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보편적 정서에서 탐구하는 서정적 자아
--최구응 시집 『코스모스의 꿈』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삶의 의미와 존재문제의 탐색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I.A.리처즈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만이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언설(言說)을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이해하는 시작법에서 이미지나 상징을 응용하여 어떤 비유법 등으로 작품을 완성하여 그 작품이 지적으로 고차원의 경지를 운율과 의미상의 주제를 창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독자나 시인들이 상당수 시단(詩壇)에 분포하고 있음을 간과(看過)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시는 그 시인의 체험에서 재생된 인생의 행로를 언어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아주 중요시해왔으나 앞의 리처즈의 말과 같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인 사유(思惟)로 표출한 삶의 애환(哀歡)이 스토리로 엮어져서 우리들의 심금(心琴)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 최구응 시집 『코스모스의 꿈』을 일별하면서 먼저 이러한 평범한 사유로 소재와 작품을 완성하는 순정적인 내면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시의 형성이나 그 흐름을 살펴보면 먼저 시적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서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는(showing) 형식을 먼저 취하고 다음에 그 속에 담겨질 내용 곧 주제로 정립되는 메시지를 들려주는(telling) 시법을 다양하게 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희망도 없고
삶이 무의미 하다고 느껴질 때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남의 집 대문 앞에
바랭이가 살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주인이라면
벌써 뽑아서 버렸을 것입니다
쓰레기 봉지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사람들 눈에 뜨이면
재빠르게 차 밑으로 숨는
고양이가 있습니다
천원어치 이 천원어치 콩나물을 팔려고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
얼굴 구경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듯이
사는 데도 이유는 없습니다
--「왜 사는가」 전문
여기 인용한 작품에서는 먼저 시적인 도입부분과 전개 그리고 결론이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생활환경이나 시야에 펼쳐지는 형상들이 작품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방점(傍點)을 찍게 된다. 우선 상황 설정에서 “삶이 무의미 하다고 느껴질 때/ 내가 왜 살아야 하나”라는 존재문제를 의문형으로 전제를 하고 그는 남의 집 대문 앞에 있는 바랭이와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고양이 그리고 천원어치 콩나물을 팔기 위해서 하루 종일 앉아있는 할머니가 이 작품을 형성하는 골격으로 화자(話者)가 등장하고 있다.
최구웅 시인은 “내가”라는 나를 중심으로 한 삶의 무의미와 각종 현상의 상황들이 마지막 연 결론에서 적시했듯이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형상이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지워지지 않고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듯이/ 사는 데도 이유는 없”다는 자아(自我)의 실존(實存)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왜 사는가”의 제재(題材)는 실존철학의 범주(範疇)에 까지 확대해서 해석해야 하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인간 존재의 주체를 고차원으로 탐색되어야 할 문제로 남는 것이다.
한편 최구응 시인은 존재의 인식에서 시와의 동행에 대한 자신의 정서를 투영하고 새로운 삶을 발견하는 인생 전환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시인의 말>에서 “늦은 나이에 시작한 시 공부/ 남들은 이미 열매를 맺었는데/ 나는 아직도 피지 못한 봉오리/ 서리 맞은 봉오리는 안 되려고/ 황혼에 첫 시집을 낸다”는 의미심장한 언술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는 “나와 시”의 접맥(接脈)에서 또 다른 자아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있는 오솔길
김천에 시인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발걸음 멈추고 한 수 읊고 또 한 수 읊고
쉬엄쉬엄 산을 내려온다
--「자산골 산책」 중에서
분홍빛 복숭아꽃이 너무 좋아
시인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했다
풀 뽑아야지 농약 뿌려야지
이 좋은 복숭아밭을 농부는
무릉도원인 줄 모르고 산다
--「시인과 농부」 중에서
시인의 대장간은 머릿속
모루도 풀무도 망치도 없다
시를 짓는 것 외에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시인의 대장간」 중에서
