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남별궁지 (서울시 중구 소공로 112,소공동 87-10)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혼인한 뒤 살던 저택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공주 사후 자손들의 재산 분쟁으로 인해 경정공주의 집을 국가에서 환수했다
(소공동 이름은 이 '소공주댁'에서 유래했다)
♤ 남별궁
1583년(선조 16년)에 선조는 이 집을 크게 수리한 뒤 셋째 아들 의안군에게 주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자 적장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가 1593년 4월까지 주둔하던 곳으로 쓰였다
한양을 되찾은 후 명나라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머물렀다
1593년(선조 26년) 10월에 선조가 피란갔다 돌아온 이후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때부터 남쪽에 있는 별궁(왕이 때때로 머무는 장소), 즉 남별궁으로 불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왕들이 남별궁을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고, 국가외교의 중요한 시설로 관리받았다
정조 때에는 빈객 접대와 연회 일을 맡아보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남별궁 안으로 옮겨 설치했다
그 뒤 1897년에 환구단(圜丘壇)을 세웠으나, 1913년에는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건축했다
환구단 (서울시 중구 소공로 106, 소공동 87-14)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 또는 원구단, 원단 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이 설계하여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간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 덕수궁)과 마주보는자리에 지어졌다
문화재청은 지난 2005년 서울 중구 소공동 사적 제157호 명칭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 정했다
문화재청이 환구단이라고 명명한 데는 1897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 논설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원구단'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 정문
대한제국(1897~1910) 초기 환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원래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있었는데, 1913~1914년에 걸쳐 망국의 천단인 원구단을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직영 조선철도호텔을 세웠는데, 그때부터 원구단 정문은 엉뚱하게 조선철도호텔 정문으로 계속 살아오다가 1967년 조선호텔이 새로 지어지고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이전이 논의되었고, 1968년 정문이 매각되어 1969년 5월 우이동에 있던 그린파크호텔로 넘어가 그곳의 정문이 되었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문이 원래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 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좀 더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하도록 서울광장, 덕수궁과 마주 보는 환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측 칸을 좁게 조정했다
기둥 위에는 출목(出目)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栱包)를 사용하고 대한제국 황실 문장(紋章)인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鳳凰紋) 등을 장식으로 활용한 점도 특별하다
옮겨진 정문에서 환구단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조선호텔의 건물로 변하였다
♤ 석고 (石鼓)
석고는 즉 돌로 만든 북이다
환구단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장소임을 상징하기 위해 제사 때 사용하는 악기의 하나로 이 돌북을 만든 것이다
전체 모양은 둥글고 몸통에는 용무늬가 조각돼 있다
용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다
이 석고가 만들어진 것은 1902년으로 당시에도 우리의 문화적 재능이 전혀 쇠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해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으로 이를 기념하는 역할도 했다
석고각이 박문사로 이전되면서 석고각에 안치되어 있던 석고는 1936년 현재의 위치인 웨스틴조선호텔 구역에 있는 황궁우 옆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원래 석고는 석고각안에 눕혀서 안치(安置)됐던 것인데, 현재의 석고는 서있는 모습이다
♤ 석고각
고종황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02년에 세워진 석고각은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다)의 종루가 되고,
1965년 옛 박문사 일대에 신라호텔과 영빈관을 짓기 위해 창경원으로 이전되었으나, 1983년~ 1984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사업 때 헐려 없어졌다
♤ 황궁우
환구제의 주요 대상인 하늘 신(황천상제: 皇天上帝), 땅 신(황지기: 皇地祈) 그리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등의 신위판을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환구단 건립 2년 후인 1899년에 완공하였다
삼층의 목조건물로 언덕 위로 우뚝 솟아 있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 장소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주며 황궁우는 팔각 월대(八角 月臺) 위에 지어진 팔각 평면의 건축물로 기둥 또한 팔각(八角)이다
외부에서는 3층 구조로 보이나 내부는 1층에서 3층이 모두 통해 있는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으며 팔면(八面)에 설치된 문과 창은 소슬꽃살로 장식하고 바깥기둥 사이로 물결과 연꽃 무늬(파련각, 波蓮刻)를 새긴 낙양(洛陽)을 설치하여 건물에 화려함을 더하였다
♤ 석조삼문
제단에서 황궁우로 연결되는 답도에 설치된 문으로 3개의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와로 된 지붕은 황궁우로 향하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낮게 되어 있다
(답도踏道 : 궁궐의 격을 나타내주는 장식물 중 하나로서 주로 정전의 중앙 계단을 장식했다
왕이 탄 가마가 지나가는 길로 과거에는 왕이 아닌 사람이 밟으면 삼족을 멸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지만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난간을 설치하곤 한다)
문 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문(龍紋)으로 되어 있고,
삼문(三門)으로 오르는 답도(踏道)는 황제의 상징인 용문양(龍紋樣)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의 양쪽에 신령스런 짐승인 서수(瑞獸)로 소맷돌을 장식한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한층 위엄을 더하였다
그 좌우에는 법과 정의를 뜻하는 해치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삼문에서 바라 본 황궁우
환구단의 난간
첫댓글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자료들 입니다. 덕분에 공부 많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