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선희 객원기자
사라져 가는 퉁소 되살리기 위해 진로 바꾼 화학자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관악기로 일제시대 전까지만 해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퉁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잊혀진 악기가 되었고, 비교적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단소나 대금에 비해 연주를 들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심금을 울리는 그 은은한 가락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무렵, ‘한국퉁소연구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한국퉁소연구회는 문화재 전문위원인 이보형 회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이진원 교수가 주축이 되어 만든 것. 매년 정기연주회를 비롯해 한ㆍ중 퉁소교류 연주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올 6월에는 ‘통 콘서트’라는 퉁소 창작연주회 무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전통예술원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이진원 교수는 “퉁소의 음색은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다”며, “북쪽에서는 북청사자놀음의 반주용으로 사용되었고, 남쪽에서는 시나위, 산조음악의 연주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항상 지니고 다니는 풀피리.
“북쪽의 퉁소는 길이가 길고, 남쪽은 짧은 특징이 있지요. 북한에서는 아직도 퉁소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남쪽에서는 거의 사라졌어요. 그 사라진 자료들을 찾아 헤매다 이보형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퉁소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함께 퉁소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퉁소와 그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 화학과 출신인 그는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중 서울대 음대로 진로를 바꾼 특이한 케이스. 고등학교 때 단소를 잘 불던 친구가 부러워 독학한 것이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대학 입학 후에는 학교 안에 국악동아리를 만들었고, 대전시립연정국악연구원과 교류를 맺어 매주 한 번씩 국악원 단원들에게 연주를 배웠다. 대금과 퉁소는 그때 접한 악기였다.
나운규의 아리랑 | 1929년 발매된 것으로 한국영화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음반으로 평가된다.
“대금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퉁소는 처음이었어요. 그 소리에 푹 빠져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지만 남아 있는 연주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주말에 서울에 오면 무조건 문화예술진흥원, 대학 도서관 등을 다니며 퉁소 녹음자료들을 찾아 헤맸어요.”
그렇게 발로 뛰며 모은 자료들을 대학교 3학년 때 책으로 엮었다. 전공자도 아닌 대학생이 석사 학위 논문을 써도 될 만큼 방대한 분량의 책을 낸 것은 당시 전통음악인들 사이에 큰 화제였다. 민속음악학자이자 문화재 전문위원인 이보형 선생과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퉁소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던 이 선생은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1930년대 퉁소 명인 유동초 선생의 음반을 복사해 준 것. 그는 “이 음반이 퉁소 연구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유성기로 녹음한 음반들을 찾아야 하는 일이라 자연스럽게 한국고음반연구회 일에도 깊이 관여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정말 취미로 시작한 일인데, 퉁소와 대금에 관심이 많고 유성기 음반을 모으다 보니 점점 이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루어야 할 일이 많은 분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과감히 진로를 바꾸었지요.”
카이스트 다니던 대학생 때 퉁소 관련 연구서 펴내
동화구연 음반 |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소년운동에 힘을 쏟은 아동문학가인 고한승이 1920년대 중반 취입한 동화구연 음반.
대학 시절, 화학과 전통음악연구라는 두 가지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일이 힘들었을 법도 한데 그는 “전혀”라며 고개를 저었다. 음악은 말 그대로 취미였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는 것. 유성기 음반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이며 골동품점, 청계천 등 퀴퀴한 먼지 속을 헤매고 다닐 때도, 용돈을 고스란히 음반 사는 데 바치면서도 마음만큼은 더없이 뿌듯했다며 웃는다.
그렇게 모은 유성기 음반이 현재 2000여 장. 그중 가야금산조 명인인 함동정월, 월북한 명창 박동실 등 그냥 사라질 뻔한 여러 명창들의 음반이 그의 손에서 발굴되었고, 최승희의 재즈송, 색동회에서 어린이용으로 만든 구연동화,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음반 역시 그 희귀성으로 인해 가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다.
“제가 공부한 두 가지가 워낙 다른 분야다 보니, 둘 중 어떤 게 나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그런데 화학 공부를 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교재가 미국에서 발간한 《캠 스터디》라는 책이거든요. 이 책의 첫머리는 ‘도대체 왜?’라는 문구로 시작됩니다. 어떤 현상, 사건을 설명할 때 왜 그런지를 탐구하라는 것이죠. 전공을 바꾸기 전이나 바꾼 후나 그런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가령 고구려 때 고분벽화에 악기가 등장하면 그 명칭과 연주방법 등을 고민합니다. 그러다 보면 문헌도 찾아야 하고, 고고학 자료도 뒤져야 하고, 그렇게 하나씩 단서를 찾아가다 보면 해결이 됩니다. 물론 미궁에 빠지는 것도 있지만요.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음반도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어요. ‘무성영화라도 음악은 있지 않았을까’라는. 그래서 열심히 발품을 팔았고 결국 찾아냈어요. 연구대상만 바뀌었을 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해결되었을 때 얻는 지적 만족도는 결국 같습니다.”
최승희 ‘향수의 무희’ | 1930년대 후반 제작된 무용가 최승희의 재즈송 음반. 그가 직접 작곡한 ‘향수의 무희’가 담긴 귀한 소장품이다.
퉁소 외에도 그가 이런 노력을 통해 살려 낸 전통악기는 또 있다. 초적, 즉 풀피리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풀피리 명인이 있었을 정도로 연주법이 이어져 왔지만 지금은 그 명맥이 끊겼다”는 그는 “풀피리로 산조를 연주할 정도였는데 이제 이것을 재현할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풀피리를 양복 주머니에서 꺼냈다. 가만히 보니 조그만 나뭇잎 크기로 오린 ‘비닐’이다. 그는 이 비닐로 즉석에서 짧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악기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작은 비닐로 청아한 가락을 만들어 내는 게 그저 신기했다.
“음악은 정신문화이자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에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지금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이 많잖아요.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만 해도 퉁소와 비슷한 악기들이 지금까지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우리는 아쉽게도 그런 노력이 거의 없었죠. 지금이라도 초등학교에서 하는 단소교육과 퉁소를 연계시키는 건 어떨까요? 단소와 퉁소는 운지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손가락이 커지면 퉁소를 쉽게 배울 수 있거든요. 단소에 이어 다음 과정 악기로 퉁소가 보급된다면 그 옛날 가장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악기였던 퉁소의 인기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사진 : 김홍진
출처 : 톱클래스(http://topclass.chosun.com)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이진원 교수 < 사람들 < 매거진 < 기사본문 - 톱클래스 (chosun.com)
Chorus Culture Korea 코러스 컬처코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