그에게서 이제는 시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통상적인 삶에 대한 사유와 고도의 정신세계를 요구하는 시의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발견으로 여생(餘生)을 영위하는 “늦가을 코스모스”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2. 사랑의 발원지, 가정적 이미지
최구응 시인은 가장으로서 한 가정의 화목과 사랑을 책임져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그는 증조할머니와 외할머니, 어머니와 아내, 딸 그리고 먼저 가신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온화한 가정과 가족애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를 평상시의 애정으로 표출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옛날 공자님이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란 말로써 개인적인 수신과 제가를 통해서 국가와 사회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교훈도 가정과 가족의 안녕과 화목을 지칭(指稱)하는 것으로써 한 가정의 행복이 바로 치국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명언처럼 최구응 시인도 그의 가정과 가족을 위한 다정다감한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집 뒷마당
땅콩 심을 이랑에
비닐을 씌운다
방에 들어가시라 해도
아들의 하는 일이
미덥지 않은가 보다
깔개를 깔고 앉아
모종삽으로 흙을 떠서
비닐을 덮는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거칠다
손바닥만 한 텃밭
비닐을 씌우는데도
허리가 아프다
어머니, 이 아들도
이제 노인입니다
--「두 노인」 전문
이제 모자(母子)가 모두 “어머니, 이 아들도/ 이제 노인입니다”라는 어조로 세월의 무상함을 전제로 하여 “두 노인”이 고향집 뒷마당에 땅콩을 심으면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거칠다”는 노모(老母)의 행장에 최구응 시인의 심정은 어쩐지 불안하기도 한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어머니에 대한 시를 창작해보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생명을 탄생시킨 불망(不忘)의 은혜가 잠재한 곳으로 누구나 사랑의 원천(源泉)으로 그 이미지나 작품의 발원은 무한대한 보고(寶庫)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정감적인 어조는 “경노당에서 깔깔대던 친구들/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갔다// 날씨가 추워 바깥에 못 나가고/ 방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 놓고/ 아흔 셋의 어머니 그림을 그리신다 (「어머니의 그림」 중에서)”거나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아들들도 이제/ 모두 늙어 가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염색」 중에서)”는 모정(母情)의 애틋한 사랑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침 밥상에 구운 조기 한 마리
미역국은 어제 먹던 그 미역국이다
허리 구부러져 잘 걷지도 못하는 아내
나 몰래 장에 가서 조기를 사왔나 보다
나중에 보니
코로나로 오지 못하는 딸들
용돈을 내 통장으로 부쳤다
남들은 내 생일을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다
조기를 뜯으며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음력 시월 스무 하루
생일이 뭐 특별한 날인가
--「생일」 전문
그의 가족애는 어머니와 함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언어도 살펴볼 수 있는데 그는 “허리 구부러져 잘 걷지도 못하는 아내”에 대한 다채로운 형상의 생활현장에서 생성하는 일상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의 아내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생일날 아침밥상에 구운 조기와 미역국이 올라온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시장에 가서 조기를 사왔음에 경탄(驚歎)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애처가이다. “아내가 눈 수술을 한 며칠 후였다/ 얼굴 곳곳에 검은 점이 보였다/ 병원에 가서 왜 점이 생겼느냐 물었다/ 그런 것은 피부과에 알아보라 했다 (「검버섯」 중에서)”라거나 “북쪽 창을 열면 가까이 다가서는 낮은 산/ 등성이에는 작은 소나무 숲/ 산비탈엔 자잘한 밭들/ 아내는 일하는 농부를 보며 밥을 짓는다 (「우리 집」 중에서)”는 등의 어조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의 아내 사랑은 무한이다.
한편 위 작품에서 “나중에 보니/ 코로나로 오지 못하는 딸들/ 용돈을 내 통장으로 부쳤다”는 딸들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효심(孝心)도 읽을 수 있는데 “딸들은 알아서 공부하고/ 일을 찾고 짝을 찾아 갔다/ 아버지는 한 일이 없다/ 고맙다 딸들아(「딸」 중에서)”라는 딸들에 대한 사랑도 적나라(赤裸裸)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가족애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아버님 모습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데/ 늙어가는 내 얼굴/ 거울에 비춰보니/ 돌아가신 아버님이/ 거기 계신다(「줄무늬 강낭콩」 중에서)”와 같이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회상도 잊지 않고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 친화와 서정적 자아 탐구
