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아랍에미리트) 대통령 사망
2019년 광주광역시 33.3℃ 폭염주의보, 폭염특보제도도입(2008.6.1.)이후 가장 이른 특보
2015년 ‘노래하는 신부(神父)’ 반예문 별세
‘노래하는 신부(神父)’로 알려진 미국인 반예문(89·레이먼드 설리번) 신부가 지난 15일 미국 뉴욕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선종(善終)했다.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된 반 신부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55년 한국에 왔다. 청주교구에서 15년간 활동했고 이후 서울에서 가톨릭 매스컴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고인은 1982년 ‘가톨릭 가요대상’을 제정했고, ‘바보처럼 살았군요’ ‘잊혀진 계절’ 등 좋은 가요를 영역(英譯)해 외국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면서 ‘노래하는 신부’로 잘 알려졌다.
1989년 한국을 떠나 뉴욕 메리놀회 본부에서 생활해 왔다
2014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메그나 강에서 250여 명을 태운 여객선이 침몰하다
2012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디아블로 3 전세계 출시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김유감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104호 '서울새남굿' 보유자인 김유감(金有感·85)씨가 2009년 5월 15일 오전 별세했다. 고인은 서울새남굿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됐다.
서울새남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울지역의 독자적인 '망자천도굿'이다.
2009년 북한 개성공단 계약 무효 선언
북한이 2009년 5월 15일 개성공단 임금·임대료·세금 등의 조건을 자기들이 다시 정할 것이며 남한이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단에서 철수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무책임한 처사"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의 개성공단 관할 기구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이날 남측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 "개성공단에서 6·15 공동선언(2000년)의 정신에 따라 남측에 특혜적으로 적용했던 토지 임대값과 사용료, 노임, 각종 세금 등 관련 법규와 계약들의 무효를 선포한다"고 말했다. 이어 "변화된 정세에 맞게 개정된 법과 규정을 시행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며 "남측 기업들은 우리가 통지한 사항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집행할 의사가 없다면 개성공단에서 나가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남측 기업이 철수해도 좋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7년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 현대미술 최고가 낙찰
2007년 한국인 4명 탄 원양어선 마부노1,2호 2척 소말리아 피랍
마부노 1호와 2호는 부산 선적의 새우잡이 어선으로, 한국인 4명을 비롯하여 중국인, 인도인, 베트남인 등의 총 24명의 선원을 태우고 케냐 몸바사 항을 떠나 예멘으로 가던 도중 소말리아 근해에서 피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주가 해적들과 협상하여 석방금을 대략적으로 합의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범과는 협상 없다”며 피랍사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정부대책반이 현지에 도착한 것은 피랍 사건 후 1개월이 지나서였다. 해적들은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8월 들어 선원들을 폭행, 감금하고 총을 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선원들 중에는 폭행으로 쇠약해져 말라리아에 전염된 사람도 있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오히려 해적들이 전에 납치했던 동원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정도였다.
이후인 한국 시간으로 11월 4일에 선원들은 석방되어, 미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13일에 아덴으로 입항하였다.
2007년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별세
제4대 해병대사령관과 제15대 국방장관을 역임한 김성은(金聖恩·83) 전(前) 장관이 2007년 5월 15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46년 해군 참위(소위에 해당)로 임관해 1949년 4월 해병대 창설 때 참모장직을 맡았다. 6.25전쟁 때는 태극무공훈장과 미 은성무공훈장 등 총 19개의 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 한국 해병대가 처음으로 단독 상륙작전을 벌인 통영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우리 해병대가 미국측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얻게 한 당사자다.
2007년 대하소설 혼불 배경 종갓집 불
작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전북 남원의 삭녕(朔寧) 최씨 종가에서 불이나 종가의 대를 이어온 할머니가 숨졌다.
2007년 5월 15일 오전 1시10분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 안채에 불이나 1시간30분 만에 목조한옥 25평이 모두 탔으며, 안방에서 잠자던 종부(宗婦) 할머니 박증순(93)씨가 사망했다.
이 집은 소설 ‘혼불’에서 최씨 종가 며느리 3대 일가가 일제 강점에서 6.25전쟁 때까지 수난과 애환을 겪어온 곳이었다.
박 할머니는 조선 성종의 스승이던 폄재공 최온의 12대 종부로, 먼 친척인 작가 최명희에게 집안 내력과 듣고 겪은 일들을 구술해 주었고, 그 자신 소설 속 종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2005년 명왕성의 위성 닉스와 히드라가 허블우주망원경에 의해 발견됨.
