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박씨(潘南朴氏)
반남(潘南)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일명 반나부리현)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반남군(潘南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 현(縣)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속하였고, 지금은 나주군 반남면(潘南面)에 이르고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신라 왕족(王族)의 후예(後裔)로 고려조에서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역임한 박응주(朴應珠)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으며, 6세손 은이 조선 태종(太宗) 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된 연유로 해서 누대(累代)에 세거(世居)해 온 반남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나라 박씨(朴氏)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인맥(人脈)을 자랑하는 반남박씨는 응주(應珠)의 현손대(玄孫代)에 와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명문(名門)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353년(고려 공민왕 2) 문과(文科)에 급제한 상충(尙衷)은 시조 응주의 현손으로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능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상진(尙眞:판서를 역임)·상경(尙 :사은직장을 역임)·천두(天斗:여의 아들)·상질(尙質:생원 계의 아들)의 아들 대(代)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 예조참판 규)·세양공파(世襄公派:금천군강)·경주공파(慶州公派:경주부윤 훤)·지후공파(祗侯公派:예문지후 인)·교위공파(校尉公派:창신교위 귀근)·감찰공파(監察公派:감찰 여해)·군사공파(郡事公派:군사 진창)·정자공파(正字公派:교서정자 충)·사정공파(司正公派: 영사정 문부)·동정공파(同正公派:영동정 상질)·직장공파(直長公派:직장 송생) 등 11개 파(派)로 크게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어졌다. 가문(家門)을 빛낸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반남박씨가 배출한 8명의 상신(相臣) 가운데 최초로 명문의 기초를 세운 은이 뛰어났다. 그는 조선 초 두 차례 왕자(王子)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방원(芳遠:태종)을 도와 공신(功臣)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아들 3형제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발상(發祥)을 이루어 오늘날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특히 그는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조밥을 먹고 살았으리 만큼 청빈(淸貧)하였고, 하직(下職)에 있었을 당시 그를 무척 구박했던 계림군(鷄林君) 류양(柳亮)이 후에 국법(國法)을 어겨 이를 다스리면서도 복수는 커녕 오히려 구명(救命)해 주었을 정도로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은의 맏아들 규(葵)도 세종(世宗)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치사(致仕)했으며, 차남 강(薑)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금천군(金川君)에 봉해져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아우 훤(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훤의 아홉 아들 중 둘째인 숭질(崇質)은 연산군(燕山君)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내다가 왕(王)의 실정(失政)을 개탄하여 일부러 말 위에서 떨어져 부상(負傷)하였다고 구실을 붙여 등청(登廳)하지 않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매서운 정치보복에도 화(禍)를 면하여 가문의 융성을 지속시켰다. 한편 청백리(淸白吏) 강(薑)의 손자인 용(墉)은 은율 현감(殷栗縣監)으로 있을 때 한 소녀를 끼고 용을 탄 채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딸이 세자빈(世子嬪: 인종비)으로 간택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라 금성부원군(金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조 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의 아들 소(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 응로·신진사류(新進士類)와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며,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으로 일생을 살았다. 소(紹)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응천(應川)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했고, 둘째 응순(應順)은 선조(宣祖)의 국구(國舅:의인왕후의 아버지)로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청렴결백하게 생활하여 사람들은 그가 국구인 줄 모를 정도였다. 응순의 아우 응남(應男)은 명종(明宗)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6조(六曹)의 참의(參議)와 참판(參判)을 지낸 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선조 초에 바른말을 잘 하기로 제일 가는 간관(諫官)으로 알려졌다. 