최구응 시인은 자연 친화에서 정서의 안정과 시적인 진실을 탐구하는 서정시인이다. 그는 지금까지 보편적인 주변 일상생활에서 생성하는 현상에 대하여 작품의 발상이나 주제의 창출을 취택(取擇)하였다면 여기에서는 그가 친자연적인 사유의 지향이 안온한 전원적인 순수성에서 발원하는 시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만유(萬有)의 자연 풍광에서 체득(體得)하는 자연 사물에서 재생하는 이미지는 바로 그가 심취(深醉)하는 서정성에서 순수한 섭리(攝理)와 거기에서 섬광(閃光)처럼 빛나는 그의 유유자적(悠悠自適)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전원이 무언으로 전하는 메시지를 긍정하고 수용하면서 우리 인간들과 상호 융합하고 화해하는 지향적인 가치관을 존중하는 정서의 중심에 그는 좌정(坐定)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삼아 뿌린 보리
망종 되니 여물었다
낫을 댈 것도 없다
개상도 필요 없다
가위로 이삭 잘라
발로 밟아 타작하고
못 쓰는 까끄라기는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
종다리란 놈이
보리밭에 알을 낳고
어절시구 옹해야
도리깨질 타작소리
사라진지 오래고
높이 날던 노고지리
자취를 감추었다
보리밥 구수한 맛
아는 이 몇 일런가
배고픈 보릿고개는
옛 이야기 되었다
--「망종芒種」 전문
최구응 시인은 우선 농촌의 자투리땅에 보리씨앗을 뿌려서 망종날 여물은 보리이삭을 보면서 그는 옛날 농촌의 정경(情景)을 소상하게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낫도 개상도 필요 없이 가위로 잘라서 밟아서 타작을 한다. 남아있는 까끄라기는 바람결에 훌훌 날려보내는 전형적인 농촌의 보리타작 현장을 재생하면서 그의 서정성은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안타까와하는 상황은 도리깨질 타작소리가 사라지고 보리밭에 알을 낳던 종다리와 노고지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정감적 이미지도 결론에서 “보리밥 구수한 맛/ 아는 이 몇 일런가/ 배고픈 보릿고개는 / 옛 이야기 되었다”는 현실적인 상실감이 엄습(掩襲)해 오는 것은 참으로 그의 시적인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약간의 침울(沈鬱)한 상황으로 전이(轉移)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깊은 흡인(吸引)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고고한 선비의 뜰에
사철 꽃이 피고 진다
매화는 봄에 꽃이 피어 열매가 있다
국화는 가을에 꽃이 피어 열매가 없다
은행나무는
기상은 하늘을 찌를듯한데
꽃은 있는 듯 없는 듯, 열매는 잘다
호박은
넝쿨은 땅바닥을 기어도
꽃도 크고 열매도 크다
오동은 잎은 크나 서리를 못 견딘다
동백은 잎은 작으나 겨울에 꽃이 핀다
--「화훼물리花卉物理」 전문
그는 생활주변이나 산천초목에서 흔하게 대할 수 있는 화훼에 대한 그의 시각은 친자연적인 사유의 정점에서 미적(美的)인 감응을 지극히 존중하는 순수 서정의 지표(指標)라고 할 수 있는데 최구응 시인의 꽃에 대한 소상한 관찰과 이미지 투영 그리고 의미의 부여는 그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잔잔한 동심의 세계에서 감동한 정신의 본향(本鄕)에서 창출한 작품이라고 생각 된다.
그는 사철 피는 꽃은 마당이나 뜰의 정원이 아니고 “선비의 뜰”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매화, 국화, 은행나무, 호박, 오동, 동백 등등 그의 뜰에 피어있는 꽃들에게서 물리(物理-자연의 물리적 성질과 현상, 구조 등을 연구하고 물질들 사이의 관계와 법칙을 밝히는 자연과학의 한 부분)적으로 판단하면서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치밀함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처럼 화훼류는 봄, 가을, 겨울을 가릴 것 없이 제 나름의 소양대로 피었다가 열매를 맺는다. 그는 이 풀과 꽃들이 열매가 맺는 섭리의 신비성과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비합리성에 대한 관찰이 그의 흥미를 유발하면서 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시법을 잘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산”이나 “숲속”에서도 이러한 꽃들과의 대화는 물론, 자연 정취에 몰입하는 시편들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할미꽃,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원추리, 구절초, 잔디 등의 야생초에 그의 시각은 멈추지 않는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으리라.
-원추리 : 시름을 잊게 하여/ 망우초라 했던가/ 원추리 심어 놓고 / 꽃보러 간다
-인동초 : 인동초야 얼마든지 덩굴을 뻗어라/ 난간을 휘감아/ 자주 꽃으로 뒤덮여도 말리지 않으마
-송화 : 꿀이 없어 벌 나비 오지 않고/ 예쁘지도 않아/ 찾는 사람도 없으니/ 애꿎은 꽃가루 만 / 사방으로 날려 보낸다
-이끼 : 저기까지/ 무슨 재주로 올라갔을까/ 나무에는 물도 양분도 없는데/ 뭘 먹고 살까
-도깨비바늘 : 도깨비바늘은/ 기차 타고/ 서울도 가지/ 싫다고/ 떼어 놓으면/ 거기서 싹이 트지
이 밖에도 작품 「마음 놓고 찾아간다」 중에서 “초롱꽃 밑으로 벌이 기어든다/ 원추리 꽃대는 하늘 향해 뻗는다/ 씨뿌려 난 잔디 땅을 덮을 것이다”라거나 「줄무늬 강낭콩」 중에서 “줄무늬 강낭콩은/ 썩어 없어지고/ 흰 콩도 자주 콩도 아닌/ 줄무늬 강낭콩 씨를 남겼다” 그리고 「봉숭아싸움」 중에서도 “심술꾸러기가 언제 또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봉숭아꽃이 피자면 아직도 멀었는데/ 꽃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다”라는 어조로 꽃들에 대한 애정의 내면의식을 토로(吐露)하고 있는 것이다.
