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인
[사유의 방]
[사유의 방]에서 상설전시 중인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어느 날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 땅을 침입한
악질적인 도굴 앞잡이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가
충청도 어느 산골에 버려진 석탑을 들어 올리자 발견한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불상을 획득한 가지야마가
1912년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 마히코(末松熊彦)에게 접근해
2천6백 원(圓)을 받고 팔았던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보통 5원 정도 했으니,
2천6백원은
5백 가마가 넘는 거금이다. ]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해 오다가
1915년 이왕가 박물관이 총독부박물관으로 개칭되고,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칭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가 입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에게 기증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던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후치가미가 불상의 출토지를 밝히지 않아
현재도 불상의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고 있다.]
데라우치가 은밀히 소장하다가
1916년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해
지금에 전해지고 있는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이 불상은 1998년 6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실 개관에 맞추어
특별전 출품을 위해 출국하였다.
이 때의 불상 보험 평가액은 3천5백30만 달러로
원화로는 4백80억 원에 이른다.]
(참고:「한국문화재 비화」․이구열․한국미술출판사)]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좌)과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우)
2024년07월06일(토요일)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Korea, 國立中央博物館)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보물 창고 소재지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휴관일 1월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이용 시간 월ㆍ화ㆍ목ㆍ금요일 09:00 ~ 18:00, 수ㆍ토요일 09:00 ~ 21:00, 일요일ㆍ공휴일 09:00 ~ 19:00. ※2017년 7월 1일부터는 개관시간 9시→10시로 조정. 목차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넓고, 크고, 깊다. '국립', '중앙', 그리고 '박물관'. 그 이름에서도 품위와 무게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국 각지 박물관의 종합관 격이다. 게다가 역사 연표와 영상 등을 활용해 유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우리 아이의 '역사 공부'에 이만큼 훌륭한 교과서도 없다.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터를 잡기 전까지 숱하게 이전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선총독부 건물(사진에서 광화문 뒤로 보이는 건물로 1995년 철거)을 사용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을 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지 면적이 약 9만 평(30만m²), 총면적(한 건축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의 합계)이 약 4만 1000여 평에 이른다. 계산상으로는 30평 아파트 1300채를 합친 면적이다. 이를 하루 만에 모두 섭렵하겠다는 '욕심'은 접어두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다가갈수록 살며시 고개 드는 남산과 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수하러 나타나는 거울 연못과 박물관 녹지 공간 속 야외석조물정원, 종각, 전통염료식물원, 이웃한 용산 가족공원 등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할아버지 격인 '국립박물관'은 100년 전인 1909년 창경궁에서 태어나 1995년 현재 용산에 자리 잡기까지 전국각지로 피난민이 보따리를 싸듯이 숱하게 이전해왔다. 셋방살이를 견디며 흩어졌던 유물들이 이 자리에 모여 대가족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더욱 크다.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열린 마당 오른편으로 상설전시실이 모여 있는 으뜸홀이 있다. 세 개 층을 어우르며 웅비하 듯 높이 뻗은 천장이 박물관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으뜸홀은 총 여섯 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되어 있다. 이곳에 상설전시된 1만 2000여 점의 유물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으뜸홀의 내부는 마치 연극에서 무대의 장막이 걷히고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순간과 닮았다. 으뜸홀 가운데로 곧게 뻗은 '역사의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전시실이 자리해 있다. 1층에는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이, 2층에는 서화관과 기증관이, 3층에는 아시아관과 조각·공예관이 있다. 특별히 정해진 관람 순서는 없다.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면 되는데, 대부분 1층의 선사·고대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꼭 챙겨볼 것은 고구려에 관한 전시다. 고구려 땅은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의 수가 백제와 신라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1층의 비밀은 관람객의 동선이 곧 역사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재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 세월은 가늠하기 힘든 약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불과 100여 년 전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휴대폰에 있는 스톱워치로 입구에서 1층 끝까지 관람 시간을 재보자. 70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삼국시대 전시실에 놓인 영산강 지역의 대형 독널(옹관)을 아이와 함께 살펴보자. 설명에 앞서 아이에게 질문을 건네보자.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이 항아리는 무엇에 쓰였던 걸까?" 독널은 항아리나 독 두 개를 맞붙여 만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館)이다.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독을 관으로 이용했다. 대형 독은 높이가 어른 키만 하다. 전시된 독널은 삼국시대 영산강 인근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본래 독 두 개가 입구를 맞대고 캡슐처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독널의 크기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사하던 권력의 크기를 대변한다. 독널을 통해 아이에게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줄 수 있다. 아이는 열 살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실제 개념을 형성한다. 이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자. "떠나버렸어"와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보았으면 하는 것은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서양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금동일월식삼산관사유상(국보 제78호), 금동연화관사유상(국보 제83호)의 미소가 있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여성미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남성미가 감돈다. 이름은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에 따라 붙여졌다. 두 반가사유상 모두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 얹고 오른손은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 쉬는 듯한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한다. 국보 제78호,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물 중 하나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역사의 길을 따라 중앙통로에 보이는 거대한 석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이다. 경기도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었다고 한다. 다행히 일제강점기가 끝나기 전에 탑을 돌려받았으나, 그 후 오랫동안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었다. 1960년에 탑을 다시 세우고 1995년에 복원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르되, 고려 말 유입된 원나라 문화도 반영되어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균형감이 뛰어나고 우아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문화재를 호위하는 무사 같기도 하다.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2층 서화관은 서예, 회화, 불교회화, 사랑방 등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인과 선비들은 글씨가 정신과 인격을 반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예는 예술 활동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수양하는 과정이었다. 서예 작품을 보면서 선의 기세에 따라 달라지는 감흥을 아이와 이야기해보자. 회화실은 전시품이 가장 자주 교체되는 전시실이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풍속화, 초상화, 산수화, 화조·동물화, 사군자화, 궁중장식화와 민화 등 그림의 소재에 따라 세분화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람 전 아이와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꼽아보기로 하는 것도 좋겠다. 3층 공예·조각관에는 백자실, 분청사기실, 청자실, 금속공예실 등이 있다. 불교조각실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한국 불교 조각의 시대적인 흐름과 함께 불교 도상에 따른 주제별 특징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은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실내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박물관의 야외 석조정원에도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염거화상 탑(국보 제104호)을 비롯해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들여 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제100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 제2호)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문화재의 백미로 손꼽힌다.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어린이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유물을 어린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즐길 수 있도록 복제하여 전시해 놓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여섯 번 매회 한 시간 20분씩 300명이 선착순 입장한다. 100명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받고, 200명은 현장에서 표를 배부한다. 어린이박물관은 아이들 세상이다. 다소 엄숙한 느낌의 상설전시장보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곳이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따끈따끈, 삶의 보금자리', 농기구의 발전과 생활 양식의 변화를 학습해보는 공간인 '밥을 담는 그릇', 시대별 다양한 장신구, 금관, 복식 등을 체험하고 과거 사람들이 입었던 옷을 살펴보는 '고운 우리 옷', 음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마음과 영혼의 소리', 전쟁에 사용된 무기와 갑옷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무기와 무사들', 동력을 이용한 에너지 생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자연 에너지 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책도 읽고 박물관 신문도 만들어볼 수 있는 '작은 쉼터, 어린이들의 도서공간'이 있고 박물관 선생님들과 함께 즐거운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어린이 교실' 등 다양한 체험 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기념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매표소 맞은편에는 '도시락 쉼터'가 있으니, 허기를 달래가면서 신 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미리 먹을거리를 준비해와도 좋겠다.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해설은 대표 유물과 전시관별로 구성되어 있고, 오전 오후 각 2회 정도 열린다. 야외 석조물 해설은 봄가을 매주 토요일에만 진행된다. 이 밖에 예약이 필요한 '박물관 명품 유물 산책' 해설과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도 꼭 들어봄 직하다.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는 관장이 추천한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 속에 담긴 숨은 이야기 등 유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당장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하고, 회원 가입도 미리 해두자. 예약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서 회원 가입은 필수다. 또 홈페이지에는 미리 살펴볼 자료가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 알차게 구성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만 참여해도 우리 아이의 역사, 문화 교육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을 정도다.