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순천만은 안개로 이름이 높았다. 김승옥 선생의 단편소설 '무진기행' 덕분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 나루 무진(霧津)은, 사실 가상의 지명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무대는 분명했다. 선생이 여섯 살 때 정착한 순천이었고, 순천만 대대포구였다.
그리고 2014년. 이제 순천만은 생명 술렁이는 땅으로 이름이 더 높다. 그 땅 갯벌은 곱디고운 노을빛으로 반짝이고, 갈꽃 팬 갈대밭은 은빛으로 일렁인다. 흑두루미와 짱뚱어와 농게가 그 땅에서 살아간다. 하늘 거스르지 않는 순천만(順天灣)은, 그러나 여전히 무진이다. "중년의 주인공은 앞만 향해 내달렸던 허망함을 무진에서 위로 받고자 했다." 김승옥 선생이 어느 매체에서 밝힌 후일담처럼 순천만은 허허로운 삶을 넉넉히 위로할 게다. 이 가을 순천만을 택한 연유다. 이유도 없이 아린 계절이 가을 아니던가.
너른 갯벌과 갈대밭의 생태 공화국
'용산전망대' 낙조·붉은 칠면초 장관
11개 나라 정원 선보인 순천만정원
하루 꼬박 투자해도 눈에 넣기에 벅차
■용산전망대
순천만은 남해로 흘러내린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에워싼 연안 습지다. 한결같이 잔잔하다. 너른 갯벌과 염습지가 발달한 그 땅은 뭇 생명들의 생태공화국이다. 흑두루미와 갈대와 칠면초와 인간을 먹여살린다. 2006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순천만의 가치는 분명 갯벌에 있다. 하나 순천만의 가을 감성은 순전히 갈대의 몫이다. 갈대는 동천이 순천만으로 흘러내리며 긋는 S자 수로 양쪽으로 군락을 이뤘다. 150만 평을 훌쩍 넘는 갈대밭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
순천만자연생태공원 내 대대포구 선착장을 지나 무진교를 건너면 갈대밭이다. 1.2㎞ 목재덱(deck)길이 이어진다. 사방이 갈대밭으로 혼곤하다. 복슬복슬 이삭뭉치가 갈색빛으로 출렁이고, 순천만 질러오는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갈색빛 춤사위는 두 주쯤 지나면 은빛으로 바뀐다. 그때는 하얀 눈꽃이 갯가에 뿌려질 터. 왜가리와 고니가 유유히 가을 하늘을 가른다.
|
순천만정원의 순천호수공원. |
"이 갈대밭이 30년 전엔 불탔었죠." 순천만 해설사의 귀띔이다. 그 무렵 갈대는 생활 밀쳐내기 힘든 사람들에겐 긴요한 삶의 방편이었다. 갈대로 김발 섶과 빗자루를 삼았고, 초가지붕을 이었다. 땅 귀했던 탓에 갯벌 개간하려 갈대밭을 태웠다. 그러나 갈대는 살아남았다. 흑두루미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반 순천만에서 구조된 다리 다친 흑두루미를 귀환시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희귀조 머무는 순천만이 생태 보고로 주목을 받는다. 이후 무분별한 개간은 종적을 감춘다. 갈대밭도 비로소 삶의 방편에서 벗어난다. 2007년 순천시 시조로 지정된 흑두루미는 이날 보지 못했다. 이달 말쯤 날아든단다.
갈대밭 뒤편 용산전망대로 길을 잡았다. 용산은 높이 77m의 야트막한 동네산.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 이런 문구가 적혔다. '용산전망대에 올라 순천만 낙조와 함께 둥근 갈대군락을 보셨나요? 그러지 않고 순천만을 보았다 말하지 마십시오.' 순천만의 비경인 S자형 수로와 황금빛 대대들판과 자줏빛 칠면초 군락이 오롯이 용산전망대의 것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다.
용산전망대는 탄성 나오는 자리다. S자 물길을 두고 오른쪽으로 원형 군락 이룬 갈대밭이, 왼쪽으로 갈대밭과 칠면초의 붉은 군락이 색채의 향연을 벌인다. 칠면초는 갯벌에 사는 염생식물. 칠면조처럼 색이 변한다 해서 칠면초다. 봄엔 녹색을 띠다 점차 붉어진다. 붉음은 이맘때 절정으로 치닫는다.
|
색색 꽃으로 화려한 네덜란드 정원. |
해가 맞은편 산자락으로 기운다. 노랗게 떨어지던 해는 점점 빨갛게 세상을 물들이고 사멸한다. 갈대밭과 수로와 갯벌이 곤곤한 어둠에 잠기고 달빛 뿌려진 대대포구에도 짙은 어둠이 깔린다. 저 멀리 저녁밥 채근하는 상가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순천만의 해넘이는 늘 이러하다.
