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로에섬
인구 약 6만 8천(1992). 1558년 에스파냐인이 발견하였다. 해안산맥의 연장이며, 산이 많고 삼림에 뒤덮여 있다. 서해안은 절벽이며, 동해안은 완만한 지형이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지만 습도가 높으며 곳에 따라 강수량이 5,000mm나 된다. 보리 ·사과 등을 생산하고 목축이 활발하며, 목재 ·석탄이 산출된다. 중심도시는 북안의 앙쿠드와 동안의 카스트로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칠로에 섬의 교회들[ Churches of Chiloé ](유네스코 세계유산)
요약 칠로에(Chiloé) 섬의 교회들은 뛰어난 형태의 목조 교회 건축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사례이다. 이 교회들은 예수회 순회 선교단(Jesuit Peripatetic Mission)이 17세기~18세기에 시작한 선교 사업의 전통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계승·발전시켜 왔다. 교회들은 칠로에 섬의 풍부한 무형 유산을 구현하면서 토착 문화와 유럽 문화가 성공적으로 융합했다는 증거물로, 지역사회의 정신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물과 경관, 환경이 완벽하게 통합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
칠로에 교회들은 유럽 문화와 전통 토착 문화가 성공적으로 융합된 목조 건축물의 독특하고 뛰어난 사례이다. 17세기~18세기 예수회 선교 활동의 산물인 메스티조 문화(mestizo culture)가 칠로에 섬에 본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이례적일 만큼 우수한 목조 교회 건축물들이다.
칠로에 섬은 차카오(Chacao) 운하에서 코르코바도(Corcovado) 만까지 뻗어 있다. 16세기에 이 지역의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의 혼합경제에 기반을 둔 정착 생활을 했다. 16세기 중반에는 스페인의 항해자들이 이 섬을 발견했지만,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Martín Ruiz de Gamboa)가 그란데 데 칠로에(Grande de Chiloé) 섬에 산티아고 데 카스트로(Santiago de Castro) 시와 차카오 시를 건설했던 1567년에 가서야 식민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탐사를 목적으로 한 1608년의 방문 이후, 예수회가 선교 사업을 시작하려고 선교사를 파견하면서 섬의 문화적 특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정착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당과 선교사를 위한 숙박 시설을 만들고 지역의 건축 재료와 기술을 이용해 지역 공동체를 건설했다.
19세기 말 무렵, 100개가 넘는 교회가 건설되었다. 그중 50개~60개의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14개가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었다. 아차오(Achao, 퀸차오(Quinchao)), 퀸차오, 카스트로, 릴란(Rilán, 카스트로(Castro)), 네르콘(Nercón, 카스트로), 알다칠도(Aldachildo, 푸겔돈(Puqueldón)), 이추악(Ichuac, 푸켈돈), 데티프(Detif, 푸켈돈), 빌리풀리(Vilipulli, 촌치(Chonchi)), 촌치, 테나운(Tenaún, 켐치(Quemchi)), 콜로(Colo, 켐치), 산후앙(San Juan, 달카우에(Dalcahue)), 달카우에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칠로에 교회들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해안 부근에 지어졌다. 몇몇 지역은 광장(아차오, 달카우에)에 들어섰고, 어떤 지역에서는 단지 담과 나무로 공간을 나눈 개방 공간(퀸차오)에 자리 잡았다. 교회의 크기는 그 지역에서 열리는 종교 축제의 중요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교회의 지붕은 경사가 급했으며 두께가 두꺼웠다. 칠로에 교회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바닷가를 바라보는 탑의 파사드(facade)가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입구의 주랑 현관, 박공이나 박공벽과 탑으로 구성된다. 교회는 지역 공동체에서 도시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주랑 현관은 초기 교회의 특징이지만, 20세기에 건설된 교회에는 이것이 없다. 수직으로 세워진 탑은 십자가를 지탱하는 종교적인 요소와 선원들을 위한 횃불의 기능을 동시에 맡고 있다. 대부분 2층~3층으로 되어 있으며,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6각형이나 8각형 구조물이 돔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테나운 교회에만 작은 측면 탑이 있다. 교회의 규모는 다양하지만, 폭은 비슷하며 길이에 있어 차이가 크다. 교회들은 3개의 측랑이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설계도에 기초하며, 중앙의 측랑만이 후벽까지 연결되었고 측랑은 돌받침대 위의 견고한 나무 기둥으로 분리된다. 이것이 지붕마루를 구성하는 거대한 들보를 지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주요 신도석은 반원통형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고, 측면 회랑은 평평한 지붕으로 되어 있다. 분리된 지붕이 있는 아차오 교회와 부채꼴 둥근 천장이 있는 릴란 교회는 드문 경우이다. 릴란 교회는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거나 다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촌치 교회의 고전주의 양식, 네르콘 교회의 르네상스 양식, 아차오 교회의 바로크 양식 등에서 칠로에 주민들의 숙달된 목공 기술을 만날 수 있다. 교회의 형식이나 재료의 특징은 사실상 4세기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교회 장식품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모든 교회가 자연 환경에 적응하도록 기술적으로 건축되었다. 교회는 언덕 위의 높은 지대에 건설되었는데 이것은 폭우가 내리는 동안에는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또 교회의 북쪽 면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의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 보호하였다. 이처럼 교회들은 이 지역에서 심한 바람과 비의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완전히 폐쇄된 구조를 갖추었다.
