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학파(The School of Antioch)의 성서 해석
I. 들어가는 말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된 역사의 기록이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늘 해석되어 왔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초대 교부들에 의해 성경이 어떻게 이해되고 사용되어 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성경해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이었다. 풍유적 해석은 3세기에 아주 강력하게 발전했으며 그 후에도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해석이 가져온 위험을 인식하고 이를 경계한 이들이 바로 안디옥 학파이다.
본 발제에서는 안디옥 학파의 일반적인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학파의 주요한 인물을 중심으로 성서 해석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연구해 본다. 이 연구를 통해서 안디옥 학파가 가지고 있던 성서 해석 전통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II. 안디옥 - 간략한 역사와 교회사적 가치
안디옥은 B.C. 300년 경에 셀루코스 1세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시리아 지역을 통치한 셀루코스 왕조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동방과 서방의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예수 당시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제국의 3대 주요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안디옥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안디옥의 기독교는 스테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무리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이 안디옥이었다(행 11:26).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마케도냐,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방 선교 사업을 감당했다.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의 중심 도시로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매우 독창적이고 탁월한 신학적 전통을 형성했다. 그런데, 아리우스 주의와 네스토리우스 주의와 같은 초대 교회에 불어 닥친 신학적인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디옥은 항상 이단 시비의 대상이 되어왔다. 결과적으로, 안디옥의 주요한 인물 등 중 상당수는 교회에 의해 파문당했으며, 불행히도 그들의 작품들 또한 대부분 파괴되었다.
한 때 아시아 총대주교좌가 위치했던 안디옥은 526년 대지진과 538년 페르시아 군의 파괴로 황폐화 되었고, 그 후 재건의 시도가 있었으나 사라센에 의한 점령, 십자군 원정, 오스만투르트의 침입 등 잇따른 외부세력의 침입과 전쟁으로 예전의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20세기 초반 시리아에 속해 있던 이 도시는 현재, 안타키아(Antakya)로 불리는 터기 남동부에 위치한 인구 약 14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III. 성서해석 - 문자적(literal), 역사적(historical) 해석: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1. 안디옥 학파의 형성
안디옥을 중심으로 시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안디옥 학파’(The School of Antioch)로 불리는 신학적 전통을 형성했다. 이들은 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성서 해석의 전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러 차례 교회 공의회를 해서 교회의 혼란과 분쟁을 야기시킨 기독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문제는 성경에 대한 이들의 태도와 해석에 무관하지 않다. 신학적인 입장과 성경해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디옥 학파는 당시 주도적인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수용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allegorical) 해석 방법을 거부하면서 성서 본문(the scriptual text)의 문자적(literal), 역사적(historical) 의미에 관심을 가졌다.
안디옥 학파의 창시자로는 3세기 후반(A.D. 268)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과 4세기 초(A.D. 312)에 순교한 안디옥의 장로 루시안(Luci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리겐과 더불어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회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성경 학자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안디옥 학파의 전통이 된 성서 본문에 대한 강조,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강조,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주장했으나, 인간적 요소에 대한 강한 주장이 정통 교회에 의해 문제시 되었다. 결국 이들은 아리우스 주의를 낳게 한 이유로 지적을 받으며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불행히도, 이들이 기록한 작품들을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2. 타르수스의 디오도르(Diodore of Tarsus) - 안디옥 학파의 진정한 창시자 Farrar는 디오도르를 안디옥 학파의 진정한 창시자로 보고 있다. (참조,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2)
