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고려의 도읍 개성, 조선의 수도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정의 움직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9차례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여파로,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가 되어 산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도 했다. 또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족들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거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방위를 위한 시설들이 들어서 군사요충지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마니산 정상에는 고조선을 세운 군주이자 한민족의 국조(國祖)인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塹星壇)이 있고, 섬 곳곳에는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 역할을 했던 석제 구조물 고인돌이 있어 고창군,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남문. (사진=황현탁)
강화도는 서해바다에 면해 있고, 한강, 임진강, 예성강 어귀이기도 해 끊임없이 외세의 영향을 받았고, 바다로 진출하려는 민족의 출항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 말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외교, 경제,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에 부닥치기도 했다.
조선 제25대왕 철종(재위 1849~1863)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서자출신이고, 할아버지는 모반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어 어렵게 생활하였다. 더구나 할머니와 아버지 본부인은 비밀리에 천주교를 신봉하여 사사 당한다. 그러나 종숙부인 순조의 배려로 가족은 한성으로 복귀한다. 철종은 바로 그 때 한성에서 역시 서자로 태어나는데, 가족의 역모사건 연루로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살았던 집터가 현재의 용흥궁(龍興宮)이며,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 즉위 후 당시 강화유수였던 정기세(鄭基世)가 외전, 내전, 별전을 지었으며, 임금이 즉위 전에 살았던 집이라는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는 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있다. 정문 입구에는 정기세와 제24대 헌종 때 영의정이었던 그의 아버지 정원영 두 사람의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철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용흥궁의 외전. (사진=황현탁)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찰스 존 코프(C. J. Corfe)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포교과정에서 조선의 민족문화와 믿음도 배려하면서 교육과 보건에도 신경을 썼다. 1900년에 지은 강화성당은 외부는 한옥양식을 채택하였으며, 단청을 하고 문양도 태극, 연꽃무늬를 택했고, 종도 전통적인 교회당 종이 아닌 불교의 범종형태로 만들어 사용하는 등 민초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였다. 성당 내부 세례대에도 한자로 ‘修己, 洗心, 去惡, 作善’의 유교적 단어들을 새겨 신도들의 마음을 다잡고 있다.
1900년에 지어진 성공회 강화성당. (사진=뉴스1)
강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방적산업이 발달하였으며,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전기가 일찍 공급되자 전깃불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최초의 민족자본 인조견 공장인 조양방적을 비롯, 유명한 심도직물, 평화직물, 이화견직 등이 강화에 터전을 잡았다. 개발연대에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의 직물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전성기 직물공장 종업원은 강화읍에만 4,000명에 이르렀는데, 현재에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10여개 면직물업체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이런 직물산업이 떠난 자리를 체험, 관광, 방문시설로 바꾸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데, ‘소창체험관’이 대표적이다. 소창(小倉)은 ‘면직물’을 뜻하는 일본단어 ‘こくらおり’(小倉織り, 코쿠라오리)의 우리식 한문발음이다. 각종 설명문에도 ‘소창역사, 소창공장, 소창산업’으로 표기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소창’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도 국산 면직 거즈(gauze)나 기저귀 등은 대부분은 강화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소창체험관 바깥벽이나 기념관에 목화꽃 모양을 붙여 놓았다. 코로나19로 체험관은 지난해 7월부터 휴관 중이다. ‘평화직물’에서 운영했던 공장을 강화군이 매입하여 체험관으로 바꿨다.
조양방직 공장터에 들어선 카페. (사진=황현탁)
또 외지인에게까지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곳이 ‘조양방직’ 공장 터이다. 강화도 지주였던 홍재묵, 홍지용 형제에 의해 1933년에 설립되었던 조양방직은 1990년대에 들어 값싼 중국 직물에 밀려 쇠락하자 문을 닫았는데,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 카페운영자에게 넘어가 방직기가 있던 곳은 카페로 바꾸고, 나머지 건물이나 마당에는 기계, 공구, 민속품, 잡동사니를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곳에는 심지어 5.16 후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의 민중당 전국구후보의 선거공보까지 전시되어 있고, 카페에도 그림, 포스터, 조각 작품 등 다양한 전시품이 방문객들이 봐주길 기다리고 있다. 케이크 조각이나 음료수 판매로 시설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니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는 얘기다.
용흥궁 공원으로 바뀐 심도직물공장 터. 가운데에 남경직물 직조기가 있고 오른쪽에 심도직물공장의 굴뚝이 보인다. (사진=황현탁)
전성기에 1,200명의 근로자가 종사했던 심도직물 공장 터는 용흥궁공원으로 바뀌었으며, 30m 높이의 공장 굴뚝은 윗부분 6m만 잘려 전시되고 있다. 1947년 문을 연 심도직물의 경우 열악한 근무환경이 문제가 되자 천주교가 개입하여 카톨릭이 노동사목을 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 강화성당에는 기림돌이 세워져 있다. 남경직물의 직조기도 공원 옆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 순절비각 뒤편에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화견직이 있던 자리는 공장은 철거되고 일부 담장만이 옛날의 영화를 알려주고 있다.
천주교 강화성당에 있는 노동사목 기림석. (사진=황현탁)
1919년 3.1운동에 동참하고자 유봉진 선생을 비롯한 강화군민들은 3월 7일 강화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김포군민까지 합세하여 24,000여명이 참가하였고, 그 중 25명이 옥고를 치렀다. 당초 발생지에 있던 기념비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용흥궁공원으로 이전하였다.
고려궁지에는 정조 때 외규장각을 건립하여 왕실과 국가주요행사를 정리한 의궤 등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여 왔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건물을 파괴하고 서적을 약탈해갔다. 2003년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자료는 외교적 환수노력을 기울여 5년 단위 대여형식으로 297책이 돌아왔다.
이처럼 강화에는 근현대 산업시설이나 종교시설, 주민활동까지 활용하여 사람들이 찾도록 가꾸어 놓았으며, 현재도 방직공장을 생활문화공간으로 재정비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다양한 ‘원도심 도보여행코스’를 개발하여 희망자를 대상으로 투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누구든 군청을 통해 예약하거나, 용흥궁공원의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을 방문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글도 한화춘 해설사의 안내로 시설과 장소를 둘러보고 썼다. 서울에서 멀지 않고, 신촌에서 출발하던 과거 시외버스 노선에 광역버스가 운행되고 있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황현탁 여행작가 hlp547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