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해설 '스마트 투어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가면, 안내데스크에서 따로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지 않아도 된다. 박물관 영상·음성안내기는 관람 전날까지 예매해야 대여할 수 있다. 관람시간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수, 토요일: 10:00 ~ 21:00 (입장 마감: 20:30) 옥외 전시장(정원)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휴관일 및 휴실일 휴관일: 1월1일, 설날(2.10.), 추석(9.17.) 상설전시관 정기휴실일: 매년 4월, 11월(첫째 월요일) 상설전시관 내 특별전시실 휴실 기획전시관(특별전시 미운영시 휴실), 야외전시장은 정상 개관 2024년 휴실일: 4.1.(월), 11.4.(월) 관람료 : 무료 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무료 특별전시 해당 유료 : 유료 특별전시 해당 관람권 구입하는 곳: 기획전시실 앞 매표소 관람권 판매시간 :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학생단체관람 안내 초·중·고 학생단체(30명 이상)의 박물관 관람은 사전예약제로 운영합니다. (사전예약하지 않은 학생단체는 입장 불가) 상설전시실 층별 안내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장은총 7개의 관과 39개의 실로 구성되어 9,884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전시물은외부전시일정 및 유물의 보존 상태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상설 전시장은누구나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층 ○중·근세관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고려, 조선, 대한제국실로 꾸며진 북쪽 전시공간은 당시의 역사자료를 관람객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사·고대관 인류가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입니다 2층 ○서화관 ○사유의방 ○기증관 ○실감2관 서화관은 서화, 불교 회화, 목칠공예 등 선과 색채로 발휘된 한국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유의 방은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된 공간입니다. 기증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재를 전시하여 기증자들을 기리며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공간입니다. ※VR체험 예약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온라인접수는 서버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1 VR체험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 2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 관람료는 없습니다. 2 VR체험은 예약제로 운영합니다. 가상현실(VR) 체험을 제외한 디지털 실감 영상관 콘텐츠는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합니다. 3 예약은 관람일 30일 전부터 가능하며, 회차 당 이용 인원은 6명입니다. 4 예약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회원 가입 후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5 1회 예약 가능 인원은 최대 4명입니다. 6 아이디 당 1일 1회의 예약만 가능합니다. 7 00:00~00:30에는 시스템 점검으로 당일 예약을 할 수 없습니다. 8 예약과 취소는 회차 시작 전까지 가능합니다. 9 예약 시간 이후 도착하실 경우, VR 체험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10 VR체험은 1회 1종만 가능하며 입장 순서에 따라 콘텐츠 주제 선택에 제한이 생길 수 있습니다. 11 VR 체험은 이용자 안전과 원활한 체험을 위해 8세 이상, 키 130cm 이상인 경우만 가능합니다. 12 VR 체험은 양 손 및 몸의 움직임이 필요한 체험이므로 이용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3 장비 소독 및 기기 교체 등 쾌적한 체험 환경 유지를 위한 1일 2회(12:30-13:00, 15:30-16:00) 점검 시간을 운영합니다. 14 문의전화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02-2077-9093 3층 ○조각·공예관 ○세계문화관 조각·공예관은 한국 불교조각과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의 도자공예 그리고 금속 공예문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입니다. 세계문화관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인도•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지하철로 오는 방법 : 경의중앙선(문산-용문)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도보로 468m 이동 ] 탐방코스 : [이촌역 2번 출구~국립 중앙박물관 거울못~국립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국립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203호)(영산靈山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2실(202-2,3호)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국립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사유의 방(국보 반가사유상 2점)~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일본실(일본 불교조각의 세계&뵤도인 아미타당)~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있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망대~이촌역 2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7월06일(토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서울시 용산동6가 최저기온 23도C, 최고기온 3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18분 소요) 12:12~13:02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이촌역으로 간 후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옴 [50분 소요] 13:02~13:06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7 번지에 있는 이촌역 2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번지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으로 이동 13:06~13:07 국립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로 이동 13:07~14:08 국립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을 관람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명 :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장소 : 기획전시실 전시기간 : 2024-06-18~2024-10-09 전시품 : <원주민 복식> <미국 인디언 : 러셀 민스>등 북미 원주민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회화, 복식 등 151점 전시요약 :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북미 원주민은 미국 대륙에만 570여 개의 부족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수리 깃털 머리 장식, 티피를 비롯하여 43개 부족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공예품, 회화 등 총 151점의 전시품을 국내 최초로 선보입니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북미 원주민은 어떤 사람들인지, 각각의 전시품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전시실에서 직접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전시로 북미 원주민 문화가 우리에게 낯설고 오래된 문화가 아닌 현재 우리 곁의 문화로 한층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담당부서 전시과 김혁중(1688-0361) □ 전시 개요 - 전시명 :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Cultures and Histories of Indigenous People in North America) - 기간 : 2024. 6. 18.(화) ~ 2024. 10. 9.(수) * 부산박물관 순회 전시: 2024. 10. 28. ∼ 2025. 2. 16.(예정) -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전시품: <원주민 복식> <미국 인디언:러셀민스> 등 북미 원주민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회화, 복식 등 151점 - 문의 : 1688-0361 - 예매링크 바로가기 : 티켓링크 네이버 - 관람시간: 월, 화, 목, 금, 일 10:00~18:00 / 수, 토 10:00~21:00 - 휴관일 : 2024. 9. 17.(추석 당일) 관람 가능 시간 월, 화, 목, 금, 일 : 10:00〜18:00 [입장 마감 17:30, 발권 마감 17:30, 관람 종료 18:00] 수, 토 : 10:00〜21:00 [입장 마감 20:30, 발권 마감 20:30, 관람 종료 21:00] ※ 전시장 내부 혼잡도에 따라 대기 시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전시해설 현장참여형 큐레이터와의 대화 : 격주 수요일 19시 진행 예정 [상세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참고] 자원봉사자 전시해설 : 24. 7. 1.(월) ~ 24. 10. 9.(수) [매일 2회(11, 14시) 진행 예정, 해설시간 약 60분] 개별청취형 오디오가이드, 기계 대여 대여료 3,000원, 이어폰 대여 포함 - 기획전시실 내 대여소에서 결제 및 대여 가능 ※ 원활한 전시 관람을 위해 전시장 내에서의 사설 전시 해설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 입장료 성인(25세 ~ 64세) : 개인 10,000원, 단체(20인 이상) 7,000원 청소년(13세 ~ 24세) : 개인 7,000원, 단체(20인 이상) 4,900원 어린이(7세 ~12세) : 개인 5,000원, 단체(20인 이상) 3,500원 ※ 출생년도 및 생일 기준 ※ 단체 관람을 원하실 경우 1688-0361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합니다. ※ 전염병 확산 상황에 따라 단체관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온라인 예매의 취소, 환불은 티켓 판매처의 취소·환불 정책을 따릅니다. ※ 관람일자가 지난 티켓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 현장에서는 당일 티켓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할인 정보 무료 대상자 ㅇ 6세 이하 미취학 아동 및 65세 이상 ㅇ 20인 이상 단체의 인솔자 1인 ㅇ 관련 법령에 따른 각종 유공자/국가보훈대상자 본인 및 그 동반 1인, 관련 유족 * 관련 법령: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고엽제후유의증 등 환자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참전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특수임무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률' ㅇ 박물관 기증자증 및 박물관회 기부회원증 소지자와 동반 1인 ㅇ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등록된 장애인과 그 동반 1인 ㅇ 의무 복무 중인 군인⋅경찰⋅소방원 등 ㅇ 상이군경(1-3급) 본인 및 동반 1인 ㅇ ‘병역법’에 따라 선정된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사람 ㅇ 문화누리카드 소지자 또는 관련 증빙자료 소지자(본인에 한함) *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의한 수급권자 및 차상위계층 해당자 ㅇ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회원(당해연도 회원 갱신자에 한함) 50% 할인 ㅇ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당일 한정) ㅇ 박물관회 일반회원증, 특별회원증, 후원회원증 소지자 30% 할인 ㅇ 단체(20인 이상) 구매자 ㅇ 다자녀 우대카드 소지자와 가족 ㅇ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른 박물관·미술관 학예사 자격증 취득자 ㅇ 예술인패스(한국예술인복지재단 발급) 소지자 10% 할인 ㅇ 국세청 홈택스 세금포인트 할인쿠폰 소지자 연계할인 ㅇ 특별전 “삼국삼색 – 동아시아의 칠기” 관람권 정가 구매자(당일 한정) - 성인 2,0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1,000원을 각각 할인 - 현장 매표소에서 특별전(칠기전) 실물 티켓 확인 후 구매 가능 ※무료, 할인대상자는 관련 증빙 지참 필수(가족관계증명서, 신분증, 그 외 증빙서류 등) ※증빙서류 미지참시 현장에서 차액 지불 - 공동개최: 국립중앙박물관, 미국 덴버박물관 ○ 전시명칭: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 전시기간: 2024. 6. 18.(화)~10. 9.(수) - 주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 특별전 연계 대중 강연회 세부 일정 강연 주제 : 나라 안의 나라들: 북미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 강연일시 : 7. 26.(금) 13시 30분 – 15시 30분 강연 장소 : 대강당 강연자 : 김봉중(전남대학교) 강연주제 : 우리가 인디언 영화로 알던 영화들 강연일시 : 7. 26.(금) 15시 30분 – 17시 30분 강연자 : 김철홍(영화평론가)] [고달팠던 북미 원주민의 삶과 문화…‘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展 19세기 북미 원주민들의 의식주, 공예품, 전시해 삶과 문화, 예술 전해 미국 덴버박물관 공동 기획…국내 최초 북미 원주민에 관한 전시 10월 9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고륜형 기자 krh0830@kgnews.co.kr 경기신문 기사 등록 : 2024.07.03. 09:40:02 존경의 상징인 독수리 깃털 머리 장식 네즈피스족, 아이다호주, 1860-1890년대, 덴버박물관. (사진=고륜형 기자) 미국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디언’은 북미 원주민을 일컫는 말이다. 붉은 색 독수리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쓴 채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인디언’ 부족은 위치와 기후에 따라 크게 10개의 문화권으로 나뉘며 570여개의 부족이 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북미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다룬 전시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이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북미 원주민에 대한 전시로 그들의 삶과 문화를 담은 151점의 전시품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설명한다. 