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윤석열대통령 G-7정상회담 참석 한미일 회담 등 8개국 정상들과 회담
2022년 한국 윤석열 대통령 미국 바이든 대통령 정상회담
2021년 성추행 피해 공군 여부사관 자살
2017년 7인조 그룹 방탄소년단(BTS) ‘2017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톱 소셜 아티스트’상 수상, 빌보드 연말결산 올해의 아티스트 10위 오름
2015년 서울대에 450억원 기부…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명예이사장 별세
정석규(86·鄭晳圭) 신양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은 1952년 서울 공대를 졸업한 뒤 1967년 태성고무화학을 설립했다. 1989년에는 신양문화재단을 만들어 활발한 기부 활동과 장학사업을 펼쳐왔다.
모교 서울대에 1987년 1000만원 기부를 시작으로 신양학술정보관 3개 동을 짓는 등 총 450억원을 기부했다. 서울대 학생들은 그를 '신양 할아버지'라고 불러왔다.
2005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 2008년 '한국공학한림원 대상'을 받았다.
2011년 아이슬란드 남동부 그림스보튼 화산 폭발,
2010년 일본, 세계 최초 금성 탐사 위성 발사
2010년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관에서 역대 최고액인 5억 유로 상당의 미술품 도난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모여있는 프랑스 파리의 현대 미술관에 걸려있던 피카소와 마티스의 명작 다섯 점이하룻 밤 사이 사라졌다 도난당한 미술품 가치를 시가로 따지면 5억 유로, 우리돈으로 7천5백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번에 도난당한 작품은 피카소의 '비둘기와 완두콩’을 비롯해, 마티스의 '전원’ 등 5점입니다. 그림 도난사건 가운데 역대 최고가인데 범인은 복면을 쓰고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림을 훔진 뒤 액자는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오은선, 히말라야 고봉 11개째 등정
2009년 5월 21일 국내 대표적 여성 산악인 오은선(43.블랙야크)씨가 히말라야 고봉 14개 중 11개를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오 씨는 이날 오후 1시30분(현지시간) 무산소로 히말라야 8천m급 고봉 14좌 중 7번째로 높은 해발 8천167m 높이의 다울라기리 정상을 밟았다. 오 씨는 7천300m 높이의 제3캠프에서 새벽 1시30분에 출발해 12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오 대장이 11개봉 등정에 성공함에 따라 세계 여성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14좌 완등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현재 호주의 겔린데 칼텐브루너(39)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36)이 12개 봉을 등정해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오 대장이 비록 경쟁자들에 비해 1개봉이 뒤처진 상태이지만 등반 시기 등을 고려하면 오 대장이 유리한 고지에 올라와 있다.
히말라야 14좌는 1986년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처음으로 등정한 뒤 국내에선 박영석·엄홍길·한왕용씨가 차례로 완등했지만 여성 산악인은 아직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
200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첫 존엄사 인정 판결
식물인간상태의 김모(77세) 할머니 가족이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장치의 제거 등 청구소송’에서 인공호흡기 떼라고 판결한 원심을 다수의견으로 확정 했다
2004년 보라매병원사건에서 경제적 이유를 내세운 가족의 요구에 따라 치료를 중단한 의료진에 살인방조죄를 적용했던 것과 다른 판결이다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죽음에 직면한 환자가 품위있는 죽음을 맞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유지조치를 중지하는 것이다
2007년 민노당 노회찬 의원 불구속 기소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2007년 5월 21일 ‘안기부 X파일’사건 때 ‘삼성에서 떡값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을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노 의원은 2005년 8월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안기부 X파일’을 근거로 “1997년 검찰 고위 간부들이 삼성에서 떡값을 받았다”며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낸 A변호사 등 전·현직 검찰간부 6~7명의 실명을 인쇄물과 이메일로 기자들에게 배포하고,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게시한 혐의다.
국회의원이 의정 활동 차원에서 배포한 자료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기소 당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2005년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사망
정세영(77)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2005년 5월 21일 별세했다.
