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인연을 낳는다.(신영복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아버님 제사를 모시고 이런 저린 일로 잠을 못 이루다가 깨어난 이른 아침, 인터넷 신문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저자인 신영복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여년의 옥고를 치루고 나오셔서 수많은 책을 쓰셨던 신영복 선생과 만난 것은 김남주 시인과의 연연 때문이었다.
신영복 선생과의 인연을 나는 <홀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93년 5월 22일 나는 서울에 갔다. 5월 30일에 덕진공원에 세우기로 한 김개남 장군 추모비문을 김남주 시인과의 인연으로 신영복 선생이 썼는데,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전날 밤, 무던히도 잠을 설쳤다. 처녀가 시집가기 전날 밤이 그렇게 길었을까? 나는 몇 번이고 아내를 깨웠다. 새벽 첫차로 서울로 갔고, 친구 최대길과 함께 목동에 있는 신영복 선생 댁에 갔다.
목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신영복 선생이 손수 끓여준 커피 한잔을 마시던 중에 신영복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요즘 김지하 선생님의 근황은 어떤지요?” “나는 잘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신영복 선생님의 집에서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했다. 역사문제연구소도, 집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난처했다. 만나고 가야 하는데, 그러자 친구가 근처에 파리공원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잠시 쉬었다 나와 전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간 곳이 파리공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현대식 공원 파리공원을 돌아다니던 중에 먼 곳에 초라한 차림의 남자가 문득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김지하 선생님의 얼굴을 닮았다. 나는 세 번을 바라보고서야 이방인처럼 앉아있는 그가 바로 김지하 시인임을 알아보았다.
“저 혹시 김지하 선생님이시지요,”
“예 그렇소.”
“저는 선생님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고 황토현문화연구소라는 단체의 대표인 신정일입니다. 다음주 5월 30일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우는 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받으러 왔던 길입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손과 내 어깨를 꼬옥 잡았다.
“참으로 좋은 일이요. 잘한 일이요. 여기 앉아요”
그 곳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퍼버리고 앉아 김개남 포에 얽힌 이야기와 동학의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김지하 시인이 그때의 상황을 회고한 글을 보자
“생각해보니 그와의 만남 자체가 그랬다. 10여 년 전이던가, 그 이후이던가, 바람 부는 날, 서울의 양천구 목동에 있는 파리공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웬 젊은이가 앞에 와 인사한다. 누구냐니까 황토현문화연구소의 신 아무개라고 한다. 동학과 전라도를 앞세우는데 서먹서먹할 까닭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에 관하여 혁명과 봉기의 관계나 이념이나, 수양이나, 조직이 혁명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과 같은 전라도의 동백사업이 왜 문제투성이인지에 대해서 격의 없이 깊은 곳까지 들어가 주고받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발언이나 주장이 그때 이후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그 토막토막이 모두 다 항구적인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애당초부터 그가 발로 탐구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불변성이다.(...) 철저히 리졸,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진 그의 길은 그가 수많은 민족민중사상가들이 유령이 되어버린 지금, 가장 현장 적이고 집요한 민족민중사상가로서 현존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 나는 그를 ‘발로 쓰는 민족 민중사상가’라고 부른다.“
그날 나는 김지하 시인으로부터 전봉준,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은 농민혁명이 끝나면서 막을 내리고 온전히 동학정신이 살아남은 것은 김개남 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무서운 혁명적 열기로 사방을 제패했으며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이 농민혁명이 끝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
그들이 결국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고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세운 김단야로 그리고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이야기를 두 시간이 넘도록 들었다.
김지하 시인은 나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줄잡아 담배를 두어 갑은 피웠을 것이다. 그 뒤 일산에 있던 자택에 있던 선생님의 집에 찾아갔을 때 집안 이곳저곳에 널려져 있던 담배개피를 보고서야 김지하 선생님이 얼마나 담배 애호가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 <지상의 양식>에서 “모든 행복이나 불행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네가 길에서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라는 구절을 절절하게 실감했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 어떻게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산책 나와 있던 김지하 시인을, 그것도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남녘 땅 뱃노래를 읽으며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세울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만날 줄이야.