원주민 미술로 잘 알려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 위치한 덴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한 특별전이다. 전시는 ‘1부 하늘과 땅에 감사한 사람들: 상상을 뛰어넘는 문화적 다양성’, ‘2부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한 사람들: 갈등과 위기를 넘어 이어온 힘’으로 구성된다. 1부에선 34개 부족의 유물을 통해 그들의 삶과 문화를 설명하고 2부에선 각 부족의 공예품을 통해 예술을 보여준다. 전시의 시작은 1915년경 카이오와족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요람’부터이다. 카이오와족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자연을 가장 큰 선생님으로, 아이가 자연을 배울 수 있길 바랐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요람 속에서 아이는 자연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원주민의 집 ‘티피’가 전시돼 있다. ‘티피’는 주로 대평원의 들소 가죽을 이용해 만들어졌는데, 캔버스 천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빠르게 이동하는 들소떼를 따라 원주민들도 이동해야 했기에 약 10분 미만으로 설치가 가능했다. 여자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모형으로 티피를 짓는 연습을 했고, 티피 겉면에는 부족의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넣었다. 이외에도 둥글게 구성된 전시장을 따라 압사록 가족이 사용하던 말안장, 샤이엔족이 사용하던 들소 가죽을 벗겨내던 도구, 활, 푸에블로 사람들이 제작했던 도자기 그릇, 주전자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적도부근부터 북극까지 위치한 북미에서 기후에 따라 진흙, 나무, 천, 지푸라기 , 얼음 등으로 만든 다양한 주거 형태의 질감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2부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한 사람들: 갈등과 위기를 넘어 이어온 힘’에서는 북미 대륙으로 건너온 유럽 사람들에 의해 변화된 원주민의 삶을 그린다. 광활한 평야와 금광을 찾아 북미 대륙을 점령한 유럽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으로 밀려났고,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급격히 달라진 환경에서도 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거침없이 밀려오는 변화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랜 세월 북미 대륙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서부 영화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야만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여러 환경적 요인과 대를 이어 물려온 전통에 따라 매우 훌륭한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나바호족의 직조 기술의 수준은 상당했다. 직물의 올과 올 사이가 매우 촘촘하고 단단해 실 사이로 물이 새지 않으며 아름다운 무늬로 족장의 덮개나 바닥에 까는 깔개로 주로 사용됐다. 덮개는 주요 무역 물품이 됐고, 줄무늬에서 사각형, 삼각형, 다이아몬드 등으로 무늬도 발전해 인기가 높았다. 나중엔 성조기를 새겨 넣기도 했다. 구슬로 만든 모카신, 물범의 내장으로 만든 의례용 복식, 독수리 깃털로 만든 족장의 모자, 바다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 청둥오리 깃털로 장식한 드레스 등 자연의 영혼과 함께하는 원주민들의 의식을 반영했다. 곧 사라질 원주민들을 4만 점의 사진으로 기록한 에드워드 커티스(1868~1952)의 사진들도 보존 가치가 큰 원주민의 삶을 보여준다. 원을 이루며 나와 너, 조상, 동물, 자연, 사물, 초자연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북미 원주민의 세계관은 함께 살아가며 조화롭고 균형 있는 삶의 방식을 전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부족의 지혜를 담은 문구와 가수 양희은의 포근한 해설이 원주민의 삶을 한층 풍부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북미 원주민의 삶과 역사, 문화와 예술을 느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10월 9일까지 계속된다.] 14:08~14:13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203호)로 이동 14:13~14:37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203호)에서 전시 중인 [영산靈山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을 관람 [영산靈山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 전시명 : 영산靈山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203호) 전시기간 : 2024-05-01~2024-10-13 전시품 : 진천 영수사 괘불 전시요약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하는 열 아홉번째 괘불전으로 보물 '진천 영수사 괘불'을 소개하는 전시 담당부서 미술부 양수미(02-2077-9499) 국립중앙박물관 2024년 괘불전 영산靈山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열아홉 번째 괘불전 <영산의 모임, 진천 영수사 괘불>을 개최합니다. 괘불掛佛은 사찰의 야외 의식에 사용하는 큰 불화입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만 괘불을 펼쳐서 걸기 때문에 평소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공개하는 <진천 영수사 괘불>(보물)은 1653년(효종 4년)에 16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만든 괘불입니다. 세로 9m, 가로 5m가 넘는 커다란 화면을 영취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보살, 제자, 사천왕, 천인 등 140명의 인물들이 가득 채웁니다. 특히 석가모니 앞에 앉아 석가모니에게 법을 청하는 인물의 뒷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뒷모습이 단정한 그와 우리가 함께 부처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그 아래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 천자, 선인, 부처를 향해 절을 올리는 남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 그림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370년 전 사람들이 처음으로 마주하고 찬탄했을 이 아름다운 부처의 세계가 2024년 봄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실에 펼쳐집니다. ‘진천 영수사 괘불’에서 화면 가득 펼쳐진 영산회상靈山會上의 풍경을 만나 부처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ㅇ연계 프로그램 - 793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8.21.(수) 18:00~18:30(미술부 학예연구사 양수미) - 799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10.2.(수) 18:00~18:30(전시과장 정명희)] 14:37~14:38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2실(202-2,3호)로 이동 14:38~15:00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2실(202-2,3호)에서 전시 중인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를 관람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전시명 :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2실(202-2,3호) 전시기간 : 2024-04-15~2024-07-28 전시품 : 남계우필 선면도 등 15건 42점 전시요약 나비와 꽃을 소재로 한 소장 회화를 선정하여 옛사람들의 나비와 꽃에 대한 인식과 표현법 소개 담당부서 미술부 명세라(02-2077-9498)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ㅇ (목적) 봄 맞이 계절전시, 나비와 꽃 소재 소장 회화 소개 ㅇ (장소) 상설전시관 서화Ⅱ실(202-2·3호) ㅇ (기간) 2024. 4. 15.(월) ~ 2024. 7. 28.(일), 총 105일 예정 옛사람들은 높은 산, 깊은 계곡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사는 꽃과 작은 벌레까지도 배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꽃을 기르면서 마음을 닦았고, 벌레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꽃과 벌레를 그려 그 속에서 교훈을 얻고 복을 바랐습니다. 18세기 이후엔 문인 지식인 사이에서 꽃 기르기 취미가 유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꽃 그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꽃과 함께 나비 그림도 많이 그려졌습니다. 특히 나비 그림에 오래 살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고 많은 이가 이를 선호했습니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계절, 옛 그림 속 꽃과 나비를 찬찬히 보면서 옛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대표 작품 1. 홀수폭: 남계우, 짝수폭: 박기준, <부채와 나비>, 조선 19세기, 덕수905 2. 신명연, <꽃>, 조선 19세기, 덕수2546 3. 심사정, <풀과 벌레>, 조선 18세기, 건희3666 4. 김홍도, <나비>, 조선 1782, 덕수1791 5. 신명연, <꽃과 나비>, 조선 1864년, 덕수1101-1 6. 조희룡, <나비>, 조선 19세기, 접수472] [꽃과 나비가 그려진 조선시대 그림…전시로 만나는 '봄'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꽃과 나비 그려진 조선 그림 15건 전시 이데일리 기사 등록 : 2024-04-26 오전 9:47:3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은 봄을 맞이해 오는 7월 28일까지 상설전시관 서화실에서 심화전 ‘옛 그림 속 꽃과 나비’를 개최한다. 꽃과 나비가 그려진 조선시대 그림 15건을 전시해 옛 사람들의 꽃과 나비에 대한 시선과 다양한 표현 방법을 소개한다. 옛사람들은 나비가 장수를 상징하는 벌레라고 생각해 나비 그림을 애호했다. 또한 나비 그림을 보면서 중국 고대 철학자 장자의 나비 꿈 고사를 떠올리며 물아일체의 경지를 되새겼다. 김홍도(1745~1806 이후)가 그린 부채 그림 ‘나비’에 쓰인 “장자의 꿈속에 나비가 어찌하여 부채 위에 떠올랐느냐”라는 시구에서 이러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문인들은 집에 꽃밭을 만들어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을 즐겼다. 꽃을 키우는 일은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감상의 대상으로 꽃을 여기면서 진기한 꽃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고, 아울러 꽃 그림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모방과 연습’ ‘사생과 관찰’이라는 방법으로 꽃과 나비를 그렸다. 그림 그리기 교재인 화보를 보면서 화면 구도와 꽃의 자태, 나비 동작 등을 익히는 것은 화가들의 중요한 그리기 공부 방법이었다. 19세기 들어서 직접 보고 관찰해 그리는 풍조가 확산됐다. 대표적인 화가가 남계우(1811~1888)다. 남계우는 ‘남나비’라고 불렸을 정도로 조선시대 나비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화가로 평가받았다. 그의 나비 그림은 나비 종류와 암수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19세기 문인 화가 신명연(1809~1886)은 꽃 그림으로 유명했다. 그는 그림의 구도나 동작은 화보를 참고했지만, 나비 날개 표현은 남계우와 같이 사생과 관찰을 기반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나비 그림보다 꽃 그림으로 이름이 더 높았다. 신명연은 식물 백과사전을 보면서 꽃에 관한 지식 등을 쌓고, 꽃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꽃과 나비, 그림 폭마다 대조적인 색을 배치해 화려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화풍을 이뤄냈다.] [꽃내음 따라 날아든 아름다움…옛 그림 속 꽃과 나비 만나볼까 김예나 기자 연합뉴스 기사 등록 : 2024. 4. 15. 10:06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서화실서 조선 회화 15점 소개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분홍빛으로 물든 꽃잎 사이로 호랑나비가 날아든다. 작은 꽃송이에는 배추흰나비가 날갯짓을 멈추고 앉았다. 눈 앞에 펼쳐진 한 장면일까. 나비의 동작은 물론, 날개 무늬까지도 생생하다. 19세기 문인 화가 신명연(1809∼1886)은 식물 백과사전을 보면서 꽃에 관한 지식을 쌓고, 주변의 풍경을 섬세하게 관찰해 다양한 꽃과 나비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완연해진 봄기운을 느끼며 옛사람들이 남긴 꽃과 나비 그림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5일 상설전시관 서화실에서 공개한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전시는 꽃과 나비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그림 15건을 소개하는 자리다. 예부터 꽃과 나비는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특히 중국에서는 나비가 80세 노인을 뜻하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 장수를 비는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생전 '남나비'로 불린 남계우(1811∼1890)의 나비 그림은 그중에서도 일품이다. 그는 조선에서 나비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화가로 평가받았는데, 그가 그린 나비는 종류와 암수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것으로 이름 나 있다. 그가 두 폭 족자에 남긴 '꽃과 나비' 작품의 경우, 그림을 배울 때 쓰는 교재를 보면서 화면 구도와 나비 동작 등을 익힌 것으로 보이나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서민의 생활상을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풍속화로 잘 알려진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가 부채에 그린 '나비' 그림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림을 본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것 같다'고 평했다고 전한다. 나비 3마리를 그린 그림 옆에는 '장자의 꿈속에 나비가 어찌하여 부채 위에 떠올랐느냐'는 시구가 남아 있어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릴 수 있다. 전시에서는 신명연이 그린 다양한 꽃 그림도 관람객을 맞는다. 고운 비단에 연꽃, 황촉규, 수국, 모란 등을 표현한 그림은 꽃과 가지만을 그리되, 잎은 엷은 물감을 풀어 속도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 눈길을 끈다. 