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이탈리아 북부서 폭우·홍수 피해로 최소 9명 숨지고 5만여 명 대피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 로마냐주(州)를 강타한 폭우로 강이 범람하고 농지 등이 잠겨 최소 9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 7명은 포를리 및 체세나 지역에서 발생했다.
로이터 및 AFP통신은 17일(현지시간) 내린 폭우로 약 24개의 강이 범람해 제방을 무너뜨렸다고 보도했다. 흘러넘친 강물로 광범위한 지역이 침수되고 약 5만 명의 주민들이 대피했다.일부 지역에서는 36시간 만에 연 평균 강우량의 절반 쏟아졌다
2023년 한국 윤석열 카나다 트뤼도 대통령 서울에서 정상회담
2019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말리 홀트 세상 떠남(85세)
2016년 일본군 위안부 이수단 할머니(중국명 리펑윈) 중국에서 세상 떠남.
2016년 서울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근현대사기념관 문 염
2012년 70~80년대 주름잡던 '디스코 여왕' 도나 서머 별세
도나 서머는 관능적 목소리, 탁월한 리듬감으로 70~80년대 미국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가수이자 작곡가였다. 그래미상도 다섯 차례 수상했다.
서머의 음악 인생은 독일에서 출발한다. 미국 보스턴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1969년 뉴욕으로 가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때 우연히 뮤지컬 '헤어(Hair)' 프로덕션 관계자를 만나 독일로 건너갔고, 곧 유명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Moroder)에게 발탁돼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서머는 미국으로 돌아와 노래 '러브 투 러브 유 베이비(Love to Love You Baby)'를 발표해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1978년 '라스트 댄스(Last Dance)'로 그래미 최우수 R&B 여성 보컬상을 받았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였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부른 노래 '노 모어 티어스(No More Tears)'로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1979년엔 '배드 걸스(Bad Girls)'와 '핫 스터프(Hot Stuff)'가 연달아 빌보드 1위를 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83년 '쉬 웍스 하드 포 더 머니(She works hard for the money)'도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2010년 박세리 선수 벨 마이크로 LPGA 클래식에서 연장전 세 번째 홀까지 가는 접전 끝에 극적 우승(통산 25승)
2009년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 별세
한국 영화계 최고의 카피라이터이자 재기 넘치는 칼럼니스트였던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44) 대표가 2009년 5월 17일 오전 10시38분 별세했다. 정 대표는 지난 2006년부터 암으로 투병해왔으며, 한달 전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1989년 영화사 '신씨네'에 입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1991년 영화사 '씨네월드'로 옮겨 '달마야 놀자', '황산벌' 등에 이어 10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왕의 남자'를 제작했다. 2005년 '아침'을 설립해 독립한 그는 '도마뱀', '라디오 스타', '님은 먼 곳에' 등을 제작했으며 신작 '비명'을 제작 중이었다. 정 대표는 뛰어난 영화 카피라이터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매트릭스 2), '그들은 민중의 곰팡이'(투캅스) 등 800여편 영화의 이름난 카피를 만들었고'카툰극장'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2006년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2009년 스리랑카, 타밀 반군 최고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 시신 발견
2009년 5월 17일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LTTE) 최고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Prabhakaran)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다. 이어서 스리랑카 타밀 반군은 패배를 선언했다. 지난 1983년에 시작돼 26년간 이어져 온 스리랑카 내전이 이로써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군은 "반군이 아직 무기를 버리지 않았다. 전투는 여러 군데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앞서 16일 스리랑카 정부군은 내전 발발 이후 처음으로 스리랑카 섬의 전 해변을 장악했다. 이는 반군의 도주로가 완전히 차단됐다는 의미다. 마힌다 라자파크세(Rajapaksa) 스리랑카 대통령은 이날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2009년 백범 선생 수행했던 선우진 옹 별세
1921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우 옹은 1944년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는 중국 황포군관학교 제10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945년 2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 백범 선생의 비서가 됐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환국할 때 함께 고국에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백범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 총탄에 서거할 때까지 가까이에서 수행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그가 백범 선생 및 아들 김신씨와 함께 찍은 사진은 특히 유명하다.
