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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여름 아침에 생각한 것들
입력2023.07.04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수련이 꽃을 피운 여름 아침에는 기쁜 일이 더 자주 일어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리라는 예감을 품게 한다. 신록은 우거지고 매미들이 숲에서 맹렬하게 울어대며, 빛들은 어디에나 풍부하게 넘쳐난다. 여름의 즐거움과 보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름 과일들이 본격적으로 출하할 무렵 나는 낙관적 기대로 물들고 자존감은 더없이 상승한다.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 계절의 풍요함이 인생을 화창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아,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공연히 중얼거리는 계절도 여름이다. 어린 시절 한여름에 공중에서 타오르는 흰 화염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빛 속에 드문드문 녹색 반점(斑點)이 생겨나는 게 참 이상했다. 무슨 까닭인지 빛이 넘치면 그 밝음 속에 돌연 그늘들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여름마다 좀 더 착한 사람이 되리라는 꿈과 함께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그리워했다.
진짜 실패란 무엇일까1986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스물여섯 살이 넘은 사람이 버스를 타고 있으면 스스로 실패자로 여겨도 좋다”고 말했다. 스물여섯 살에 버스를 타고 있다는 게 어떻게 실패의 증표가 될 수 있을까? 이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삶을 비하하는 건 아닐까? 나는 대처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 그 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어떻게 실패자로 규정되는 것일까를 물을 수 있다.
그 물음 전에 먼저 ‘실패란 무엇일까’를 물어야 한다. 성공이 자기 일에 대한 타인의 인정과 보상, 더 구체적으로 지위, 부, 명성을 얻는 것이라면 실패란 그 반대의 현상일 테다.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분투한 노력이 좌절됐을 때 갖는 감정에 매몰되면 자기에 대한 실망과 무력감이 솟구치고 더러는 분노를 동반한 낙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가 구상했던 인생의 기획이 어긋나고 뒤틀릴 때 사람들은 실패를 직감한다. 실패란 한마디로 상실이고 좌절의 경험이다. 탈락, 실직, 낙방, 이혼 따위에 실패란 낙인이 찍힌다. 노숙자, 실직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감옥의 수형자들에게서 실패의 그림자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패는 인생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우리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를 가늠할 수 없다. 실패의 은유로 ‘어둠’을 호출할 수도 있을 테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때로는 어둠이 필요하고/ 달콤한 어둠에 갇힐 필요가 있다.”(데이비드 화이트, ‘달콤한 어둠’)인생에는 어둠도 필요한 법실패를 ‘달콤한 어둠’이 되게 하는 것은 실패에서 어떤 유용성을 찾아내는 행위다. 경제학자인 팀 하포드(Tim Harford)가 쓴 책의 제목은 실패가 성공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당연한 일이라는 암시를 담는다. 그 책 제목은 <성공이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유>다. 실패란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시행착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이런 정의는 우리 인생에 ‘때로는 어둠이 필요하다’는 시인의 시구와 조응한다.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성공의 서사들은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 서사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동과 활동 그 이상의 비현실적인 성취라는 걸 강조하면서 그 뒤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지운다. 차분한 성찰이 빠진 채 비현실적으로 가공된 성공의 서사에 도취하는 것은 자칫 해로울 수도 있다.
성공을 꿈꾸는 자들이여, 먼저 실패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는가? 청년 시절,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철학책들을 끼고 읽으며 습작 노트에는 시를 끼적였다. 20대 초반에 백수로 지내는 동안 미래는 암담했다. 몇 년째 여러 신문사의 신춘문예 공모에서 잇달아 떨어졌다.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의 햇빛 잘 드는 자리에서 시를 쓰는 동안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한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그들은 나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시 쓰기를 당장에 걷어치우고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까. 구두 수선하는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하는 번민 속에서 숱한 밤을 보냈다. 몇 년 뒤 나는 연이은 낙방의 비참과 굴욕을 견딘 끝에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그 뒤로 마흔 해 동안이나 전업 작가로 살림을 꾸리며 여러 권의 책을 쓰며 살아왔다.그곳에서 쇠를 달구며 노래하라우리 인생에서 겪는 가장 큰 실패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인생의 가능성 일체를 거둬가 버리는 죽음보다 더 큰 실패가 있을 수 있을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저마다 품고 있는 이 거대한 실패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런 까닭에 인생에서 실패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실패학’에서는 실패를 성공의 도약대이니 조금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실패는 성공의 일시적 유예이고,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품는 것이며,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쳐야 한다는 점이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불꽃 속에서 자신을 태우는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실패를 딛고 반드시 성공하고 싶다면 부디 실패의 경험을 미래의 자산이 되게 하라!
