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사야 65:17-25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인듯싶지만, 돌아보면 기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여행자로 지난 일 년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마치 뙤약볕 아래를 터벅터벅 걷는 것처럼 어지럽고, 암담하고, 또 목마르고, 지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발목까지 빠져드는 진창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 놓아 울고 싶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 꼴 저 꼴 다 보지 않고, 한갓지게 세상을 다 잊고 지내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으로 가슴 벅찬 설렘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든 기억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이루는 아롱진 무늬일 겁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늘 연말이 되면 다사다난했다고 말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참 소란스런 한 해였습니다. <교수신문>은 매년 전국의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곤 하는데, 올해의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입니다. “이로움을 보자 의를 잊다”는 뜻입니다. 견리망의라면 단박에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견리사의(見利思義)’입니다. 견리사의는 『논어』의 자로(子路)와 공자의 대화에서 유래한 사자성어입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리망의(見利忘義)’는 ‘사(思)’와 ‘망(忘)’, 단지 글자 한 자 차이지만, 그 뜻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견리사의가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지만, 견리망의는 그 의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견리망의가 겨냥한 것은 우리 사회지만, 구체적으로 겨누는 것은 ‘정치인’입니다.
교수들은 “대통령의 친인척과 정치인들이 이익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위공직자의 개인 투자와 자녀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 개인의 이익을 핑계로 가족과 친구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공익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에 집착하는 세태를 ‘망의’로 압축한 셈입니.
이러한 견리망의 현상은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정당화되어 사기 사건과 아이의 편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해를 당연시하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이러한 현상이 사회 전반에 대의와 가치가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익 추구로 가치 상실의 시대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러다 보니, “오늘날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사회의 나아갈 방향이 불확실해졌다”라고 논평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국민들의 상당수가 깊은 인식이나 판단에 근거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서로 갈등을 빚곤 했습니다. 거친 말과 비방과 냉소가 넘쳤습니다. 그 때문에 사회의 온기는 줄어들고 냉랭함은 가중되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세상을 가꿔가는 것은 시민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문제는 그런 입장의 차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다른 차이를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역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나타낼 수 없다'(전1:8)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들 피곤합니다. 피곤하기에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부족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오늘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 마음속에는 헛헛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도대체 이 헛헛함과 공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이 '관계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면에 고요함이 없기 때문에 찾아오는 헛헛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죄'를 '소외시키는 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힘이라는 뜻일 겁니다. 죄는 사이좋은 관계를 깨뜨려 서로 버성기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웃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인간 됨인데,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친밀함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든든함을 잃고, 넉넉함을 잃고, 여백을 잃고 허전함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삶이 각박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웃들에게 좋은 이웃이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 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믿는다고는 하지만 제멋대로 사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회개할 기회 또한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에 보여지는 하나님은 언제나 분노하는 분이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많지만 거룩함을 향한 순례자로 살아가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고, 힘겹지만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진력을 다하는 이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신실한 신자 같았는데, 자기 삶의 자리로 옮겨가는 순간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의 실상입니다. 세속적인 욕망 충족을 위해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면서도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사65:1-7).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겪은 고통과 실패를 오롯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에다가 더럽고 무질서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삶을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말 복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모습으로, 손이 더러운 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병든 자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병들었음을 시인하고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인 것 같지만,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옛 세계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깨끗이 씻어 새로운 시간 앞에 세우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탁월한 가객이었던 故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새해에 주실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정말 뜬금없이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가사를 검색 해 보니 노래의 첫 절 가사가 기가 막힙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오래 전에 훈련소에 입대하던 때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새로움은 이렇게 옵니다. 낯익은 것들과 작별한다고 생각하니 시간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시간의 의미가 달라지고 보니, 늘상 평범하게 대하던 어느 것도 범상히 보아 넘길 수 없음을 알기 시작합니다. 풀 한 포기도 친구 얼굴도 모두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새로움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현실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과 눈이 달라졌을 때, 세상이 달라졌더라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될 겁니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새 삶을 다짐해본다 해도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은 결국 밥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사귀고, 싸우면서 이리저리 부대끼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일상을 떠난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잘 산다는 것은 그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는 그 일상적인 삶 속에 있다고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해가는 지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일상은 벗어버려야 할 굴레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포로민으로 살다가 꿈에도 그리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공동체가 겪었던 신산스런 삶을 배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만 벗어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묵정밭으로 변해 버린 땅을 일구고 무너진 도성을 세우기 위해 땀 흘려야 했고, 적대적인 시선과 도발에 맞서야 했습니다. 제국이 부과한 세금은 가혹했습니다. 희망은 달콤하지만, 현실은 쓰디쓸 때가 많습니다. 삶이 고달프면 인심이 각박해지게 마련입니다. 원망의 말이 서로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분쟁과 갈등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것이 귀환 공동체의 현실이었습니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고단한 일상만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라는 이름의 권위에 의지 하여 한 예언자가 등장하여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사65:17)