안디옥 학파의 성서 해석 방법이 찬란하게 꽃을 피운 시대는 4세기 중엽 이후로 디오도르 이 전에 안디옥 학파의 맹맥을 잇는 인물로는, 안디옥의 감독이 된 유스타디우스(Eustathius),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of Salamis) 등을 들 수 있다. 유스타디우스는 ‘오리겐을 대학한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 대해’(On the Wicth of Endor Against Origen)에서 풍유적 해석이 성경의 역사적 특징을 박탈한다고 비난했고, 아폴리나리우스(약 310-약 390년)는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과 안디옥 학파의 언어학적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에피파니우스(약 315-403년)는 ‘무게와 치수에 대해’(On Weights and Measures)라는 사전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정경, 구약성경 번역, 성경의 도량법, 팔레스타인의 지리 등을 논했다. (참조, 도날드 맥킴, 성서해석자 사전, 54-55쪽)
, 이 시기의 선구자로는 안디옥 학파의 가장 특색있는 이론가 타르수스의 디오도르(Diodore of Tarsus)를 들 수 있다. 디오도르는 문자적 의미에 입각한 방대한 양의 주석을 기록하였으나, 그의 대적이었던 아리우스 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만약 "알레고리와 영적 통찰의 차이에 대해"(On the difference between allegory and spiritual insight) 여기서 ‘영적 통찰’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theoria'로서, Farrar는 이를 문자 만으로 충분하지 않는 영적인 통찰(spiritual insight)을 의미한다고 했다. 여기서 ‘영적 통찰’이란 알레고리와는 구별된 것이다. (참조,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3) 라는 디오도르의 논문이 남아 있었더라면, 문자적 해석의 입장에서 풍유적 해석을 극복한 영적인 의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디오도르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사상과 업적은 그의 두 제자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와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저술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데오도르는 ‘주석가’(Interpreter)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정도로 성서학에 있어서 안디옥 학파의 가장 뛰어난 주창자였고,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the golden mouth)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따른 성서 주석으로부터 탁월한 메시지를 전한 설교가였다. 이 둘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안디옥 학파의 성서 해석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3.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Theodore of Mopsuestia, 350-428년)
먼저, 데오도르는 아리우스 논쟁이 한창이던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자 리바니우스(Libanius)에게서 수사학을 배웠고, 크리소스톰과 함께 디오도르의 제자였다. 그는 383년에 사제 안수를 받았고, 393년부터 428년 사망할 때까지 길리기아(Cilicia) 지방의 조그만 주교좌 도시인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으로 봉직했다. 그는 탁월한 주석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열정적인 전도자요, 목사로서 성경 주석에 있어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Farrar는 데오도르를 ‘고대 주석의 습지대에 바위’(a rock in the morass of ancient exegesis)와 같은 존재로 평했다. (참조,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3)
데오도르는 주석과 설교를 명확히 구분했는데, ‘요한복음 주석’ 서론에 그의 입장을 적절히 표현했다:
“나는 주석가의 임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여기는 단어들을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명백하고 분명한 단어들을 묵상하고 이를 전하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다. 설교자는 이따금 과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주석은 의미를 간략하게 전달해야 한다.” (번역) “I judge the exegete's task to be to explain words that most people find difficult; it is the preacher's task to reflect also on words that are perfectly clear and to speak about them. For the latter there are times when excess is valuable, but the former must give the meaning and do it concisely."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1)
주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그의 주석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것을 만들었다. 그는 구절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필요한 경우 곧 정통과 비정통의 견해가 대립되거나, 난해한 경우에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불공정한 것이었는데, 신학적으로 데오도르가 니케아 신조를 적극 받아들였고 그의 작품이 기독론 형성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한 이들에 의해 그의 사후 100년이 훨씬 지난 553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당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28-431 콘스탄노플의 감독으로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고 장로직을 가졌다. 그는 데오도르에게 신학을 배웠다. 신인 양성을 엄격히 구분한 결과 반대에 부딪혔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에게 공격을 받고 431년 에베소 회의 때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는 추방당해 이집트에서 죽었는데, 그의 일파가 시리아의 에뎃사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5세기말 페르시아의 니시비스로 옮겨 교회를 세웠고 인도와 중국에 경교로 전해졌다. (참조, 그리스도교 대사전, 166쪽, 대한 기독교서회)
그 결과 그의 작품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오직 소수만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4권의 주석(시편, 소선지서, 요한복음, 바울서신)과 그 외 작품의 파편들이다.