4. 동심의 세계에서 승화한 지적 의식
최구응 시인은 동심 지향의 시인으로서 작품세계에서도 원대한 지적인 이상향적인 사유나 가치성에 취우치지 않는 평범한 일상적 소재와 주제를 음영(吟詠)하는 시인이다. 그는 평생을 초등교육에 몸담으면서 축적해온 동심의 세계를 외면할 수 없는 안온하면서도 잔잔한 품성이 바로 시로 형상화하는 발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소에게 풀을 뜯기다가
지루하면 풀피리를 불었다
구멍도 안 뚫린 풀잎으로
기막히게 연주를 했다
아버지는 아들 하나는
농사꾼을 만들고 싶었다
중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서 농사일을 가르쳤다
비 오는 날 소년은 산에서 꼴을 베다가
들을 내려다보며 풀피리를 불었다
구슬픈 피리소리가 온 들에 울려 퍼졌다
나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 후 소년은 도시로 나가
목수 일을 배웠다
소년이 소 풀 뜯기던 산과 들은
스포츠타운으로 변했다
고향 떠난 소년은 돌아오지 않고
풀피리 소리 멀리 사라졌다
--「풀피리」 전문
그는 어렵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생활상을 명민(明敏)하게 적시하고 부자(父子)간의 교감이 현현되고 있어서 당시를 살았던 우리들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풀피리를 잘 불던 소년은 농촌에서 소를 먹이면서도, 또는 “비 오는 날 소년은 산에서 꼴을 베다가/ 들을 내려다보며 풀피리를 불었다” 소년의 구슬픈 피리소리는 온 들판에 울려퍼졌으나 그 후 소년은 도시로 나가 목수가 되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당시의 산과 들이 이제는 스포츠타운으로 변해 있었고 그 소년도 돌아오지 않아서 풀피리 소리는 영원히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문명의 발전으로 산천과 생활상을 변화시키는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심의 모티브는 작품 「당연하지」 「순돌이」 「주입식」 「쪼무래기들」 등에서 그가 직접 경험했거나 주변 상황에서 발견된 스토리들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최구응 시인의 회한(悔恨)들이 암묵적으로 스며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회한에서 발생하는 갈등의식이 간헐적(間歇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급속도로 변하는 문명사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써 시의 시사성(時事性)(참여성)인지도 모른다. 그는 “대문을 열었다/ 골목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쓰레기봉투에 넣는다(「순찰」 중에서)”거나 “죽은 고양이가 골목에 누워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며칠 째 고양이는‘ 그대로 있었다/ 보다 못한 한 처녀가/ 그의 어머니가 / 만지지 말라고 해도/ 신문지에 싸서 가지고 갔다//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골목청소쯤이야 누가 못해」 중에서)” 또는 “먹이를 찾아 들로 내려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간다/ 뒤늦게 울타리를 치며/ 주인은 분통을 터뜨린다(「생태계」 중에서)” 그리고 “도롱뇽은 살아 있다/ 사람들은 미국 산 소고기를 사 먹는다/ 성주 참외는 해외로 수출한다/ 괴담을 퍼뜨리던 자들 / 왜 한 마디 말이 없나(「지나고 보니」 중에서)”라는 등과 같이 문명 발달이든, 인간들의 의식의 변화이든 간에 사회적인 갈등과 고뇌는 시인들의 뇌리(腦裏)에서 어차피 화해하고 해소 되어야 한다는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에 충실하려는 사명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M. 아놀드가 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라고 했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사회성이 짙은 갈등요소의 비평과 동시에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는 휴머니즘의 실천자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최구응 시인은 이 시집 『코스모스의 꿈』을 통해서 소재의 채택이나 상황 설정, 전개 그리고 주제의 정리 등이 자의식(自意識)에서 출발하여 실생활(real life)과 밀접한 체험적인 이미지를 투영하여 자신의 사유와 정서가 융합하는 정점에서 작품을 창작하는 노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순수서정에서 자아의 진실을 탐구하는 시법을 응용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시 창작에 필요한 언어의 조탁(彫琢)이나 고차원 시법, 즉 낯설게 하기와 화자(話者-persona) 그리고 외연(外延)과 내포(內包), 시간과 공간문제 등에 관심을 두어야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사족(蛇足)으로 첨언(添言)하면서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