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함께 살게 되면서 가장 설레는 순간이 언제일까?
별다른 이유 없이 희망에 부풀어 오르고, 소박한 자신이 아름답고, 세상 금은보화보다 지금 이 순간이 좋은, 그런 때 말이다. 단언하는데, 세계 모든 여성들의 공통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이가 다이아 반지를 사 왔을 때? 그런 그이가 있다면 동거 살림에 무슨 얼어 죽을 다이아냐고 멱살을 잡자. 한 아름 꽃을 안겨다 줄 때? 물론 감동적이다. 하지만 꽃은 그리 다용도로 쓸 수 없다. 모 기호에 따라서 장미를 삶아 먹을 수도 있지만 짜다리 맛있을까?
가장 설레일 때, 그것은 바로,
‘살림살이를 살 때’다.
(이마트에서)
주인님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걸어가고 있다. 들뜸들뜸) 음, 밥그릇 두 개하고, 국그릇 두 개하고, 접시도 한두 장 있어야겠고, 숟가락 두 개하고, 젓가락 두 개하고, 방 바닥이 차가우니까 실내화도 두 개 사고, 쿠션도 있어 야 되나? 베개도 니가 안 갖고 왔으니까 하나 사야 되 겠제? 아니다, 아니다! 이왕 사는 거 커플 베개로 똑 같은 거 두 개 사자. 아, 냄비도 있어야 되는구나. 3중 바닥으로 사까? 그래, 그래, 가스버너도 있어야지. 샴 푸하고 린스, 치약, 칫솔, 비누하고⋯. 여기서 더 보탤 거 있나, 야옹⋯⋯?!!!
야옹이 (카트를 타고 달리며) 이야아아아아~~~!
주인님이 가계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쇼핑 카트를 타고 매장 내를 질주하는 넘은 주인님이 벗어던진 신발에 맞게 된다.
야옹이 (ㅠ.ㅠ;) 그렇다고 때릴 건 뭐고?
주인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바라, 밥그릇, 국그릇, 반 찬그릇, 숟가락, 젓가락⋯⋯.
야옹이 (갑자기 변신) 숟가락 젓가락은 내가 집에 가서 가져 올께. 쿠션, 이딴 건 필요 없고, 실내화는 괴정시장 가 면 한 켤레 천 원이다.
주인님 (미적미적)그, 그래도, 마트 실내화가 더 이뿌고⋯.
야옹이 실내화 이뿌다고 상 안 준다. 지금 우리가 가진 돈이 내가 한달 용돈으로 가지고 나온 돈 이십 만원 뿐 인 거 알제? 이번 달 지나모 용돈도 안 받기로 했으니까 그것도 없다. 겨울 방학 동안 내가 아르바이트 할 꺼 니까 그 때까지는 긴축재정이다. 비누 치약은 각자 집 에 가면 쌓여 있으니까, 주말에 들를 때마다 훔쳐 오 자. 그것까지 머라 히시겠나. 내 베개는 집에 가서 가 져올 꺼다.
주인님 (울먹울먹 ㅜ.ㅜ;) 커플 베개는?
야옹이 커플은 개뿔이 커플! 베개 쌍으로 맞추모 누가 구경 오나? 샴푸, 린스? 좋아, 이건 사자. 내는 비누 하나로 다 할 수 있지만 너에게 선물하는 셈친다.
주인님 (주루루 ㅠ.ㅠ;;) 그럼 이마트에는 와 왔는데?!
야옹이 대형 할인매장에선 가끔씩 국그릇, 밥그릇 깜짝 세일 을 하곤 한다. 오오,! 저걸 봐라! 내 예상이 맞았군. 밥그릇은 천 원, 국그릇은 천 오백원이다!
방금 전까지 마냥 좋아라 하며 쇼핑 카트를 타던 야옹이는 어느새 프로 주부로 변신해 있었다. 연애할 때는 용돈도 규모 있게 못 써서 쩔쩔매기만 하더니 이렇듯 한순간에 눈부시게 변신할 줄이야. 몇 분 후 그것은 ‘눈부시게’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 순간엔 참 감동적이었다. 이제야 남편 마음잡자고 애를 낳는 여자들이 이해가 갔다. 이해 ‘만’ 갔다는 얘기다. 현실에서 마누라가 우는데도 정신 못 차리는 남편은 사지를 테이프로 묶어놓고 정신 차릴 때까지 굶겨야 한다. --+
남자를 변화시키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책임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은 남자를 방황하게 할 수도, 강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진지한 생각은 곧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서 날려 사라졌다. 천 원짜리 밥그릇은 천 원짜리 답게 좀 허덥한 무늬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딱 두 개가 매우 안 허덥했다. 갑자기 ‘⋯천 오백 원이야.’ 라는 문장의 말미가 도플레 현상을 (맞나? 공부가 나를 싫어해서 원⋯!) 일으키며 멀어졌다.
⋯⋯ 덥석~!
