 화력은 우리 현대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대부분의 선도적인 작가들이 밟아온 전형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청년시절에 선배 화가의 지도를 거치고, 좀 더 넓은 미술의 세계로 진출하는 방법으로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에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작가활동을 하였다.
화가들이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게 되는 청년기에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종무의 조국은 미술 문화를 심고 키워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토양이었다. 미술 시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이러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는 길은 미술협회와 예술원 등과 같은 단체에 소속되거나 미술대전과 같은 관제 행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술계를 이끌어 왔던 이종무도 미술대학에서 강사와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고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예술원 등의 단체에서 회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화가로서의 창작활동을 해왔다.
작가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이력을 가진 작가에게서 시대의 첨예한 문제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참여와 혁신적 행보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아카데미즘과 순수한 미학적 주제, 그리고 재료의 물성에 대한 탐닉이 작품 창작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일 가능성이 높으며, 예술적 지향성과 진화도 이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종무 작가의 세대에는 서양화의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국내의 선배 작가들에게서 작가로서의 길을 안내받고 예술적 기량을 훈련받을 기회가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가가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참조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미술이나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외국의 작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비록 원작을 대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영감의 원천으로서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종무의 경우에도 작가는 자신이 일본화가 와타나베 고베와 서양화가 세잔, 브라크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안에서 세잔의 색채 연구와 고갱의 상징주의적 표현 등이 풍경 속의 산이나 하늘의 구름 표현 등에서 감지되기도 한다. 청년 화가 이종무가 활동하던 시기가 일본의 식민 통치 기간이었고 2차 대전 기간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미술 생태계가 정상적인 창작환경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이종무의 작업 방향 선택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한 때 추상적이 작업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작가가 스스로 언술하고 있는 것처럼 이종무는 색채에 대한 감각과 친숙한 모티브를 통해 드러나는 분위기를 구상적으로 화폭에 담아내는 것을 자신의 작가로서의 사명으로 여기며 창작활동을 해왔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러한 화업을 보여준 화가 이종무의 후기 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의 산을 그린 풍경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산 풍경들은 스스로의 작품을 재현적 사실주의라기보다는 구상적 표현 안에서 대상의 사계절의 환경을 담은 모습과 각각의 산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의 빛을 품은 모습에서 전해주는 자연스러운 시적 분위기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순수한 색채의 감각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곳곳을 답사하면서 마주한 산들의 다양한 모습을 화면 안에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한 색채로 뒤덮인 평면'으로 치환하여 작품화한 작가는 색채의 깊이에 대한 몰입과 산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풍부한 창조적 에너지를 감지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보는 이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으로 특별한 감정을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색채의 역할을 담아내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한 단계 다듬은 색면으로서의 화면에 전개되는 시각적 치유와 정신적 고양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술이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하나의 효용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 : 하계훈 미술평론가]
[한국화 화가 소호(小湖) 김숙진(金淑鎭 1951∼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부문 한국화심사위원 역임) 화백은 아름다운 사계(四季)의 자연 풍경을 주로 화폭에 담아온 작가다.
김 작가는 한 줄기 건조하고 단순한 지형에 불과한 옛길을 한국화의 소재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능선따라가는길', 하얀눈이 쌓인 '산길'을 비롯, 유채꽃 핀 제주도 해안 길을 주제로 삼은 '제주의 봄' 등 그의 다수 작품에서는 긴 세월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다듬어놓은 산길이나 옛길이 담겨있다. '제주의 봄'은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될 예정이다.
푸르른 녹차밭의 '보성의 봄', 능선의 멋스러움이 돋보이는 '천년의 흔적', 붉은 단풍으로 물든 '장군봉의 단풍' 등 아름다운 자연 풍광들이 가득 담겨 있는 그의 작품들은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치유와 안식을 제공한다.
'만삭의 추경', '농가의 뒤뜰', '잊혀진 세월' 등 한지에 채색기법으로 사실적이고 탁월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극사실화 작품도 김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만추의 고개 숙인 조밭의 풍경을 담은 '만삭의 추경'은 현대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정겨운 시골풍경의 '잊혀진 세월'은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수상작이다.
[김숙진 화백은]
채색화의 대가 석당(石堂) 우희춘 화백 문하에서 미술수업을 시작해 20여년간 붓을 놓지 않았던 김숙진 화백은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부문 한국화, 현충 미술대전 한국화, 한국 새늘 두방지 미술공모전,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대한민국 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협, 종로미협 자문위원, 현대여성미술협회 부회장, 신맥회 이사, 현대한국화협회, 창석회, 전업미술가협회 출판홍보 부위원장, 현대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 작가는 개인전 3회, 현대 한국화협회전, 미술과 비평 초대전, 한국 미협 K-art광화문전, 한·일 회화 교류전, 한·중 현대회화의 조망전, 한국전업미협여성 작가전 및 국내외 초대·그룹전을 다수 진행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과 두 차례 입선,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자연주의 신봉자 김숙진(金叔鎭)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그래서 自然보다 더 眞實한
김숙진(金叔鎭)은 서울에서 1931년 출생, 1956년 홍익대학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국전(國展)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후 1959∼61년까지 3년 연속 특선을 한 다음 1962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63년 홍익대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다 1967년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김숙진은 그의 작품 ‘소녀상’에서 보듯, 미술의 표현에 있어서 사실이라는 것은 자연형태를 그대로 긍정(肯定)하여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추상(抽象)이라는 것은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찾아서 자연형태를 부인하고 기하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이라는 것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문자 그대로 사실이고 또 하나는 구상이다. 구상과 사실의 차이는 그것들이 둘 다 자연형태를 긍정하는 데는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으나, 구상은 약간의 주관적인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 특색이다.
어쨌든 간에 사실과 구상은 대상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고, 대상이 되고 있는 물체의 분위기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어느 의미에서는 대상이 되고 있는 물체의 재확인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실제의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이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마음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 즉 기술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형식과 내용이 아울러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사실적인 예술에 있어서는 기술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화가 김숙진은 학창시절부터 ‘소녀상’ ‘백합’ 등의 작품이 말해주듯 사실주의 화가인데, 변함이 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실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화가로서 성장할 무렵, 우리 화단에는 새로운 회화사조가 물밀듯이 들어와서 앵포르멜 아트 오브 아트, 그리고 온갖 새로운 미술이 범람하였지만 그는 고집스럽게도 정밀 묘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놓은 듯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길을 외롭게 걸어왔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고, 그 자연을 만든 것은 조물주이기에 누가 감히 조물주의 작품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미술은 자연형태를 그대로 본받은 자연주의라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 밑에서 그는 자연의 오묘한 비밀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그렇게 관찰한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 때문에 그는 그가 제작한 사실적인 작품은 어느 의미에서는 대상이 된 자연보다도 더욱더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대량 생산의 과정에서 약간의 결점이 있지만 그 자연을 고쳐서 다시 만든 사실적 작품은 대상이 된 자연보다 더욱 진실한 것이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소녀상’에서도 잘 나타나 있으며, ‘백합’에서는 보통 사실적인 화가가 시도하는 것보다 더 딱딱한 처리로 나타난다. 어두운 배경 처리라든가 뚜렷한 백합의 표정 같은 것은 리얼리티를 넘어서서 오히려 요기(妖氣)띤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나부’(裸婦)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몸의 비례와 그 살붙임에 있다. 따라서 휴식(休息)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포즈는 여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송두리째 나타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세밀히 다루어진 살색이 리얼리티를 이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사실적인 수법은 투명한 효과에 도달하고 대상의 외관을 모방할 뿐더러 대상의 내부에까지 스며드는 철저한 것이 되었다. 사실,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화가 김숙진은 이와 같은 사실적 창조관으로 1969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국전 초대작가, 국전 심사위원, 1975년 한국현대미술 100인 초대전 출품, 1977년 세종대학교 교수, 1980년 국전 운영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 상명여자사범대학 대학원 강사를 역임하는 등 화려한 화력과 관록을 펼쳐보였다.
글 : 고운석 주필]
[김춘식(金春植)
서양화가
출생 : 1947년
분야 : 회화/판화/평면
소속 : 전 춘향미술대전(심사위원), 전 성남미술대전(심사위원), 전 전라북도미술대전(초대작가 / 심사위원)
학력 : 전주대학교 미술교육 학사
수상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978년 전라북도미술대전 최고상
1977년 목우회 특선
대표작 : ‘포구(浦口)’ 1977,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5×112cm
완주출신으로 전주대학교 미술과를 1회 졸업 후, 전주신흥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중 1982년 서울로 이주,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1968년 목우회 공모전 입상을 시작으로 전북미술대전 서양화부문 최고상 3회와 특선2회, 목우회 공모전 문예진흥원장상 및 특선2회, 국전23회부터 30회로 끝날 때까지 8회 연속 입선했다.