3.1 영감(Inspiration)에 한 데오도르의 입장
성서 해석에 있어 데오도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풍유적 해석 방식을 거부하고 본문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접근을 강조했다. 그의 독특한 성서 해석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영감(inspiration)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오도르는 영감에 대한 유대적 이론과 알렉산드라적 이론을 구분했다. 유대적 이론이 영감을 성질상 윤리적인(ethical) 것으로 보고, 개인 의식의 확대라고 이해했던 반면,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영감을 의식을 초월하는 환상으로 이해했다. 이 둘의 차이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 구별을 가져왔는데, 데오도르는 유대적 이론을 받아들여, 계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미래에 완성되는 그림자를 보려고 했다.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7
데오도르는 성서의 숨겨진 저자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시편 주석에서 성경 저자가 마치 ‘진정한 저자인 성령의 손에 들려진 펜’과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편 45편 주석에서 성령이 예언자들의 생각을 계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 글쓰는 이가 펜에 잉크를 가득 채우는 것과 같다는 유비를 사용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영감’이란 계시된 진리가 특정 인간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부여되는 것(imparting)을 말한다.
그러나 영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인간 자유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데오도르는 성서 저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피동적인 영감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데오도르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하고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협력한다는 것과 마찬가지고 영감은 계시의 내용을 전달하고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내용을 담는 형식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손에 붙들린 펜이라면 그들은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추진력(self-propulsion)을 가진 펜이라고 본 것이다.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4
3.2 정경(Canon)과 본문(Text)에 대한 데오도르의 입장
정경(canon)에 대한 데오도르의 입장은 그에 대한 비난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데오도르는 영감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성경에 일부 문서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렸다. 그는 예언자적 영감(prophetic inspiration)에 대한 이해는 역사서의 일부(역대기와 에스라), 지혜문학의 일부(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 신약의 야고보서와 공교회 서신에 대한 낮은 평가를 내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데오도르가 위의 책들에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정경에서 이들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비난은 구약의 역사서에 대해선 시리아 교회의 전통을 신약의 서신들에 대해선 안디옥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 본 뒤 내려야 할 것이다.
먼저, 데오도르는 구약의 경우 잠언과 전도서 같은 지혜서를 예언적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혜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가 위의 두 문서를 예언서보다 낮게 평가했다고 해서 이 둘을 정경에서 제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5
다음으로, 욥기에 대한 그의 평가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그는 역사적 인물인 욥과 욥기서의 저자는 다른 인물로 판단했다. 그는 욥기서가 헬라적 배경을 갖고 있는 학식있는 이교도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았는데, 욥의 저자가 하나님이 허구의 동물(Behemoth)을 언급하고 있다거나, 욥의 셋째 딸의 이름이 헬라적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욥기 42:14에 등장하는 욥의 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Qeren Happuk’으로, 그 의미는 '화장할 때 쓰는 작은 상자'(horn of eye-paint)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칠십인 역에서 이를 번역할 때, 'Amalthei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Amaltheia'는 제우스 신을 젖 먹여서 키운 염소인데, 이 염소의 뿔을 소유한 자는 바라는 모든 것이 뿔로부터 흘러 나온다. 히브리에의 능통하지 않았던 데오도르는 칠십인 역에 의존해서 이 이름이 이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5)
데오도르는 아가서에 대해서도 어떤 영적인 해석을 거부하는데, 이는 아가서가 솔로몬이 이집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기록한 시였다는데 근거한다.