박물관 관계자는 "옛사람들이 복을 구하기 위해, 또는 덕을 쌓거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그린 꽃과 나비를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28일까지.] [남계우(南啓宇) 남계우는 조선시대 나비 그림의 제일인자로 조선 말기 사실적이면서 장식성이 강한 화풍의 진작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칭별칭 : 자 일소(逸少), 호 일호(一濠) 출생 – 사망 : 1811년(순조 11) ~ 1890년(고종 27) 본관 : 의령(宜寧) 저서(작품) : 군접도, 화접도대련, 화접묘도, 석화접도대련 조선후기 「군접도」·「화접도대련」·「석화접도대련」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본관은 의령. 초명은 영시(永詩).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의 5대손이며, 부사 남진화(南進和)의 아들이다. 서울의 남촌(南村)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냈다. 나비를 특히 잘 그려 남나비[南蝶]라고 불리었으며, 평생 동안을 나비와 꽃그림만을 즐겨 그려 많은 유작을 남겼다. 그의 나비 그림들은 곱고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공필(工筆)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정확한 세필의 사실적 묘사에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군접도(群蝶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폭에는 여러 종류의 나비 약 150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나비 그림은 모란·나리·패랭이·국화 등 꽃그림과 조화되어 있으며 고양이 등도 그려넣었는데, 동물화에도 기량있는 세필의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나비 그림의 제일인자로 조선 말기의 사실적이면서 장식성이 강한 화풍의 진작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유작으로는 「화접도대련(花蝶圖對聯)」(국립중앙박물관 소장)·「화접묘도(花蝶猫圖)」(손세기 소장)·「석화접도대련(石花蝶圖對聯)」(간송미술관 소장) 등 많은 그림이 전해오고 있다.] [신명연(申命衍) 출생 1808(순조 9) 사망 1892(고종 29) 국적 조선, 한국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평산. 자는 실부, 호는 애춘. 아버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 신위이며, 형은 명준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부사를 지냈다. 아버지로부터 시·서·화에 능하다는 평과 함께 집안의 의발을 넘겨준다는 교시를 받기도 했다. 산수·화조·화훼·묵죽·묵매 등을 즐겨 그렸는데, 특히 꽃그림에서 청나라 추일계의 절지화법과 상통되는 치밀한 묘사와 산뜻한 채색으로 참신한 화풍을 이룩했다. 산수화에서는 전형적인 남종문인화법을, 묵죽에서는 아버지의 화풍을 따랐으나 화훼도에 비해 전반적으로 생동감이 부족하고 개성이 약한 편이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화훼도첩〉·〈화조도〉 등과 개인 소장의 〈임곽희추림독서도 臨郭熙秋林讀書圖〉·〈강남무진도 江南無盡圖〉·〈산수도〉 등이 있다.] [김홍도(金弘道) 이칭 : 사능, 士能, 단원, 檀園, 단구, 丹邱, 서호, 西湖, 고면거사, 高眠居士, 첩취옹, 輒醉翁 출생 1745(영조 21) 사망 미상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 요약 한국적 풍속화로 조선 시대 4대 화가에 꼽히는 화가로 호는 단원.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이며 어려서 경기도 안산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 이론가인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다. 1781년에는 정조어진 익선관본 도사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 지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서호(西湖)·취화사·고면거사·첩취옹(輒醉翁)·단구(丹邱).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칩거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77년 별제로 있으면서 강희언(姜熙彦)·김응환(金應換)·신한평(申漢枰)·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그림제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1781년에는 한종유·신한평 등과 함께 정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쳤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을 지내기도 했는데,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1810년경을 전후하여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세계 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전기에는 원체화적 경향을 띤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는데, 1778년 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병풍과 선면화 등에 잘 나타난다. 50세 이후의 후기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과 수파묘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도석인물은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그렸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소방하면서 농익은 필치로 바뀌게 된다.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김홍도에 대한 평가 홍백화의 글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활달해서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 또는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회사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유운홍(劉運弘)·엄치욱·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1784년작)·〈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1804년작),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 [심사정 - 남종 문인화풍을 뿌리내리다 심이숙(沈頤叔), 심사정(沈師正) 출생 1707년 사망 1769년 대표작 〈강상야박도〉, 〈파교심매도〉, 〈촉잔도〉 등 시기 조선 후기 중국의 화풍을 본받아 필법을 연구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재탄생시켰다. 담묵과 농묵, 세필, 수묵과 담채 등 다양한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3원(園) 3재(齎)가 꼽히는데, 3원이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을 일컫는다. 18세기에 유행한 화풍은 크게 진경산수화풍과 풍속화, 남종화풍인데, 그중 진경산수화풍은 정선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풍속화는 조영석에 의해 틀이 갖추어졌고, 본래 중국화풍이던 남종문인화풍은 심사정에 의해 토착화되어 조선 화단에 뿌리내렸다. 심사정의 그림은 외래의 화풍을 모방했다는 비난도 따르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히 중국의 화풍을 답습하거나 모방한 단계를 뛰어넘어 보편적 이상의 세계, 화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고 평가된다. 문인화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조선의 토착미를 농후하게 풍기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독창성이 덜 부각되기 때문인지 오늘날 그는 다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조선 시대에는 그의 명망이 정선 못지 않았다.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 후기 문신 김조순은 “겸재(정선)의 그림은 말년에 더욱 공교롭고 신묘해져 현재(심사정)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서는 겸현(謙玄)이라고 일컬으나, 그 아취(雅趣)는 현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심사정은 1707년(숙종 33) 죽창 심정주와 하동 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묵선(墨禪)이다. 현재라는 호는 명나라 말 남종화풍의 대가인 동기창(董其昌)의 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자 효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증손이며, 〈고산방학도〉를 그린 문인화가 정유승의 외손이다. 셋째 큰할아버지 심익현은 서예가로 유명했으며, 아버지와 육촌형 심사하가 문인화에 뛰어났다. 이런 집안 환경 덕분인지 심사정은 서너 살 무렵부터 스스로 사물을 그리는 법을 터득하여 재능을 떨쳤다고 하며, 10세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가가 당대의 명문이었음에도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할아버지 심익창이 성천 부사로 재직할 무렵 과거시험과 관련해 부정을 저질러 유배형을 당하면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심사정이 태어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후 심익창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의 영조) 시해 기도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크게 비화되지 않았으나 영조 즉위 후 표면으로 드러나 심익창이 극형에 처해지면서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심사정이 18세 때의 일이다. 다행히 심사정은 아버지 심정주와 함께 화를 면했으나 이후의 삶은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심사정은 어린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사사했으며, 집안이 몰락한 이후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26세 무렵에는 화가로서 크게 명망을 떨쳤으나 역적 가문의 자손인 그에게 드러내 놓고 그림을 주문하는 이도, 교유를 청하는 이도 없었기에 고독과 가난 속에서 살았다. 그림에 있어 당대 1인자였으나 굶주림 속에 세상을 떠났고, 몹시 가난하여 시신을 염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가문의 업 때문에 관직 진출도, 정상적인 교유 관계도 맺을 수 없었던 그에게 그림만이 유일하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림 한 점 한 점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다. 중국 대가들의 그림을 본받아 그리면서 필법을 연마했으나 단순히 본떠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필법을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자신만의 시정(詩情)을 담아 재탄생시켰다. 조선 시대 문인화가들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그에게는 그림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선의 화가 중 그만큼 수많은 모사를 한 화가도, 자기화하여 새로이 탄생시킨 화가도 없었다. 송나라 마원의 그림을 모작한 〈방마원산수〉에서는 마원의 북종화풍을 남종화풍으로 재해석했고, 송나라 미불의 그림을 모작한 〈방미남궁산수〉에서는 미불의 미점(米點)법1) 을 묵법으로 변용했다. 이런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는 대담하고 활달한 담묵(淡墨, 엷은 먹)과 농묵(濃墨, 짙은 먹) 사용부터 세필(細筆)을 이용한 정교한 묘사, 수묵(水墨, 색이 엷은 먹물)과 담채(淡彩, 엷은 채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이런 심사정에게 42세 때인 1748년(영조 24) 일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1월 17일 선원전(璿源殿)의 어진들을 보수하기 위해 영정모사도감2) 이 설치되었고, 도화서 화원들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대부들이 선발되었다. 그중 한 사람으로 심사정이 천거되었는데, 이는 역적 가문인 청송 심씨의 자손이 아니라 큰외할아버지인 정유승의 예(例)에 따른 것이었다. 보통 어진이나 의궤 제작에 참여하면 이후 관직에 제수되거나 관직을 높여 주는 일이 흔했으므로, 심사정으로서는 관직 진출의 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월 25일 역적 가문의 자손이 국가 주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그 길로 심사정은 파직되었다. 파직 사건이 있던 이듬해 단 하나의 의지처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완전히 혼자 남은 그는 그림에 더욱 매진했다. 그의 작품들은 졸작이나 범작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 이는 한 점 한 점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손질하고 성실한 태도로 그림에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기법을 익힌 것만큼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서툰 것이 없다. 〈딱따구리〉, 〈황취박토도〉, 〈노안도〉 등과 같은 영모, 〈연지쌍압도〉 등과 같은 화조, 〈파초와 잠자리〉 등과 같은 초충도 등을 비롯해 〈갈대 탄 달마〉, 〈하마선인도〉 같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등 수많은 화재를 그렸는데, 무엇보다 그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산수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촉잔도(蜀棧圖)〉 등이다. 41세 때인 1747년 그린 〈강상야박도〉는 중년 시절의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무성하게 숲이 우거진 가운데 광활한 산세가 고즈넉하게 펼쳐진 그림으로 두보가 지은 〈춘야희우(春夜喜雨)〉의 한 구절인 ‘들길은 구름과 함께 어두운데, 강가의 배만 불이 밝구나’가 쓰여 있다. 화면 전체에 애잔함과 적막함이 물씬 배어나오는데, 이런 정서 작용은 조선의 산수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미불과 예찬의 화풍을 따르고 있으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개성적,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는 화가가 만년에 들어서 이룩할 수 있는 절정의 기교와 예술성이 한데 담겨 있다. 중국 시인 맹호연의 고사에서 소재를 취한 것으로, 맹호연은 평생 유랑과 은둔 생활을 하며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읊은 인물이다. 아직 눈이 쌓인 이른 봄, 맹호연이 봄소식을 기다리며 매화를 찾아 나귀를 타고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는 고사를 묘사했다. ‘현재 필치’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먹선과 은은하게 펼쳐진 담채 기법으로 화면 전체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다. 1768년에 그린 〈촉잔도〉는 심사정의 마지막 작품이다. 촉잔도란 산수화의 화재 중 서촉(西蜀)으로 가는 험난한 풍경을 다룬 것을 말한다. 8미터 18센티미터의 장폭 두루마기에 그린 대작으로, 이 한 폭 속에 심사정의 모든 필치가 담겨 있어 ‘심사정의 회화 이력서’라고 일컬어진다. 연달아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깊은 계곡들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진 한편, 우수가 깃든 서정을 은은하게 뿜어낸다. 