그는 서울로 이주 이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대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매일 스스로를 가르치고 어제보다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그의 삶의 흔적이 ‘향수’, '소싸움'이라는 작품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작품은 해바라기 활짝 핀 아래에 어머니와 함께 있는 막둥이, 자매, 소를 끌고 가는 농부, 벚꽃이 하얗게 핀 봄, 쟁기질을 하는 농부의 일상 등 그림의 소재는 고향의 산천, 풍물과 세계를 여행한 흔적들로 채워졌다. 그는 풍경, 인물과 누드뿐 아니라 소싸움도 즐겨 그린다. 화면 속 소재와 제재가 활달하고 호쾌한 붓놀림은 관객에게 시각적인 쾌감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인물화는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며 굵고 두터운 선의 흐름으로 인물의 형태를 명료하게 표현한다.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한국의 자연전 및 도시와 미술전, 남북 평화미술축전 및 한중 당대 대표작가전, 아시아의 정신전, 사단법인 목우회, 한국미협 부이사장 역임, 사색동인, 강동미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사단법인 목우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윤중식(1913년~2012년)은 평양 출생으로, 노을 지는 전원 풍경을 주로 작업하여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표현주의를 바탕으로 대담한 요약과 강렬한 색채의 구사가 돋보이는 독자적 화풍을 가지고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오늘 9월 22일까지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가운데 한국 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 1960-70년대 구상회화를 재조명한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조형개념이 출현하더라도 작가들의 개성적인 시선으로 충실히 묘사하는 표현양식은 한국 회화의 토양을 굳건히 다져왔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가들은 자연에 관한 서정성과 사실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조형적 요소로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윤중식(尹仲植)
출생 연도 : 1913년
사망 연도 : 2012년
출생지 : 평양
대표작 :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대담한 요약과 강렬한 색채의 구사를 특징으로 하는 <금붕어와 비둘기>(1979)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화가. 서양화가.
평양 출신.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일본의 국화회전과 동경유학생으로 구성된 재동경미술협회의 전시회(동미전)에 참여하였다. 해방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였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인 1931년부터 수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고, 제국미술학교 재학 당시에는 일본의 중진 서양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가 주도하던 국화회(國畵會)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 결성된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두 차례 출품하였다. 해방후에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재직하였다.
학습기 이후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하여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이 특징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박수근(朴壽根)
출생 1914년 2월 21일, 강원 양구
사망 1965년 5월 6일, 서울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 화가로 서민을 주제로 절제된 미학을 보여주었으며, 주요 작품은 <농악>과 <나무와 여인>. 강원에서 태어나 평범한 서민 생활의 모습을 주제로 삼은 작품을 많이 그렸다. 소재를 극도로 단순화하고, 공간감을 무시하며 대상을 평면화한 화풍을 통해 절제의 미를 화폭에 옮겨 민족 정서를 표현했으며, 질박한 색채와 바탕의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가 특징이다. 이중섭과 쌍벽을 이룬 작가지만 이중섭의 자유분방함에 반해 최대한 절제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
작품세계
한국 화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그림에는 꾸밈없는 생활 속의 시골사람들이 등장한다. 행상이나 빨래터 또는 절구질하는 아낙네들이 주로 등장하고 담소를 즐기는 노인들이나 놀이에 빠진 어린이들도 즐겨 그렸다. 상당수의 화가들이 서구적 분위기의 귀부인이나 유한(有閑) 취미 속의 고급스런 인물을 선택할 때 그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았다.
이같은 인물들은 거짓 없는 한국인의 한 전형으로 화면에 묘사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자연도 양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기 십상이었다. 특히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이 소재들은 극도로 단순명료한 형태로 응축되었다. 절제된 선묘(線描)는 결코 허장성세(虛張聲勢)에 의한 과장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도로 추상화되어 본질을 은폐시키지도 않았다. 절제의 미를 체질적으로 화면에 옮겨 민족정서를 그려냈다.
특히 화면 바탕의 처리방식이 독특하여 두툼한 질감을 느끼게 했다.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의 표면처럼 우툴두툴한 효과를 냈다. 마치 오랜 풍상에 시달린 마애불상처럼 형상이 바탕의 매체에 깊이 스며 일체감을 이룬 자연성을 느끼게 했다. 또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을 기조색으로 삼고 있어 한결 깊이있고 무게가 있는 듯한 장엄미도 배어 있다.
원색에 의한 화려함을 거부하고 질박한 색채와 표면질감으로 견고함을 이루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가졌다. 오랜 잔향(殘響)이 남게 되는 그의 화폭은 한국인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부담감 없는 조형적 호소력을 가졌다. 회색조의 두툼한 질감 위에 평범한 인물과 주변풍경이 간결하고 담담한 단순구도로 압축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중섭(李仲燮)과 쌍벽을 이룬 1950년대 이후 작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중섭이 분방한 선묘에 다양한 색채를 구사했다면, 박수근은 반대로 최대한 절제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 둘 다 민족회화의 구현이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했지만, 박수근은 보다 규모 있는 대작으로 일관된 조형논리를 전개시킨 특징을 보인다. 대표작으로 〈농악〉(1932)·〈나무와 여인〉(1950년대)·〈행인〉(1964)·〈할아버지와 손자〉(1964)·〈소와 유동(遊童)〉(1962) 등이 있다.]
[황염수(黃廉秀)
출생 1917년
사망 2008년 7월 22일
직업 화가, 유화가
대표작 : ‘장미’ 1975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해방 이후 장미를 주소재로 하여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은 화가. 유화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일본의 동경(東京)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50년대 후반 모던아트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60년대 중반부터 장미를 주된 소재로 삼아 그렸다.
생애와 활동사항
1917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과 1935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일본에 건너가 1938년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현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고 1942년에 졸업하였다. 동경 제국미술학교는 1929년에 설립된 사립 미술학교로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으로 교수했으며 수업연한은 5년이었고, 1929년부터 1945년까지 147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수학했다(50명 졸업). 유학 중에 동경의 미술대학 유학생과 졸업생들이 결성한 재동경미술협회에 참여하여, 1940년 제3회와 1941년 제4회 재동경미협전에 출품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황염수는 1957년유영국, 한묵, 박고석 등과 함께 모던아트협회를 창립하고 제1회 전람회를 열었다. 1950년대 후반은 한국의 미술계에 현대미술로의 도약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 추상적 경향의 현대미술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모던아트협회는 그러한 단체들 가운데 하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황염수는 그림의 소재로 장미를 선정하여 장미만을 주로 그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1989년까지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2005년에는 미수(米壽)전을 열었다.]
[황염수 '장미']강인한 검정 테두리 속 꿈틀대는 생명력...열정·순결·사랑을 담다
서울경제 기사 입력 : 2018-05-25 수정 2024.03.11.
조상인 기자
1960년대 후반부터 장미소재로 40년 작업
높은 채도로 표현된 독특한 색채감각 눈길
모던아트協 활동땐 추상적 화풍 보였지만
이후 전업화가로 지내며 '작은 그림' 고집
장미가 지천이다. 반포대교 남단에 조성된 화단부터 용산구청을 지나 돌아가는 삼각지에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북촌, 서촌의 담장 있는 집이면 너나없이, 아파트는 곱게 꾸며둔 화단 구석구석 빨간 장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흔해서 싫다거나 많아서 지겹다는 얘기가 아니다. ‘꽃 중의 여왕’인 장미가 친근하게 곳곳에 피었으니 반갑고 기뻐 스쳐지날 동네 담벼락 한 번 더 돌아보는 게 흐뭇해서 하는 소리다.
그렇게 핀 장미를 한 송이씩 꺾어 담은 듯하다. 빨간장미와 흰장미 사이로 분홍장미와 노란장미가 다투듯 얼굴을 내민다. 꽃송이를 꽂아둔 백자 항아리에까지 철화(산화철로 그려 진붉은 갈색을 띰) 문양으로 그려넣은 장미가 만발하다. ‘장미의 화가’라 불린 황염수(1919~2008)의 1975년작 ‘장미’다. 장미는 다발로, 무더기로 여럿이 뒤섞여있지만 화가는 굵고 짙은 색 테두리를 꽃마다 둘러 각각이 고유한 표정을 갖게 했다. 감출 줄 모르는 열정의 사랑부터 순결한 첫사랑과 당당한 질투, 든든한 우정과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색색의 장미 사이를 넘나든다.
화가가 꽃을, 특히 장미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꽃이라는 소재에 매달렸으니 영면에 드는 날까지 거의 40년을 장미만 파고들었다. 꽃을 찾는 일은 벌처럼 부지런했다. 어스름 새벽에 남대문 꽃시장을 찾아가 장미를 직접 보고 골라서 그림을 그렸다. 마음에 드는 장미라도 반드시 피기 전의 것이라야 그의 작업실까지 따라올 수 있었다. 대상을 눈앞에 실제로 두고 현장에서 느낀 그 흥분감을 온몸으로 그리고자 했기에 살아있는 장미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렸다. “꽃병에 꽂고 피기까지의 과정을 응시하면서 구상을 하고 그 움직임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하는 그는 종종 “꽃의 움직임”을 이야기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 꿈틀대는 생명력이 굵고 강인한 검정 테두리가 됐다.