이와 같은 의태어가 가장 적절하게 쓰이는 순간을 나는 목격했다. 붓으로 휘갈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그려진 밥그릇(정상적인 상황에선 이런 무늬 대따 시러한다. 덴당!)에서 두 개의 손이 동시에 저와 같은 의태어로 만났다.
야옹이는 생애 최초로 대형마트에서 ‘아줌마’를 만난 것이다. 나? 스스로 쨉도 안되는 인물이란 걸 자각하고 멀리서 구경만 했다. 남포동 오락실에서 야옹이가 <쌈바!>게임을 하며 막춤을 췄을 때처럼, 나는 최선을 다해 일행이 아닌 척했다.
야옹이와 아줌마는 잠시 그 그릇을 사이에 두고 무척 어색하게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둘 다 포기할 의사가 없음이 확실했다. 눈빛으로 만나는 두 사람의 영혼! 아름답기도 하지. 잠시 후 야옹이는 보무도 당당하게 포도송이 밥그릇 두 개를 들고 달려왔다.
야옹이 헤헤헤~! 아줌마가 포기해주셨다.
주인님 그래? 아줌마는 그게 별로 필요 없었나 보네?
야옹이 아니다, 불꽃이 튀었다!
주인님 그럼 어떻게 이깄노?
야옹이 울었다!
야옹이는 쇼핑카트에 소중하게 전리품을 담고 국그릇을 고르러 갔다. 아줌마와의 싸움에서 그릇 두개를 쟁취하고 돌아서는 당당한 장부의 기상을 나는 보았다. 이마트에서. 국그릇을 향해 돌아서기 전 야옹이는 내게 당부했다.
야옹이 잘 지켜!
주인님 월월~! (ㅠ.ㅠ)
어디서 다 주워들었는지 전문가적인 눈빛마저 번쩍이며 국그릇을 살펴보는 그에게 나는 어떤 쪼잔함 같은 걸 느꼈는지도 모른다. 연애할 땐 무시무시한 가격의 커피숍에서 파르페도 사주고, 무시무시한 가격의 빵집에서 케잌도 사주더니 이젠 밥그릇 하나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씨씨(CC)를 자처하며 온갖 닭살 짓으로 교내를 어지럽힐 때, 야옹이는 학생 신분에도 불구하고 날 데리고 ‘언덕 위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언덕위의 집’은 유명한 만큼 비싸기도 비싼 곳이었다. 나는 그런 곳에 한번도 못 가봤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야옹이는 수업을 제끼고 해운대로 날아갔다. 말이 날아간 거지 실제로 가는데 3시간은 걸렸다.
240번 버스를 타고 동아대학에서 해운대까지 가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우리가 출발한 시각은 퇴근시간의 러시아워였다. 240번 노선의 러시아워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시간엔 동아대학에서 5시에 출발해도 8시에 도착하고, 6시에 출발해도 8시에 도착하고, 7시에 출발하면 정상적으로 8시에 도착한다. 부산이라면 아직도 초가지붕 위에 갈매기만 날아다니는 줄로만 아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 부산 와보면 큰 코 다친다.
그렇게 세 시간 걸려서 해운대에 도착하고 한밤중에 달맞이 고개를 걸어서 올라갔다. 오오~! 유명한데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지금 돌이켜 보니 뭐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 거의 네 시간 걸려서 그 먼 데까지 가고 보니 본전 생각에 좀 과장해서 감동했던 것 같다. 웨이터가 안내하는 대로 쭈뼛쭈뼛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를 펴보니 세상에 커피가 4000원 팥빙수가 5000원 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메뉴판을 든 야옹이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야옹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내게 제일 싼 <커피>를 권했다.
야옹이 하하하! 커피숍에서는 그 집이 자랑하는 브랜드 커피 를 마시바야 된다.
주인님 그, 그래. 근데 니 돈 있나?
야옹이 하- 하- 하-! \(-o-)/이 정도쯤이야! 맘껏 시키고 리필도 해서 마시라.
주인님 알았다. 니는?
야옹이 ⋯⋯나도 커피! (ㅠ_ㅠ)
물론 그 담날부터 야옹이는 속이 아프다며 점심을 안 먹었다. 그랬던 야옹이가 이마트에서 남자의 갑빠를 버리다니⋯. 그의 변신은 어디까지인가. 하지만 야옹이가 울면서 가져온 그 밥그릇은 세상의 어느 그릇들 보다 예쁘고 참했다. 요기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도 담아 먹고, 보글보글 끓인 라면도 덜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쇼핑 카트에는 작은 빗자루, 행주, 이천 원짜리 세숫대야, 바가지, 비눗갑, 칫솔 두 개, 그릇 받침대, 매운 새우깡 한 개, 콜라 한 병, 빨래집게⋯, 같은 소소한 물건들로 조금씩 채워져 갔다. 물건이 하나하나 담길 때마다 나는 그 물건들을 야옹이와 나눠 쓸 행복에 들뜨고, 야옹이는 수첩을 꺼내서 가격을 적었다.