정세영 명예회장은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후, 1967년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1987년 현대그룹 및 현대자동차 회장을 거쳐 99년부터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재직했다. 또 1977년 한·영 경제협력위원장, 1998년부터 한미협회 회장을 맡았다.고인은 현대차 초대 사장 재직시절 우리 기술로 만든 첫 국산차 ‘포니’ 개발을 주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포니 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고인은 2000년 폐암 치료를 받은 후 1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의사의 진단을 받는 등 건강 관리에 철저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폐렴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1999년부터 아들 정몽규 회장과 함께 현대산업개발을 경영해 왔고, 최근 자신의 현대산업개발 지분 전량을 정몽규 회장 등 가족들에게 매각,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했다.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자(69) 여사와 외아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딸 숙영씨와 유경씨, 큰사위 노경수 서울대 교수, 둘째사위 김종엽씨, 며느리 김나영씨 등이 있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 첫 무죄 판결
종교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병역기피자 3명에 대해 법원이 2004년 5월 21일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 판사는 이날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병역소집을 거부한 혐의로 기소된 오모씨에 대해 “입영 또는 소집을 거부하는 행위가 오직 양심상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보호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경우에는 병역법상 징집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같은 종교 신자로 양심적 병역기피를 주장하는 조모씨에 대해서는 “소명이 충분하지 못하다”며 법정 최고형인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병무청은 이날 ‘양심적 병역기피 무죄 선고에 관한 병무청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보환경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다면 병역의무 이행의 기본질서가 와해돼 국가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며 “종교적 신념에 의한 대체복무를 인정할 경우 종교상 특혜시비가 있을 수 있는 만큼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특정 종교인들에 대한 병역상 혜택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2004년 한국계 첼리스트 구세라씨 줄리아드 석사 2년 연속 수석, 윌리엄 슈만상 수상
2004년 ‘부부의 날’ 제정
부부의 날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부문화를 만들기 위한 기념일로, 1995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건강한 부부와 행복한 가정은 밝고 희망찬 사회를 만드는 디딤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관련 행사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2001년 4월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고, 6년이 지난 2007년 5월 2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부부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5월 21일로 정해진 까닭은 가정의 달 5월에 두 사람(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2004년 백혈병 극복한 이호, 산악인 허영호과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등정에 성공
2000년 대한극장 철거
좌석수 1924석이란 엄청난 크기로 대형극장 시대를 주도했던 대한극장이 2000년 5월 21일 ‘징기스칸’ 상영을 마지막으로 멀티플렉스(상영관 6개 이상에 각종 편의-오락시설을 갖춘 극장) 변신을 위해 철거에 들어갔다.
1956년 건립된 대한극장은 1개 극장에서 몇달씩 롱런하며 관객몰이를 해온 단일 개봉관 시대 대형극장의 상징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복합관이 들어서고 시설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한극장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대한극장의 철거로 이젠 국내에서 온전히 70mm 필름 영화를 감상할 기회도 사라지게됐다. 대한극장은 그동안 ‘닥터 지바고’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대작들을 70mm로 상영해왔다.
1999년 방일영 조선일보사 전 고문, 금관문화장 수여
1998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1998년 5월 21일 짤막한 사임성명 발표로 32년간에 걸친 기나긴 철권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사임을 발표하는 장면은 인도네시아 국내는 물론 CNN에 의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권좌에서 쫓겨나는 늙은 독재자의 회한과 최후의 변을 전세계인들이 지켜본 것이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사임성명에서 77세의 늙고 고집스러운 독재자는 실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2억 국민 위에 군림한 ‘전제군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어떠한 실수들과 부족한 점 및 실패들이 있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었다.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사임성명을 발표한 수하르토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인지 ‘사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잘 쓰지 않는 ‘용퇴’라는 표현을 썼다. 사임의 변 또한 완곡하기만 했다. 수하르토의 사임후 B J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96년 탄자니아 여객선, 빅토리아호에서 전복 5백여명 사망
1991년 리지브 간디 안도총리 폭탄테러로 사망
라지브 간디 전 인도총리가 1991년 5월 21일 남부의 타밀 나두주에서 지방유세 도중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온 네루 일가는 가족 중 3명을 비명횡사로 잃은 비운의 가문이 됐다. 라지브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었다. 라지브 간디의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 전 총리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동생 산자이 간디 역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네루 전 총리의 외동딸이었던 인디라 간디는 당초 두아들 중 권력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차남 산자이 간디를 후계자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산자이가 뜻밖의 죽음을 당하자 평소 정치에 무관심했던 장남 라지브 간디가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인도는 라지브 간디의 암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직전까지 몰려 국정의 방향타를 잃고 혼란을 거듭했다.
