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조선 철도호텔 터 (서울시 중구 소공로 106, 소공동 87-1)
1910년 합방 후 일제의 침략 목적에서 각 방면으로 철도가 설치되어 경성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외국인들의 내왕이 많아지자 철도국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호텔을 설립하였다
1911년 2월부터 환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조선철도국이 1913년부터 남별궁 자리의 환구단을 헐고 1914년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물의 조선철도호텔을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남만주철도회사가 건설했는데, 1920년대에 들어와서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영이 되었다)
호텔 건물 왼쪽의 황궁우와 왼쪽 아래의 삼문은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으나
이것 이외에 나머지 부속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거나 이전되었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조선 국왕이 제례를 행하던 환구단의 일부를 헐고 그 위치에 지은 호텔이다
♤ 1939년 10월 15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를 방문하여 참배했고 그 다음날 조선철도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라고 사죄했다
해방 후 1945년 조선으로 관리권이 넘어와 미 군정 사령부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통부가 관리하여 이름을 Chosun Hotel로 개명한다
(201호실은 과거 이승만, 김구, 서재필 등이 투숙하였던 곳이다)
1963년에 국제관광공사로 이전되고(반도호텔과 합병하여 조선반도호텔이 된다), 1967년 민간에 매각되어 아메리칸항공과 신관 건축 후 독립법인으로 출범한다
1970년 20층 건물로 개관하면서 1981년 외국인 투자자인 웨스턴호텔과 제휴를 맺으며 '웨스틴 조선호텔'로 개칭한다
<2022년 11월 28일 추기>
한국관광공사가 가지고 있던 호텔부지(3,198평)와 주식지분 일체가 공매입찰의 형식으로 삼성그룹에 양도된 것은 제5공화국 때인 1983년 6월30일 이었다
매각대금은 547억 846만원으로, 중도금(40%)은 2년에 나누어 내고 잔금(50%)은 5년 거치 후 8년간 균등 분납토록 정하였다
이런 식의 계약조건은 관광공사 사장 정도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고위층에서 결정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조선호텔은 삼성그룹에서 분리되어 신세계백화점그룹에 속해 있다
신세계백화점그룹 회장 정재은의 부인 이명희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막내딸이다
반도호텔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30, 소공동 1)
국내최초의 본격적 상용호텔로 일본 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사장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에 의해서 1936년에 착공, 1938년 4월 27일에 개관하였다
(일제강점기 흥남질소비료공장과 압록강 수풍댐 등을 소유한 당시 최대 거부 노구치 시타가우가 조선철도호텔에 갔다가 허름한 작업복 차림 탓에 문전박대를 당하자 바로 옆에 4층의 그것보다 높은 8층 건물을 지어 자기 사무실을 5층에 두고 조선철도호텔을 내려다보며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지하 1층에 지상 8층 건물인 반도호텔은 미국의 스테틀러호텔의 경영방식을 도입하였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한 당시 한국 최대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반인들의 여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 되었고 호텔사업도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해방후 미군사령부 하지중장의 사무실도 여기에 있었으며, 한국전쟁당시 서울 수복후 정부에서는 미군공병대에게 내부 인테리어 개편을 맞겨 미국식 호텔로 변화되었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 정부는 다시 반도호텔을 매입하여 1년에 가까운 수리를 하였다
(폭격으로 인한 수리공사는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이정도 규모의 건설공사를 진행할 중장비를 갖춘 민간회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당 시절에는 정치인들의 본거지가 되어 국회의사당과 다름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 이 호텔 809호실에 머물며, 자유당 간부회의, 여야 고위간부 연석회의 등 주요한 의사결정이 진행되는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정부(한국관광공사) 소유로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을 합병시켜 반도조선호텔이 되었다
1974년 민영화로 롯데에 매각되어, 1979년 지금의 롯데호텔을 지었다
(청와대 인근이라 건축법상 40층 이상 짓지 못하여 38층으로 지었는데 당시로서는 한국 최고층 빌딩이었다)
근택빌딩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7길 27, 소공동 76-3)
