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 배병태
오랜만에 봄나들이를 갔다. 괴산호 산막이 옛길을 걸어보고 문경새재를 둘러보는 가벼운 일정이다. 여행은 늘 설레고 즐거움을 주지만 이번 길은 의미가 더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일행은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13명의 친구들이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낯선 장소에서 하루 밤을 지내기로 한 것은 웬만큼 끈끈한 정이 있지 않고는 어렵기 때문이다.
산막이 옛길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은 절정에 달했고 연초록 새순은 생명의 숨결을 내뿜고 있다. 숲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호수 수면을 스치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발걸음도 가볍다. 여행은 역시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것 같다. 연하협 구름다리까지 4km를 걸은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모터보트를 탔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 선장은 서비스 차원에서 묘기를 부리기도 한다. 모두들 괴성을 지르면서 스릴을 만끽한다. 해질 무렵 산막이 옛길 걷기는 환상적인 노을과 함께 마무리 짓고 숙소로 향했다.
나실마을 마을회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실마을은 문경시내에서 20km나 떨어진 오지마을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좁은 골짜기 사이로 사철 마르지 않는 맑은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산자락에 발달한 구릉지 밭에는 대부분 사과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회관은 최근에 신축했는데 현대식 숙박시설과 취사장,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어 1박 2일 머무르기엔 손색이 없는 시설이었다. 마을 부녀회 임원들이 준비한 저녁밥상은 산골 마을의 특산물로 그득한 웰빙 식탁이다. 두릅, 고사리, 머위, 취나물, 표고버섯에다 한방재로 우려낸 문경약돌 돼지수육은 장시간 보행으로 허기진 우리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막걸리 잔이 돌고 정담과 웃음소리는 한적한 산골의 밤을 행복으로 적신다. 잠시 좌중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발길을 돌린다. 초승달은 벌써 넘어가고 청청한 하늘에는 별빛만 초롱초롱하다. 싸늘한 밤공기를 마시면서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는 5년 전에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고, 60대 초반에서 70대 초반의 초로의 남녀들이다. 그 당시 모 단체에서 ‘은퇴자를 위한 공동체 마을’을 개설해 제주도에서 첫 문을 열었다. 전국에서 희망자를 공모했는데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1기생 동기들이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이름난 지역이고 입주 조건도 좋은 편이었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숙소와 식당, 사워실 등 꽤 괜찮은 시설이었다. 무엇보다도 천연 잔디로 가꾸어진 넓은 운동장을 앞마당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했다. 생활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정한 규율에 따라 자율로 움직였다. 강제성이나 제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우리의 규칙에서 벗어나 일탈 행위를 하는 자는 없었다. 한 번도 집을 떠나 생활해본 적이 없는 남남끼리 모였지만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당번을 정해 취사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그야말로 한 솥에 밥을 지어 먹고 한 지붕 아래 잠을 자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갔다. 농촌 일손 돕기와 밀감 따기 같은 봉사활동에도 솔선해서 연장을 챙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곤 했다. 우리 동행이 더욱 빛나는 우애를 발휘할 때는 올레길 걷기였다. 올레길은 대부분 15km 이상 되는 장거리 코스라 동트기 전에 출발을 서둘러야 무리 없이 한 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 점심과 간식 준비, 운전 봉사와 코스 안내도 모두 즐거운 마음뿐인 행복한 동행이었다. 제주 있는 동안 올레길 26개 코스를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우리의 동행자 덕분이리라.
가족 공동체는 모든 동행의 시원이다. 가족의 최소 단위인 부부야말로 지상 최고의 동행자가 아닐까. 간혹 짧은 동행으로 마무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가장 오래, 가장 멀리 함께 가는 짝이다. 처음 만나 설렘이 싹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신혼의 달콤함이 식어갈 즈음이면 새로운 사랑의 샘물이 솟아난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성숙된 동행이 시작된다. 아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육체의 고통도 마음의 괴로움도 기꺼이 감내한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는 시기가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령기. 내 아이를 바르고 유능하게 키우고 싶은 이 세상 부모들의 바쁜 일상이 시작된다. 거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청년기의 스펙 쌓기, 좋은 직장을 구하기 바라는 간절함, 좋은 짝을 맺기 바라는 소망 등 부모로서 할 일이 첩첩산중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이후에 또 다가올 애프터 서비스와 인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가족이라는 동행은 희생을 전제로 한 숙명적 관계임에 틀림없다.
2018년에 개봉된 애니메이션 명작 영화 〈코코〉가 생각난다. 증조할머니가 된 ‘코코’는 임종이 임박해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증손자 ‘미겔’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노래 ‘Remember me'라는 노래를 듣고 의식을 되찾는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어릴 때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빠였지만 '코코'의 영혼 속에 감춰진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증조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었나 보다. 가족이라는 사랑의 끈이야말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동행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웃 공동체도 있다. 학창 시절의 친구나 동호회 회원이 그것이다. 함께 예배드리는 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회원으로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부대끼고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를 맺어 간다. 소속된 모임을 위해 직책을 맡기도 하고 희생적인 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합창단 총무를 맡은 적이 있다. 회계가 따로 없어 모임의 재정도 관리했다. 재정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회원의 회비를 수납하고 경비를 지출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타 지역 공연도 가고 해외공연까지도 하는 일이 생겼다. 회계 규모가 점점 커졌다. 일이 힘에 벅찼지만 임기 중에 그만 둘 수도 없고 해서 밀고 나갔다. 회기를 마치고 결산을 할 때 꽤 많은 액수가 비었다. 분명 어딘가에 지출이 되었겠지만 기록을 게을리 했으리라. 남을 위해 봉사하고 금전적 손실도 입지만 회원을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동행자의 태도이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가끔 한다.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한 지혜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가족이 운명적으로 만나지듯이 국가도 운명적으로 만나는 동행 공동체임에 틀림없다. 글로벌이 대세라지만 여전히 세계는 자국의 이익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전쟁이 그렇고 중국과 대만의 분쟁 또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갈등이 아니겠는가.
국민의 동행 의식은 국가가 어려울 때 나타난다.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가 났을 때많은 자원봉사자가 환경을 살리기 위한 방제작업을 펼쳤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국가라는 동행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발로된 애국심이다.
우리들의 봄나들이 동행도 다음을 기약하고 마무리한다. 마주 잡은 정겨운 손, “잘 가시오. 연락 자주 하고 지냅시다.” 헤어짐이 아쉬운 인사말 한마디 남긴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라는 동행의 의미를 생각해 본 뜻 깊은 여행이었다. 차창 밖의 봄 빛깔이 어제보다 짙어졌다.
첫댓글 좋은 이웃들과의 나들이 속에 피어난 동행 이란 작품을 읽으며 현대인들이 거미줄처럼 엮인 공동체 생활의 참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민 공동체 라는 의식을 늘 마음에 심어 놓고 물을 주어 가꾸듯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