돌아보면 우리는 숱한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실패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빵을 주고 포도주를 주는 것. 그리고 다시 한번 시도할 기회를 베푸는 것이다. 제 분수에 넘치는 성공을 꿈꾼다면 늘 실패자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노르웨이 국민시인 올라브 H 하우게는 이렇게 쓴다. ‘그곳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늘 생에 감사하는 태도, 자기 일에 성심을 다하고 인생의 소소한 덕목을 기르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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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도 위안도 없지만, 의문이 떠오르면 계속 펼쳐보게 되는
정체성 정치: 교집합이 아닌 합집합으로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2021년 말 아사드 하이더의 <오인된 정체성: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을 읽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우선은 비자이 프라샤드의 <제3세계의 붉은 별>과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를 읽고 나서 두 책을 낸 두번째테제 출판사의 책들을 더 읽어보자고 생각한 참이었다.두번째테제는 순전히 출간 책 목록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응원하게 되는 출판사인데, 어느 날 문득 목록을 펼치면 늘 당시 궁금해하던 문제를 다룬 책이 새로이 출간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그해 초 편집을 담당했던 <랭스로 되돌아가다>라는 책에 직접 붙인 “계급 정체성과 성 정체성은 어떻게 교차하는가?”라는 소개 문구 때문이었는데, 조금 더 고심해서 단어들을 사용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유행하는 담론에 너무 손쉽게 올라탄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여 <오인된 정체성>을 읽으며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좌파 정치에 대해 여러 논쟁적인 글을 발표해온 아사드 하이더는 책의 도입부에서 무슬림과 백인으로부터 당한 이중의 속박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열심히 설득한다. 이런 생기 없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몇몇 이들은 근본주의의 위안을 선택하고 만다. 또 다른 이들은 정체성이라는 위안을 선택한다.”우리는 한동안 모든 주변적 정체성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소수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는 말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적어도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아사드 하이더는 왜 정체성이 ‘위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 정체성들을 당연한 것으로 보며, 모든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이들과 상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집단적 자기 조직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약화시킨다.”정체성 정치의 프레임은 정치를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환원해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정체성 정치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비판하고자 추진했던 바로 그 규범을 강화하고 만다.”물론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처음 정치적 담론으로 도입한 흑인 레즈비언 단체 컴바히강공동체에게 이 말은 정치가 개인들의 구체적 정체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급환원주의적인 노동운동이나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 운동, 흑인 남성 중심의 흑인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스스로의 삶과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연대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이해했다.이 책은 여러 정체성 가운데 ‘인종’에 주목, 클린턴의 대선 캠페인에서 ‘교차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버니 샌더스를 중심으로 민주당 내부에 등장한 좌파의 도전과 맞서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이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이 용어가 정반대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이들에게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정체성 정치는 이렇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통합되면서 진정한 해방 프로젝트에서 멀어지게 된다.그렇다면 정체성이라는 위안에 안주하지 않고 해방적인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수한 정체성과 모습을 지닌 우리 모두를 위한 공간”을 생각했던 컴바이강공동체의 초창기 목표와 그들이 수행한 정치적 실천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인종의 자리에 우리가 최근 통렬하게 경험했던 젠더,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의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쳐 다시 “랭스로 되돌아”간다.