선우 옹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백범 선생은 평양행을 저지하는 청년들에게 '반쪽 국토를 너희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고 호통을 치며 북행(北行)을 결행하셨다"며 "김일성·김두봉과 회견하고 미군과 소련군 철퇴, 내전(內戰) 불가, 통일정부 수립회담 개최 등을 합의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선우 옹은 또 "백범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말은 잘못이다. 백범 선생은 '국부(國父) 김구 선생'이라 소개받으면 '국부가 둘일 수 있나, 우리나라에 국부는 이 박사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백범 선생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 실시
남북간 분단된 이래 열차운행이 중단되었던 것이 2007년 5월17일에 휴전선을 넘어 열차를 운행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열어 615 공동선언을 하고 이에 근거하여 경의선 복원이 합의되었으며, 경의선과 동해선이 복원되었다. 하지만 육로를 이용하는 합의는 있었지먄 철도는 합의가 이루어 지지않아 열차운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6년 5월25일에 열차 시험운행이 예정되었지만, 북측의 전날 취소통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여러 가지 국내외 정세에 대한 합의로 5월17일 경의선과 동해선이 시험운행을 하였다
경의선은 오전11시30분 8량의 열차에 남측 100명,북측 50명을 태운 열차가 문산역을 출발하여 휴전선을 넘어 개성역까지 운행하였으며
동해선은 금강산역에서 승객을 태우고 제진역까지 운행하였다
경의선은 문산에서 개성공단까지 화물수송으로 2008년 11월 까지 운행되었다가 중단되었다
2007년 아동문학가 권정생씨 별세
동화 ‘강아지똥’, ‘몽실언니’를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70)씨가 2007년 5월 17일 오후 2시17분 대구 가톨릭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앓은 전신 결핵으로 평생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에 기반을 둔 아름다운 동화들을 발표,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며 동화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됐다
2004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현대비자금 수령 혐의로 징역 20년 구형
현대비자금 150억원 및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에게서 7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각각 징역 12년과 징역 2년6월이 선고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17일 열린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북한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김일성 주석의 시신에 대한 참배를 요구했기 때문” 이라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했을 경우 우리가 국립묘지를 참배하라고 요구하면 하겠냐고 북측에 항의하고 자신이 참배를 한 뒤 사표를 내고 베이징을 통해 남한으로 돌아와 구속되는 절차를 밟겠다고 제의했다고 했다.
박 전 장관의 이 같은 진술은 그동안 정상회담이 연기된 것은 송금문제가 타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혹과는 다른 것이며, 북한의 참배 요구에 대한 협의가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북한으로 출발을 강행해 현지에서 협상을 진행했다는 취지로 풀이됐다.
한편 박 전 장관은 최후 진술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지인들이 구속될 것이니 임기 끝나고 외국에 나가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눈 뜨고 죽지 무릎 꿇고 살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가지 않았다” 며 “(그런 나에게) 노무현 당선자 인수위가 ‘DJ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나서라’ 고 했을 때 심한 모멸감을 느껴 북한산에서 자살하려고 바위까지 정해놨었다” 고 했다.
그는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구치소로 면회와 그런 생각 말라고 해서 생명과 건강을 지키려고 마음먹고 있다” 며 “절대 자살은 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김정일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북한에 초청, 직접 만나기로 합의했지만 나중에 공보수석이 발표해버려 (사전에 알지 못한) 한나라당이 발끈해 무산됐다” 고 밝혔다.
박 전 장관은 정상회담 대가로 정부가 1억달러를 북한에 지원했다는 특검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남북협상 관련 내용은 역사와 민족통일을 위해 진술을 거부한다” 면서도 “150억 건은 절대 아니다” 라고 알선수뢰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천하의 이익치가 대질 때 벌벌 떨었다” 면서 “있다면 증거를 대달라” 고 되풀이 강조했다.
