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길버트 그레이프의 마음은 초조하다. 답답하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지적장애자인 남동생, 남편의 자살이후 폭식을 거듭하다 마치 고래와 같이 살이 쪄버린 엄마, 화장하기 바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 사춘기 여동생,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도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큰누나, 일년에 집에 한번밖에 돌아오지 않는 형과 누나. 길버트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작은 마을에서 필사적으로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있다. 동년배인 친구들은 오래전에 마을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데, 길버트는 그것을 할 수가 없다. 도망치는 것 조차.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알아. 길버트는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와 이제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런 때 한명의 소녀가 나타난다. 소녀의 이름은 베키. 그는 베키의 아름다움에 끌리고 있지만, 베키는 외모뿐만 아니라 남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길버트의 눈에 담긴 증오를 본다.
베키가 아니였다면, 길버트는 어느 순간 가족을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꼬박 하루동안 차가운 욕조속에 들어가 있었던 기억으로 물을 피하던 어니 그레이프의 더러워진 몸을, 베키가 씻게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길버트가의 묵은 앙금들도 서서히 씻기워져 내려간다. 소원했던 가족의 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길버트의 눈물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종반부의 진행은 가슴이 뭉클하다. 슬픔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공존하는 안도감. 다만 거기까지 오는동안, 어쩐지 지루한 청년 길버트에게 지쳐버릴지도 모르겠다. 길버트와 같은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의외로 꽤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동명의 영화의 원작소설. 영화에서는 조니 뎁이 길버트 그레이프 역할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적장애자인 동생 어니 그레이프 역할을 연기했다. 원작자인 피터 헤지스가 각본을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수많은 영화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가장 좋아하는 작품중에 하나. 원작소설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이렇게 읽게 되고 보니 이 영화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던가를 잘 알수 있었다. 다만 영화는 원작을 조금 샤프하게 가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고 해도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소설과 영화를 완전히 동일하게 표현할수는 없을테니까. 그래서, 소설에는 영화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깊이가 있다. 특히 개개인의 인물을 더 잘 이해하고 그 생각을 더 깊숙히까지 들여다볼수 있는건 역시 소설쪽이다. 소설을 읽고난 지금 다시 영화를 꺼내 본다면, 그때는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던 장면 하나 하나가 담고 있는 감정들을 남김없이 발견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족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고뇌하는 길버트의 초조함이나 슬픔은 어떤 소설보다도 가까이 와 닿았다. 영화도 좋은 작품이지만, 이런 훌륭한 원작이 있기 때문에 명작이 나올수 있었던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남동생의 부모역할을 해야하는,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없는 남매의 고뇌가 잘 그려져 있다. 다만, 그들의 입장이나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고뇌룰 읽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족쇄가 되어버린 가족과 자기 자신의 장래. 좀 더 자유롭고 좋았어야 할 하루하루. 그래도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작가의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이들과 비교하면, 지적 장애자나 그 가족에 대해서 이 나라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편견과 차별로 가득 차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너무 슬프지만.
첫댓글 음.. 옛날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겪어봤을 법한 내용이네요..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만.. 마음속은 항상 자유를 위해 떠나고 싶어하던 예전의 모습들.. 이런 책들 보면 난 행복한거구나 란걸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