생전의 작가는 ‘왜 장미를 그리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 정작 대답은 싱겁다. “마음대로 바꾸기 좋은 대상”이라 장미를 그린다고 했다.
“나는 장미를 그대로는 그리지 않는다. 그대로 그리려 하면 자꾸 다른 꽃들이 튀어나온다. 내 그림의 목적은 장미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장미가 내 마음 속에 던지는 어떤 ‘부딪힘’이다. 미술이 해야 할 역할은 현실의 장미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을 그려내는 일일 것이다.”
꽃을 그리지만 ‘꽃 그림 화가’로 불리는 데는 질색했다. 따지자면 그의 본색은 ‘영도’ ‘도봉산’ 등 직접 사생하고 그린 풍경화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어떤 것을 느끼게 했느냐였다. “비록 장미를 그렸어도 보는 사람이 장미임을 깨닫기 전에 ‘좋다’는 느낌부터 먼저 받았으면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기야 인류와 평생을 함께해 온 장미는 동서고금의 화가들이 두루 그린 소재였다.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은 과일이 있는 정물 곁에 장미를 포함한 화병을 종종 두고 함께 그렸다. 세잔의 장미는 그의 ‘산’과 ‘사과’만큼이나 견고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장미는 그가 그린 여체의 풍만함 못지않게 눈부시게 풍요롭다. 사랑받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꽃 그림을 좋아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이글거리는 ‘해바라기’나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푸른색 ‘붓꽃’도 강렬하지만 말년에 그린 ‘아몬드나무’와 더불어 ‘장미가 든 꽃병’은 아름다움을 초월한 숭고함을 내뿜는다. 2004년 5월 뉴욕 소더비에서 1억 417만달러에 낙찰돼 당시 세계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은 푸른 옷의 소년 못지않게 그가 머리에 쓴 장미 화관과 뒷벽을 장식한 장미가 눈길을 끈다. 최근 크리스티 뉴욕이 실시한 록펠러 자선경매에 나와 1,241억원에 낙찰된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 역시 청회색을 배경으로 선 깡마른 앳된 소녀의 건조한 표정과 붉은 꽃이 묘한 대구를 이룬다. 이들 두 작품은 1905년에 그려진 것으로 2년이 채 안되는 피카소의 ‘장밋빛시대(Rose Period·장미시대)’의 대표작이다. 클로드 모네의 ‘장미정원’이든, 에두아르 마네의 ‘장미’든, 앙리 마티스의 화려한 방을 채운 꽃까지 화가에게 장미는 지천에 널려 언제든 보고 그릴 수 있는 소재임에도 본질에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존재였다.
황염수는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의 이중섭(1916~1956)과 절친했기 때문에 또래인 1917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족에 따르면 1919년 이후에 태어났으나 “호적이 잘못됐다”고 들었다 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고 전국 규모의 미술대회에서 두 번이나 입선해 화가의 꿈이 움텄다. 그 시절 서양화를 배울 방법은 독학 아니면 유학이었으니 처음에는 일본 우에노 미술학교 응시했는데 근처 미술관에 부르델 조각을 보러 달려가는 바람에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부득이 들어가게 된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는 자유로운 학풍이 오히려 황염수의 천성과 더 잘 맞아 5년 유학기간에 한 번도 방학 때 고향에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영영 떠나게 됐지만 피난시절 부산에서 만난 화가 남경숙이 평생의 짝이 됐다. 남경숙 여사는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재원으로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던 실력파 작가였지만 결혼 후에는 황염수와 같은 작업실을 쓰며 남편의 활동에 더 힘을 실어줬다. 황염수는 이중섭과 동향의 또래로 아주 친했고 양쪽 부부간에도 왕래가 잦았다. 이중섭은 황염수 부부의 결혼 선물로 비둘기 그림을 그려줬고 남 여사는 지금도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
황염수는 1957년 모던아트협회 창립 멤버로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봄·가을 기획전에 참여했다. 유영국·박고석·한묵·이규상과 함께 협회를 설립했고 이후 천경자·문신 등이 합류했다. 명성과 개성이 두드러지는 화가들이었지만 정치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예술에 대한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공통분모로 모인 이들이었다. 당시 황염수의 화풍은 추상적 경향을 보였다. 모던아트협회 이후 황염수는 그 어떤 협회에도 속하지 않고 교수나 강사 자리 조차 마다한 채 오로지 ‘전업화가’로 살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독창적 화풍이나 근현대 화단에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대표적 공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는 황염수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미술관 학예실에서도 “없을 리가 없는데?”라며 놀라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현대미술에 기여한 바가 크나 작품이 자그마한 소품 위주라 대작 중심인 여타 미술관 소장품으로 같이 전시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대작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소장품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면서 “특히 ‘장미’ 등의 그림으로 인기작가였고 다작하지 않고 과작하는 편이었기에 미술관에 작품이 들어올 경황이 없었다”고 되짚었다. 미군과 외국인을 상대로 선물용 그림을 그려준 박수근이나 골방 같은 작은 화실에서 웅크리고 그림 그린 장욱진처럼 끝끝내 ‘작은 그림’을 고집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 평론가는 “문인화를 그리던 선비적 사고가 자기과시적인 큰 그림보다는 소박하고 소탈한 작은 그림에 천착하게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국큐레이터협회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박래경은 ‘황염수와 그의 그림세계’라는 평론 글에서 소재나 조형성 못지않은 작가의 독특한 색채감각에 주목했다. 장미와 꽃들은 눈이 부시기라도 한 듯 유별나게 높은 채도로 표현됐다. 실재의 꽃보다 작가의 마음에 다가온 꽃을 그렸기에 그럴 것이리라. 작가 생전에 박래경 평론가는 “대상을 앞에 두고 철저하게 그리면서 꽃의 고유색이 아닌 그 강렬한 색채대비는 대체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고 황염수는 “어머니가 과거 평양에서 비단염색 공장을 크게 하셨고 그걸 보고 자라서 아마 그럴 것”이라며 눙치듯 답했다고 한다. 꽃을 다시 보자. 그 고운 빛깔과 새초롬한 모양을 눈으로 더듬고 다가가 향도 음미해 보자. 화가는 그 꽃이 지는 게 안타까워 송이송이 그림에 가둬 넣었다. 그림 밖 꽃은 이내 지고 만다.
/조상인기자]
[황유엽(黃瑜燁)
1916년3월 30일~2010 년10월 11일
▽출생 1916 평남 출생
▽분야 회화
▽학력 1943 일본도쿄 미술학교 졸업
▽수상 1993 세종문화상 문화부문
▽경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미술대전람회 심사위원,
▽작품 : 對話(1978년, 서양화), 원두막의 일기(1992년 서양화), 목가(1978년 서양화), 귀로(1978년 서양화), 정가(情歌, 1992년 서양화), 故鄕(고향, An Old Day 1979년 서양화), 숨바꼭질(1979년 서양화) 등
황유엽은 1916년 평남에서 출생하였고 6.25때 월남한 이후 창작미협전, 신상회전에 관여한 외에 60년대 초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의 출품을 계기로 동 추천작가, 초대작가의 서열에 오른다.
그의 실질적인 작품활동은 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유엽의 작품에는 '소'(牛)가 자주 등장한다. (중략) 오랜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특히 한 국인에게는 소라고 하는 친근한 동반자, 주인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추종자가 생겼다. 한 국의 소, 황소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인성을 왜나 닮은 한국적 체질의 상징성을 고루 갖춘 우리 모두의 벗이다.
소그림은 곧 지금은 자꾸만 사라져 가는 고향의 정서와 다름 아니다. 그 우직하고 믿음직 스러운 몸매, 강인성과 과묵함, 온갖 수모를 감내해 온 질긴 근성과 표정 깊은 슬픈 큰 눈망 울, 그러면서도 몸 속 깊이 어디서 솟구쳐 나는지 모를 장대한 힘(에너지)의 묶음으로 자신 을 감싸며 우리의 농가를 지켜온 수문장이다. 소를 즐겨 그리는 화가 황유엽은 그래서인지 화가의 인품 가운데서도 소처럼 텁텁하고 강인한 일면이 풍겨나온다. 소를 테마로 한 이 화가의 그림 어느 것이나 '망향'을 전제로 한 고향의식이 그 근저에 깔려 있다. 화가는 소라고 하는 매체를 통해 아련한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황소의 등허리에 얹혀 가는 목동들의 모습을 통해서, 혹은 여인과의 대비를 통해서도 나타 내 보인다.
단오같은 명절날에 시골 씨름판에서 패자(獨者)인 주인을 기다리는 '현상붙은 소 '도 있다. 확대된 소의 초상은 더욱 감동적이다.]
[황유엽
생몰년 : 1916~2010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 1930년 전국학생미술전 1등 상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1935)에 입선
-도쿄 다이헤이요미술학교 유학,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지만 집안의 반대로 귀국, 평양에서 활동.