1989년 89로터리클럽 세계대회 서울서 개막
89로터리클럽 세계대회가 1989년 5월 21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열렸다. 로터리세계대회는 1910년부터 1년에 한번씩 각국을 돌며 개최되는 연례행사로 이번 서울대회는 로터리 사상 최대규모였다. 1백20개국으로부터 4만2천여명이 참가했다. 개막식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가졌으나 대회참가자가 많아 두 번에 나눠 거행했다.
봉사를 모든 산업활동의 기초로 삼고있는 로터리가 창립된 것은 1905년. 미국의 변호사 폴 해리스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선의와 우정`이란 신념아래 친구인 석탄광업자 실베스터 실, 광산기사 가스로아, 양복점 주인 쇼래 등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각 회원의 사무실을 순번으로 돌아가며 회합을 갖기 시작한 것이 로터리의 시원이다. 한국 로터리는 지난 1973년 `로터리 장학재단`을 설립해 무의촌 진료, 장애자 봉사활동 등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펼쳐왔다
1984년 앰네스티 인터내셔날 엘살바도르에서 5년간 4만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1984년 재경대학 총장, 학원사태관련 공동성명 발표
1982년 전두환 대통령 개각 단행
1981년 새세대육영회 창립(회장 이순자)
1980년 국무총리서리에 박충훈 임명
1977년 미국 카터 대통령 철군계획 반대한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 해임
1975년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청와대에서 회담
1974년 산야 태국 내각 총사퇴
1967년 김두한 후보 선거연설중 반공법 위반혐의 구속
1964년 무장군인 법원 난입사건 발생
1964년 5월 21일 새벽 공수단 제1특전단 소속 최문영 대령이 지휘하는 장병 8명과 공수단 출신 민간인 2명이 완전무장하고 법원에 난입, 소동을 벌였다.
이들은 20일 낮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벌인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에 참가한 주모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많이 기각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치근 담당검사와 양헌판사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법원청사에 난입했으나 양 판사가 퇴근했다는 말을 듣고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양판사집까지 찾아가 위세를 과시, 공무중인 판사를 협박했다.
또 6월 6일 새벽 최대령등 제1공수특전단 소속장교8명이 술을 마신후 순찰도중 동아일보사에 침입해 숙직중인 김광희 기자에게 법원난입 사건으로 구속당한 황길수 대위 등에 대해 인신공격성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약45분간 폭언을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7월 10일 제6군관구계엄보통군법회의는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판결공판을 열고 주모자 최문영 피고인에게 징역 5년, 관련자 4명에게는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장교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하사관등 1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1963년 국제 공산당 해산
1961년 혁명정부 용공분자 2천, 깡패 4,200여명 검거 발표
1961년 미국 앨러배마주 인종차별반대 폭동
1960년 대한교육노조연합회 결성
1960년 괌도에서 2차대전 중 살아남은 일본인 발견
1959년 내각책임제개헌안 공고
1958년 탈모 비누, 군납사건 발생
1957년 인도서 아시아 최대의 우라늄광 발견
1957년 니카라과 소모사대통령 피살
1956년 미국 수폭투하 실험 성공. 비키니섬서
1953년 화천 수력발전소 복구(81,000kw)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열렸지만 소련의 무리한 요구가 회의를 또 결렬시켰다. 소련이 공위 참가를 위해 등록한 남한측 425개 단체를 118개로 줄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회원 1만명 이하의 군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반탁운동을 `의사표현의 자유`로 간주하며 소련의 제의를 거부했다.