본문(Text)에 관해서 데오도르는 예언자들이 말한 히브리어 원문을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다. 데오도르는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한 칠십인역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가지 번역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번역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를 통해 원문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약의 경우, 데오도르는 현대적 의미의 사본 비평을 통한 본문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구절은 전체적으로 보다 적합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 신학적으로 올바른 해석을 내리려고 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3:15의 경우, 데오도르는 'patria' 대신에 'fratria'를 지지하는데 이는 천상에서는 가족관계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7)
3.3 데오도르의 주석
3.3.1 시편 주석 (Commentary on the Psalms)
시편을 주석하는 데 있어서 데오도르의 출발점은 시편이 기록된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다. 데오도르는 시편을 들여다 보면서 각각의 시편이 처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고자 했다. 나아가 그는 시편 모두가 다윗이 기록한 글로 읽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당시 구약 해석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은 각각의 시편에 대한 상이한 화자를 인식하는 것이었는데, 데오도르의 입장은 이것은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시편 모두가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사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당히 많은 시편은 다윗 생애 이후의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72편은 솔로몬 시대를 가리키고 있고, 다른 시편들은 히스기아 왕 때에 예루살렘성의 포위라든지, 느부갓네살의 침공이라든지, 바벨론 포로라든지, 스룹바벨의 귀한이라든지, 심지어 마카비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들도 있다. 데오도르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499)
이에 대해 데오도르는 다윗을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될 미래적 사건들을 미리 보게된 예언자의 원형(the archetypal prophet)이라고 주장한다. 곧 시편에서 다윗은 미래의 사건들을 미리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겪게 될 사람으로서 올바른 반응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중 일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나타내는 시편으로는 시편 2, 8, 45편을 든다. 시편 110편도 아마 이 중에 포함되었을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시편 주석이 81편까지 이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예언자로서의 다윗의 예언이라고 본다. 그 밖에 신약 성서가 시편을 인용해서 그리스도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하는데 이 구절들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성서 저자들은 시편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편의 원래 단어를 상황에 맞게 변경했다.
3.3.2 소선지서 주석 (Commentary on the Minor Prophets)
데오도르의 소선지서에 대한 주석도 선지자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는 사건은 다윗이 시편에서 예언한 것과 관련이 있으며, 예언자들의 임무는 다윗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단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을 격려하거나 경고를 주는 일을 감당한다.
데오도르는 예언서에서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을 찾는데 회의적이었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도 시대의 모형을 예언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요나서의 경우, 요나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형, 곧, 유대인의 거부, 기적적인 부활, 이방인의 개종을 모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데오도르가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보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라는 두 시대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데오도는 유대인들이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6
데오도르는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을 주장하여, 구약과 신약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3.3.3 요한복음 주석 (Commentary on John)
데오도르는 그의 주석적 관심인 역사성과 신학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난 책으로 요한복음을 들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의 기록으로서 역사적으로 신뢰성이 높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신학적 진리를 제시함으로 다른 기록의 부족함을 보충한다고 보았다. 데오도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복음서의 연대기적 발전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제자들의 믿음도 점차적으로 성숙한 것으로 보았다. 데오도르는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에 대해 나다니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사를 한 것은 단지 기독교적 고백이 아니라 유대적 기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부활 후에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도마의 고백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가 그에 대한 정죄의 근거를 제공했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504)
한편, 데오도르는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니케아 신조의 고백처럼,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며, 한 분 안에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명백한 구별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데오도르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에서 나는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로서 영원한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말인 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일 것이다’(요 5:20)에서는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본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분은 의도적인 해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본문의 역사적 상황에 따른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5:17은 예수의 치유 행위가 안식일을 범한다는 공격에 맞서서 자신의 신적 본성을 드러낸 것이며, 이것이 유대인들의 화를 자극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하자, 5:20에서 그 단계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그의 인성에 입각해 이야기 한 것이다고 보았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505)
이처럼 역사적 사건에 주목한 해석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복음서의 영원한 차원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게 만들었다.
3.3.4 바울 서신 주석
데오도르는 구약의 시대와 신약의 시대를 구분하고 불완전한 시대가 완성의 시대로 발전했다고 본다. 구약 성서가 제시하는 유형은 바울 서신에서 적절히 설명되었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그런데, 신약 시대라는 것도 하나의 유형이며, 결국 영원한 시대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개념은 바울의 급진적인 복음에 대해 보다 올바른 이해에 이르도록 도왔다.
데오도르의 바울 서신 주석은 그가 다른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경향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의 신학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데오도르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근거해서 본문을 해석해고 있다. 로마서 9:18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데오도르는 인간 자유에 대한 강조와 예정에 대한 거부로 이 구절이 바울의 말이 아니라 바울이 논쟁하고 있는 적대자들의 말이라고 해석한다.