선조는 "정치솜씨가 조선의 으뜸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나 부정에는 인간관계를 초월하여 공박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사재감정 응천의 아들 동현(東賢)은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과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고 선조때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으며, 그의 아우 동선(東善)은 선조때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이조참판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 동열(東說)은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여 이퇴계(李退溪)를 배척하는 정인홍(鄭仁弘)과 맞서 싸웠고,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광해군 때 대사성을 거쳐 예조참의를 지냈다. 그의 아우 동망(東望)은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응복의 막내아들인 동량(東亮: 동망의 아우)은 임진왜란때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하여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攻臣)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져서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계승하였다. 광해군의 난정 속에서 함경도 병마 절도사로 나갔던 엽(燁: 참봉 동호의 아들)은 성지(城地)를 수축하여 방비를 굳게 했고,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규율을 확립,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진력하여 외침에 대비했다. 당시 권신(權臣)이었던 이이첨(李爾瞻)도 그의 명성에 눌려 굴복했을 만큼 명망이 높았다. 동민(東民)의 아들 환(煥)은 인종(仁宗)때 양천현령(陽川縣令)과 단양군수(丹陽郡守)를 거쳐 현종(顯宗)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던 병(炳)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던 미는 좌참찬 동량의 아들로 인조 때 사신(使臣)이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와 금양군(錦陽君)에 개봉되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우 의는 인조조에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장령(掌令)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어, 광해군의 폭정을 시(詩)로 풍자했던 아우 유와 더불어 명문(名門)이 가통(家統)을 지켰다.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세채(世采)는 반남박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1631년(인조 9) 영의정(領議政) 신흠(申欽)의 외손자로 태어난 세채는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고, 당쟁이 격렬했던 숙종조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당파를 초월하여 당쟁완화에 진력했으며, 특히 예학(藝學)에 밝아 육례의집(六禮疑輯)·남계예설(南溪禮說) 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참판(參判) 정(炡)의 아들로 현종 원년에 문과에 장원(壯元)했던 세당(世堂)은 숙종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저서인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주자(朱子)의 사서주해(四書註解)중에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이론을 내세운 것과,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 가운데 송시열(宋時烈)을 풍자한 문구가 있다하여 노론의 당쟁 자료로 역용되어 맹렬한 논척을 받고 유배당했다. 그의 아들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형제가 뛰어났는데, 1681년(숙종 7)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태유는 지평(持平)과 정언(正言)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태보는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서인(西人)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화(禍)를 당했다. 숙종이 승지를 시켜 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여 올린 소문(疏文)을 읽게 했는데 <만일 그렇지 않고∼>란 구절 밑에 이르자 숙종의 노기가 폭발하였다. 숙종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역(大逆)에 해당된다고 태보를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네가 전날부터 이미 나에게 항거하여 독을 내뿜더니 지금 또 이같이 욕을 보여 나를 배반하고 간악한 여인에게 붙었으니 네 무슨 흉심이 있어 이같이 간특한 흉역을 하느냐"고 호통치며 물어볼 필요도 없다면서 "이같은 독물(毒物)은 바로 머리를 베는 것이 옳다"고 참형을 명했다. 이에 여러 조신들이 원정(原情)을 듣지않고 죽임은 법례(法例)가 아니라고 노기를 달래어 혹독한 형이 가해졌는데, 태보가 조금도 변심없이 태연하자 화가 난 숙종은 "내가 친국(親鞠)을 하는데 아프다는 소리가 없으니 지독히 독물이다. 더욱 엄하게 매질하라"하였다. 계속된 혹형으로 태보의 살이 저며나와 피가 흘러 얼굴에 가득하여도 오히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임금이 더욱 화가 나서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려야겠으니 무릎을 누르는 형틀과 화형(火刑)할 기구를 대령하라"하며, 또 무슨 대꾸를 하려고 입을 열거든 몽둥이로 입을 후려치라고 명하였다. 이미 혹형이라 하여 법적으로 폐지된 무릎 누르는 형을 가하자 비명을 기대했던 숙종은 다음과 같은 태보의 발언에 안절부절 했다. "신은 오늘날에 죽을 것을 단정하였사오나 전하의 지나치신 처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망국(亡國)의 임금을 면치 못할까 하여 통탄하고 한스럽게 여기나이다"하고 두차례에 걸쳐 무릎을 눌러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질 않았다. 