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아침해 문학에 오르고
검붉은 저녁해 황해에 지는곳
소성에 정기 감돌고 바다에 물새 나른다.............
우리의 태를 한 곳에 모은 모교 교가의 첫 소절이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고향의 소리인양 다정하기만 하다.
2003년 3월 11일(화).
"제16차 인천 화요산악회의 화요 산행은 우리 어린시절 소풍을 갔던 유서깊은 배꼽산(문학산)에서, 만남의 장소는 인천 지하철 선학역 3번 출구."
곳이어 "제82차 서울 목요산악회의 목요 산행은 인천 문학산에서 화요산악회와 함께" 라는 안내문이 인고 56 카페 게시판에 각각 떠오른다.
인고 56산악회의 양대산맥인 서울/인천의 산악회가 합동으로 내고장 인천 문학산에서 회동 하는 것이다. 산우들의 단합대회라! 아주 좋은 만남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르려는 문학산(213m)은 인천의 주산이며, 또한 진산으로서 북쪽의 계양산(395m), 동쪽의 소래산(299.4m)과 함께 삼각형으로 대치하는 사이에 50-100m 내외의 낮은 구릉이 시가지에 연속적으로 펼처저 있다. 인천시 남구 학익동. 문학동과 연수구 청학동. 선학동으로 이어지는 문학산은 멀리서 보면 커다란 학이 날개를 펴고 포근히 자리 잡은 형상이다. 또한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6.25이후 사라짐)멀리서 보면 마치 배꼽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배꼽산 이라고도 불려 왔다.
오전 10시. 인천 지하철 선학역 3번 출구에는 하나, 둘씩 정다운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분당과 용인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산우들은 하이 화이브!를 외치면서 손바닥을 마주친다. 예전의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가며 환하게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는 노익장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밝기만 하다.
지난 3일동안 지꿎었던 날씨와 봄샘 추위도 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화창하게 개이고, 싱긋한 봄의 향기와 함께 산우들의 마음은 창공을 나는 새처럼 가쁜하기만 하다.
모두 19명(서울 7명, 인천12명)의 산우들은 선학역을 떠나 문학산 정상을 향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기 시작한다.
오늘 회동한 산우들의 면면은
서울에 鄭石宮 산악회장, 田河鎭 등반대장을 비롯 朴尙玉, 朴年培, 李永圭, 林永植, 韓相根산우.
인천에 宋相鎬 동창회장, 全永德 사무총장과 吳秉益 화요산악회장을 비롯 金瑛基, 禹大均, 兪洪錫, 李未鉉, 李榮求, 鄭樂憲, 崔 鍾萬, 洪錫天산우 그리고 筆者이다.
선학역을 출발한 일행은 콘크리트 숲으로 이루어진 상가와 아파트단지를 지나 산행로 초입에 선다. 한국의 산은 어디에서나 소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항상 푸르름을 간직한 청솔은 포근히 산행객을 감싸주고, 잘 다듬어진 등산로는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의 옛친구들을 다정하게 반겨주며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모처럼만에 고향을 찾은 서울의 목요 산우들의 감회도 새로워 지겠지? 어려운 국난의 50년대, 이땅의 젊은 이들은 가난만을 물려준 선대들에게 무척이나 많은 원망을 토해 내면서 배움의 길에 서있었고, 60년대 격변하는 사회속에서 고향을 떠나며 얼마나 많은 서글픔의 나날 속에서 Lost Generation! 이라는 자탄으로 독백하였는가?
이제 반백의 머리와 깊은 이마의 주름을 안고, 고향의 옛산을 찾은 발걸음은 희한과 함께 희열 또한 교차 하리라! 서울의 산우들 잘 오셨네. 이제 옛 일들일랑 다 잊어 버리고 오늘 하루만은 신나게 고향의 흙 냄새를 맡아 보세나............