심사정은 1769년 6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화가로서의 명망에 비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다 할 만큼 불우하고 고립된 삶 속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려 나간 불행한 일생이었다. 다음은 7촌 손자 심익운이 쓴 묘지명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조희룡(趙熙龍) 이칭 : 치운, 致雲, 우봉, 又峰, 석감, 石憨, 철적, 鐵笛, 호산, 壺山, 단로, 丹老, 매수, 梅叟 출생 1789(정조13) 사망 1859(철종 10) 요약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으나 독자적 화풍을 이룬 조선 시대 후기 화가로 주요 작품은 <매화서옥도>. 20대에 이학전, 이재관과 교류했으며,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웠고 고서화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화론에서는 수예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의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본관은 평양. 자는 치운, 호는 우봉(又峰)·석감(石)·철적(鐵笛)·호산·단로(丹老)·매수. 중인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46년(헌종 12) 헌종의 명으로 금강산을 탐승하고 시를 지어 바쳤으며, 1848년에는 궁궐편액의 글씨를 쓰라는 명을 받았다. 1851년(철종 2) 김정희(金正喜) 일당으로 지목되어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20대에는 이학전(李鶴田)·이재관(李在寬) 등과 교유했으며, 1847년에는 유최진(柳最鎭)·전기(田琦) 등과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고 김정희파의 여항문인 서화가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유했다. 김정희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우고 19세기 중엽 화단에서 중추적 구실을 했다. 고서화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했고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화론에서는 수예(手藝)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의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산수와 함께 사군자를 특히 잘 그렸으며, 김정희가 강조했던 간일한 남종문인화풍에 토대를 두되 다양한 구도와 담채의 대범한 구사, 필치의 자유로운 운영,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실험의식, 거리낌없는 표현력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글씨는 추사체를 따랐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인전기집인 〈호산외사 壺山外史〉, 귀양시의 기록인 〈해외난묵 海外蘭墨〉, 회고록인 〈석우망년록 石友忘年錄〉 등이 있다.] 15:00~15:02 상설전시관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으로 이동 15:02~15:10 상설전시관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에서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과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을 관람 [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뛰어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근엄한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사유의 방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좌(半跏坐)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다리,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치마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조각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이는 동양조각사에 있어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이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다수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그 중 석굴암 조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의 반가사유상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는 미래에 태어나 성불하는 구세주 미륵보살의 행적이 과거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을 비슷하게 따른다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조형적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우선 화려한 보관이 눈에 띕니다. 마치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합니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발전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는데,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다양한 예가 나타납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가늘며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냅니다. 반가좌의 자세도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 손가락은 깊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합니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는 비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 기법 등, 우리는 이 금동불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도의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입니다. 그러나 두 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입니다. 국보 83호 상은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보 78호 상과 달리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였습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아, 우리나라 불상의 고대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한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과 관련하여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백제 혹은 신라의 것이라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고구려에서 특히 중국의 북위와 동위시대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한 점,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 국가를 지목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는 이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지금까지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우리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국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1) 종목 국보 (옛 지정번호 국보 제78호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삼국시대 소유 국유 위치 : 국립중앙박물관(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또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른다. 본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불교조각실 (301호)에 국보 반가사유상 전용전시실이 마련되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과 함께 번갈아 전시되었으나, 상설전시관 2층에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2021년 11월 12일부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또한 2017년 6월에는 표면 부식을 막고 균열 부위를 보강하는 보존처리를 마쳤으며, 안정화 처리 과정에서 표면을 덮은 이물질이 제거돼 불상의 새김문양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냈다. 오른쪽 어깨 부근 옷자락 일부와 보관 솟음장식의 균열부도 보강하였다. 반가 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서 석가가 태자였을 때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츄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이 용화수란 석가불(釋迦佛)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 근교에 있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에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라는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 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 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중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작품 설명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위에 초생달과 둥근 해를 얹어놓은 일월식(日月飾)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어 일명 '일월식삼산관사유상(日月飾三山冠思惟像)' 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월식 보관은 이란의 사산조(朝) 왕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ㆍ일본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보관 밑으로는 관대(冠帶)가 양쪽 끝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두 가닥으로 나뉘어 어깨 위에까지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가운데 끝이 뾰족한 굵은 목걸이가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약간 네모난 편으로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는 유난히 오똑하게 표현되어 있고 입가의 미묘한 미소 등에서 사색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매우 날씬하게 표현되었는데 좁은 어깨와 가는 허리ㆍ팔 등에서 부드러운 곡선미가 잘 드러나 있다. 얇은 천의(天衣)는 양쪽 어깨에서 넓게 펴져서 양끝이 뻗어 있고 몸 앞쪽으로 내려온 천의자락은 무릎 부분에서 교차하여 다시 양 팔에 걸쳐 내려오다가 대좌 양쪽에서 리본으로 묶여져 있다. 이와 같이 날개처럼 뻗어있는 옷깃은 중국에서는 피건(被巾)이라 하며 북제(北齊) 후기에서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의 형식이다. 허리에 걸친 군의(裙衣)는 띠 매듭으로 묶여 있는데 두 다리 위에 표현된 층단식 주름이나 대좌를 덮고 있는 Ω형의 옷 주름은 입체감이 없고 형식적이면서도 예리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 불상은 뒷모습까지도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천의가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지게 표현된 점이나 의자에 보이는 투각 장식은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에 보이는 날씬하면서도 탄력감 있는 신체표현과 날개와 같은 옷깃, X자형의 천의, 형식적인 옷 주름 표현 등은 대체로 중국 동위 및 서위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함께 6세기 후반경의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현재 출토지를 알 수 없어 그 제작지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전체적으로 둥근 맛이 적고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는 직선 위주의 조형감 때문에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나왔다.] [문화재비화]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8. 일본 국보 제1호를 만들어 낸 신라인의 예술혼과 기예는 하늘의 작품이지 결코 사람의 것은 아니다. 현재 학교나 학원에서 미술의 데생을 배울 때 보통 서양의 비너스 상을 보고 그리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미를 자랑하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배운다면 젊은이들에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법보신문」에서 이 불상의 모조품을 학교에 무료로 기증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고마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조각품으로 꼽히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1910년경에 충청도에서 발굴되었다. 그런데 1910년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발표에 맞추어 또 다른 불상이 서울에 나타났다. 이 불상도 상기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다. 높이가 83.2센티미터이고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가 입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에게 기증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현재 국보 제78호인 이 불상은 국보 제83호와 비교해 한층 고식적(古式的)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잔잔히 웃고 있는데, 얼굴에는 광대뼈가 약간 나오고, 어깨에 날리고 있는 날카로운 옷자락, 얕게 새겨진 옷주름 선, 끝이 뾰족한 목걸이, 보관의 치밀한 장식이 돋보인다. 이와 함께 다리의 U자형 선각 주름이나 어깨에서 앞뒤로 내려간 옷자락의 특성적인 처리 등은 세장(細長)한 형태와 함께 6세기 초 이래의 중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비슷하다. 이 불상은 데라우치가 은밀히 소장하다가 그가 1916년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해 지금에 전해진다. 그러나 후치가미 역시 불상의 출토지를 밝히지 않아 현재도 불상의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6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 개관에 맞추어 특별전 출품을 위해 출국하였다. 