1922년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지어진 근택빌딩이라는 명칭은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의 소유자인 일본인 치카자와 모헤이(近澤茂平)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및 조선인쇄주식회사 다음으로 유명하고 규모도 크며 시설이 훌륭한 인쇄소 겸 출판사로 성장하자 1944년 8월에는 조선정판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당시 우수한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던 근택빌딩을 당의 사업을 위해 일본인 건물주 차카자와 시게류(近澤茂)에게 20만원을 주고 정식으로 문서를 받고 매입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장안파 공산당 잔류파가 발전적 해소를 선언하고 재건파 공산당에 백기 투항하자 근택빌딩에는 조선공산당 간판이 정식으로 걸렸다
(한국 역사상 조선공산당이 최초로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 이후 미군정은 근택빌딩을 폐쇄하고 조선공산당이 불법으로 취득한 적산으로 몰수하여 천주교측에 임대하였다
천주교측은 조선정판사를 대건인쇄소로 개칭하고 근택빌딩을 경향신문사 사옥으로 하여 1946년 10월 6일 '경향신문'을 창간하였다
♤ 정판사 위폐 사건
1945년 10월 20일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 공산당원 7명이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 활동비를 조달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6회에 걸쳐 매회 200만원씩 총 1200만원(2021년 기준으로 약 160억원)이라는 위조 지폐를 발행하였다는 사건으로, 박낙종, 이관술, 송언필, 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년~15년 형이 선고되어 복역 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일제히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 1974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경향신문사가 문화방송(MBC)과 강제로 합병되면서 정동 사옥으로 옮겨간 후 한일은행이 인수하여 본점 별관으로 사용하였다
1980년 소공동 지역 재개발로 철거되었으며,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타워가 들어서 있다
소공동 화교촌 (서울시 중구 소공동, 북창동 일대)
1882년부터 서울에 들어온 화교는 1894년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다툰 청일전쟁 이전까지 3000명 넘게 거주했다
1910년 519가구 1828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조금씩 늘었다
1970년에는 서울 거주 전체 외국인 1만 463명 중 8262명이 중국인이었다
대부분 소공동에 모여 살았다
화교회관 건립 등 아이디어가 속출했지만, 사업은 3년 이상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1966년 10월 31일 미국 제36대 린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했다
환영 행사에 학생 100만명, 시민 155만명, 공무원 20만명 등 모두 275만명을 동원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이 세워졌다
정부는 방한 당일 학교, 은행, 회사, 관공서의 임시 휴무를 결정했다
서울 시민이 350만명이던 시대에 200만명 이상이 김포공항~한강대교~용산~시청 앞 연도에서 미국 대통령 일행을 환영한 것이다
행사장인 시청 앞 광장에는 30만명의 시민, 학생이 대기했다
한국전쟁을 치른 나라, 베트남전쟁으로 부흥의 기회를 잡은 나라 서울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실황중계는 35분간 이어졌는데 존슨 대통령의 연설 13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시청 건너편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화교촌(플라자호텔 자리)과 남창동·회현동의 판잣집과 창녀촌을 비췄다
서울 도심의 슬럼가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방송을 본 재미교포 10만명이 난리가 났다
부끄러워 못살겠다는 탄원서가 쏟아졌다
박 대통령은 이때 도심 재개발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화교 집단촌인 소공동에서 도심 재개발의 막이 올랐다
그 후 화교들에게는 화교회관 등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조성하겠다는 거짓말로 그들의 토지를 모두 강제수용한것은 한국화약(한화) 창업주 김종희였다
(감정가 평당 30만원 정도의 땅을 107만원을 주고 몽땅 사들였다는 주장도 있다)
화교가 서울 한복판 차이나타운에서 내쫓기는 세계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8년 그 자리를 병풍처럼 가리는 플라자호텔이 준공됐다
서울 도심 재개발사업 제1호였다
오늘날 한화금융프라자 등 북창동 한화타운 형성의 기반이 됐다
결국 이런 거짓말에 사과를 표하기 위해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이 대만을 방문하기까지 했던 일화가 있다
대관정 터 (서울시 중구 소공로 103, 소공동 112-9)
구한말 대한제국의 영빈관으로 사용됐던 대관정(大觀亭)이 있던 곳이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반포 이듬해인 1898년, 덕수궁 인근 한 서양식 주택을 매입해 황실 영빈관으로 사용했다
(원래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미국선교회가 유럽식 숙박 구조로 개조한 건물이었다)
대관정을 사용한 최초의 국빈은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친왕이었다