'더 글로리'가 청불인 이유? "내 아이의 눈을 가려야 하는가"
청소년관람불가. 이 단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보통은 선정적이거나, 신체 훼손과 유혈이 낭자한 폭력 장면이 있는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영상물의 등급 분류는 선정성과 폭력을 비롯해 주제, 대사, 공포, 약물, 모방위험 등 총 일곱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어느 한 가지 요소라도 청소년의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정도의 높은 유해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 된다.올해 초 대중의 관심을 받은 화제작이라면 단연 ‘더 글로리’를 꼽게 된다. 수없이 “연진아~”를 따라부르게 했던 이 시리즈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비디오물이다. ‘더 글로리’는 주제, 폭력성, 대사, 약물, 모방위험 요소에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사법 체계에 의한 처벌이 아닌 사적 복수를 다룬 주제, 몇몇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된 폭력성 등은 결정 등급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그런데 당시 이 시리즈는 워낙 인기 있어서 일부 시청자들이 영상물 등급에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특정 장면의 노출이 심한 것 아니냐,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수위가 낮아 보여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어도 되는 것 아니냐 등 상반된 의견이 오갔다. 영상물 등급 심의위원의 입장에서 보면, 시청자들이 등급의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꽤 긍정적이다. 특정 영상물을 어느 연령대가 시청할 것인지에 관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영화 등급 분류 담당인 나는 비디오물인 ‘더 글로리’를 심의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결정된 핵심 유해 요소는 ‘모방위험’이라고 생각했다. 등급 분류 기준이 되는 요소 중 ‘모방위험’이야말로 청소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판단한 결과다. 모방위험이 높은 영상물의 청소년 시청은 반드시 제한되어야 한다. 영상물의 관람 등급이 존재하는 이유가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 장면들, 특히 헤어 고데기로 피해자의 신체를 지지는 등 잔인한 학교폭력 방법의 묘사에서 높은 모방위험이 있다. 학교폭력뿐 아니다. 최근 영화에서 모방위험이 우려되는 작품을 자주 본다. 아동 학대, 스토킹과 무단 침입, 보이스피싱이나 마약 판매 등의 불법 거래에 청소년을 동원하는 설정 등이 빈번하다. 모방위험이 높아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두 편의 한국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영화 A는 타인의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인물이 연쇄살인범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내용의 판타지 액션 스릴러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설정이 전제되어 있기에 비현실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에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쓰레기통에 훼손한 시신을 유기하거나 어린아이가 쓰러진 아버지의 머리를 큰 돌로 연거푸 내리치는 장면이 있다. 영화 B는 여자친구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몰카 라이브 방송을 보게 된 남자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방송에 참여해서 가해자와 추격을 벌이는 스릴러다. 사이버 성범죄의 직접 가해자뿐 아니라 몰카 등 불법 영상을 소비하는 숨겨진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긍정적 주제에, 몰입감 있는 추적 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도 있다. 그러나 불법 영상의 촬영, 개인 신상정보의 유출, 성폭력 암시와 여성을 성적 물건으로 대하는 설정, 물뽕의 사용 등은 높은 모방위험으로 판단된다. 두 작품을 응원하고 흥행 선전을 기원한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가려야 한다.