미소공위가 계속해서 공전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1.한반도 문제를 미영소중 4국회의에서 논의할 것 2.남북한에 각각 입법기관을 설치할 것 3.남북 입법기관 대표들이 논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남북분열을 조장하는 제안이라며 반대해 결국 2차 공위도 10월 18일 5개월 만에 결렬됐다.
1943년 뉴질랜드 한국 승인
1934년 이라크의 키르쿠크 유전에서 팔레스타인 하이파항까지의 석유파이프라인 완성
1923년 평양시내 전차 개통
1907년 중국혁명동맹회 광동성 황강봉기 실패
1906년 알프스산맥을 뚫는 싱플로터널 개통식(이탈리아.스위스 국왕 참석)
1904년 프랑스 정교분리문제로 대교황청관계 악화 바티칸대사 소환
1904년 FIFA(국제축구연맹) 창립
1902년 한양-개성 전화 개통
1902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1원권을 발행 한국에 유통시킴
1871년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 시작
1871년 5월21일, 이른바 `피의 일주일`로 불리는 대살육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다. 프로이센의 꼭두각시 정부인 국민회의가 파리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투입한 것이다. 1년 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를 대신해 국민회의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파리 만은 그들의 통치권 밖에 있었다.
파리는 자치구를 뜻하는 코뮌을 발족시켜 프로이센에 굴복한 정부를 향해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었다. 패배에 따른 좌절감도 분노를 증폭시켰다. 노동자ㆍ학자ㆍ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코뮌의원은 친(親)프로이센ㆍ부르주아 정부에 철저 항전을 선언했다. 혁신적인 정책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한편에서는 파리 대주교를 살해하는 등 보수세력에 대한 과격한 투쟁도 서슴지 않아 곳곳에 유혈이 낭자했다. 적기(赤旗)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관망하던 국민회의 군대가 마침내 파리에 투입됐다. 피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시민들은 튈르리궁ㆍ오르세궁 등을 불태우며 죽음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3만여명이 학살돼 세느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주일 만에 진압된 파리코뮌을 놓고 좌파와 우파는 해석을 달리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며 추켜세운 반면 우파들은 `난동의 온상`이라며 비난했다. 이후 파리는 1977년까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시장을 두지 않았다.
1871년 신미양요
1860년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에인트호벤 출생
심장의 전기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로 1924년 노벨 의학상 수상
1851년 프랑스의 정치가 부르주아 출생
국제연맹 결성 추진으로 1920년 노벨 평화상 수상
1844년 프랑스 화가 루소 출생
1762년 사도세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
조선조 19대 임금 숙종은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로부터 균을,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로부터 금을 얻었다. 숙종 사후 균은 경종이 됐고 금은 영조가 됐다. 그러나 세자인 균이 병약한 탓에 조정은 경종과 영조의 즉위를 둘러싸고 당파간의 죽기살기식 암투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영조를 지지했다.
경종 즉위 후 승자가 된 소론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등을 일으켜 수십·수백의 노론파를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경종이 재위 5년 만에 병사하자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면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썼다. 그러나 고질화된 붕당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만무했다.
영조의 유일한 혈육인 세자 선을 둘러싸고 당쟁이 재연된 것이다. 영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자 세자를 등에 업으려는 소론·남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노론이 다시 맞붙었다. 한때는 총명했던 세자도 잦은 무고(誣告)와 되풀이되는 영조의 질책으로 정신병적 성향을 보이며 잇단 비행을 저지른다. 영조도 편집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영조는 못마땅한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1762년 5월 13일(음력) 뒤주 속에 가둔다. 초여름 8일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세자는 뒤주에 갇혀 절망과 분노를 토해내며 몸부림치다 숨을 거둔다. 5월 21일이었다. 사도(思悼)는 훗날 이를 후회하고 애도한다는 뜻으로 영조가 내린 시호이다.
1506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