1899년 6월 8일부터 19일까지 일정으로 방문했던 그는 독일 황제의 친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함대의 사령관이기도 했던 매우 중요한 군사지도자였다
고종은 대훈위(大勳位)에 서훈하고 대한제국의 최고 등급 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특별히 수여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독일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외교적 입지를 다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904년 4월 3일 러일전쟁을 구실로 하여 황실의 영빈관인 대관정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사령관의 관저로 사용하다가 1904년 8월 28일 주차군사령부는 필동으로 주둔지를 이전하고 관저만 남았다가 용산에 대규모 주둔지를 건설하면서 1911년 12월 20일 관저 역시 용산의 신관저로 이전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당시 이토 히로부미 특사와 하세가와가 이곳에 머물며 을사늑약을 지휘·조종한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 대관정은 1914년 시종무관(侍從武官) 등 총독부 관계인의 숙박이나 1916년 조선신문사 낙성연(落成宴), 1922년 4월 9일 곡물공진회 개최 등 여러 장소로 쓰이다가 1923년 일본 재벌인 미쓰이(三井) 합명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대관정 부지는 미쓰이가 경성부의 요청에 따라 1926년 2월 20일 원가에 매도한 후 1927년 5월 24일부터 일제의 경성부립 도서관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 서울시립남대문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도서관이 1965년 남산으로 이전한 뒤 1966년 6월 1일부터 1972년 9월 28일까지 민주공화당(당시 집권세력)의 당사로 사용되었다
1972년 민주공화국이 남산 기슭으로 이전한 뒤에 1983년 민간(삼환기업)에 매각되었으며 이후 건물은 철거되고 터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백화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22년 현재는 부영호텔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다
송현궁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9, 남대문로 3가 110)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의 소생인 정원군(定遠君, 추존왕 원종元宗)과 그의 아들 인조의 잠저(潛邸 :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이곳 언덕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궁(松峴宮)’이라 불렀으며, 1755년(영조 31) 저경궁(儲慶宮)으로 개칭하고, 인빈김씨의 사당을 설치하여 신위를 봉안하였다
저경궁은 이후 1908년(융희 2년) 인빈김씨의 신위를 육상궁(育祥宮 :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으로 옮긴 뒤에도 건물이 존재하였으나, 1927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건립되면서 철거되었다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192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에비슨 박사가 치과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치과과장인 니기라에게 치과강습소 설립 청원서(1921년 12월 26일)를 내게 하고 이를 허가(1922년 4월 1일)했다
1922년 4월 15일에는 이미 내정되어 모집된 60명의 신입생(조선인 40명, 일본인 20명)으로 3년제 경성치과의학교를 개교했다
설립 초기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수업을 진행했으나, 1928년에는 소공동 관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독립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해방 이후 대학기관인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여기서 의과대학과 치과대학이 나뉘는 서울대학교의 전통이 기인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의사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면허번호 1번) 함석태이다
일제 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최금봉은 1931년 3월 2일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면허번호 295번)하여 대한민국 최초 여성 치과 의사가 되었다
해방 후 다시 새로운 면허번호 311번을 부여받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에 대한 이견도 있다
- 강흥숙
졸업 후 1925년 8월 25일 중국 상해 호강대학 재학 중인 이강희(독립운동가)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산에서 개업하였다
- 김름이
김름이의 행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만주에서 개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 박봉남
강흥숙과 김름이보다 1년 늦게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편 고준구도 치과 의사이다
대한민국 최초 부부 치과의사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