화형을 쓰라는 명이 급하게 내려 나졸들이 옷으로 불을 붙이고 태보를 거꾸로 매달아 온 몸을 지져댔다. 무릎 누르는 형이나 화형을 열세 번으로 한 차례를 삼았는데, 세 차례 네 차례 씩을 지지면서 사타구니에까지 불인두를 대라 하니 주변의 조신들이 자고로 화형은 지지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온몸을 지져서 후세에 그릇된 전례를 남길까 두렵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형벌이 계속되어도 태보는 "이제 만일 전하의 뜻에 맞도록 의(義)를 죽이고 영합한다면 신이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 형벌에 못이겨 거짓 자복한 귀신됨을 면치 못하여 여러 귀신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바가 될 것이오니, 어찌 영원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길을 택하오까. 신이 살아서 전하를 바른 길로 구(救)하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엔 거적도 덮지 않은 난장(亂場)이 가해지자 정강이 뼈가 부서져서 골수(骨髓)가 나왔다. 극형이 끝나자 부서진 지체(肢體)를 싸맬 베를 갖고 오도록 시켰다. 이때 어찌나 싸맬 곳이 많은지 베가 모자라자 태보는 도사에게 "내 도포소매를 찢어서 싸시오"하였다. 도사가 태보의 도포소매를 찢었으나 질겨서 잘 찢기지 않자 태보는 "칼로 실밥을 뜯고 찢으면 쉽소"하니, 도사가 마음이 흔들리고 손이 떨려 찢질 못하였다. 태보는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지휘하여 싸매고는 소매 속에 있는 부채를 꺼내면서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테니 이것을 우리집에 전해주오"하니 그 태연함에 숙종도 어이없이 지쳐 버렸다. 태보가 진도(珍島)로 귀양가기 위해 금부(禁府)를 나오자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얼굴을 보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눈물을 흘리며 애석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목놓아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태보는 여러 사람 가운데 그의 참상을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돌려 울고있는 친구를 알아보고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 유배길에 읽겠다고 책을 꾸려들고 떠나는데, 그의 아버지 세당이 "너는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조용히 죽어서 마지막을 빛나게 하라"로 하자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을 좇지 않으오리까"하였다. 세당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태보는 노량진을 겨우 건너 사육신(死六臣) 묘(墓) 근처에서 유명을 달리하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기사치문(己巳置聞)에는 태보의 절의(節義)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처지를 바꾸었던들 육신(六臣)이 되었으리 / 영전(靈殿)이 어찌 또 노량(露梁)의 물가런고 / 하늘도 역시 묻히기 원하는 뜻을 알아 / 짐짓 충혼으로 육신과 이웃을 만들었는가> 조선 실학파(實學派)의 대가(大家)인 지원(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1737년(영조 13) 노론(老論)의 가문(家門)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의 손자로 태어나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하여 실용문학에 치중하였고, 정조(正祖)때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당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가 되어 청(淸)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김정희(金正喜)·김홍도(金弘道)와 더불어 문예3대가(文藝三大家)로 일컬어졌다. 특히 그는 일반사회의 허실과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양반전(兩班傳)·허생전(許生傳)을 저술했으며, 홍대용과 더불어 태서지구설(泰西地球說)을 주장하여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외 순조(純祖)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오른 종경(宗慶:판돈령부사 준원의 아들)과 우의정(右議政)으로 글씨와 시문(詩文)에 능통했던 종훈(宗薰)이 유명했고, 회수(晦壽)는 철종(哲宗)때 좌의정을 역임하여, 좌참찬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기수(岐壽), 문장(文章)과 글씨로 이름난 순흥부사(順興府使) 운수(雲壽),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호수(鎬壽), 금양군(錦陽君) 제문(齊聞)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세웠으며, 군수(郡守) 종채(宗采)의 아들 규수(珪壽:지원의 손자)는 고종 때 대제학과 공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최익현(崔益鉉) 등과 함께 강력한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의정부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을 지낸 정양(定陽)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 영교(泳敎)·영효(泳孝) 형제가 뛰어났으며, 기양(箕陽)은 글씨와 묵죽(墨竹)에 뛰어나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評議員)을 역임하고,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원 찬익(贊翊), 신극운동(新劇運動)의 선구자 승희(勝喜)와 함께 의열(義烈)의 전통 가문인 반남박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8,395가구, 118,8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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