『소나타가 음악의 일이라면』… 우연의 점이 모여 선이 된다
사진출처 = 문성욱 제공 클래식 음악회 무대감독이 공연 근무를 하는 하루, ‘소나타’라는 표현을 과연 몇 번이나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할까. 작품의 제목일 수도 있고 작품을 구성하는 형식일 수도 있는 ‘소나타’라는 표현을 정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듣고 말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소나타의 정의는 늘 궁금했다. 주변에 음악을 배우고 공부하신 분들이 많지만 정작 ‘소나타’란 무엇인가에 대해 시원한 답을 듣기는 쉽지 않았다.“웬만하면 현대음악 작품에 반복은 없습니다.”“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시작하는 네 음의 동기는 교향곡 전체에 걸쳐 있는 파편과 같습니다. 사람의 얼굴로 치면 꼭 점이나 주름 같지요.”“앞선 세대의 작곡가 중에서 존경하는 작곡가의 소나타 형식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만든 작곡가의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소나타의 정의를 배웠다기보다는 그 단어의 어원적 정의에서 출발한 한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제 논문을 준비하다 각 세기의 몇몇 음악 작품들을 선별해서 각각의 작품마다 소나타 형식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연구하던 음악학자를 본 적은 있지요.”“현대음악 작곡가들은 타악기를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지요. 어떤 때는 심지어 제1번 나뭇가지의 소리를 내기 위해 그리고 제2번 나뭇가지의 소리를 내기 위해 실제로 나뭇가지를 악기로 지시하고 있는 작품도 만났구요. 사실 두 나뭇가지의 소리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작곡가는 분명 무슨 뜻이 있었던 거겠죠.” 제시부 – 전개부 - 재현부무대감독 일을 하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한 수많은 해설을 듣는다. 지금까지 들어온 다양한 해설 중에서 ‘소나타 형식에 대해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무엇이었나’를 곰곰이 기억해 본다. 같은 듯 다른 얼굴의 양면을 예로 들며 청소년 음악회에서 듣게 된 내용 하나가 기억에 남았다. 얼굴을 왼쪽, 오른쪽으로 나누면 눈과 귀는 왼쪽, 오른쪽으로 대칭되게 자리잡고 있고, 코와 입은 중간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얼굴의 왼쪽 부분은 제시부, 오른쪽 부분은 재현부이며 가운데 부분은 발전부라고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였다. 왼쪽 눈은 제1주제, 귀는 제2주제가 되며, 제1·제2 두 개의 주제는 오른쪽 얼굴에도 왼쪽과 대칭되게 나타나 재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음악을 듣는 신체기관인 귀와 가까운 비유여서인지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인상적으로 남았다. 물론 이 해설자는 예외 없는 수학 공식이 없듯이 많은 훌륭한 작곡가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며 다양한 소나타 형식을 만들어 냈다고 하며 이 소나타의 비유를 끝냈다. 2. 형식으로서의 소나타는…고전음악을 작곡했던 수많은 작곡가가 소나타 형식에 천착하며 하나 혹은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발전시키며 재현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당시의 청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일 수 있다고 한 무대감독은 이야기 했다. 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음악을, 연주되는 현장이 아니면 다시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청중들에게 주제를 닮은 악절들을 반복하고 발전시키고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음악을 설득하고 각인하는 일에 있어 소나타 형식이 유용했다고 했다. 이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선택할 수도, 요즘 말로 무한 반복의 청취 역시도 가능해진 현대에 와서는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고 발전시키며 재현하는 작곡의 방식은 21세기의 청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서기 어렵다는 것 역시 이야기해준다. 클래식 음악을 여전히 작곡하고 있는 현재의 작곡가들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어떤 음악이 혹은 어떤 형식이 다시 몇백 년이 지나도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 알 수 없다. 하지만,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음악을 만들기 위해 현재의 작곡가들은 오늘도 그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다.사진출처 = 문성욱 제공 3. 진은숙 작곡가의 작품 – Allegro ma non troppo for percussion solo and tape꿈많은 소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타악기 연주자가 무대 중앙으로 등장한다. 연주자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선물 상자가 무대 중앙에 놓여 있다. 그 커다란 상자를 감싼 테이프를 작곡가가 지시한 리듬에 따라 뜯는다. 그 안에는 구겨진 종이가 가득하다. 연주자는 종이를 꺼내어 부스럭거리며 구기고 펴고를 반복하며 무대를 걷다가 종이 뭉치 단 하나만을 들고 상자 뒤쪽 무대에 설치된 타악기들로 자리를 옮긴다. 쇠사슬을 위시한 다양한 말렛으로 여러 개의 공(Gong)을 연주하고, 생활용품 같은 빗자루, 유리병, 수저, 철제 가락 등등의 소품 역시 악기처럼 사용하며, 배경에 깔리는 전자음향, 마이크를 통해 째깍째깍 대는 시계 소리를 확성한다. 