이 때의 불상 보험 평가액은 3천5백30만 달러로 원화로는 4백80억 원에 이른다. (참고:「한국문화재 비화」․이구열․한국미술출판사)]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2) 종목 국보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삼국시대 소유 국유 위치 : 국립중앙박물관(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일제 때 밀반출되어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그 제작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 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의 태자 시절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형(太子思惟形)에서 유래한 것이나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6~7세기 동양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이 있으며 일본 교토시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해 한일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작품 설명 측면 높이 93cm. 3 개의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한다. 이 불상은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몸에 전혀 장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나 좀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이 조각된 두 손과 두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나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天衣)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데 비해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특히 양감이 강조된 두 다리의 형태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 표현 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하반신 부분만 남아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제작 시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 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에서 북제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602년-641년)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연관되어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 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의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 특히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해외 전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해외 전시 횟수는 1960년 이후 총 7차례에 달한다. 가장 최근에는 2013년 미국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 전에 출품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변영섭 문화재청장 측이 '해외로 반출되는 문화재가 너무 많다'며 전시 불가 심의를 내렸으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요청과 문화관광부의 개입으로 출품될 수 있었다.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여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고류사 측 주지가 '목조반가사유상의 해외전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83호 반가사유상의 일본 전시 역시 무산되었고, 대신 국보 78호 반가하유상과 일본 국보 23호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의 교환 전시로 변경되었다.] [문화재비화] 세계 최고의 조각품,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8.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돈자형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을 쓰고 반가한 자세로 앉아 있다. 1910년경에 충청도에서 일본인 가지야마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 93.5cm, 국보 제83호), 이 불상은 돈자형(墩子形)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앉아 있는 형태로 삼국 시대 말엽(7세기 경)의 대표적 미술품이다. 이 불상을 보고 어느 독일의 박물관 관계자는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다’라고 극찬을 했다. 오른손 끝을 뺨에 살며시 대어 명상에 잠긴 보살은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에 얹은 반가상의 모습이다. 또 얼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명랑한 표정이고, 천의를 목뒤로 돌려 어깨를 감싼 형태는 부피감과 함께 탄력적이면서 부드러운 율동이 느껴진다. 소박한 삼산 보관, 벗은 상체, 간결한 목걸이에서는 단순함이,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는 자비로움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한편으론 부드럽고, 한편으론 섬세하여 사실적인 느낌에 숨이 막히는 감동을 전해 준다.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가 ‘남대문’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럼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7세기 초 신라에서 전해 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상기의 불상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일본의 불상은 한 그루의 나무로 조각한 목조불이고, 우리 것은 금동불인 점이 다를 뿐이다. 일본 교토(京都)의 코류지(廣隆寺)에 봉안된 이 불상은 높이가 123.5센티미터로 일본에서는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寶冠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부른다. 불상을 친견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Jaspers, 1883~1969)는 세계 최고의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 그리이스의 신(神)들을 조각한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의 예술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어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이 코류지에 봉안된 것은 603년의 일이라고 한다. 성덕태자(聖德太子)가 교토의 지도자였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에게 전해 주고, 진하승은 곧 코류지의 전신인 봉강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 불상이 신라인이 만든 불상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재질이 적송(赤松)이란 점이다. 1980년 대 초, 불상의 미소에 반한 일본인 대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불상에 접근했다가 실수로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정밀 조사를 통해 재질이 한국에서 난 적송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국에서 적송을 들여다 일본 내에서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조각을 완성해 현해탄을 건너간 것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한반도의 장인에 의해 조각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완성된 형태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절에는 또 다른 신라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균형도 잘 잡히고 기교도 뛰어나지만 어쩐지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그곳에서는 ‘우는상투미륵상’으로 부르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재질은 장목으로 616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 한다. 이 땅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어느 날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 땅을 침입한 악질적인 도굴 앞잡이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 는 충청도 어느 산골에 버려진 석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속에는 숨이 막히도록 빼어난 예술품이 천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 침략자를 보고는 얼떨결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악질은 예술 혼이 빼어난 이 불상을 보고 어떠한 미소를 지었을까? 일본인은 집에 아담한 연못을 두고 비단 잉어를 기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일본 대신의 환심을 사야 하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은 그들이 정원을 꾸밀 마땅한 석등과 탑을 찾아 내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마침 한국의 깊은 산에는 언제 없어진 지 모르는 폐사지가 널려 있었고, 잡초 속에는 탑이며 석등, 부도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일본인 골동상의 표적이 되었다. 탑이나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불경을 봉안한 무덤의 또 다른 형태이다. 이 땅의 백성들은 선조가 만든 예술품을 지독히도 즐기지 못하는 민족이다. 특히 효 사상이 뛰어나 조상의 묘를 파헤치면 죄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특히 그 속에 간직된 부장품을 꺼내 집안에 두면 부정이 탄다고 해 터부시하였다. 잡초에 뒹구는 탑이나 부도 또한 신앙의 대상으로만 경외시 했을 뿐 그것들을 마당에 설치해 감상하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계룡산에 살면서 백제 불상과 유물을 많이 연구한 이나다 순스이(稻田春水)는 이 불상을 보고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만 발표했다. 그래서 이 불상은 백제불상으로 간주되고 정확한 출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불상을 획득한 가지야마는 1912년,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 마히코(末松熊彦)에게 접근해 이 불상을 2천6백 원(圓)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보통 5원 정도 했으니, 거의 5백 가마가 넘는 거금이다. 그러나 그 돈은 온전히 이 땅의 백성들이 낸 세금이었다. 고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토가 창경궁에 지은 이왕가박물관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문화재를 조선 백성이 낸 세금으로 합법적으로 구매해 주는 루트였다. 그 후 이 불상은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해 오다가 1915년 이왕가 박물관이 총독부박물관으로 개칭되고,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칭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3호로 지정되었다.] 15:10~15:12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일본실로 이동 15:12~15:31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일본실에서 전시 중인 [일본 불교조각의 세계&뵤도인 아미타당] 전시를 관람 [일본 불교조각의 세계 전시명 : 일본 불교조각의 세계 전시장소 :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일본실 전시기간 : 2022-04-05~2024-10-09 전시품 : 목조대일여래좌상, 목조아미타여래입상 등 5건 5점 대여기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관람요금 : 무료 관람 전시요약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불교조각품 5점을 특별공개하는 전시. 일본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밀교, 정토교, 신불습합의 불교조각품으로 구성하여 일본 불교조각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 담당부서 세계문화부 이원진(02-2077-9556) 이 전시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불교조각품을 특별 공개하는 전시입니다. 일본의 불교미술은 6세기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만들었으나, 헤이안 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부터는 일본의 독자적인 불교문화가 나타납니다.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한 밀교密敎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한 정토교淨土敎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합해진 신불습합神佛習合 또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없는 일본의 독특한 불교문화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본의 불교신앙인 밀교, 정토교, 신불습합을 대표하는 5점의 조각품을 선보입니다. 일본에서 불상은 주로 국가사업이나 귀족, 무사 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완성된 불상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불상에 담긴 염원은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 바다를 건너 우리를 찾아온 부처와 만나, 그 염원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같고도 다른 일본 불상'...도쿄박물관 소장품 국내전 기자명 김호준 기자 BBS NEWS 기사 입력 2022.04.05 14:15 수정 2022.04.06 00:39 국립중앙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5점 특별 공개 ...내년 10월9일까지 9세기 무렵 일본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목조 조각품이 온전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목조대일여래좌상과 목조아미타여래입상 등 5점을 대여해 오늘부터 세계문화관 일본실에서 일반에 특별 공개했습니다. 이번 전시품들은 9세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일본 불교미술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조각품들입니다. 