■순천만정원 지난해 4월부터 6개월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다. 그 박람회장이 바로 순천만정원이다. 순천만정원은 박람회보다 순천만과 관련이 깊다. 사정은 이렇다. 순천만이 관광명소로 부각되면서 건설자본의 개입이 걱정됐다. 차단장치가 필요했고 순천만정원이 등장했다. 순천만과 도심 사이에 정원을 조성해 일종의 차단막을 친 셈.
순천만정원은 무척 넓다. 약 33만 평에 달한다. 하루 꼬박 투자해도 전부를 눈에 넣기 벅차다. 순천만정원을 관통하는 동천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갈린다. 동쪽은 세계정원구역과 테마정원이, 서쪽은 수목원구역과 한국정원이 자리했다. 입구는 동문과 서문 두 개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
동문 들어서니 순천호수정원이다. 인공호수에 여섯 언덕 봉우리가 우뚝하다. 봉우리마다 빙 두른 나선형 길이 정상까지 인도한다. "천천히 걸어보세요. 마음에 맺힌 게 있으면 저 아래 호숫물에 내려두시고." 정원해설사로 동행한 문원식 어르신의 말이다. 봉화언덕 정상에서 맞는 바람이 한결 가볍다.
순천만정원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11개 나라의 정원을 선뵌다. 네덜란드, 터키, 프랑스, 태국, 일본…. 저마다 특색을 갖췄다. 유럽 정원이 대칭과 균형미를 갖췄다면, 미국 정원은 소통을 강조한 모양새다. 정원 입간판을 일독한 후 구경하시라.
|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
테마정원 중 바위정원에 눈이 간다. 그 정원에 아름드리 팽나무가 품새 곱게 섰다. 수령은 600년. 경남의 한 조경사업가가 기증했단다. "이 나무는 제주도 암반지대가 고향인데, 스스로 줄기에 7개의 구멍을 만들어 물 저장 창고로 쓴답니다. 가뭄 견디는 강인한 지혜죠." 팽나무 옆 크고 작은 바위 틈새로 산국, 비비추가 고개를 내민다. 이 녀석들도 모질게 살아간다. 무릇 생명은 그러하다.
순천만정원 동쪽과 서쪽을 잇는 통로가 '꿈의 다리'다. 길이는 175m. 설치미술가가 컨테이너 30개를 다리 위에 놓고 그 내·외벽을 타일 작품으로 꾸몄다. 내벽은 전 세계 어린이 14만 5천 명이 장래희망을 그린 그림으로 채워졌다. 내벽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도초등생 예진이는 교사가, 성북초등생 서연이는 가수가, 왕지초등생 예은이는 요리사가, 병천초등생 태영이는 환경미화원이 꿈이란다. 꿈이 예쁘다. 저희 눈엔 다 귀한 사람일 터. 돈벌이 따지지 않는 아이들이 만든 꿈의 다리는 그래서 따뜻하다.
순천만정원의 동쪽이 화려하고 화사하다면, 서쪽은 차분하고 고즈넉하다. 한국정원엔 창덕궁 후원과 소쇄원의 광풍각과 덕산서원의 세심정을 그대로 옮겨놨다. 자연과 어울린 우리네 정원은 정갈하고 정겹다. 익숙함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싶다. 한국정원 뒤쪽 수목원전망지 그늘 벤치에서 땀을 식힌다. 발아래 국화밭에 가을향이 그득하다. 코끝 스치는 국화향이 참 좋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스카이큐브와 생태체험선
스카이큐브(061-740-0600)는 순천만정원과 순천만을 잇는 소형 무인궤도차다. 순천만정원에서 출발해 순천문학관에서 하차한다. 순천문학관에서 순천만자연생태공원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 이용료는 1인 5천 원. 생태체험선(061-749-6052)은 대대포구 선착장과 순천만 앞바다를 오가는 배다. 둘러보는 시간은 30분 안팎. 운행은 오전 9시 10분부터. 물때가 맞아야 하는 관계로 사전에 운행 여부를 확인한다. 이용료는 어른 7천 원, 어린이 2천 원.
■찾아가는 법
자가용:남해고속도로(광양IC)~영암순천고속도로(순천만IC)~인월사거리(순천만 방면)~순천만자연생태공원. 2시간 30분 안팎. 순천만자연생태공원~순천만정원(동문 혹은 서문) 15분 안팎.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순천종합버스터미널(061-744-8877)까지 2시간 30분 걸림. 오전 6시 30분~오후 9시 40분 출발, 요금 1만 2천400원.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순천만행은 67번 버스를 타면 된다. 25분 걸림. 순천 교통 문의는 061-753-6267. 순천시 교통정보 시스템 홈페이지(its.sc.go.kr)에서 QR코드를 이용하면 버스뿐 아니라 주차 정보를 받을 수 있다.
■먹을 곳
순천만 흑두루미가든(061-741-7544)을 추천한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주차장 맞은편에 있다. 걸쭉하게 끓인 짱뚱어탕이 일품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는 맛. 게장 백반은 비린내 없이 깔끔하다. 밑반찬도 좋은 편. 짱뚱어탕 중간 것 3만 원, 게장 백반 1만 원.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