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도 6,8-15; 요한 6,22-29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2024.4.15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질문이라는 행동은 사유 능력과 언어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에다 세상과 그 돌아가는 사정 즉, 사물(事物)과 사안(事案)을 관찰하고 사색할 수 있는 비판 능력이 있어야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자기 자신까지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으면, 자문자답(自問自答)도 가능합니다. 그 대표적인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 또는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유 능력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으면, 하느님과 관련된 질문도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솟구쳐서 던지는 질문을 유다인 군중으로부터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이제껏 유다인들은 그분께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자신들의 신체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종교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온갖 요구와 질문을 해댔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문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좁았던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시야를 한껏 넓혀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셨고,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고자 호수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좇아서 군중은 배들에 나누어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까지 따라왔던 것인데, 이들의 속좁은 의중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하고 타이르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자기 자신을 바치는 참된 제사를 하느님께 직접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었던 전통적인 유다교 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전혀 새로운 형식과 방식으로 백성이 직접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교에서는 아브라함 이전에 인신공양 제사를 공공연히 자행하던 야만적인 우상종교의 지경을 겨우 벗어났다고 해도 사람 대신 동물을 불태우는 번제로 만족하고 있었으며, 이 제사에 바쳐진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음복(飮福)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격적으로 하느님과 소통한다는 일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하는 일로 구분하여 사회적 신분을 나누고 인간을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관습을 제도적으로 정당화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막눈 엘리트들이 제사와 율법 지식을 독점한 상태에서 보통 유다인들은 그저 속절없이 사두가이들이 정해 놓은 규칙대로 번제를 드리고 또 바리사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을 지키는 데 급급해서, 하느님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꽉 막혀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나온 이 거룩한 질문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유난히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 이래 수천 년 전부터 명색이 하느님을 믿어온 유다인들을 향해서 강조하신 것인데, 이는 그들의 믿음이 정통적이지 아님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선포하신 말씀을 시작으로, “하느님을 믿어라.”(마르 11,22) 하고 가르치셨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8) 하고 강조하셨는가 하면,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마르 11,24)이라고 장담하시며,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요한 14,12)이라고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신성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억지로 뒤집어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어온 백성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해 버린 이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음이 약하거나 흔들렸던 제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려고 동분서주 하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상하게 하지 못함, 빛남, 빠름, 사무침의 사기지은이 발휘되어야 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를 제대로 알아들은 제자가 스테파노 부제였습니다. 아직 초대교회의 신자들도 숨죽여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었던 그 무렵에 성령을 받은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곧이곧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가르치며 교회 바깥의 유다인들에게도 서슴없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기성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나서야 가까스로 사도직에 나섰던 데 반해서 해외 디아스포라 출신이었던 스테파노는 제자로서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지만 성령이 충만했던 덕분에 사도들보다 더 용감하게 하느님과 백성이 직접 소통하는 길을 열고자 하였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를 박해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못하고 여전히 고루한 유다교의 모습을 거듭 확인합니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왔다고 해도, 또한 율법을 아는 그 복잡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해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 통로가 꽉 막혀 버린 이 사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완고한 모습, 즉 진실함도 없고 개방성도 없이 아집과 기득권에 갇혀 있는 영혼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테파노 부제에게서 보듯이,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위대함은 영혼의 진리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영과 소통하는 사람의 혼은 누구나 위대한 가능성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일이 복음선포요 또한 교육인데, 이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 특히 신앙 교육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지식을 주입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자각이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도록 촉매 작용을 하면서 기다려주는 일입니다. 인격적인 존중과 배려는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물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증도 생겨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하는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에 의한 답변은 이때 해 주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모처럼 군중으로부터 받으신 거룩한 질문에 대해 하신 답변, 즉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요한 6,29)이란 예수님의 삶과 가치와 의미를 마치 빵 먹듯이 수용하여 하느님의 기운을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된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가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의 빵에 대해 가르치신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 기사의 선명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직접 소통해야 한다는 이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아나빔들이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 119,1. 화답송)
이스라엘 안에서 이름난 율법 교사였던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운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는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사도 6,3) 신자가 되어 부제로까지 뽑혔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식량을 공정하게 배급하는 일은 물론 교회 바깥의 군중을 향해서도 복음 말씀을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성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사두가이들과의 일전(一戰)도 불사하려는 선명한 노선(사도 6,13)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베드로와 그 동료 사도들은 유다교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등(사도 3,1) 마치 유다교의 신흥교파처럼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요한 2,21-22)이라던 예수님의 가르침 정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처신이었습니다.
결국 스테파노는 유다교 당국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괘씸죄에 걸려서 돌에 맞아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사도 6,13)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스테파노의 선명노선은 이후 사울에 의해서 계승되게 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와 가말리엘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동창생이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율법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스테파노에 반대하여 그를 처형하는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차마 직접 돌을 던지지만 않았을 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테파노를 따르던 신자들이 북쪽으로 흩어지자 그들을 체포하러 영장을 발부받을 정도로 박해자로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벼락을 맞고서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10여 년이 더 지난 후(갈라 2,1) 그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확신을 얻고 나서는 마치 죽은 스테파노가 부활한 것 같은 모습으로 초대교회의 향방을 아예 서쪽으로 바꾸어 장차 유럽과 서양을 그리스도교화시키게 되는 초대형 거사(巨事)를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서양을 지배하게 된 사조인 그리스의 합리적 사유에 익숙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선교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사도신경이고 그 안에 담겨진 열두 가지 신앙조문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라는 고백이지요. 그런데 이 열두 신앙조문 가운데에서 ‘육신 부활’ 교리처럼 오해를 많이 받는 교리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미 생전에 호수 위를 걸어 오신다든가(요한 6,19), 노를 젓지 않았는데도 배가 필요한 곳에 와 닿는다든가(요한 6,21), 무엇보다도 빵을 많게 한다든가(요한 6,1-15) 하는 기적과 이적들은 물질계를 지배하는 영계의 차원과 기운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징들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면서 보여주신 사기지은(四奇之恩)의 특징들이 이미 공생활 중에 여러 번 숱한 기적들로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시고,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가 하면 빵도 많게 하시고 물 위로도 걸으신 일들이 다 삼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의 존재가 그 이하에서 존재하는 물질들과 생명체들을 다스리는 빛나는 부활 은총이었습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스테파노들의 얼굴은 여전히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증언해 마지 않았던 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리더십은 죽음의 처형장에서조차 빛났던 스테파노의 얼굴처럼 역사 안에서도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의 역사에서도 이벽 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정씨 삼형제, 즉 약전 안드레아, 약종 아우구스티노, 약용 사도 요한 같은 선비들이 총기어린 지성과 예리한 종교적 감수성에 의해서 천주교 교리에 담긴 진리를 알아본 일이야말로 ‘빛남’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초대교회의 예언자요 교부들이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 최초의 평신도 신학자들이라 불러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들이 남겨 놓은 저술 속에는 민족역사 초창기부터 우리 민족이 믿어온 하느님 신앙이 녹아 있으며, 서양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 전통적 종교심성으로 해석한 토착화 신학이 담겨 있는데다가, 당시 후기 조선의 사회적 모순을 신앙 진리에 입각하여 해결하고자 혜안을 발휘한 선교적 지향이 들어있어서 빛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의 힘에서 나오는 이 ‘빛남’의 은총으로 가득한 우리 신앙 선조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음화 과업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