얘기를 마무리할 즈음에 김지하 선생님은 전화번호를 적어주셨다.
“장모님(소설가 박경리)이 김개남 장군의 영원한 팬이요, 토지의 전편에 나오는 김개주가 그분이요, 장모님이 알면 무척 기뻐할 것이요, 오늘 밤에라도 원주로 전화해 주시요”
김지하 선생님의 말에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원주에 있는 박경리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로 서울에 가서 우연히 김지하 선생을 만났고 박경리 선생님에게 전화해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잘한 일이여. 내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자랐다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김개주라는 이름으로 썼었지.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인 혁명가야. 내가 그래서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양반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해도 안 쓰잖아. 토지 끝내고 나면 전주에 한번 갈게”
들뜬 그 목소리.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에 실려 있는 기쁨에 찬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져 갔다. 그날 나는 내가 존경하는 세 분과 조우했다. 더구나 김지하 선생님과 선생님의 장모이자 한국문학사상 길이 남을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선생과 기이한 인연으로 한 시간여 남짓 통화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화를 끝내자마자 그날 하루가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의 인연을 다시 불러낸 것은 신영복 선생이었다. 당신이 쓴 글씨를 찾아 답사를 다니고 경향신문에 연재를 하던 중이었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답사 하던 중 김남규 전주시의원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2012년 오월에 펴낸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 112페이지에 그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가 있는 덕진 공원은 전북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자연석 추모비는 이끼가 돋고 비바람에 바래어 글씨가 얼른 눈에 띄지도 않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에서 역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이 글 귀는 역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라고 함께 불리었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라는 노래의 1절이다.
비문 글씨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사실은 그 글씨를 부탁한 사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남규 시의원이 찾아온 그 당시의 기록을 보고 나서야 그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나에게 글씨를 부탁한 사람은 <새로 쓰는 택리지>의 저자인 향토문화연구회(황토현문화연구소>의 신정일 선생이었다. 물론 김남주 시인이 작고해서 연결 고리가 끊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93년에 목동의 우리 집에서 커피까지 함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의 저서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양해를 구한다. 그 날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 까지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연이란 참으로 우연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강물의 표면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란 인연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또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거든, 하물며 역사의 인연이야 오죽하랴, 거대한 산맥이 서로 밀고 당기듯 그 우람한 역사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 인연이란 신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인 최명희 선생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을 것이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 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1992년 4월 추모사업회에서는 김개남 장군이 죽은 지 백 년이 넘어서야 그가 살았던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에 “김개남 장군이 살았던 옛터”라는 유허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해 5월 전주 덕진 공원에 드디어 추모비를 세웠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글이다.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김개남 장군을 추모했다. 불치의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작고한 김남주 시인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그리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역사학자 우윤, 서지영선생, 전북대학교 사회학과의 정학섭 교수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장군의 삶과 업적을 재평가 하며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추모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 하나를 세우는 것도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인연이 모이고 모여 세워진 것이다. 김지하 선생이 <남녘땅 뱃노래>에서 남원과 김개남에 대한 원인 제공을 했고 우리들은 그 일을 오랜 시간을 두고 추진했다. 비문의 글씨를 김남주 시인과의 인연으로 신영복 선생이 썼다.
그리고 그날 세 사람이 만났을 뿐더러 소설 속에 처음 김개남 장군을 등장시킨 박경리선생님과 그날이 가기 전, 전화를 통하여 원주에서 전주, 전주에서 원주의 다리가 놓인 것이다.
잠시 살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 일 년에도 수없이 만나 수많은 길을 걷는 우리들의 인연은 필연처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연 같은 우연, 우연 같은 필연으로 만나고 사는 우리들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억겁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우리들의 인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삼가 신영복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병신년 정월 열엿새.
첫댓글 영원한건 없으니~~
인연을 소중히 여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