-평양 시절 최영림, 장리석, 박수근 등과 함께 미술 모임 ‘주호회'(珠壺)를 만들어 활동
-1951년 국방부 종군화가로 활동
-1957년, 순수한 창작활동을 강조한 창작미술협회 결성
-1960년대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작품 출품
-서라벌예술대학 출강(1964), 중앙대학교 예술대학교수로 부임(1976)
황유엽은 시골에서 자랐는데, 서당에 갈 때면 냇가와 붉은 흙으로 덮인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붉은 흙으로, 사람이나 소 등 여러 모양을 만들면서 놀았다고 한다. 1.4후퇴 때 부모님은 두고 두 형제만 월남을 한다.
붓 대신에 나이프를 사용. 캔버스에 물감을 짜서, 나이프로 선을 긋고, 색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소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로 소를 즐겨 그렸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자 친근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키는 소에 그리운 고향을 투영하였다. 화면의 거친 붓 터치와 두터운 마티에르, 형체를 드러내는 검은색 윤곽선은 1970년대 작가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작품
-[고향의 노래, 1978]
외양간 앞에서 소와 개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년이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을 목가적으로 묘사한 작품. 화면의 어두운 갈색과 붉은색 배경에 형체를 허물어트리면서 자유분방하게 찍어 바른 듯한 거친 붓 터치와 두터운 마티에르, 투박한 검은색 윤곽선은 1970년대에 작가가 즐겨 사용했던 표현주의적 경향의 기법. 이처럼 격렬한 질료감, 그 속에 농축된 형상들은 그가 겪은 전쟁의 참화와 공포, 가난 등의 아픔을 내포한다.
-[목가(牧歌), 1978]
-[석양의 언덕, 1978]
-[옛 노래, 1978]
-[양지, 1978]
-[목가(牧歌), 1970년대]
-[추석전일, 1978]
-[정담, 1976]
-[감나무집, 1977]
[이봉상(李鳳商)
출생 – 사망 : 1916년 ~ 1970년
출생지 서울
직업 서양화가
서양화가. 서울 태생으로 1937년 경성사범학교를 나왔다. 학생 때부터 선전에 입선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해방 후에는 미술교육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58~1966년 홍대 교수) 창작미협, 신상회(新象會), 구상전(具象展)등의 창립에 가담 미술운동을 주도하며 국전 심사위원을 하였다. 그 사이 개인전을 3회 가졌으며 중후한 질감과 서정적인 구상작품을 많이 남기었으나 만년에는 추상에도 접근하였다.
대표작으로 『고궁에서』, 『미분화시대 이후』등이 있다.]
[최영림(崔榮林)
최영림(1916년 ~ 1985년 7월 13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출생 1916년(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85년 7월 13일
직업 화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중퇴했다. 선전(鮮展) 및 일본 판화협회전에 출품했다.
해방 후에 제8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55년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하고 계속 마닐라, 사이공, 도쿄 등지의 국제전에도 출품했다. 서라벌예술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하였다. 그룹활동으로는 창작미술협회(創作美術協會)에 참가하였다가 그 후 구상전(具象展)의 지도적인 인물로 활약하였다. 1971년에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평가 및 작품
그의 작풍(作風)은 초기의 도식적(圖式的)인 구상경향(具象傾向)에서 출발하여 점차 토속적인 데로 흐르며, 그 위에 선(禪)과 무속(巫俗)과 에로티시즘을 혼융한 독자적인 스타일로서 특색지어진다고 평가된다. 작품 〈낙(樂)〉, 〈여인의 일지(日誌)〉 등이 있다.]
[박고석 (朴古石)
본명 박요섭(朴耀燮)
별칭 호(號)는 고석(古石)
출생 1917년 2월 25일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사망 2002년 5월 23일(85세)
직업 서양화가, 영화 미술감독, 영화 제화 디자이너, 판화가, 조각가
학력 평안남도 평양 숭실학교 졸업
일본 도쿄 니혼 고등상업학교 전문학사
일본 도쿄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 학사
종교 개신교(침례회)
분야 서양화, 판화, 조각, 미술감독, 제화 디자인
부모 박종은(부), 김승은(모)
배우자 김순자
자녀 슬하 3남 1녀
박고석(朴古石, 1917년 2월 25일 ~ 2002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영화 미술감독, 영화 제화 디자이너, 판화가, 조각가이다.
본명(本名)은 박요섭(朴耀燮)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평안남도 평양 출생이다.
그는 193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하였고 1955년에는 홍성기(洪性麒)가 감독한 영화 《열애》로 영화 미술감독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김수용(金洙容)이 감독한 영화 《사격장의 아이들》로 영화 제화(題畵) 디자이너 데뷔하였고 1970년 판화가로도 미술 분야에 등단하였으며 1972년 조각가로도 등단하였다.
대표작으로는 6·25전쟁 중의 상황을 강렬하고 거친 필치로 표현한 「범일동 풍경」(1951)과 「가족」(1953), 단순하고 굵은 선과 강렬한 색채로 산의 형상을 묘사한 「치악산」(1973)과 「외설악」(1981) 등이 있다.
상훈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87년 금관문화훈장]
[홍종명(洪鍾鳴)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생명체를 소재로 작업
1922년5월22일 ~ 2004년9월3일
구체적인 현실보다 물고기, 꽃, 소등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생명체를 소재로 작업한 한국의 서양화가·문화예술인. 저서로는 《실용색채》, 《흙에 묻혀 사는 이의 고운 마음》등이 있다.
출생-사망 평양충생 1922.5.22 ~ 2004.9.3
본관 남양
학력 일본동경미술학교(현 대학교)
활동분야 미술(서양화)
출생지 평양특별시
주요수상 교육공로상,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문화상
주요저서 《실용색채》 《홍종명화집》
주요작품 《자화상》 《3월의 태양》 《하구》
1922년 5월 22일 평양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941년 평양 광성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도쿄[東京]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평양 숭인중학교와 평양제2중학교 교사, 국제대학교, 경희대학교, 숭의여자전문대학(지금의 숭의여자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자문위원 등을 지내고 1988년 구상전 회장, 한국미술협회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작품은 구체적인 현실보다 물고기·꽃·소 등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생명체를 소재로 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개인전, 타이완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프랑스 그랑 팔레 초대전 등을 개최하였다. 제2회·6회 국전에서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기독교미술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상, 국민훈장 목련장·동백장, 예술문화장(공로상), 문화훈장 은관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실용색채》(1976), 《새로운 구상회화의 모색》(1978), 《홍종명화집》(1983), 《흙에 묻혀 사는 이의 고운 마음》(1989) 등이 있으며 대표적 작품으로 《자화상》(1953), 《황소》(1964), 《3월의 태양》(1970), 《하구》(1980), 《산과 태양》(1990), 《시장 가는 날》 등이 있다. 2004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吳之湖)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가로 우리나라 자연이 지닌 밝고 명랑한 풍광을 인상주의에 결합시켰다.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특유의 붓 터치와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감으로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출생-사망 : 1905.12.24 ~ 1982.12.25
본관 : 동복(同福)
본명 : 점수(占壽)
출생지 : 전남 화순
주요수상
국민훈장 모란장(1973),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 금관문화훈장(2002)
주요저서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주요작품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함부르크 풍경》(1974)
주요업적 : 한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에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통한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점수(占壽)였고,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전주고보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휘문고보로 편입하면서 신문화와 신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있었다. 또한 2년 선배인 정지용을 비롯해 1년 후배인 이마동, 이태준 등 후일 문화예술계를 빛낼 많은 인재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지호가 평생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혜석의 《농가》를 본 이후였다. 그는 1923년 고려미술원에 다니며 김주경과 김용준 등을 만났다.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오지호는 기초과정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2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던 교육기관으로 오지호는 후지시마 다케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지호는 193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주경 등과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인 ‘녹향회’의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기법의 유화를 발표하고, 1935년 무렵부터는 국내 화단을 지배하던 향토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자연이 지닌 밝고 명랑한 풍광을 밝은 색채로 담아냈다. 1938년에는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화집을 제작하면서 어두운 화폭에 갇혔던 민족의 빛과 영혼을 밝은 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은 단순히 인상주의를 토착화시켰다는 의미를 넘어 근대 화단에 민족의 혼을 불어 넣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당시 일본화단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았다. 오지호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적인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아울러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에 실린 <순수회화론>에서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는 회화론을 주창했다.
오지호는 오랜 친구인 김주경의 도움으로 1935년부터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송악산 아래 김주경이 남겨 준 초가는 그가 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그의 대표작인 《남향집》의 바로 그 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화창한 봄날의 따뜻한 기운을 쏟아지는 빛과 보라색 그림자로 표현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생각한 오지호는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문을 나서는 어린 소녀와 담장 아래에서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삽살개가 정겨운 감흥을 일으킨다.
오지호는 8.15광복 직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호남지역 미술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 전쟁 중에는 작품이 불에 타 없어지는 고통을 겪었으며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짙은 암청색의 거친 붓질이 드러나면서 자율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주관적인 감성이 강조되었다. 말년에는 유럽여행의 감흥을 분출시킨 자유분방한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오지호는 작품 활동 이외에 자신의 예술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8년에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밖에 문화재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오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7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2년 12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5년 미망인 지양진 여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 34점을 기증했으며, 2002년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주요 작품에는 《나부(裸婦)》(1928),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함부르크 풍경》(1974), 《선운사 설경》(1979), 《가을풍경》(1981) 등이 있다. 저서로는 원색판 『오지호 작품집』(1978)과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시론 『알파벳 문명의 종언』(1979) , 미학원론으로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을 남겼다.]