특히 일본 고유의 민간 신앙인 '신도'와 불교가 합해진 신앙형태인 신불습합의 영향으로 제조된 목조남신좌상과 목조여신좌상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여래입상은 '내영인'의 손모양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으로 서쪽의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비는 정토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이와 함께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목조대일여래좌상은 주문과 의식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밀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다양한 불상 중 하나입니다. 박물관은 9세기부터 일본 불상 대부분이 나무로 제조된 것은 일본에 자생하는 나무의 재질이 좋은데다 나무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영목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불교조각품 특별 공개는 내년 10월9일까지 1년6개월간 이어집니다. [이원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품된 불교조각품들은 주로 헤이안 가마쿠라 시대에 제작된 것들입니다. 이 시기에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고 이를테면 자연재해나 질병같은 어려움들이 있었을 텐데요. 그런 어려움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이런 불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줬고 이런 불상들이 지금까지도 전해져서 우리에게도 이런 감동과 여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이 불교를 수용한 후 고래(古來)의 신기(神祈)신앙과 불교신앙이 융합한 결과 나타난 신앙 형태. 메이지유신기의 신불 판연령(判然令)에 의해 근대 이후 신도와 불교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신사(神社)와 사원, 신직(神職)과 승려가 개별의 종교로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사회에서는 양자가 역사적으로 관계되어 왔다. 신불습합이라는 현상은 나라(奈良) 시대부터 형성되어 헤이안(平安) 시대에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로서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이 되었다. 본지수적설이란 본체인 부처나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해 일시적으로 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설이다. 또한 중세에 들어 신과 부처를 관계짓는 다양한 교설이 나타나 보다 복잡한 습합상태가 발생하였다. 근세에는 일본학자의 일부, 복고(復古) 신도가를 중심으로 점차 배불적 주장이 강해졌지만 사람들의 일상적 신앙에서는 습합상태가 일반적이었다. 신불습합 상태가 하나의 체계적 종교가 된 것은 수험도(修驗道)이다. 불교를 수용하기 이전의 일본의 산악신앙은 신성시된 산에는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불교, 특히 밀교는 수행의 일환으로서 산에 들어가는 예가 나라 시대에 두드러졌다. 또한 헤이안 이후에 사이쵸(最澄)와 구우카이(空海)가 각각 비예산(比叡山), 고야산(高野山)을 수행의 거점으로 기도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산악신앙은 독자의 전개를 하여 전국에서 다수의 산이 영산(靈山)으로서 수행의 장이 되었다. 이것이 후에 수험도라고 불리게 된다. 중세의 수험도는 천태계(天台系)의 성호원(본산파)과 진언계의 홍복사(당산파)라는 2개의 파에 의한 조직화가 진행되어 에도(江戸)기에는 전국적인 규모에 달하였다. 수험도는 메이지유신시에 일시 폐지되었지만 그 후 부활하였다. 신불습합 상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은 메이지 정부의 종교정책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은 신사신도와 불교 종파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였지만 일반 사람들의 신앙생활에서는 여전히 습합상태를 볼 수 있다. 또한 근대에 다수 형성되었던 신종교에서도 교의나 의례 등에 있어서 습합적인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뵤도인(平等院) - 봉황 새를 모티브로 지은 일본 절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23. 9. 8. 09:24 [박현국 기자] 7일 오후 교토 남쪽 우지에 있는 뵤도인(平びょう等どう院いん) 절에 다녀왔습니다. 뵤도인 절은 원래 귀족들의 별장이었습니다. 1052년 관백 후지와라(関白藤原頼通)가 절로 고쳐서 짓고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셨습니다. 처음 뵤도인 절이 지어졌을 때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극락처럼 화려하고 장엄했다고 합니다. 뵤도인 절의 대웅전에 해당되는 봉황당은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시가현 비와코 호수에서 흘러내리는 우지가와 강이 있습니다. 뵤도인 절 봉황당 앞 호수는 처음 뵤도인 절이 지어졌을 때 우지가와 강이 휘돌아 나가는 지류 냇물이었을 것입니다. 뵤도인 절 봉황당 이름이 봉황당인 까닭은 건물 용머리 양쪽에 봉황 상이 올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봉황은 상서로움과 고귀함을 나타내는 상상의 새입니다. 인간이 새를 섬기거나 신의 심부름꾼으로 여기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일부 새를 신성시하는 민족은 태어나 아기 이마를 돌로 눌러서 새머리처럼 만드는 편두 풍습도 있었습니다. 뵤도인 절 봉황당은 용머리에 놓인 봉황 새 뿐만 아니라 봉황당 건물이 봉황 모습입니다. 봉황의 몸통에 해당되는 부분이 아미타여래 좌상이 놓인 곳이고, 날개에 해당되는 부분은 건물 옆 남북으로 뻗친 익랑(翼廊)입니다. 처음 지어진 뒤 여러 번 보수와 수리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봉황당 아미타여래 불상은 불교에서 죽은 영혼을 저 세상으로 안내하는 일을 합니다. 처음 뵤도인 절을 짓고,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신 것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에 귀의하여 죽은 뒤 아미타여래 불의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봉황당 아미타여래 불상 둘레 벽에는 운중공양보살상이 꾸며져 있습니다. 운중공양보살상은 아미타여래을 칭송하는 나무 조각상으로 춤을 추는 모습,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장식을 든 모습들입니다. 이들이나 아미타여래 불상은 모두 처음 옻칠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색이 바래고 벗겨져 속이 드러났습니다. 봉황당 둘레에는 스님들이 종교 행사를 하거나 기거하는 여러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뵤도인 절 박물관에는 그동안 절에서 보관해온 여러 가지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습니다. 보됴인 절 봉황당 건물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일본에서 사용되는 10엔 동전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봉황당 지붕에 세워진 봉황은 일본 1만엔 지폐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일찍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불교 사상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다시 그것을 표현하는 건축과 예술은 각각 지역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달리 나타냈습니다. 뵤도인 절 봉황당도 그 가운에 하나 일본 문화입니다. 찾아가는 길> 교토 역에서 JR나라선 전차를 타고 우지 역에서 내려 걸어갑니다.] 15:31~15:32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로 이동 15:32~15:50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에서 전시 중인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을 관람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명 :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장소 :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 전시기간 : 2022-07-22~2024-09-29 전시품 : <사자 벽돌 패널>, <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 <구데아왕의 상>,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등 66건 전시요약 : 인류 최초로 도시를 형성하고 문자를 창안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시입니다. 기원전 3200년~기원전 6세기의 점토판 문서, 인장, 벽돌, 석상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재가 들려주는 인류 역사의 특별한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담당부서 세계문화부 양희정(02-2077-9554)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 전 시 명: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전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 기 간: 2022. 7. 22.(금) ~ 2024. 9. 29.(일) ○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 ○ 전 시 품: <사자 벽돌 패널> 등 66건 66점 ○ 관람절차: 예매나 발권 필요 없이 상설전시관 306호에서 무료 관람 가능 ○ 전시해설: 11:00, 13:00, 15:00 (메소포타미아실에서 출발) ☞<해설 운영 여부 확인> *세계문화관 전체 해설이며, 해설 초반 15~20분이 메소포타미아실에 해당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상설전시관에 ‘메소포타미아실’을 신설하고 국립 박물관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주제로 한 전시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을 개최한다.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을 선보이는 국내 최초 상설전시로, 세계적인 메소포타미아 소장품을 보유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 기획하였다. 전시는 2022년 7월 22일부터 2024년 9월 29일까지 열린다.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19년에서 2022년까지 운영한 이집트실, 2021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인 세계도자실에 이어 개최하는 세 번째 주제관 전시이다. 메소포타미아실 신설 역시 상설전시관에서 세계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세계문화관 연차 운영계획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해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후대에 전하며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고대 문명으로 현대 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이집트 문명과 같은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크게 조명 받지 못해 그러한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성취를 소개하되 전문적 배경 지식이 없이도 관람할 수 있도록 문자, 인장, 종교, 초상미술 등을 접점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문화 혁신’ 은 도시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노동이 분업화·전문화되고 신전을 중심으로 물품의 수합과 재분배가 이루어지면서 사제 계급과 정치 계급이 통제권을 갖는 위계 사회로 나아갔음을 그릇을 키워드로 해 설명한다. 쐐기문자의 창안은 메소포타미아가 이룬 대표적인 문화 혁신이었다. 문자로 교역과 거래의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추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키고 주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문자 창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원통형 인장도 발명되었다. 전시에는 13점의 쐐기문자 점토판 문서와 11점의 인장을 선보인다. 작은 점토판에 빽빽이 담긴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각 점토판의 내용과 해설을 담은 키오스크를 별도로 배치하였다. 또 신상과 의례 물품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신과 신전 건축, 의례 행위를 소개하였다. 거대한 신전을 짓고 그에 수반되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 또한 문화 혁신의 한 부분이었다. 2부 ‘예술과 정체성’ 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인장 역시 인장의 소지자가 섬기는 신과 글을 도안에 넣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였다. 우르의 왕실 묘에서 발굴된 장신구들은 착용자의 신분을 드러내거나 죽은 자가 지하세계에 내려갔을 때 힘을 보태기 위해 고가의 수입 재료를 포함한 재료의 물성에 따라 맞는 형태를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상’ 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태도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물상을 만들 때 개별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본뜨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업적에 걸맞은 이상적인 속성을 조합했기 때문에 개별 상의 생김새는 매우 유사하다. 구데아, 우르-남마의 상에는 누구의 상인지 밝히는 명문이 몸체에 남아 있어, 글과 상의 보완적인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또 <나부쿠두르우쭈르(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문을 새긴 원통>은 통치자의 군사적·종교적 공적을 적은 문자 기록이 통치자에게는 초상 미술만큼이나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부 ‘제국의 시대’ 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두 제국인 신-앗슈르(신-아시리아) 제국(기원전 약 911~612년)과 신-바빌리(신-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약 626~539년)의 대표적인 예술을 다루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반기에 등장한 두 제국은 정복 전쟁과 강력한 통치력 못지않게 왕성한 예술 활동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신-앗슈르 제국은 궁전 내부를 장식한 아름다운 석판 부조로 이름이 높았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는 당시의 정세를 정교한 조각 기술로 담은 작품이며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 등 여러 부조에서 상이 현실을 대리하는 힘을 가진다는 앗슈르인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신-바빌리 제국은 수천 년 전통의 벽돌 제작 기술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수도 바빌리(바빌론)에 당시 세계가 경탄할 만한 건축물을 세웠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이쉬타르 문·행렬 길을 장식했던 <사자 벽돌 패널> 2점이 전시된다. 