2005년 서해 입파도 일가족 보트 참사
서해 섬에서 휴일을 보내고 돌아오던 한 가족이 탄 보트가 침몰해 7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숨진 이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찬 바닷물에서 14시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구자훈(39·회사원·경기 안산시)씨 형제·자매(2남3녀)와 가족 등 14명은 휴일인 15일 서해상의 섬 입파도(경기도 화성시 우정면)로 야유회를 갔다가 오후 4시쯤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구씨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딸, 동생인 자희(여·30)·자영(28)씨, 자희씨 남편인 김심환(33·서울 서대문구)씨 등 모두 8명을 구씨 소유의 0.7t짜리 레저용 보트(7~8인승)에 태우고 전곡항으로 향했다. 마침 파도도 없는 데다 보트도 최고 시속 30노트(54㎞)로 달릴 수 있어 평소 같으면 1시간 남짓이면 갔다 올 거리(약 13㎞)였다.
그러나 보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섬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던 자훈씨의 동생 자경(여·28)씨 등 가족 6명은 자훈씨와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4시간 뒤인 오후 8시 20분쯤 해경에 신고했다. 해경은 신고한 지 1시간 만인 이날 오후 9시 24분 출동, 2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경비정 8척과 헬기 2대로 밤새 수색을 벌여 이튿날인 16일 오전 6시 20분쯤 자희씨를 구조했다. 자희씨는 김 양식장 부표를 붙잡고 상반신을 물 밖으로 내놓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해경은 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가족 7명은 모두 인근 해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3년 국립 공주박물관서 국보 1점등 4점 분실
국보 19점, 보물 4점 등 문화재 1만여점을 전시·보관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의 야간 근무자는 3명이었고, 비상사태 시 서로 연락할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전시실에는 폐쇄회로TV(CCTV)와 적외선 감지기가 설치돼 있었지만 가동되지 않거나 제 구실을 못했다.
15일 밤 10시쯤 공주박물관 당직근무자 박모(35·학예연구사)씨는 바람을 쐬러 당직실 옆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셔터와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 10시 25분쯤 검은 복장을 한 30대 남자 2명이 뛰어들어왔다. 순간 건물에서 20m 떨어진 경비초소 청원경찰(2명)에게 알리려고 박씨는 소리를 질렀지만 곧 제압을 당했다. 범인들은 각각 전기 충격기와 칼로 박씨의 목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위협, 박씨의 팔과 다리를 뒤로 묶고, 눈과 입을 테이프로 가렸다. 범인 중 한 명은 박씨를 감시하고 나머지 한 명은 안으로 들어가 전시실 유리창을 깼다. 몇 분 후 인기척이 없어 박씨가 결박된 손을 풀고 가려진 눈을 떠 보니 범인들이 도주한 뒤였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온 시각은 10시 44분. 범행은 불과 10여분 만에 이루어졌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공주박물관에는 보안방범시설로 CCTV 4대, 적외선 감지기 6대, 당직실에서 경비초소와 파출소로 연결된 비상벨 1개가 있다. 하지만 CCTV는 2층에만 설치돼 있고, 야간에는 작동을 중지시켜 사실상 야간 침입자에 대한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다. 1층 전시실과 1~2층 사이 계단에 설치된 적외선 감지기는 당직자가 야간에만 작동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건 당일 벨은 울리지 않았다. 경찰은 “박씨가 감지기를 작동시키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 말했다. 또 당직실과 연결된 출입문 안쪽에 셔터가 있지만 당직자들은 이를 거의 내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작년 4월 공주박물관으로 발령받은 이후 당직 때 출입문 셔터를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충남지방경찰청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문화재 4점의 회수를 위해 16일 이례적으로 20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도난 문화재 사진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14일 오후 6시(한국시각 15일 오전 7시)에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30분 가량의 단독회담, 배석자를 물리친 5분간의 ‘양자대화’ 순으로 진행됐고 이어 오후 8시까지 만찬 겸 확대정상회담이 열렸다. 두 정상은 회담 후 만찬장인 2층 올드 패밀리 다이닝룸으로 가면서 이동로인 로즈가든에 마련된 포토라인서 기념촬영을 한 뒤, 기자들에게 회담결과를 ‘공동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은 5분, 노 대통령은 4분 가량 회담 결과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질문은 받지 않았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대목은 두 대통령의 ‘5분 단독대좌’였다. 오후 6시 단독 정상회담 시작 후 30분 가량 지난 뒤 두 정상은 배석자를 모두 물리친 뒤 5분간 ‘독대(獨對)’를 했다. 통역만 배석한 독대 회담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부시 대통령은 또 정상회담과 공동 브리핑 후 노 대통령을 10분간 백악관 내 관저의 ‘대통령 방’과 ‘링컨침실’을 안내했다. 이해성 홍보수석은 “이 시간에도 두분이 적지않은 얘기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97년 채널 터널이 완전히 복구되다.
1996년 판소리 대가 강도근 명창 별세
강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의 마지막 대가로 평생 고향을 지키며 향토의 예맥을 이어온 고집스런 예술인이었다.