[김형근(金炯菫)
출생 1930년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現 통영시)
사망 2023년 9월 7일(93세)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연제구 과정로 272 (연산8동 382-10) 한양류마디병원
직업 화가, 수필가, 대학 교수
국적 대한민국
분야 서양화, 미술
사조 서양화
수상
1968. 경남도 문화상(미술창작상)
1969. 제18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수석상)
1970 제19회 국전 대통령상(최고상, 과녁)
1981 서울시 문화상
1995 제1회 통영시 문화상
1999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수상(오지호 미술상)
주요 작품
1970년 과녁
1973년 장미
1978년 풍요의 열매
1981년 정물
1982년 여인
1983년 도라지 꽃 속의 여인
1983년 모과
1983년 안개꽃
1983년 황과 黃果
1986년 가을에의 초대(招待)
1986년 포도
1986년 황색의 계절
1988년 화병
1990년 자매
1990년 행(幸)
1990년 황색의 계절
1990-1991년 가을의 연가
1991년 향수 (Nostalgia)
1995년 연가
1998년 가을의 연가
2000년 꽃 광주리
김형근(金炯菫, 1930년~2023년 9월 7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수필가이자 대학 교수였다.
193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고인은 통영수산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때 소위로 임관해 1958년 대위로 전역했다. 그 뒤 정치대학(건국대) 법정과를 다녔지만,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충무(통영)시 공무원으로 일하며 나전칠기협동조합을 만들고, ‘꼬마화가 사생대회’ ‘한산대첩 기념제전’을 기획했다. 1968년 경남문화상을 받았다. 1970년 국전에서 ‘과녁’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등 여러 차례 국전에서 수상했다. 1971년 미국 뉴욕으로 가 활발히 활동했고, 귀국 후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 회화과 교수로 근무했다. 1992년 국전 심사위원장을 지냈다.
金炯菫씨라면 중앙화단에선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과녁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가라면 모르는 이가 적을 것이다. 그가 중앙화단에서 비교적 생소한 편이란 것은 주방에 주거를 두었다는 조건에서 뿐 아니라 중앙을 혜성과 같은 존재로 돋보이게 하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게 한다. 그가 처음 국전에 특선을 차지하였을 때는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최고상을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비상한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것은 이처럼 몇차레의 국전 출품을 통해 단연 頂点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데서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앙화단에선 거의 무명이었던 지방작가였다는 점에서 설명되었다.
경력
1971. New York American School 수료
1999. 세종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76~1982. 세종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역임
1982.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1983. 서울시전 초대작가
1983. 중앙일보 미술대전 초대작가
1983. 문화공보부 대한민국 국전 심사위원 역임
1989.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1995. 서울 국제 현대미술회 회장
1998.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1998. 뉴욕한인미술회 New York 한인 미술협회 고문
2000. 미국 Jersey City에서 년 4월 김형근 화백의 달 제정
2002~2004. 대전광역시 금강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2002. 대한민국 미술협회 고문
작품 활동
1970년 과녁
1973년 장미
1978년 풍요의 열매
1981년 정물
1982년 여인
1983년 도라지 꽃 속의 여인
1983년 모과
1983년 안개꽃
1983년 황과 黃果
1986년 가을에의 초대(招待)
1986년 포도
1986년 황색의 계절
1988년 화병
1990년 자매
1990년 행 (幸)
1990년 황색의 계절
1990-1991년 가을의 연가
1991년 향수 (Nostalgia)
1995년 연가
1998년 가을의 연가
2000년 꽃 광주리
수상
1968. 경남도 문화상(미술창작상)
1969. 제18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수석상)
1970 제19회 국전 대통령상(최고상, 과녁)
1981 서울시 문화상
1995 제1회 통영시 문화상
1999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수상(오지호 미술상)]
[김형구(金亨球)
생몰년 1922년~2015년 8월 6일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국적 대한민국
분야 서양화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형구는 누이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데이고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를 수료하였다. 재학중 태평양전쟁에 학도병으로 징집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종군화가로 활동하였다. 제국미술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백우회를 비롯하여 목우회와 신미술회 등 구상회화 계열의 단체에서의 활동과 전시를 통해 폭넓을 작품활동을 펼쳤다.
작품세계
김형구는 '미의 본질은 사물이 가진 원초적인 신비를 색이나 형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고전적인 자연주의 회화 이념에 충실한 자세로 인물을 포함한 풍경을 소재로 사실적인 화풍을 견지하였다. 감각과 정념에 경도되지 않고 대상을 관찰하여 얻은 시각적 진실을 화면 위에 재현해내는 것을 회화의 역할로 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 다수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며 풍경 또한 일상적인 생활 주변에서 포착한 경우가 많은 것도 미술에 대한 그의 신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이나 한적한 시골 마을, 그리고 고요한 도시의 풍경들은 감성적이거나 역동적이기보다 평온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들에 재현된 정경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과 세계의 아름다움을 침묵의 고요 속에서 차분하게 느끼도록 한다. 이러한 그의 작풍은 두 차례에 걸친 전쟁 참여를 통해 얻은 생명 존중과 자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력
1941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 수학
1944 일본 데이고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졸업
경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 고문
세종대학교 교수
전시
1954-61 백우회전
1957 세계가톨릭미술인전, 바티칸
1958-72 목우회전
1970 한국현역작가초대전, 경복궁미술관
1971-90 서울가톨릭미술협회전
1972 한국근대미술 6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73 현대미술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1978 아시아현대미술전, 동경, 대만
1979 한국미술 오늘의 방법전, 미술회관
1981 서양화가가 본 한국의 자연전, 국립현대미술관
1984 한국현대성화전, 로마 산마르코 화랑
1986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1987 한국인물화전, 호암갤러리
1990 한국미술-오늘의 상황전, 예술의전당
1994 서울풍경의 변천전, 예술의전당
1999 한국미술 99-인간, 자연, 사물, 국립현대미술관
2005 이동훈미술상 수상기념 김형구전, 대전시립미술관
수상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연 29회 출품, 입선 4회, 특선 3회
1985 국민훈장 동백장
1992 한국문화예술협회 예술문화상 공로상
1996 옥관문화훈장
2004 제2회 이동훈미술상
2005 제10회 가톨릭미술상 특별상]
[강정영(姜丁永)
1947년 8월 23일~2003년 4월 15일
서양화가, 목우회 사무국장, 서양화
학력
1968년-1975년 계명대학교 서양화 학사
1976년-1978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
기관 경력
한국미술협회 회원
1977년 심상회 회원 및 고문
1985년 대구시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1993년 목우회 사무국 국장
1998년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
1999년 서울미술협회 부회장
전시
1974년, 3인전, 대구백화점화랑
1975년-1976년, 이상회현대공간회교류전, 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개관초대전, 대구 동아백화점화랑
1976년, 시립도서관상설전시
1976년, 대구현대화랑 30대초대전, 대구 현대화랑
1976년, 개관초대전, 고려백화점화랑
1976년-1977년, 영남사실작가회전, 부산 현대화랑
1977년, 개인전, 대구백화점A화랑
1977년, 르살롱전, 파리 그랑팔레
1977년-1985년, 심상회회원전, 대구백화점화랑
1978년, 향토작가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78년, 청년작가5인초대전, 대구 이목화랑
1978년, 경북도전금상
1978년-1979년, 미술단체초대연립전, 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진주실업전문대학교수미전
1979년, 영호남미술초대전
1980년, 서양화초대전, 진주 가야화랑
1980년, 경향작가초대전, 마산 동서화랑
1980년, 12인초대전
1981년, 평행전, 진주 가야화랑
1981년, 정예작가5인초대전, 대구 중앙미술관
1982년, 선과 색전, 관훈미술관
1982년, 구상작가5인초대전, 대구 삼보화랑
1982년, 경남중진작가초대전, 경남신문사
1982년-1983년, 동서양화정예작가초대전, 롯데미술관
1983년, 서양화중견작가초대전, 대구 중앙미술관
1983년, 개인전, 대구 이목화랑
1983년, 파스텔초대전, 대구 삼보화랑
1983년, 개관기념전, 대구 예맥화랑
1983년, 대구미술````````````````83전초대출품, 대구 태백화랑
1984년, 영호남교류전, 광주 남도예술회관
1984년, 서양화초대전, 대구 동아백화점화랑
1984년, 대구서양화60년사전, 대구 동아쇼핑센타
1984년, ````````````````84 선과 색 대작전, 선화랑
1985년, 주목작가소묘전 초대출품, 대구 명화랑
1985년, 대구근교풍경화초대전, 대구 예맥화랑
1985년, 동서양화 100인전, 서울갤러리
1985년, 한&midot;중 미술교류전
1985년, 개인전, 서울갤러리
1986년, 한국대표작가 100인전초대출품, 전경련회관
1986년-1988년, ````````````````86````````````````88 영호남미술교류전, 광주 남도예술회관
1987년, 서양화 20인초대전, 진화랑
1988년, 서양화 30인초대전, 대구 예맥화랑
1988년, 시가 있는 그림전, 금호갤러리
1988년-1990년, ````````````````88````````````````90 한·중 미술교류전, 시민회관전시실
1988년-1989 년, 대구미술대전초대작가전, 시민회관
1989년, KBS개국기념미술초대전, 시민회관
1989년, 대구미술대전초대작가전, 시민회관
1989년, 향토서양화24인전초대출품, 대구은행
1989년, 영남구상작가15인전초대출품, 롯데미술관
1989년, 아주지구화가요청전
1989년, KBS개국기념미술초대전, 시민회관
1989년, 일본 센다이미술교류전
1989년, 아시아미술연맹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1989년, 서양화15인초대전, 대구 매일화랑