산자락 소나무 가지에서는 기쁜 손님을 맞이 하려는 듯, 깍 깍 깍! 하는 까치와 이름모를 산새들의 울음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히는데, 田河鎭 대장의 선발대는 힘차게 오르며 멀리 앞서나가고, 그간 다리가 불편 하면서도 기꺼히 산행에 참가한 金瑛基동문과 林永植, 韓相根산우와 후미를 이루면서 못다한 예전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서서히 산을 오른다.
솔잎 향기를 뿜어주는 소나무 군락이 끝나는가 싶더니, 겨우내 떨어지지 않은 마른 잎새를 보듬어 안고 서있는 참나무 단지가 이어진다. 낙옆이 발 끝에 채이는 갈림길에서 李榮求, 李未鉉 산우가 맞이해 준다. 혹시나 겻길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후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한다. 그래. 고마우이! 조금 더 오르니 휴식의 광장이 나타나며 선발대들은 숨결을 고르고 있다.
시간은 10시 45분. 발아래로는 월드컵 4강 신화를 알려준 인천 문학경기장의 아름다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처진다. 밝은 햇살을 받아 은물결처럼 돋보이는 하얀 돛대인양 매우 인상적이고 참으로 아름답다.
문학경기장 윗편, 문학산을 마주보는 얕으막한 야산에는 인천도호부 청사와 550년의 역사를 갖는 향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인천도호부 청사는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재 제1호로서 옛날 백제,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긴 세월 이고장을 다스리는 원님이 계시던 관아와 향교가 모여 있는 곳으로 산자락속에 아늑히 감춰저 있다. 옛 도읍지로서 적지인 듯 싶으며 이 일대는 관아와 향교가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관교동이라 부른다.
문학경기장을 뒤로하고 기념촬영후 일행은 남향받이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산우들은 윗옷을 벗어 배낭에 걸치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씻어낸다. 정상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이 다가온다. 8부능선 오르막길은 가파른 깔딱고개로 이어지며, 왼편 산행로 옆에는 밧줄이 길게 늘어저 있어 산을 오르는 등반객에게 편익함을 주고 있다.
오전 11시. 정상 능선에 올라섰다. 지적측량에 기준점이 되는 지적삼각점이 설치 되어 있고 여기 저기에는 문학산성의 잔해인 돌무지가 보인다. 산 정상에는 토성으로 쌓은 내성이 있고, 그 주위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이중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모두 없어지고 현재 정상 동북쪽에 70여m의 외부성곽만이 남아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때 김민선 부사가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개축하고 왜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워 왜군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게 된다. 왼편으로는 청량산 너머로 송도 앞 바다와 연수구의 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으로는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위치한 산자락 너머로 인천 시가지가 전개된다. 예전의 인천과 달리 지금의 인천은 너무도 광대하다. 널이 964.52km*, 인구 254만5천796명(2.001년 기준)의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근대사의 여명을 맞이한 곳으로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한반도의 문물이 해외고 나가는 중요한 관문 이었다. 위도상으로는 미국의 산프란시스코와 워싱톤,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동위선 상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백제 시조 溫祚王의 형인 沸流가 정착하여 彌鄒忽이라고 명명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인천 최초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대립되는 경계에 위치하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토호가 할거하는 지역이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買召忽縣이라 칭하였다. 통일 신라시대에 이르러 경덕왕때 소성으로 개칭, 울진군(지금의 시흥시)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현종 9년(1.018년) 수주에 속하였으며, 공양왕 2년(1.390년)에 경원부로 승격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종 13년(1.413년)에 인천군이 되었으며, 고종 20년(1.883년)에 개항 되었다. 문학산에 있던 도호부 청사가 개항과 함께 다소면의 작은 어촌이던 제물포로 옮겨짐에 따라 제물포가 근대 인천의 중심지로 발전 하였다.
8.15 광복이후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시로 개칭되었고,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1.995년 1월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개칭 되었고, 같은해 3월 경기도 강화군 전역과 김포시 검단면,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이 편입 되었다. 현재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남동구, 연수구, 부평구, 계양구의 8구와 강화군, 옹진군의 2개군으로 행정구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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