전시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성취의 바탕에 소박한 벽돌 한 장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장식 벽돌로 끝맺는다. 전시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네 편의 영상도 준비했다. 전시에 출품된 인장을 실제로 사용하여 인장 찍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과 그 인장에 대한 큐레이터의 상세한 설명 영상이 1부에 상영된다. 전시품을 대여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고대근동미술부의 킴 벤젤(Kim Benzel) 부장과 나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이야기도 2부에서 들을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계관과 예술적 성취를 테마로 한 4미터 높이의 미디어큐브가 관람객을 맞는다. 메소포타미아를 상징하는 땅과 강,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인장 그리고 일상을 빼곡하게 기록한 쐐기문자가 담겨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손바닥 안의 작은 점토판에 세밀하고 집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놀랄 만큼 닮아 있어 수천 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아주 먼 동료 인간과 오늘의 나를 잇는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큐브 영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고대근동학회와 협력하여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지명과 인명을 쓰는 대신 악카드어 원어의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기하였다. 악카드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공용어로 사용된 언어이다. 전시는 무료이며 전시 설명은 하루 3회(11:00, 13:00, 15:00) 진행한다.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에서도 직접 보기 어려운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인류 역사에 큰 걸음이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적 혁신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그들이 남긴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5:50~15:53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있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로 이동 15:53~15:55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있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를 사진촬영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 높이 6.39미터, 무게 약 37톤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옛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돌기둥 4면 44행 1,775 글자로 새긴 광개토대왕의 업적 “태왕의 은택은 하늘에 미치고 위엄은 사해에 떨쳤다” “나라는 부강하며 백성은 여유롭고 오곡은 풍성하게 여물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공적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첨단 디지털 기술로 원본의 가치와 감동을 오롯이 담아 2024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에 세워졌다.] [디지털 고구려, 더 실감 나네…광개토대왕비·고분벽화의 비밀 중앙일보 기사 입력 : 2024.02.14. 14:54 강혜란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서 고구려의 존재가 이렇게 강렬했던 적이 있을까. 지난달 24일 상설전시관 로비인 ‘역사의 길’에 발광다이오드(LED) 미디어타워, 일명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이하 광개토왕비)가 공개되면서 연 400만명(지난해 기준)이 찾는 박물관의 첫 인상이 바뀌고 있다. 고대 삼국 가운데 영토 대부분이 한국(남한) 바깥에 있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고구려(기원전 37년~서기 668년) 유물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분위기다. 중국 지안(集安)성의 실제 광개토왕비(6.39m)를 재현한 높이 7.5m(받침대 포함 8m)의 미디어타워는 영상물 스크린을 겸한다. 4면을 둘러가며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적힌 총 1775자의 비문을 보여준다. 중요 단락은 부분 확대해 국문과 영문으로 소개한다. 타워를 에워싼 벽에도 비석 원문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한 족자(총 4개)를 걸고 하단엔 국문·영문 해설을 곁들였다. 이 디지털 복제본은 중국 현지의 실제 비석보다 원문이 훨씬 또렷하다. 고구려 멸망 후 잊혔던 광개토왕비는 1880년대 이르러서야 이끼 가득한 모습으로 재발견됐다. 당시 독특한 서체를 높이 산 금석문학자들이 이끼 등을 제거하고 무리하게 탁본하는 과정에서 비 표면이 심하게 훼손됐다. 반면 미디어타워와 족자는 원석탁본인 청명본을 바탕으로 하되 빠진 글자도 여러 판본을 대조해 채워 넣었다. 청명본은 1889년 리윈충(李雲從)이 떴던 원석탁본 50벌 가운데 하나다. 비문을 3글자씩 잘라 한페이지에 두줄, 즉 6글자씩 수록한 책 형태로 전해져왔는데 비석 3·4면의 일부가 빠져 있다. 류정한 학예연구관은 “3글자씩 이뤄진 탁본 자료를 비문의 각 위치에 배열하고, 규장각본과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고화질 자료를 협조받아 362자를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실의 실감영상관에선 북한 내 고구려 벽화무덤 3곳(안악 3호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대묘)을 실제보다 생생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진자료와 모사도 등에 기반해 복원한 디지털 영상을 360도로 공간감을 느끼게 프로젝터로 투사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복제본이 실물보다 나은 디지털 재현의 또 다른 예는 박물관 1층 선사·고대관의 고구려 실감 영상관에 있다. 북한 내 벽화무덤 3곳(안악 3호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대묘)을 내부에서 360도로 느끼게끔 전면과 양 측면, 천장까지 총 4면에 프로젝터 영상을 투사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벽화무덤 속 인물·동물 문양이 생생하다. 2020년 공개 당시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장은정 교육과장은 “벽화 내부를 촬영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일부 유실된 부분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전해지는 모사도 등으로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자료는 2006년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고구려 고분 10여기를 대상으로 공동조사를 했을 당시 찍어둔 것을 활용했다. 굴식 돌방무덤 내부의 벽 재질을 드러낼 수 있게 화강암·대리석 느낌을 가미하고 색채 등을 보완했다. 사신(백호·청룡·현무·주작) 등 중요 상징물엔 애니메이션 효과도 줬다. 가상현실(VR) 미디어아트에 친숙한 젊은 세대의 호응이 높다. 디지털 고구려 활성화는 국내 남아 있는 고구려 유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고구려는 건국수도(졸본성)와 천도한 국내성·평양성이 모두 남한 외곽에 있어 신라·백제처럼 화려한 왕실 유물은 거의 없고 기와·전돌·토기 등이 대부분이다. 박물관 소장품 40여만 점 가운데 세부 시대 구분이 ‘고구려’로 등록된 소장품은 8150점(전체의 2%)뿐이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에 수집·기증된 4000여점 가운데 중국·북한 지역 자료가 포함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활발해진 고구려 연구·전시는 2004년 표면화된 중국의 동북공정 영향이 크다. 고구려와 발해 등이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고대사 왜곡에 맞서 남북한 역사학계가 북한 내 고분벽화를 공동조사한 게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서울대 박물관이 주도한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군사유적(보루) 발굴도 재조명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사진 및 수집 유물을 토대로 한 ‘유리건판으로 보는 고구려의 도성’(201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기와(중국 지역)’(2023) 등 보고서도 나왔다. 2012년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은 제3전시실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를 비롯한 주요 고구려 유물을 특화해 전시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 전문가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사학과)는 “이젠 중국도 한국의 고구려사 연구 성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실제 유적에 접근할 수 없다 해도 디지털 재현을 통해 고구려사의 존재감을 국내에서 더 키워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서 “북한·중국의 고구려 도성 관련 자료가 충분하니 광개토왕비에 이어 디지털 실감영상을 추진해볼만하다”고 의견을 냈다. 박물관 윤상덕 고고역사부장은 “고구려실에 대한 관람객 호응도가 높아 올해 안에 현재의 2배로 확장하고 최근 발굴성과와 디지털 신기술을 활용해 고구려사를 더욱 가깝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15:55~15:56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있는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으로 이동 15:56~16:04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있는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을 사진촬영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 고려 사람들이 생각한 불국토의 모습 '경천사 십층석탑' 위치 : 국립중앙막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들, 나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그려낸다면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 수평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수직적인 모습일까? 시대마다 국가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불국토의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 국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약 13.5m의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는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3차원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보여준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성배경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 건립된 석탑으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냈던 곳으로 왕실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이다. 경천사가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다. 비록 일부 글자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지만,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였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권세를 누렸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충혜왕대에 공녀로 간 기자오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자정원사(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처럼 석탑 발원자의 면모를 보면 친원 세력이 석탑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발원자의 성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 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이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비록 이를 모두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원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이 백미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잘 표현되어 있고, 특히 기와가 정교하게 표현된 옥개석은 마치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한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불회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수난사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경천사 석탑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조화롭게 만들어 새로운 양식을 만든 우리 문화사의 기념비적 석탑이며, 동시에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를 반추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16:04~16:07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망대로 이동 16:07~16:12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망대 주변 풍경을 사진촬영 16:12~16:20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7 번지에 있는 이촌역 2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을 완료 16:20~16:30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전철 승차 대기 16:30~17:19 경의중앙선을 타고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49분 소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시설 안내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2층 시설 안내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3층 시설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