1989년, 대구미술대전초대작가전, 시민회관
1989년, 개관초대전, 한성갤러리
1989년, KBS개국기념미술초대전, 시민회관1990년, 개인전, 대구 한성갤러리
1990년, ````````````````90 서양화전초대출품, 대구 세일화랑
1990년, ````````````````90 동서양화신춘초대전, 서울갤러리
1990년, 한국현대서양화전 초대출품, 서울갤러리
1990년-1993년, ````````````````90, ````````````````93 회화제, 서울시립미술관
1991년, ````````````````91 한성전초대출품, 한성갤러리
1991년, 달구전초대출품, 인데코화랑
1991년, 목우회소품초대전, 청학미술관
1991년, 회화제, 서울시립미술관
1992년, 구상미술의 신춘초대전, 갤러리타임
1992년, 아시아미술연맹전, 문화예술회관
1992년, 중진작가5인전 , 대구 봉성갤러리
1992년, 신춘서양화초대전, 서울갤러리
1993년, 개관2주년기념전, 타임갤러리
1993년, 전관개관기념현대미술전, 예술의전당
1993년, 남맥회·심상회 합동전 , 문화예술회관
1993년, 개관기념전, 갤러리타임
1993년, 개관기념현대미술전, 예술의전당
1993년, ````````````````93 주부작가초대전, 영남일보사
1994년, 신춘기획전, 신미화랑
1994년, 분거의 아트리에전, 대구 대백프라자
1994년, 대구미술만남-그 새로운 표현전,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
1994년 4월 19일-4월 25일, 개인전, 대구 봉성갤러리
1993년-1996년, 구상미술의 신춘초대전, 서울갤러리
1995년, 현대서양화 30인전, 서울갤러리
1995년, 韓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롯데화랑
1995년, 3인의 자연전, 본화랑
1995년, 한국현대회화조망전, 서울갤러리
1996년 4월, 누드-사랑의 언어전, 갤러리도올
1996년 6월, 한가정 한그림-5월전, 롯데화랑
1996년 11월 12일-11월 24일, 테마전 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 롯데화랑
수상
1973년-1975년, 목우회 특선(3회)
1977년, 프랑스 르 살롱 은상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1978년, 경상북도미술대전 금상
저술
-논문
근대회화재양식에 나타난 형태변모에 관한 연구(석사학위논문), 계명대학교 대학원, 1978]
[박영선(朴泳善)
한국의 서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 일본문전(日本文展)에서 여러 번 입선하며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미술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문화장을 받았다.
출생-사망 : 1910.4.10 ~ 1994.6.15
출생지 : 평양
주요수상 : 3·1문화상, 예술원상
주요작품 : 《파리의 서커스》《박영선체불작품집》
평양 출생이다. 1936년 일본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연 5회를 특선하고 2회 수상하였다.
또 같은 무렵 일본문전(日本文展)에서도 3회 입선하였으며, 1947년까지 개인전도 5회를 열었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까지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면서 파리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한편 개인전도 열었다.
1960년부터 서라벌예대학·중앙대학교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으며, 1972년 국전심사위원장으로 선임되고,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한국 미술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3·1문화상,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작품에 《파리의 서커스》 《박영선체불작품집》 등이 있다.]
[박영선(朴泳善)
출생 일제강점기 평양부
사망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분야 서양화
박영선(朴泳善, 1910년 4월 10일 ~ 1994년 6월 15일)는 한국의 서양화가이다.
평양 출신이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등단한 뒤, 일본에 유학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국과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공동 결성한 단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호전적인 미술 작품을 전시한 결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가운데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 미술인 모임인 조선미술가동맹이 김주경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해 결성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과 회화부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후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정치 논리가 미술에 개입하는데 대하여 반대하고 순수미술을 옹호하여 우파적 입장을 개진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1969년 3·1문화상, 1982년 국민훈장 문화장을 받았다.
박영선은 누드화를 포함하여 여성을 소재로 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색채와 구도를 강조하는 화풍은 서양화의 우아함과 세련됨이 가득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주며, 여성의 얼굴도 서구형으로 묘사된다. 1955년부터 4년간 프랑스에 유학하여 활동하면서 작풍에 큰 변화가 일어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파리 유학 전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나, 유학 후에는 환상적이고 추상적인 화풍으로 변화했다.]
[김태(1931-2021)는 함경남도 홍원 출생으로, 1948년부터 평양미술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기에 월남하였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에서 수학(1951-1955년)하고 동대학원을 졸업(1967년)했다. 195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하였다. “구·추상을 가리지 않고 모여 그림을 그리자”는 취지로 앙가쥬망을 결성(1961년)하고 지속적으로 동인전에 참여했다.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님 밑에서 어촌 풍경을 그렸으며, 이는 작가 생애에 있어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1950년대 사실주의 화풍을 거쳐 1960년대 초에는 풍경의 모티브가 화면 전체를 채운 밀도가 높고 구축적인 구성의 추상적 경향을 잠시 선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풍경, 인물, 정물 등 대상을 따뜻한 시각으로 관찰하며 사실적인 경향으로 전환했다. 에메랄드색 바다, 투박한 듯 강한 붓질, 묵직한 마티에르는 작가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화면의 자연스러운 구성과 조형미로 이어진다.]
[김태(金泰)
생몰년 1931년~2021년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1931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하여 평양미술대학 재학 중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전쟁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통해 화단에 등단하였다.
작품 세계
앵포르멜(Informel)을 필두로 다양한 사조의 전위적인 추상화가 유행하던 무렵, 그는 그러한 흐름과는 비껴나 있었다. 우리의 감수성에 맞는 양식을 스스로 추구하고 실험하여 찾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택한 출발점은 모든 미술의 시작인 사실과 구상이었다.
그는 대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밖으로 보이는 외관 내부에 묻힌 본질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태도를 보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원인이자 변화하지 않는 실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흔히 후기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의 태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강한 붓질로 화면에 묵직한 재질감을 주어, 안정된 수평 위주의 구조와 율동감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균형적인 색채의 구사를 통해 조형적으로 조화로운 화면을 시도한다. 이러한 결합은 거칠고 역동적인 힘과 색채가 어우러지는 회화적인 조형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은 구축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을 벗어나 보다 자유스럽게 대상을 파악하는 유연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학력
평양 미술대학 수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경력
한국미술협회, 한국신미술협회, 한국가톨릭미술협회 회원
서울대학교 교수
전시
1954-58 제3,4,5,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경복궁미술관
1961-71 제1-10회 앙가쥬망동인전, 국립도서관전시실
1967년 민족기록화전
1973년 한국현역작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1974년 제10회 아시아현대미술전, 동경 우에노모리화랑
1978-81 한국카톨릭미술협회전, 미술회관
1979 한국미술 "오늘의 방법" 전, 미술회관
1981 서양화가의 눈으로 본 한국의 자연전, 국립현대미술관
1984-96 한국수채화작가회전, 미술회관
1985 현대미술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86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1990 한국미술-오늘의 상황전, 예술의전당
1994 서울풍경의 변천전, 예술의전당
1996 대한민국원로작가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
2000 한국미술99전-인간.자연.사물, 국립현대미술관]
[MMCA, 사진 소장품展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김연신 기자
서울문화투데이 기사 승인 : 2024.04.01. 18:21
~8.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국내·외 작가 34인 작품 200여 점, 아카이브 50여 점
강홍구, 김미현, 김희중, 오노 다다시 등 19점 첫 공개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4년 이후 10년 만에 사진 소장품전이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오는 8월 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층 1원형전시실에서 《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1,300여 점 중 국내·외 사진작가 34인의 사진 200여 점을 선별한 전시다. 1950년대를 관통해 200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풍경 및 인물사진들을 통해 도시, 일상, 역사적·사회적 사건 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모습들의 이면을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더불어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 속 사진의 전개 양상과 맥락을 확인하고, 사진 매체의 기술적, 형식적 변화 역시 파악해볼 수 있다.