역사적 배경
16세기에 칠로에 섬의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의 혼합경제에 바탕을 둔 정착 생활을 했다. 스페인의 항해자가 16세기 중반에 이 섬을 발견했지만,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가 그란데 데 칠로에 섬에 산티아고 데 카스트로 시와 차카오 시를 건설했던 1567년에 식민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은 지역 주민의 온화하고 수용적인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도 정복자와 현지에 사는 원주민이 함께 토지나 마을을 수여받는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가 시행되었다. 원주민은 식민지 정착민을 위해 일하면서 스페인 왕가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에 음식과 종교 교육을 제공받았다. 때로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났고, 1712년에 가장 심각한 반란이 발생했다. 이는 식민 통치 당국이 원주민을 가혹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발생했지만, 당국은 예수회가 반란을 사주했다고 비난하며 폭력적으로 이를 진압했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프란체스코회와 성모마리아회 출신의 선교사들과 함께 섬에 도착했다. 1608년의 탐사 방문 이후, 예수회는 전도 사업을 위해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때부터 섬의 문화적 특징들이 드러나면서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교회 건축물들이 나타났다.
예수회의 선교 전략은 걸어다니는 활동으로 요약된다. 온화한 계절에 카스트로의 학교를 출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연례 전도 여행을 했다. 배로 선교 여행을 할 수 있게 하려고 해안 근처에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선교사들은 계획된 일정에 따라 각각의 선교지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곳에서 선교사들은 주민들의 정신적 ·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처음에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머물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당과 선교사를 위한 숙박 시설을 만들고 지역의 건축 재료와 기술을 이용해 지역 공동체를 건설했다. 또한 주요 가문 출신의 평신도를 지명해 감독관 일을 맡기고, 교회와 묘지를 돌보게 하며, 공동체의 기본적 신앙적 요구를 들어주게 했다. 토착 공동체의 사회적 · 종교적 생활의 실질적인 발전을 장려하는 것이 예수회의 전통이었다. 19세기 말에 100여 개의 교회가 건설되었고, 그중 50개~60개의 교회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7세기에는 해적들의 약탈이 성행했으며, 도시의 스페인인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시골로 들어갔다. 그들은 원주민의 땅을 차지했고, 양쪽 집단의 인종적 · 문화적 동화를 촉진시켰다. 섬의 다수를 차지하는 칠로타(Chilota) 집단은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인 집단이다. 기독교가 원주민을 포용하는 동안 스페인인은 소통을 위해서 지역 언어인 벨리체(Veliche, 지금은 사라진 언어)를 수용했고, 원주민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여 낚시와 농업에 종사했으며, 그들의 기술을 이용했다.
1767년 예수회가 추방되었을 때, 예수회의 활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체스코회가 그들의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프란체스코회는 전도 구역이 있는 9개의 선교 구역을 만들기 위해 도보 선교를 이용했다. 이것이 1840년에 생긴 현재의 교구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더 이상 행정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식민 지배가 끝나갈 무렵에는 칠로에에는 5개의 도시밖에 없었다. 섬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정되었지만, 그것은 칠레의 총독보다 리마의 총독에 의해 더 좌우되었다. 군 수비대는 1768년에 구축한 산 카를로스 데 안쿠드(San Carlos de Ancud) 요새에 주둔했다.
칠로에 주민들은 스페인 왕실에 충성했다. 1810년 칠레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칠로에 섬은 칠레와 페루의 식민지 회복을 위한 스페인 작전 기지가 되었다. 스페인의 회복 전쟁은 실패했고 칠레가 마침내 1818년에 독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칠로에 섬은 여전히 스페인 영토로 남아 있었다. 섬은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지배의 마지막 거점이었고, 8년 후에야 새로운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칠로에는 19세기에 번영을 누렸다. 남쪽으로 항해하는 배들이 수시로 항구를 드나들었고, 목재는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의 개통과 사이프러스와 낙엽송을 지나치게 벌목하는 바람에 호경기는 19세기 말에 끝났다. 20세기 초에는 농업과 목축 경제가 심각해져 섬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결국 섬 주민들은 남쪽인 파타고니아(Patagonia)와 메가야네스(Magallanes) 해협 지역으로 이주했다. 현재 섬의 경제는 목재와 어류 자원을 산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통제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다.
등재기준
기준 (ⅱ) : 칠로에 교회들은 유럽 문화와 전통 토착 문화가 성공적으로 융합한 독특한 목조 건축물의 뛰어난 사례이다.
기준 (ⅲ) : 17세기~18세기 예수회 선교 활동의 산물인 메스티조 문화가 칠로에 섬에 본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칠로에 교회들은 이례적일 만큼 우수한 목조 교회 건축물들이다.
출처:[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2023-08-2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