검찰은 이날 박 전 장관에 대해 징역 20년에 추징금 29억6000만원, 몰수 121억4000만원(총 151억원)을 구형했다.
한편 박 전 장관의 변호인은 150억원건과 관련해 “김영완씨는 저명인사들과 골프를 쳤지만 베일에 싸인 인물로 진술을 믿을 수 없다” 며 각계 인사들의 실명이 들어있는 동반라운딩 명단을 공개했다
2004년 이라크 과도통치위의장 이제딘 살림 피살
이제딘 살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압둘 자흐라 오트만 모하마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 의장이 17일 차량폭탄 테러로 숨졌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하메드 알 바야티 대변인은 살림 의장이 이날 미군 주도의 연합군 사령부가 있는 바그다드 그린존으로 들어가기 위해 검문소에서 기다리다가 차량폭탄이 터져 변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 사고로 현장에 있던 차량 3대가 파괴됐으며 살림 의장의 운전사와 보좌관을 비롯해 최소 10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 사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가 2002년 5월 17일 저녁 모스크바 중앙의료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 뒤 사망했다. 성씨의 사망원인은 지병인 심장병과 신경성 질환이었다.
성혜림씨는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출신으로 어린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성씨는 명륜동이 집이어서 서울사대부국을 다녔으며 월북무렵 서울사대부중 학생이었다. 부친 성유경씨를 따라 1948년 월북했다. 부친 성씨는 창녕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일본 법정대를 나왔다. 해방전후 서울 혜화동에 살았으며 남로당 자금책으로 활동했다. 부친 성씨는 1948년 대규모 좌익검거선풍이 불자 부인 김원주씨와 세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성혜림은 남한에서 유복하게 살다 부모 따라 월북한 후 북한 최고 여배우가 되었다. 전 남편과 별거하는 그녀에게 집요하게 구혼한 김정일과 동거해 김정남을 낳았고 김정일의 후처들에 밀려 모스크바로 나와 살다 서방세계로 탈출했었다
2001년 사진작가 이경모 별세
사진작가 이경모씨가 2001년 5월 17일 75세로 타계했다. 1926년 전남 광양에서 출생한 이씨는 해방 후 노산 이은상이 부사장 겸 주필로 있던 호남신문 사진부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사진대 문관으로 활동하며 신탁통치 논란, 좌우익 격돌, 6·25 전쟁 등 현대사의 고비고비를 넘는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해냈다.
특히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은 현재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사진으로 꼽히며 정부 문서기록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한국사진협회 이사, 새한칼라 전무, 이화칼라 대표이사ㆍ회장,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만년에는 젊은 시절의 다큐사진들을 모은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사진집`을 펴냈다. 화관문화훈장과 제36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1998년 국산 SF영화 ‘용가리’ 해외판매 39억원 기록
본래 개그맨이었던 심형래씨는 직접 제작-감독한 국산 SF영화 ‘용가리’로 ‘신지식인 1호’의 영예를 안았다. 심형래씨가 제작-감독하는 한국산 SF 극영화 ‘용가리’가 한국 영화 해외 판매고 기록을 세웠다. 제51회 칸 국제영화제와 함께 열리고 있는 영화견본시장에서 ‘용가리’는 1998년 5월 17일까지 모두 2백80만달러(약 39억원)의 해외판매계약고를 올렸다.
‘용가리’는 공룡을 닮은 거대한 괴물 용가리가 현대 도시에 부활하면서 시작되는 SF 극영화다. 이 같은 해외판매를 고려, 미국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해 영어로 제작하고 미국에서 믹싱작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내기술로 완성했다.