전시명은 2014년작 해외영화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What’s the Time in Your World?)에서 가져왔다. 영화에서 사진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주인공을 소환한 것처럼,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나온 사진이 관객을 사진 속 풍경과 시간으로 접속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전시는 도시와 일상, 그리고 이에 영향을 준 역사적·사회적 풍경을 주제로 총 3부로 구성했다.
1부 ‘눈앞에 다가온 도시’에서는 한국 고유의 근대화 흔적이 담긴 ‘도시’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통해 현재와는 다른 도시의 모습들, 개인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도시 풍경의 입체감과 부피감을 조망한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시대상을 생생히 기록한 김희중의 <명동성당>(1956/ 2006 인화), 1990년대 공사 현장의 야경을 통해 산업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홍일의 <기둥 1>(1996)을 비롯해 박찬민, 강홍구, 금혜원 등의 작품이 출품됐다.
2부 ‘흐르는 시간에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법’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개인의 ‘일상’에 주목한다. 고단한 일상을 달래는 포장마차 속 풍경을 촬영한 김미현의 <포장마차>(2001-2003/ 2016 인화)와, 도시와 농촌의 접경 지역의 실내 풍경을 통해 1990년대 경제성장의 이면을 나타낸 전미숙의 <기억의 풍경-경북 고성>(1994), 그리고 이강우, 김천수, 구본창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3부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국내·외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을 소개한다. 2011년 일본 대지진을 기록한 오노 다다시의 <2012 후쿠시마현 소마 제방>(2012) 시리즈와, 미군의 공군 사격장이었던 매향리에 남겨진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강용석의 <매향리풍경>(1999), 송상희의 <매향리>(2005) 등이 출품된다.
도록에는 출품작의 상세 설명과 함께 영화를 전공한 서이제 소설가의 에세이 ‘수평선 지긋이 바라보기’와 정훈 사진영상이론가의 평론 ‘현대 사진속의 풍경’을 수록, 전시의 이해를 도울 예정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꾸준히 수집해왔지만 그간 자주 볼 수 없었던 중요한 사진 소장품을 10년 만에 한자리에 펼쳐 보인다”라며, “한국 현대미술 속에서 사진의 주요 흐름을 확인하고 동시대 사진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미술사적 논의를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주체적으로 바라본 세상…‘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소장품 200여 점 전시…사진으로 바라본 도시와 사람, 사건
사진들을 통해 세상이 어떤 구조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주체적 파악
8월 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층 1원형전시실
고륜형 기자 krh0830@kgnews.co.kr
경기신문 기사 등록 : 2024.06.18 11:29:11 10면
사진을 찍는 순간 세상은 포착되고 시간은 기억된다. 사진을 꺼내들었을 때 현재와 다른 과거를 마주하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가 열리고 있다. 사진을 통해 주체적으로 바라본 세상과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어디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영화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속 주인공이 사진 한 장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착안해 미술관의 사진 소장품 200여 점을 꺼내 관객들을 과거로 데려간다.
전시는 크게 삶의 물리적 기반이 되는 도시를 보여주는 ‘눈앞에 다가온 도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개인의 삶이 담긴 ‘흐르는 시간에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법’, 그리고 그 역사를 가로지르는 사회적 사건들을 다룬 ‘당신의 시간은 지금 몇 시?’로 구성된다.
‘눈앞에 다가온 도시’는 도시화가 시작된 1950년대부터 현대인 2000년대까지 찍은 사진들로 시작한다. 한영수, 김경태, 강홍구, 박찬민 등의 작가가 기록한 도시는 생성과 확장, 고도화의 과정을 보여주며 주택과 아파트 속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빽빽이 들어선 주택, 창문 없이 쌓아 올려진 아파트의 모습에서 과도한 개발에 대한 비판 의식도 들어있다.
특히 강홍구의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 안창 17’은 발전한 카메라 기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가로 폭이 6m에 달하는 이 작품은 부산의 주택가를 담았는데, 고밀화된 도시 풍경과 매체 기술의 발전이 현대 사진이 도달한 위치를 나타낸다.
‘흐르는 시간에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법’에서는 도시 속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아파트 안에서 각자 다른 인테리어로 살아가는 가족들, 주거 공간의 생활용품과 인물의 옷차림, 헤어스타일을 피사체로 삶의 단면을 근경으로 담아낸다. 구본창, 강홍구, 전미숙, 정연두 작가는 우리의 삶과 시대, 시간의 연속성을 기록했다.
이강우 작가의 ‘길-속도-운명’은 1990년대 도시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포착했다. 금요일 밤 지하철 안에서 무장 해제된 것처럼 입을 벌리고 곯아떨어진 사람들은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거리의 계단이나 지하철 공간 같은 일상의 공간을 포착해온 작가가 이미지의 상징성을 이용해 프레임을 설계하고 언어와의 관계를 모색했다.
‘당신의 시간은 지금 몇 시?’는 도시와 사람들을 형성하는 사회적 사건들을 기록한 섹션이다. 한국 전쟁, 남북 분단, DMZ, 기무사, 미군의 공군 사격장이었던 매향리, 1997년 외환위기, 지구 온난화, 온산공단, 원자력 발전소, 후쿠시마 대지진 같은 사건들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정책을 만들며 삶의 지형을 변화시켰다. 사건들을 바라보는 사진이 직접적인지, 은유적인 지 파악해본다.
한성필의 ‘그라운드 클라우드 034’는 프랑스의 노장-쉬르센(Nogent-sur-Seine)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를 찍은 사진이다. 거대한 굴뚝에서 나오는 수증기는 거대한 구름 같은 모습을 띠며 원자력의 피상적 이해를 구체적 모습으로 변환하며 평화와 공존하는 공포를 담아낸다. 이런 풍경은 ‘현실적이지만 초현실적 미장센’으로 치환된다.
미술관의 사진 소장품이 과거를 소환해 도시화 과정, 그 속의 삶, 사회를 만들어갔던 사건들을 펼쳐놓는 이번 전시는 8월 4일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모습들의 이면,《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K스피릿 기사 입력 : 2024.04.19. 20:38
기자명 김경아 기자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1,300여 점 중 국내ㆍ외 사진작가 34인의 사진 200여 점을 선별한 전시이다.
1950년대를 관통하여 200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풍경 및 인물사진들을 통해 도시, 일상, 역사적ㆍ사회적 사건 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모습들의 이면을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더불어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 속 사진의 전개 양상과 맥락을 확인하고, 사진 매체의 기술적, 형식적 변화 역시 파악해볼 수 있다.
1부 ‘눈앞에 다가온 도시’에서는 한국 고유의 근대화 흔적이 담긴 ‘도시’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도시는 점차 더 많은 건물로 채워져 먼 곳 보다는 눈앞의 풍경만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변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통해 현재와는 다른 도시의 모습들, 개인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도시 풍경의 입체감과 부피감을 조망한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시대상을 생생히 기록한 김희중의 <명동성당>(1956/ 2006 인화), 1990년대 공사 현장의 야경을 통해 산업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홍일의 <기둥 1>(1996)을 비롯해 박찬민, 강홍구, 금혜원 등의 작품이 출품된다.
2부 ‘흐르는 시간에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법’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개인의 ‘일상’에 주목한다. 특히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장소와 일상용품 등을 근경에서 바라봄으로써 시대에 따른 개인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유추한다. 고단한 일상을 달래는 포장마차 속 풍경을 촬영한 김미현의 <포장마차>(2001-2003/ 2016 인화)와, 도시와 농촌의 접경 지역의 실내 풍경을 통해 1990년대 경제성장의 이면을 나타낸 전미숙의 <기억의 풍경-경북 고성>(1994), 그리고 이강우, 김천수, 구본창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세대별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시대적 표상이 담긴 이미지들을 통해 과거 일상을 엿봄과 동시에 시대와 세대가 연결되어 있음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본다.
