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慶州 芬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 구황동 312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 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 절은 평지 일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다른 사찰에서 보듯 중문, 탑,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나 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 지금은 3층(국보)만 남아있다. 신라탑은 전탑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구조 모방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루었다. 통일신라의 모전탑 및 전탑은 안동, 의성, 제천 등지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어갔다고 한다.
이 탑은 바다속의 안산암을 갈아서 쌓은 것으로 1915년 탑을 수리하다가 사리장치가 든 돌 상자 속에서는 구슬과 금은으로 된바늘, 고려시대 화폐가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늘은 탑을 건립한 선덕여왕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는 1층 탑신 4면에 감실을 만들고 돌문을 달았으며 이 입구마다 좌우로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있고, 탑에는 돌사자가 놓여 있다. 금강역사상은 조각이 아름답고 입체감이 두드러져 삼국시대 조각 기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분황사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 경내, 당시의 우물 석정에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는데 이 우물 속에 호국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1965년 우물 속에서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되었고이 석불들은 경주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약사전은 조선시대에 세워졌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8각 석정)이라는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분황사약사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는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634년(선덕여왕 3) 경주에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자장과 원효가 이 절에 머물렀다.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의 화쟁국사비가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하고 광해군 때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국보 제30호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보물 제 2162호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중도리 바닥에서
1616년「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및 종도리에서 1680년「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묵서(墨書)가 확인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한 대형 불상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조성 이후에도 김수홍(金壽弘, 1626∼1690)의『퇴우당집(退憂堂集)』, 임필대(任必大, 1709∼1773)의 『유동도록(遊東都錄)』등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 언급되어 있어 전승 경위 또한 명확하다. 분황사는 신라시대부터 자장율사(慈藏律師), 원효대사(元曉大師) 등 여러 고승들의 수행처이자 중요한 가람터로 인정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사찰이다. 원래 이곳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불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약사도량으로서 분황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이 주목되는 이유는 17세기 초반의 동조(銅造) 불상이라는 점, 규모가 354cm이르는 현존 최대 금동약사불이라는 점, 앞 시기 규범에 따라 입상으로 조성된 정통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 대부분 소조(塑造, 진흙)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규모 금동불상은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ㆍ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16년과 1680년에 작성된 두 건의 상량문을 통해 1609년에 동(銅)으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조성 경위와 불상의 존명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 시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분황사 경내 계단으로 사용되고있는 또 다른 석탑 부재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