예언자가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마치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의식되지 못한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땅의 현실이 너무 힘겨워 고개를 자꾸 숙이다 보니 하늘을 잊어버리고 살던 동족들에게 하늘빛을 끌어들입니다. 죄와 절망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을 거듭하던 영혼에게 은총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생활의 곤고함은 일쑤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흑암과 공허와 혼돈 속에서 빛을 이끌어내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 삶은 잿빛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공허함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흑암이 깃들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흑암과 공허함 그리고 헛헛함 속에서부터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내 마음속에 어둠이 지극한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의 때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도모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벌써 새로운 삶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새롭게 하시고, 행복을 누리는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행복의 조건을 누리는 것입니다. 행복이 저만치에 있다고, 행복을 유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껏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평화는 우리의 꿈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성경의 어떤 대목보다도 평화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샬롬의 세상은 모든 생명이 각자에게 품부된 자기 몫의 삶을 한껏 살아내는 세상입니다. 아기들도 노인들도 잘 돌봄을 받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는 세상 말입니다.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사소한 질병에 걸려도 목숨을 잃는 이들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평화의 세상입니다. 강대국들이 전쟁을 위해 사용하는 군비의 일부만 돌려도 제3세계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호의를 기다리기보다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이 먼저 소박하지만 자기 주변에서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평화가 무너진 땅에서 자기 몫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그들 곁에 다가가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우리 욕망을 절제할 때 평화의 뿌리는 깊어질 겁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또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서 가족들이 오순도순 살고, 자기가 가꾼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거두어 먹는 세상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아 제 배를 채우는 이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절제를 모르는 욕망에게 자기 삶의 고삐를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은 우리에게서 이웃을 빼앗아 갑니다. 내 욕망이 커질수록 내 주변은 가시밭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순간, 우리 이웃들의 한숨 소리가 높아갑니다. 성도는 주변을 평화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가시밭과 같았던 인심을 장미꽃이 피어나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웃이 사라진 세상은 온기 없는 세상입니다.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것이 결코 사치가 되지 않는 세상이 새해에는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 청소년들이 자기 꿈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세상은 우리의 꿈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향도가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향도’란 말 아시죠? 군대에서 행진할 때, 대오의 선두에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병사를 향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향도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꿈에 우리가 응답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사65:24)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알아차리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는 세상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세상입니다.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이 아니기에 이 꿈은 더욱 소중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해가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히11:1).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기에 용기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증오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죽음 대신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어둠 대신 빛을 선택하고, 악 대신 선을 선택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길이 쉽지 않은 길이기에 주님은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기에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쉽지 않은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주님이 가르치신 그 길을 걸으면 좋겠습니다. 증오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죽임의 기운이 넘치고 있는 세상에서 기어코 생명을 선택하는 끈질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을 '존재의 용기'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현실 속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런 용기를 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길을 만들고 계실 것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지를 예민하게 알아차리며 사십시오. 이전보다 더 많이 감탄하고, 더 많이 감사하며 사십시오. 이웃의 시린 가슴을 녹여주기 위해 한 걸음 더 이웃들에게 다가서십시오. 불의에 대한 깊은 침묵에서 깨어나 의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소리를 지르십시오. 그리고 땀을 흘리십시오. 땅의 현실 속에 하늘빛을 끌어들이는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날마다 우리의 삶이 축제로 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는 자들의 기쁨이 2024년 일 년 내내 여러분 삶의 내용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과 가정과 일터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첫댓글 외람되지만,
진태와 현태 얘기를 해드릴게요
진태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철렁했습니다. 새로 만난 사람들과 잘 못 섞이나 보다. 심장이 두근반세근반하는데
"단톡방을 나간 친구가 있어요. 처음은 아니에요.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데 정작 본인은 몰라요. 특히나 한 친구랑은 다툰 적이 있었는데... 단톡방을 나간 친구는 그 상대 친구가 왜 화가 났는 지도 몰라요"
물었지요
"중재하고 싶니"
그렇다고 하네요. 저도 나이만큼 경험치도 쌓였으니 아는만큼 조언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꼭 당부를 했지요
"서로가 오해하고 있는 정보만 전달해라. 상대의 감정은 절대 언급하지 말고"
어느 날은
현태가 쇼파에 풀썩 앉아요.
"그게, 사고가 나잖아. 쫌 덜 떨어지는 애들이 사고난대. 하면 안 되는 뻘짓을 해서 사고가 난대"
"그래? 그럼 그 애한테 그 일을 맡기면 안 되지"
"덜 떨어지니까 그 일을 맡지"
"그래? 그럼 덜 떨어지는 애도 안전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현태야, 우린 어차피 언젠가는 다 죽을 거야. 그치만 말야. 죽으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우리 모두는 다 살려고 태어나는 거야.
그래서 모든 초점을 사람을 살리는 데에 맞춰야 하는 거야."
또, 잊지 않고
"나중에 이걸 현태가 해"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냥 막 현태에게 던집니다. 마음밭에 씨가 되라고.)
*저는 오늘 간만에 친구랑 통화 중간에
순간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른 친구에 대해 말을 하려다
아, 이 말을 디스인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의지적으로라도 그 자리에 없는 친구
디스는 삼가야겠다
라고 다짐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또 받으세요!
한 해를 돌이켜보면 믿는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분노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큰 위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해 보라며 저희를 깨끗이 씻어, 또 한해 새로운 시간 앞에 세워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행복의 조건들을 더 열심히 찾고 누리며 제 몫으로 주어진 삶을 더 한껏 열심히 살아내겠습니다. 더 많이 감탄하고, 더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이웃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시간을 더 내겠습니다. 2024년 내내 이 소망과 결심을 성실히 실천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