타악기들의 연주 속 어느 한순간에는 자신이 들고 온 금색의 종이를 찢어버리는 퍼포먼스도 있다. 이윽고 그나마 가장 익숙한 음악 같은 베이스 드럼의 연주가 이어지고 연주자는 다시 무대 앞의 그 상자로 걸어 나온다. 바닥에 흩뜨려 놓았던 종이들을 다시 상자에 담고 덮개를 닫는 시늉을 하고 그중 단 하나의 종이를 손에 든 채로 연주자는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작품의 연주가 끝났다.연주자가 상자를 열고 타악기들의 장소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제시부였을까?말렛들과 생활 소품들을 이용한 공(Gong)의 연주, 배경으로 등장한 전자음향, 째깍째깍 시계 소리, 그나마 익숙한 베이스 드럼의 연주는 전개부이며 발전부였을까?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 종이들을 상자에 담고 그중 하나의 종이를 들고 무대 밖으로 나가는 연주자의 퍼포먼스는 재현부이며 종결부였을까?종이를 접고 펴고 구기고 찢는 소리는 결국 이 작품의 제1 주제였을까?소나타란 단어의 어원은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하는 음악의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칸타타(Cantata)란 표현의 건너편 소나타(Sonata)란 표현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음악을 표현하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소나타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어원적 정의가 사실 그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진은숙 작곡가의 작품을 듣는 것에 더해, 이 어원적 정의가 앞으로 소나타가 살아갈 길인가 잠시 생각을 해 본다.‘세상에 없던 예술 놀이터’에 참여하게 되며 가장 기뻤던 점 하나는 사랑하는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작가와 이 플랫폼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다와 운명을 함께하며 바다의 안녕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파도. 클래식 음악에 있어 소나타의 운명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소설의 제목을 오마주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는 빈번히 인용하곤 하는 사랑하는 구절 역시 들어있다.‘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인상적이며 강렬한 주제 하나가 우연처럼 탄생하고 그 우연들을 연결한 작품 하나가 탄생하며 그 작품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작곡가와 청중들에게 삼백 년의 사랑을 선사해온, 그것이 음악을 위해 일해온 소나타의 지금까지의 인생이었다면 큰 비약일까? 현대음악을 작곡하는 클래식 작곡가들은 앞선 작곡가들의 형식에서 무엇을 배우며 또 다른 무엇을 탄생시키려 노력할까? 그리고 혹시 그 작품들을 여전히 앞으로도 소나타라 명명할까? 오늘의 우연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으로부터 다시 삼백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이름을 잃지 않고 또 하나의 멋진 선을 이어낸 소나타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를 마음을 다해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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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댓글
한경으로 로그인luckykan*****
2023.07.05 12:28
장석주 시인님. 제 의견을 소재로 다뤄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신춘문예에 나이 기재가 필요한 이유?' 해마다 겨울이면 각자의 연유로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우리나라는 문예 도전의 왕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문 신춘문예는 유독 사는 지역, 나이, 성별 등등을 표기하기 돼 있습니다. 신춘문예에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할까요? 요즘 입사 시험도 대학교와 나이 등 출신에 대해서는 블라인드 처리를 하고 뽑습니다. 누구나 공모할 수 있는 공모전이 신춘문예일텐데, 굳이 왜 나이와 지역 등등을 표시해야 할까요? 꾸준히 문단에서 활동할 사람을 뽑기 위함이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분명히 봤습니다. 그 또한 말이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 입니다. 70살이면 어떻고, 80살이면 어떻습니까? 시인이 못되고, 소설가가 못되는 나이가 어디 있을까요?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어떤 신문도 신춘문예에 나이를 묻는 그런 공모는 없었음 좋겠습니다. 어디다가 건의해야 될지, 독자의 소리 이런 코너도 보이지 않아서 시인님께 이런 얘기를 드려 봅니다. 청와대 국민신문고에 써 볼까 했는데, 너무 안 맞는 주제이잖습니까. 청와대에서 신문사에다가 "거 신춘문예 수령할때 나이는 적지 말라고 하세요." 라고 말하는 사회와 시대도 아니고요.
신춘문예는 누구나 꿈꿀 수 있습니다. 그 꿈이 문예의 취지에 맞는지 아닌지는 심사위원분들이 선정해 주면 되는 겁니다. 다만 나이라는 걸 통해서 조금이라도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음 합니다. 개인의 정보는 이름과 전화 번호, 그 두 가지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할까요? 신춘문예에 필요한게 나이와 지역, 성별 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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