계약이 체결된 곳은 라틴아메리카 전역 1백50만달러, 독일 70만달러, 러시아 17만달러, 중국 5만달러, 터키 6만달러 등 8개 지역. 계약방식은 판권을 한꺼번에 넘겨주는 일괄판매 방식이 아니라 일단 계약금(미니멈 개런티)을 받고 현지 개봉성적에 따라 60%까지 흥행수익을 나눠 갖게 되는 러닝 로열티 방식으로 계약 체결됐다. 즉 계약금을 일단 받은 다음 현지 흥행시 수익이 발생하면 그 돈을 6대4 비율로 나눠 갖는 방식이다. 심헝래씨는 이번 영화제작으로 ‘신지식인 1호’라는 영예를 안았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 구속
김현철씨 비리 의혹을 수사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7년 5월 17일 현철씨가 고교동문 등 기업인 2명으로부터 이권청탁과 관련 46차례에 걸쳐 총 32억2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고 특가법상 알선수재 및 특경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했다.
이번 사건은 한보사건 수사가 진행중일 때 의혹이 불거졌으나 구체적인 근거가 없어 수사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 1997년 3월 10일 박경식 G남성클리닉 원장에 의해 `현철씨의 YTN사장 인사개입 의혹`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자 검찰은 진상조사 차원의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에 따르면 현철씨는 1995년 4월 김덕영 두양그룹 회장으로부터 "신한종금 경영권 분쟁과 관련 장인인 양정모 전 국제그룹회장과의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3억원을 받는 등 21차례에 걸쳐 15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또 이성호 전 대호건설 부사장으로부터 "서초 케이블TV 사업자로 선정되도록 공보처 공무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부탁 등과 함께 26차례에 걸쳐 17억2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철씨는 이밖에도 1994년 6월 김기섭 당시 안기부 운영차장을 통해 조동만 한솔그룹 부회장이 제공한 5천만원을 받는 등 31차례에 걸쳐 15억5천만원의 활동비를 받았으며 1995년 6월에는 곽인환 대동주택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현철씨에 대해 알선 수재액 32억2천만원과 증여세 포탈액 13억5천만원을 전액 추징키로 했으며 증여세 포탈액의 2∼5배가 벌금으로 부과됐다.
1995년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국제언론인협회(IPI)본부 부회장에 피선
1994년 한국-아르헨티나,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4년 PLO 자치협정 서명
1990년 교통부, 수도권 신공항입지를 영종도로 확정
1986년 중국-대만 대만항공기 망명귀환협상, 37년 만에 첫 직접협상
1983년 레바논·이스라엘 철군협정 조인
1983년 서울 형사지법 가정파괴범에 사형선고
1980년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금지, 대학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1980년 계엄사, 김대중 등 7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노조소요 조종혐의로 연행
1979년 전아프리카 회의 아프리카의 난민이 200만명이라고 발표
1974년 미국 최초의 정지기상위성인 SMS 1호 발사 성공
1973년 북한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
1973년 미국 상원 외교위 대통령의 해외 파병권 제한 법안 가결
1973년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개시
1973년 5월 17일,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됐다. 증인으로 출석한 닉슨의 선거 운동 담당자의 증언을 시작으로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 수뢰, 탈세 등이 점차로 드러남에 따라, 결국 이듬해에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했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의 관계 사실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사이에 불신 여론이 높아졌던 것이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했다.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권력분립의 중요성과 함께 민주주의의 전통이 수호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1969년 이수근 사형확정
1968년 청록파 시인 조지훈 사망
본명이 동탁인 시인은 1946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낸 것을 계기로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시인이면서 국학자요, 논객이었고 지사였다. 일제의 압제와 6.25전쟁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서슬퍼런 독재정치 하에서도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했던 거목이었다. 그의 선비정신은 어려서부터 체화된 것이다. 의병장을 지내다 한일병합때 자결한 증조부, 6·25때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부, 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내다 납북된 아버지 조헌영. 그는 가계에 면면히 흐르는 올곧은 선비정신을 몸으로 체득했다.
시인은 혜화전문을 졸업하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고풍의상` `승무` 등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한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광복후에는 민족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다. 그가 민족의 역사와 사회현실로 뛰어든 것은 6ㆍ25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일제말기 오대산에서의 은둔, 광복후 좌우익의 대립속에서 민족문학진영의 선봉으로 나선 것, 6ㆍ25 전쟁의 종군작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 그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그는 1947년부터 고려대에 재직하면서 민족문화연구소를 창설, 한국학연구에 정열을 바쳐 `한국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서설` `멋의 연구`등을 저술한 탁월한 국학자이기도 했다.