3부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우리 삶을 가로지르는 국내ㆍ외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을 소개한다. 도시와 일상이 형성되는 방식에 영향을 준 사회·정치적 사건들은 다양한 형태로 개인의 삶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2011년 일본 대지진을 기록한 오노 다다시의 <2012 후쿠시마현 소마 제방>(2012) 시리즈와 미군의 공군 사격장이었던 매향리에 남겨진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강용석의 <매향리풍경>(1999), 송상희의 <매향리>(2005) 등이 출품된다. 이외 이상일, 노순택 등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무관하거나 무관심했던 사건들에 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를 재고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은 출품작과 사진 및 영상 아카이브를 중첩해보며 변화된 도시와 일상 풍경 및 시대적 배경을 다각도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
전시는 화~일,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김경아 기자]
[김희중(1940~2019)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팀장을 지낸 최초의 동양인 사진가였다. 그의 작업에는 한국전쟁 이후의 도시 공간과 함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면서도 대상을 향한 자신의 고유한 시선을 유지함으로써 형식적인 완결성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 특징은 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부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한옥마을(기와집)›과 언덕 아래에서 성당을 향하는 구도로, 수녀의 뒷모습을 담아낸 ‹명동성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다양한 구도로 대상을 보여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를 재인식하게 하는 방식으로 공간에 새로운 깊이감을 부여한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아이스께끼 파티›, ‹책방›, ‹기다리는 사람들›은 상업과 생활이 맞물린 서울의 명동 인근에서 촬영한 작업이다. 작품 속 인물의 차림새, 표정 등을 통해 전후 사람들의 삶에 서구 문화가 뒤섞인 채 유입되는 혼란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젤라틴실버프린트로 작품을 출력해, 작지만 선명한 흑백의 명암으로 1950년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히 기록했다. 그의 작업에서는 리얼리즘과 회화주의 (pictorial photography)가 교차하는 등 당대 우리나라의 사진 형식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홍순태(1934~2016)는 10년간 산업화의 중심에 있던 청계천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기록했다. 청계천은 조선 시대부터 도시의 역사를 상징하는 오래된 장소였다. 그의 사진은 청계천의 복개 공사와 고가도로 건설과 같은 도시 개발 과정을 기록한다. 청계천이라는 우리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를 기록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형성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청계천, 1968›은 청계천 판자촌에 살던 어린이나 인물의 모습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모습을 포착한다. 이처럼 홍순태의 사진은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집단의 이야기이다. 사진 속 청계천 거리의 움막집과 판자촌은 물론,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를 상징했던 건축물도 도시 정비 이후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이다. 작가는 재개발과 도시 정비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시민의 일상을 기록함으로써 산업화의 이면을 함께 드러낸다.]
[전미숙(1965~)은 일상적인 낙서와 그림, 물건을 통해 바라본 우리 문화의 변화 양상과 시대상에 주목하며 1990년대 대도시 주변부, 도시와 농촌의 접경 지역, 도시인을 위한 휴양지 등을 촬영했다. 작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간에 떠밀려 사람들이 선뜻 들여다보지 않는 일상 속 빛바랜 대상을 기록했다. 전통적인 것과 외래문화가 뒤섞여 다소 혼란스럽고 촌스러운 공간은 한 시대가 양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문화 비평적 기록물’이라 칭한다. 전미숙은 경제 성장, 대중문화의 발전 등 화려한 수식 뒤로 밀려난 도시와 농촌의 경계, 휴양지의 모습을 통해 1990년대 시대상을 보여준다. 벽에서 천장으로 비스듬히 붙여진 1960년대 스크린의 우상, 알랭 들롱(Alain Delon)의 사진은 세탁소의 분위기와 상반되지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기억의 풍경-경북 고성›은 고성의 오래된 세탁소를 촬영한 작업이다. 세탁소 내부는 세탁물과 수선물, 재봉틀이 빼곡히 놓여 있는 어수선한 모습이다.]
[오노 다다시(1960~)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로, 주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해왔다. 이 작업은 ‹2011. 3. 11. 이후 247일부터 341일까지 시리즈›에 속한다. 제목의 2011년 3월 11일은 일본 대지진이 있었던 날로, 작가는 8개월 동안 일본의 파괴된 해안선을 걸으며 이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는 쓰나미로 폐허가 된 토호쿠 지역의 가옥과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원자력과 자연의 불가항력적 연결고리를 스트레이트 포토 방식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다큐멘터리 사진 안에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해석과 사적인 감수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오노 다다시의 사진 속 풍경은 모두 실존하는 현실 속 장소지만, 작품 속에서는 일상과 일탈이 공존하는 가공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대지진 이후 10여 년이 흐른 현재, 변해버린 풍경과 현실에 대한 다양한 견해 또한 쌓이고 있다.]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음악-드로잉으로 연결된 ‘원형정원’
이지완 기자
서울문화투데이 기사 승인 : 2023.11.09. 10:37
MMCA과천 ‘원형구역’, 11.15~24.10.20
‘연결’ 키워드…정승현, 수연ㆍ엄유정 참여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작품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과천관의 숨겨진 명소, 원형정원과 옥상 일대를 드로잉과 음악으로 만나는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을 15일부터 내년 10월 20일까지 개최한다.
MMCA 과천프로젝트(MMCA Gwacheon Project)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020년부터 과천관 특화 및 야외 공간 활성화를 위해 실시하고 있는 중장기 공간재생 프로젝트다. 2026년 과천관 개관 4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미술관을 재생해, 예술적 경험의 무대를 곳곳에 펼쳐나가고 있다.
올해는 3층 옥상정원, 2층 원형정원과 동그라미 쉼터 등 세 공간으로 이뤄진 ‘원형구역’을 대상으로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을 개최한다. 과천관의 숨겨진 명소인 2, 3층 정원 일대는 내ㆍ외부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관람객에게 전시 관람과는 다른 휴식과 사유의 공간을 제공해오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연결’을 키워드로 과천관 원형구역의 건축적 특색과 활용성을 재해석한 드로잉과 음악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세 공간에 연결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이 다층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활성화를 시도했다. 야외 원형정원을 둘러싼 내부 공간인 ‘동그라미 쉼터’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된 수연, 엄유정의 드로잉 60여 점을 전시하며, 정승현이 구성한 14곡의 음악 재생목록(플레이리스트)을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는 정승현은 미술관의 원형정원과 옥상 일대를 정신적 쉼을 얻는 공간으로 재해석해 이곳과 어울리는 14곡의 재생목록을 꾸렸다. 정승현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시작, 태동, 힘, 성장, 정화, 회귀’ 순으로 구성된 재생목록 중 ‘시작’<0>(2023) 과 ‘회귀’<Vitality>(2023) 2곡을 작곡했다. 나머지 12곡은 동시대 음악가의 음악에서 선별해 재생 목록으로 구성했다.
정승현은 미술관에서 받은 영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렬한 주제나 이미지를 지닌 곡보다는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정신적 ‘쉼’이 가능한 음악이 필요하다고 봤다. 천오백 곡 이상 탐색하며 타악기 같은 큰 볼륨이 필요한 악기는 배제하고, 장조곡 위주로 선택한다거나, 앰비언트 효과를 고려하는 등 나름의 기준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작가로 활동하는 수연과 엄유정은 미술관의 원형정원, 옥상정원 일대의 건축 구조물의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 속에 자라나고 있는 200여 종의 식물들과 계절의 풍경을 드로잉으로 재해석했다.
수연은 모눈종이를 이루는 작은 칸에 정원의 식물과 가시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에너지 등을 담아 상상의 영역을 넓힌다. 국내 미술관 건축의 표준을 제시했던 과천관을 방문하는 길부터 건물의 외형과 특수한 조건에 조성된 정원 구조를 중점으로 한 드로잉 작업을 선보인다. 엄유정은 오일 스틱과 아크릴 잉크를 활용한 드로잉을 통해 흑백에 가까운 무채색으로 식물의 순간을 묘사한다. 세밀화처럼 재현적이라기보다 대상을 자신만의 시각 언어로 재해석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정원의 식재 중 댕강 나무, 털댕강 나무, 큰바늘꽃, 쇠뜨기, 좀작살 나무를 관찰해 드로잉을 선보인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려 하는 순간과 같이 식물의 작은 움직임과 성장의 순간을 표현해 사계절의 정원을 입체적으로 사유해 볼 수 있게 한다.
관람객들은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을 통해 원형구역을 하나로 ‘연결’한 음악과 드로잉을 감상하며, 정원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적 정보를 공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연, 엄유정의 드로잉을 수록한 아트북은 동그라미 쉼터에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으며, 과천 아트숍 및 서울관 MMCA 미술책방에서 구매 가능하다. 또한,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음악 재생목록은 동그라미 쉼터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유튜브 채널(youtube.com/MMCAKorea)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는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 2층의 원형정원과 3층 옥상정원의 수직적인 연결성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보완하며, 관람객의 유동적인 공간의 이용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한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은 과천관 로비에 위치한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을 따라 경사로를 올라오는 길에 찾을 수 있는 ‘원형구역’(원형정원, 동그라미 쉼터, 옥상정원)을 공간 재생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1시간 분량의 미술관 전용 음악 재생목록(플레이리스트)을 제작한 음악감독 정승현, 200여 점이 넘는 원형정원의 식재 정보를 시각 언어로 재해석한 드로잉작가 수연, 엄유정, 정제된 언어를 선보이는 음악 비평가 김호경, 시인 박세미 등 예술 분야의 여러 전문가와 함께 원형구역의 ‘연결’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해 본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각적, 청각적 자극에 의한 감각기억에서 시작하나 금세 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시각 정보 이외의 청각, 후각 등의 다른 감각 경험을 추가함으로써 관람자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관람객은 정원의 식재와 미술관 공간을 재해석한 감각적인 작업물을 통해 원형구역의 순환하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원형구역을 방문한 관람객은 음악과 드로잉을 통한 다층적 공간 경험으로 인해 기존 프로젝트들과의 연결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4:48~14:50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대공원역으로 태워다 줄 셔틀 버스 승차 대기
14:50~14:58 셔틀 버스를 타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대공원역으로 이동 [8분 소요]
14:58~15:03 대공원역에서 삼각지역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03~16:03 대공원역에서 4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 소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층 안내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층 안내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층 안내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셔틀버스
이용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