조선조 말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오던 강 명창은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강 명창은 생전에 “인간문화재가 좋다지만 서울 올라가 인간문화재 되고 무대에서만 소리하게 되면 동편제소리는 버리게 된다”며 중앙무대 진출을 거절했다. 명예나 출세보다 오직 판소리 하나만을 벗삼아 농사지으며 일생을 살아온 강 명창은 이 같은 고집 때문에 지난 1988년 70세의 나이에서야 비로소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로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1918년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16세되던 해에 김정문 문하에 들어가 1년을 사사하고 20세 때 상경,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다. 그 후 지리산 쌍계사일대에서 7년여 동안 독공한 끝에 득음의 경지에 들었다.
1995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제44회 연례총회 서울서 개막
1993년 일본 프로축구리그 `J리그` 출범
1993년 한학계 원로 우전 신호열 별세
우전은 고전 국역에 큰 공적을 남겼으며 한학 분야에서 마지막 남은 대학자로 불려왔다. 전남 함평 태생인 우전은 3살 때 조부의 무릎 아래서 천자문을 배우고 6세 때 이병수 선생에게 통감절요를 배움으로써 본격적으로 한학에 입문했다.
열 살 때 이미 한시를 지어 동네 노인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7세 결혼할 때까지 사서삼경을 비롯, 사기 당송팔대가의 글과 6경 제자백가들을 뗐다. 1960년 `한중시사`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그가 지금까지 번역한 한문 고전들은 20여종, 수십 책에 이르고 있다. 우전은 한문고전 중에서도 특히 시문 번역에 독보적 경제였다.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퇴계의 시나 완당집을 번역한 것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으로 평가된다. 지난 1985년 제1회 고전 국역상 본상을 수상했다.
1991년 일본 자민당 아베 신타로 사망
아베씨는 다이쇼(大正)13년(1924년) 야마구치켄에서 태어났다. 동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잠시 마이니치 신문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 1958년 총선거 때 출마, 첫 당선함으로써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3번째 선거인 1963년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곧 컴백, 지금까지 11회 당선을 거듭했다.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라는 가계의 덕택과 성실한 인품, 원만한 성격으로 신망을 쌓았다. 그는 미키 내각 때(1974년) 농상으로 첫 입각한 것을 계기로 관방장관, 통산상과 외상을 역임했다.
1991년 에디트 크레송 프랑스 최초의 여성총리 됨
1988년 국내 최초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 한겨레신문 창간
1988년 8년간의 전쟁 끝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후퇴(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시작).
1986년 미국 네바다사막 지하 핵실험장에서 방사능 유출 2000만$ 장비 피해
1982년 영국 특공대 포클랜드 상륙
1982년 제1회 스승의 날(부활, 1973년 중단)
1980년 ‘서울의 봄’ 맞은 시민 학생 20만명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화 요구
1974년 한국-네팔, 국교수립
1973년 국무회의에서 새 가정의례준칙 의결
1973년 국회의사당 본관 상량식
여의도 국회의사당 3개 건물 중 본관 상량식이 1973년 5월 15일 열렸다. 국회의사당은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진후 6년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됐다. 3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 대열주가 받쳐주는 처마와 밑지름 64m의 돔으로이루어진 지붕으로 구성되어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징하는 것이며 돔은 원만한 결론을 지향하는 의회정치의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 대지면적은 33만평방미터제곱(10만평)이고, 지하2층 지상6층의건물로 지반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69.19m, 연건평은 8만1444평방미터제곱(2만4680평)이다.
1972년 류큐 제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미국, 27년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1972년 5월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縣)’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라는 영원한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감격해했지만 진보진영은 핵과 미군기지없는 전면반환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반환은 예정대로 진행돼 국제선은 국내선이 됐고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렸다.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한국ㆍ중국ㆍ일본ㆍ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1609년 가고시마(鹿兒)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뒤부터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됐지만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버려진 섬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석달간 미군ㆍ일본군 간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전투로 미군 1만5000명과 일본군 6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도 12만명이나 희생됐다. 본토방어를 위해 시간을 벌기위한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일본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패전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의 흥정대상이었다. 군사요충지로 오키나와를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일본은 오키나와를 바치고 그 대가로 미ㆍ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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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5. 15 미군부대 병력 피습, 미군 병력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사격을 받고, 응사하자 도주하였음.피해(부상 2명)
1967년 문무대왕릉(해중릉) 발견
1967년 5월 15일 경북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백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둘레 약 2백m의 대왕바위에 정확한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령의 해중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다. 유골은 그 못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여졌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1964년 라오스내전 격화
1963년 동경올림픽 남북 단일팀 협상 홍콩서 개시
1958년 한강 인도교 보수 후 개통
한강 인도교의 복구공사 준공식 및 개통식이 1958년 5월 15일 오전11시 이승만 대통령 참석하에 거행됐다. 행사는 국무위원 전원과 내외귀빈 및 시민들로 가득찬 백사장에서 경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됐고, 이 대통령은 개막 테이프를 끊은 후 새로 단장한 인도교를 도보로 건너기도 했다.