(야옹이의 수첩)
싯누렇고 비싼 세숫대야 - 2000원
시퍼렇고 역시 비싼 바가지 - 2000원
별 쓸모없어 보이는 비눗갑 - 1000원
천 원짜리를 사도 무방했을 4000원짜리 칫솔 - 8000원! 에에잇!
매운 새우깡 한 개 - 380원
단순히 예쁘다는 이유로 충동 구입한 빨래집게 - 2000원 (맘에 안 듬)
주인님의 적절한 소비행위를 향한 땡깡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메모다. 물론 수첩은 아름답게 폐기되었다. 가계부를 쓰는 게 뭐 나쁘냐며 야옹이는 발악을 했다.
야옹이 니는 계획성이 없다! 가계부를 쓰는 습관은 규모 있 는 살림살이의 첫걸음이다!
주인님 휴우!, 야옹아.
야옹이 왜애애!
주인님 앞으로 니 가계부에 관형사, 부사, 감탄사, 의성어, 의 태어, 등등을 모두 금지한다. (--+)
야옹이 쳇, 꿍얼꿍얼꿍얼!
주인님 (디스플레이 된 골프채를 뽑아들며) 맞을래⋯?
야옹이 (작게) 꿍얼꿍얼꿍얼꿍얼꿍얼꿍얼꿍얼꿍얼!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처음으로 구입해 본 그 물건들에게 자리를 찾아 주었다. 새로 산 그릇들은 씻어서 물기가 빠지도록 받침대에 걸쳐두고, 빨래비누랑 세숫비누는 두 칸짜리 비눗갑에 담아놓았다. 쓰레기통에 비닐 씌우는 것도 새로웠다. 집에 있을 땐 그렇게 하기 싫던 일이 쓰레기통 비우고 새 비닐 씌우는 일이었는데, 그게 무진장 즐거운 게 신기했다. 황량한 방 안에 놓인 이불 한 채, 책 몇 권, 야옹이가 주워 온 책상 하나. 따뜻한 전기장판 위로 기어들어가자 야옹이는 오늘이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다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콜라를 밥그릇에 담아 마시고 새우깡을 집어 먹으며 남은 돈을 계산하고서 공포에 질렸다.
야옹이 (이불 뒤집어쓰고 돈을 센다) 칠백, 팔백, 구백, 천⋯.
주인님 얼마 남았는데?
야옹이 ⋯⋯육만구천이백사십원!
주인님 하하하하! 정착금이 꼴랑 그거 남았다구? 아이~ 넝 담도.
야옹이 주인님, 돈 갖고 넝담하면 벼락 맞는다.
주인님 그걸로 한 달 살아야 되는데? 덩말? 덩말?
야옹이 밥하고 김치만 먹자!
주인님 쌀은 어딨는데? (ㅠ.ㅠ)
처음 그 집에 이불을 깔았을 때 둘이서 부비부비 딩굴딩굴 거리며 나누었던 대화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주인님 나는~ 아침마다 간지러운 햇살을 받으며 깨어나고 싶다~.
야옹이 내가 아침마다 프렌치토스트 구워주께〜.
주인님 후훗, 커퓌도 부탁한다. 아참, 티 테이블도 만들어 줘 야 댄다〜!
정말 닭 쌈 싸먹는 소리 아닌가?
티 테이블? 그걸 정확히 모에 쓰는 건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간지러운 아침 햇살? 그 방은 건물과 건물사이에 있는 반 지하다. 햇살은 개뿔이 햇살이냐⋯!
프렌치토스트, 커퓌? 뽀할할~~~!
그러나 하나씩 살림이 늘어가는 재미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우린 비눗갑 하나에도 수세미 하나에도 이름을 붙여 주었다.
비눗갑 - 분홍이
수세미 - 퍼렁둥이
주인님 많이 산 거 같은데 그래도 쫌 썰렁하네.
야옹이 인자, 차차 늘어갈 건데 뭐.
주인님 먹는데 드는 돈 빼고 저금 하면 되겠제.
야옹이 전자제품 같은 거는 작은 걸로 사자.
주인님 마이클럽 게시판에서 읽었는데, 동거가 이래서 좋다더 라. 결혼할 때 혼수 안 해도 된다고.
야옹이 그래, 나는 결혼할 때 이거 저거 몽땅 새 걸로 사는 거 이해가 안 된다. 둘이서 하나씩 장만해야 사는 재미도 있는 거 아니가. 집에서 사주는 집하고 혼수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런 거 별로다. 애만 일찍 안 낳으면 그래 어렵지 않을 꺼다. 젊을 때 고생 해 바야지.
주인님 니, 아르바이트는 뭐 할 건데?
야옹이 아까 오다 보니까 이 앞에 신문지국에서 배달원 구하 더라.
주인님 오토바이 탈 줄 아나?
야옹이 타모 되지 뭐. 설마 새벽에 면허증 검사 하겠나.
주인님 하이바(헬멧)는 꼭 써야 된다.
야옹이 와, 니 두고 죽을까 바?
주인님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