3.4 데오도르에 대한 평가
데오도르의 주석은 흔히 ‘반-알레고리적’ 방법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알레고리에 대한 데오도르의 반대는 알레고리가 성서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 구약의 사건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이 일어난 역사성을 무시하지 않고 두 시대를 조합했다고 데오도르는 보았다. 바울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 지금도’라는 문구를 통해 구약의 사건이 일어난 과 현재의 시점을 연결하고 있다. 데오도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4:24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인용할 때에 그 역사성을 확신했다고 보고, 아담과 타락에 대한 이야기의 역사성도 부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참조,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 from the beginnings to Jerome, ed. .by P.R. Ackroyd, p. 507-508)
데오도르는 성서의 일관된 해석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위한 가장 손쉬운 도구인 알레고리를 거부했다. 데오도르의 신념, 곧 성서가 하나님이 주도하는 역사 발전에 대한 기록이라는 믿음은 구약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은총 행위요, 이에 대한 궁극적 완성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하게 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의 그림자요, 한 유형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발전에 대한 강조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법은 지혜 문학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는 적절치 못했다. 또한 역사의 차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약 기자들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는데 데오도르는 실패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석가’ 혹은 ‘해석자’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데오도르의 성서 해석 방법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14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손색이 없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파러(Farrar)의 표현대로 단지 빈 소리를 반복하는 메아리(echo)가 아니라 강력한 목소리(a Voice)였음이 분명하다. "He was a Voice, not an Echo; a Voice amid thousands of echoes which repeated only the emptiest sounds."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15)
4. 존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약 347-407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리바니우스(Libanius)에게 수학을 배웠고 데오도르와 함께 디오도르의 제자였다. 그는 디오도르에게서 안디옥 학파의 주석 방법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수도사의 고행에 매력을 느꼈으며 은둔자로서의 고독한 삶에 익숙했다. 팔라디우스(Palladius)에 의하면 그는 동굴에서 수도하는 2년동안 신약성경 전체를 암기했다고 한다.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79쪽
후에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381-386년 집사로 봉직하다가 386년에 감독 플라비안(Flavian)에 의해 사제로 임명받았다. 그는 12년동안 사제로 지내면서 성서 해석과 설교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398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407년 사망할 때까지 왕실세력들을 견제하는 논쟁에 휘말려 추방과 유배를 거듭했다.
크리소스톰의 성경 해석은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의 주석 방법은 매우 정확하고 객관적인 것어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목자로서의 실제적인 지혜였다. 파러(Farrar)는 그를 ‘안디옥 학파의 활짝 핀 꽃’이라고 칭했다. "the bright consummate flower" of the school of Antioch. (F.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 220)
크리소스톰은 양떼를 향한 열정과 사랑으로 주옥같은 설교를 남겼는데, 이 중 약 700편이 남아 있다.
크리소스톰은 성경을 논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지침서로 여기고 그 문자적 의미에 주목했다. 그는 무의미한 교리나 근거없는 알레고리로부터 자유로웠고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경의 많은 부분은 명료한 언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기꺼이 배우려는 마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 해석을 위해 두 개의 해석학적 원칙을 제시한다.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83-84쪽
이 둘은 배려(considerateness)로 번역되는 쉰카타바시스(Synkatabasis)와 정확성으로 번역되는 아크리베이아(akribeia)이다. 쉰카타바시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인간 한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로 조절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할 때 영감으로 참여한 하나님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본문의 모든 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영감을 주신다. 이 때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과 함께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참여한다.