복구공사를 직접 담당한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씨와 홍화공작소 사장 양춘선씨는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한강 인도교는 6·25가 발발하자 작전상의 이유로 일부를 폭파했다가 그후 개수하여 가교로써 사용하던 것을 1957년 9월부터 복구 공사를 개시, 8개월 만인 이날 개통됐다. 다리가 끊어진지 만 8년만이었다.
1957년 영국이 키리티마티섬에서 수소폭탄 실험 성공(세계에서 3번째 수폭 보유국)
1957년 5월 15일 영국이 중부 태평양상에 있는 크리스마스섬에서 수소폭탄개발 실험에 성공했다. 이날 4발 제트기폭격기인 바리안트는 고도 9.100m에서 영국 최초의 수소폭탄을 투하했고, 폭탄은 3,000m의 고도에서 폭발했다. 실험지역에는 해군함정이 배치됐고 일반선박은 출입이 금지됐다.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으로 세계의 방사능 수치가 상승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2월 영국의 실험이 예고됐을 때 반대를 표명했다. 일본 정부도 특사를 파견해 맥밀런 수상에게 중지를 요청했으나 결국 영국은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의 수소폭탄 보유국이 됐다.
1957년 제25회 임시국회 야당만으로 개회식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실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 당선
이승만의 3차 집권을 겨냥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목표로 한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부통령에는 이기붕, 장면, 박기출, 이윤영, 백성욱, 이종태 등 8명이 출마했다.
선거 10일전에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의 득표수는 전체 유효표 720만표의 70%에 달하는 504만여 표였고, 신익희 지지표를 일부 흡수한 조봉암도 선전해 유효표의 30%인 216만여표를 얻었다.
선거 전에 사망했음에도 유권자들이 신익희에게 던진 185만표는 무효처리됐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결과는 장면이 유효표의 46%인 401만여표를 얻은데 비해 이기붕은 44%인 380만표를 얻어 패배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급서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회는 놓쳤지만 자유당이 당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추구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당의 독주를 막아낼수 있게 됐다.
1955년 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948년 항공부대 창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발발
1948년 5월 15일 아랍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5월 14일 이스라엘의 지도자 벤 구리온이 이날 소집된 제4회 전국평의회 석상에서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인 5월 16일 미국 소련 일본 등이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전쟁 초기에는 아랍제국이 우세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제국은 패배를 거듭했다. 조정에 나선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49년 7월 21일 휴전이 성립됐지만, 휴전은 잠시뿐 지금까지도 중동의 화약고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전쟁 패배로 1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으며 아랍게릴라가 조직됐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발표
1940년 나일론 스타킹 미국 전역에서 판매 시작
1932년 일본 이누카이 총리 피살
1928년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가 처음으로 등장한 <Plane Crazy>가 상영되다.
1923년 평양 전차 시운전
1918년 3대와 6대 국회의원 지낸 국회오물투척사건(1966년)의 주인공 김두한 태어남
1915년 경춘도로(서울-춘천) 준공
1911년 첫 동시상영 영화 ‘The Lost Chord’와 ‘The Fall of Troy’상영.
1905년 미국 네바다 주에 라스베이거스가 세워지다.
1902년 시인 정지용 탄생
1902년 5월 15일 한국 근대 시사에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난 그는 재학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교지를 만들며 일찍이 뛰어난 문학적 재질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후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됐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에 접어들어 격렬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6·25전쟁 이후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누명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01년 모펫, 한성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설립
1859년 플로늄과 라듐 발견해 부부가 함께 노벨상 받은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 태어남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세움
1644년 명 末王 숭정제의 자살로 홍광제가 남명(南明) 초대황제 즉위
홍광제가 1644년 5월 15일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남경에서 즉위했다. 남명 정권은 명나라 수도 북경이 청나라에 함락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에 이주해 있던 황족들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였다.
황족들은 숭정제가 죽은 후 황태자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황족가운데 한 사람인 복왕을 감국(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담당)으로서 국사를 담당케 했다. 이것이 이른바 남명 정권으로 복왕은 그후 제위에 올라 홍광제라 칭했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즉위 1년만인 1645년 5월15일 청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됨으로 막을 내렸다. 융무제, 영력제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청군의 공격과 관료들의 무능, 부패로 결국 18년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청의 군사들을 피해 멀리 미얀마까지 도주했으나 뒤쫒은 오삼계에 의해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