1967년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66년 소련 7월 1일부터 집단농장의 현물노임제
1964년 라오스 친공군 월맹군과 합세. 자르평원 완전장악
1961년 군사혁명위 국회해산, 정당활동정지, 국무위원 출두 명령
1955년 미국 해중 원폭실험 성공
1954년 미국 대법원,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고 판시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이 브라운과 캔사스주(州) 교육위원회간의 인종차별에 의한 학교분리 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금지시켰다. 미 대법원은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전원합의로 선언하고, 1896년 대법원에서 내려진 `분리된 평등` 원칙은 이제 공립학교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많은 남부지역 사람들은 공립학교를 폐지시키겠다고 맹세한 조지아와 남캐롤라이나 두 주(州)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판결에 대해 분노했다.
이 결정은 앨러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미시시피, 미주리, 북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조지아, 켄터기, 루이지애나, 버지니아, 콜롬비아 등에서 분리되어 학교를 다니고 있는 8백5십만의 백인아동들과 2백5십만의 흑인아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51년 용문산전투서 중공군 1개군단 섬멸
용문산전투는 1951년 5월17일부터 21일 까지 국군 6사단 2연대가 중공군63군 예하 3개사단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중공군 주력부대의 진출을 저지했으며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으로 철의 삼각지에 대한 위험을 제거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5월의 공세를 전개했다
이에 용문산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6사단 2연대는 사창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위해 결사라고 쓴 머리띠를 매고 진지사수를 다짐한다
수적 우세를 이용한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을 맞아 아군은 진지를 고수하며 백병전 까지 벌여 과감한 역습을 감행했다
막대한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지연전을 실시하며 퇴각하기 시작했고 약 5일간의 전투에서 6사단은 용문산 전투를 대승으로 마감하는 쾌거를 이룬다
1951년 국민방위군 해체 완료
1947년 브라질 공산당 불법화
1939년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독일의 상호불가침조약안을 거부
1938년 미국 빈슨 해군확장안 수립
1930년 영국 유태인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제한령
1902년 마산포 일본 전관조계협정서 조인
1900년 시인 홍사용 출생 - `백조` 동인
1899년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개통식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명성황후 능)을 빈번하게 찾는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고종에게 접근,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솔깃한 고종은 출자액의 반을 부담하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 전차 설치를 허락한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史)’는 전차 도입 배경을 이렇게 전한다.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 초파일), 서대문∼청량리 간을 잇는 전차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고관·각국 사신 등을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가 줄지어 “댕 댕”거리며 종로거리를 지나자 이 ‘기묘한 괴물’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대,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탑승객이 증가하면서 노선도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1899년),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까지(1900년 1월) 연장됐다.
전차 운영의 첫 불상사는 개통 후 열흘 만에 일어났다. 종로2가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극심한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을 때 일어난 전차사고는 답답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전차를 뒤엎은 뒤 불살라 버렸다. 광복 후 23년간이나 대중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바야흐로 전차의 시대는 가고 있었다. 1968년 11월 29일, 69년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1749년 종두법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 출생
1551년 신사임당 사망
신사임당은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뛰어난 예술가이자 현모양처로 유명하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완성해냈으며 이이와 같은 뛰어난 인재를 키운 어머니이기도 하다.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릉 외가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외조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는 여자들이 그다지 학문을 배우지 않았지만 신사임당은 현명한 어머니와 외조부의 가르침 속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조부에게 문자를 배웠는데 기억이 빨라서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새 정통했고 한시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이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한 외조부는 안견의 그림을 사다주었고 신사임당은 그대로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임당은 예술가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훌륭한 어머니로써의 역할도 존경받을 만하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었다.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사임당이란 당호를 지었는데 이는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것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 ` `요안조압도`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1510년 화가 보티첼리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