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아침
反戰
우 영 규 (시인· 문학평론가)
얼마 전 평소에 알고 있던 지인과 오랜만에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녀와의 깊은 얘기는 생략되었지만, 일본생활이 아직은 힘든 듯했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3,4년 전 그 어느 날 일본으로 떠난다고 했고 여행이 아니라 돈 벌로 가는 일본행이라 했으니 짐작건대 모국을 떠난 타국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수년 전 문학 카페에서 문학이야기가 단초가 되어 알게 된 그녀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서울)에서 살았는데 사업실패로 인하여 먹고 살기 어려운 현실을 가끔 내게 토로하곤 했었다. 자신은 미리 계획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도 살기 어려운데 물가 비싼 일본으로 가서 어떻게 살아나가려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타국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현지의 문화적 적응이나 언어관계로 늘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의 일본 정착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가고도 남는다. 그날 메일에서 ‘아예 일본에 눌어붙어 살 작정이냐’라고 물었더니 ‘그동안 힘들게 생활하면서 빚 갚기 바빴다.’며 ‘아직 몇 년 더 살아야겠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어려운 경제 사정이나 실업난 등을 고려해 볼 때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요즘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유학과 더불어 어학연수(주로 영어)까지 하고서도 취직도 못 하는 자식에게 부모는 무엇을 어떻게 더 해줘야 할지를 걱정하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옛날처럼 자식이 출세는 못하더라도 자기 인생을 헤쳐나 갈 수 있는 기틀이라도 마련되어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이니 이제는 자식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은 아예 포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자식에게 바라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죄인처럼 느끼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아니, 그건 아니더라도 제발 나쁜 일에 관여되어서 부모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세상이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홀연히 그렇게 타국으로 떠나 산업전선에 뛰어든 그는 애국자이며 감히 민간 외교관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다.
효경에 나오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 했다. 이는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높여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라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공자로부터 전해 받은 효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이 문구는 효경의 맨 처음 ‘개종명의’장에 나오는 것으로써 孝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전의 입신(立身)이라 하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으로 이는 관직의 높은 벼슬에 올라 누구 집의 자식이라는 이름을 널리 날려 우회적으로 부모의 성함을 높이는 그것이 곧 효도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인식은 같이하지만, 옛날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요즘 세상에 꼭 그렇게 행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입신(立身)보다는 행도(行道)에 더 중요함을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자식이 좋은 취직이 되었더라도 올바른 길로 가지 않고 나쁜 일에 연루되었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 한일이요, 그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행도를 무시함으로써 양명(揚名)은 고사하고 오명(汚名)으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은 우리 국민에게 있어 참으로 희망적인 3월이었을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한국인이 세계무대에 나가 이름을 떨치는 일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가 좋아하지 않을까. 그 어린 나이의 김연아 선수는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에 등극하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날아온 낭보로 모처럼 온 국민이 환하게 웃었고 신이 났었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우승이나 다름없는 준우승을 하여 온 국민의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올 3월은 말 그대로 희망을 안겨다 준 달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 사회 전반에서 어렵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한 피부로 느끼는 요즘의 말라버린 감정에 비유할 때 이 같은 낭보는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자신의 입신은 물론이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국위를 선양하는 나라의 보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잘 키운 자식 열 대통령 안 부럽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지 않은가.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이러한 인물들은 대개 끝까지 양명(揚名)으로 남게 되지 오명(汚名)으로 남게 될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말이기도 하다.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행복의 얼굴」 김현승 《김현승 시선집》1974년
1970년대를 풍미하는 것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의 일화를 정리하여 회고 집을 낸 ‘데이비드 심프슨’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그 무렵 당시 미국의 M16자동소총 수출업체였던 맥도날드 더글러스사의 중역이었다. 그의 회고 집에서 보면 M16자동소총 수입을 결정해준 대통령각하께 감사의 뜻으로 국방에 도움이 되라고 100만 달러의 돈을 비서관을 통해 전달했는데 대통령은 이제 그 돈은 내 돈이니 그 돈 만큼 무기를 더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나는 그의 얼굴에서 조그마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서술했고 “사치와 감동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스승 같은 훌륭한 분이었다.”고 진솔하게 심경을 밝혔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이 한 나라로서 대반전을 이룬 이면에는 최고지도자의 훌륭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는 전 세계가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결코 전직 대통령의 공과를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결국, 그 반전의 결과 뒤에는 정신력과 피나는 노력,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정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싶은 것이다. 어려운 작금의 나라 사정이나 혹은 개인의 일에도 반전의 기회는 분명히 있는 법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반전은 너무나 많다. 반전이 없다면, 아니 반전의 희망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우리가 늘 접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도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밋밋할 것이고 뒤집기의 기대가 없다면 야구나 축구 등의 스포츠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문학에서도 그러하다. 한 편의 시에서도 반전의 효과는 대단하다. 훌륭한 시 한 편에서 독자로부터 더 큰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바로 반전의 효과가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나 반전의 기회는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이나 하나같이 힘든 우리나 국가가 반전의 희망을 품고 산다면 분명히 기회는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반전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주름살만 자꾸 늘어가는 서민의 삶이 팍팍하다. 우리의 삶에도 반전은 있다. 그렇다고 삶의 반전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뜻하지 않은 개발 덕분에 생겨난 촌부나 로또복권의 대박이 불행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선인들은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세상사를 새기며 일희일비(一喜一悲)를 취하지 않는 삶의 여유를 덕목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일 게다. 우리 모두 풋풋한 마음과 희망으로 삶의 반전, 그 짜릿하고 통쾌한 날이 오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松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