아크리베이아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믿음이 결국 본문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정확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에는 불필요한 여분도 없고, 무작위적으로 덧붙여진 것도 없다”고 말했다.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84쪽
크리소스톰은 성경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를 들면서 성경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밭에 감춰진 보물, 바닥이 없는 우물, 숙련된 뱃사람이 땅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항행할 수 있는 바다, 참여자가 영혼을 먹이시는 성령의 향기를 뿜을 수 있는 꽃밭이다. 바울 서신들은 전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노아의 방주보다 훨씬 더 큰 방주이다. 바울서신과 모든 성경은 영혼의 모든 질병을 위한 필수 처방, 약을 담고 있는 상자라고 설명한다. (참조,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84쪽)
성경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성경에 대한 그의 애정은 성경 저자들과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에게까지 확대된다. 한편, 크리소스톰은 데오도르와 마찬가지고 히브리어를 몰랐기 때문에 칠십인역에 의존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의 구약 해석은 기독론적 관심과 모형론적 접근을 보여준다.
크리소스톰에 대한 평가는 그의 설교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지를 통해 내릴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크리소스톰의 마태복음 설교집을 파리라는 도시보다 좋아한다고 외쳤으며, 칼빈은 그를 바울 서신 주석의 주요한 권위자라고 인정했다. 현대의 비평 학자들은 크리소스톰에게서 풍부한 해석의 자원을 발견한다. 그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해석 방법이 올바르게 평가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사이러스의 테오도렛 (Theodoret of Cyrus 393-458년)
테오도렛은 안디옥에서 태어나 안디옥 주변 산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에게 배웠고, 안디옥 학파의 여러 인물들의 글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 그는 니케테에 있는 수도원에서 지내는 7년 동안 학업을 계속하였고, 423년경에 사이러스 교구의 감독직을 맡게 된다. 458년 사망할 때까지 사이러스에서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테오도렛은 교구 일을 돌보면서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70인역의 대부분을 주석하기도 했다. 그의 주석가로서의 과업을 목회적 관점을 가지고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변증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성경 해석의 방법론에 있어서 테오도렛은 안디옥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단순히 답습하지 않고 여러 방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유형론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더욱 강조한다:
"몸이 그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처럼 실제로 먼 옛날의 사건들은 신약성경에 일어나는 일들의 모형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경건한 왕 히스기아가 있고, 신약성경에는 경건의 키잡이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Theodoret, Commentary on Psalms 28:1)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150쪽
한편, 테오도렛은 데오도르가 역사성을 강조한 나머지 구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을 찾는데 실패한 것과는 달리 신약 시대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발견한다. 그는 시편 주석 서문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주석들을 참고해 왔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알레고리에 빠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예언들을 과거 역사들과 조화시킴으로 그리스도인들보다 유대인들에 더 적용되는 해석을 하고 있다. 옛날의 역사와 관련된 모든 일들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열방의 교회, 복음전파, 사도들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들의 본연의 의미가 바뀌어 다른 일들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Theodoret, Commentary on Psalms, Prefatio 80:860-861)" 도날드 맥킴, 성서 해석자 사전, 151쪽
결론적으로, 테오도렛은 기독록적 중심에 서서 알레고리와 역사적 해석의 중간적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고 감독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했으며, 그가 사용한 방법은 현장을 무시하지 않는 해석학적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V. 나오는 말
초대 교부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대체로 문자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 두 가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상에서 살펴본 안디옥 학파는 일차적으로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을 거부하였으나, 성서의 영적인 의미까지 무시하진 않았다. 이들은 ‘영적 통찰’(theoria)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성서의 영적인 의미를 역사적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안디옥 학파가 보여준 성서 본문에 대한 철저한 강조와, 역사성이라는 관점을 통해 성서를 들여다 본 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잠시 모습을 감추었으나, 종교 개혁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게 되었다. 비록 이들의 성서 해석이 현대적인 방법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라 할지라고 성서에 대한 열심과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안디옥 학파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의 성서 해석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결단과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 비평학의 관점으로 판단할 수 없는 보다 숭고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아타나시우스의 ‘말씀과 성육신에 관하여’란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성경 연구와 성경의 참된 지식에 더하여, 삶의 성실성, 영혼의 순수성,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는 덕이 필요하다... 거룩한 성서 기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거룩한 생활로 자신을 정하게 하고 성자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 (De Incarn. Verbi 57) 보니페이스 램지, 초대 교부들의 세계,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