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엘살바도르 축구장 압사사고 발생 12명 사망
2021년 방미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대통령 정상회담
2021년 북한화물선 동해상에서 침몰
5500톤급 북한 화물선 청봉(CHONG BONG)호가 이날 오후 2시30분 침몰했다.
일본 해상보안청 제8관구 해상보안본부는 21일 오후 11시쯤 청봉호에서 '화물 창고가 침수하고 있다'며 구조 요청이 왔었다고 밝혔다. 청봉호에 타고 있던 선원 21명은 이후 배에 싣고 있던 구명정으로 탈출해 인근을 지나던 북한 유조선에 의해 구조됐다.
청봉호는 북한의 한 항구에서 자국의 또 다른 항구로 철 약 6500톤을 운반 중이었다
2020년 엔진 고장 파키스탄기 4번 착륙시도 끝 추락.."전원 사망“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의 주거지역에 99명을 태운 파키스탄국제항공(PIA) 여객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99명 중 2명이 생존하고 97명이 사망하였다 파키스탄 북동부 라호르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한 이 여객기는 오후 2시45분께 남부 카라치 진나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착륙을 준비하던 조종사가 "기술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메이데이' 조난 신호를 보냈고, 2개 활주로 모두 착륙 준비가 돼 있다는 답신을 들었다.
조종사는 착륙 전 항공교통관제센터에 엔진 하나가 고장났다고 보고했다.
일부 목격자들은 사고기가 세 차례 착륙 시도를 했지만 연이어 실패하고, 네 번째 시도를 하다 추락했다고 보고 있다.
2018년 한국 요리계 대모' 하숙정씨 별세
2017년 아리아나 그란데 공연 중 영국 맨체스터 공연장 자살폭탄테러 22명 사망
2014년 북한 연평도 우리 함정 인근에 2발 포격
북한군이 22일 오후 연평도 근해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 중이던 우리 해군 유도탄 고속함 인근에 2발의 포격을 가했다. 이에 우리 해군 함정은 북한군의 포격 직후 곧바로 5발의 함포를 NLL 이북 해상에 있던 경비정 인근으로 발사했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발사한 포는 우리 해군 함정으로부터 150여m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며 "우리 함정이 발사한 포탄도 북한 경비정 인근 150여m 해상에 낙하했다"고 설명했다. 군은 오후 6시20분 부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을 복귀토록 했고 주민들도 긴급 대피토록 하는 등 안전조치를 했다 북한군이 포격을 가했을 때 NLL 남쪽에선 우리 어선 20여척, NLL 북쪽에선 중국 어선 20여척이 부근 수역에서 조업 중이었다. 합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군 전투기를 발진시켰고 해군 함정도 대기토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 시장에서 차량 폭발 31명 사망 94명 부상
2011년 미국에 토네이도 연쇄 발생 500여명 목숨 잃음
2011년 김학원 前 자민련 대표 별세
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학원(65)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22일 오후 폐혈증으로 별세했다.
충남 청양 출신인 김 전 의원은 공주사대부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사로 근무했다. 1994년 민자당 서울 성동을(乙)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입문, 1996년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 조세형 부총재를 꺾고 당선됐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의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을 한 인연으로 이 의원과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1998년 김종필 전 총재의 권유로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그는 김 전 총재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부여에서 16·17대 때 내리 당선됐다. 자민련에서 대변인, 원내총무, 당 대표 등을 지냈다.
자민련이 한나라당과 합당한 이듬해인 2007년 친박계인 강창희 전 의원의 사퇴로 빈자리가 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조 정리해고 반대파업 시작 2413일 흐른 2015.12.30. 노사협상 타결
2009년 폐암 투병 탤런트 여운계씨 별세
여운계씨는 KBS 2TV 드라마 ‘장화홍련’ 첫 방송을 앞둔 지난달 23일 갑작스레 촬영을 중단하면서 폐암 투병 사실이 알려졌다. 여씨는 이후 인천성모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아왔다.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여씨는 대학시절 연극활동을 하며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고, 1962년 TBC 탤런트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개성있는 외모로 ‘별명붙은 여자’(1969) ‘방자와 향단이’(1972) 등에 출연했고,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선 주로 어머니 역을 맡았다. 여씨는 드라마 ‘아씨’(1972) ‘토지’(1986) ‘사랑이 뭐길래’(1991) ‘대장금’(2003) 등에서 탄탄한 연기로 극을 받쳤다. 특히 할머니 연기자들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마파도’(2005) 이후에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듯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연기는 내 운명이었다”고 말해 온 그는 2007년 신장암 진단 후에도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 촬영을 계속했다. 고인과 절친했던 동료 배우 전원주씨는 “매니저도 없었던 고인은 몸이 아파 힘든데도 새벽에 손수 운전을 해 강화도 촬영장까지 오갈 만큼 연기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고 말했다.
2007년 정부, 부처 브리핑룸 3곳으로 통폐합 확정
정부는 2007년 5월 22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각 부처의 브리핑룸을 통폐합하고 기자들의 부처 취재를 제한하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 을 확정했다.
이 방안은 현재 각 부처에 있는 37개 브리핑룸·기사송고실을 중앙청사, 과천청사, 대전청사 등 3곳으로 통폐합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다만 업무 특수성과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 청와대, 국방부, 금감위 브리핑룸·기사송고실은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본청과 지방청별로 쓰고 있는 검찰과 경찰 브리핑룸도 각각 하나로 통폐합하고, 서울시내 8개 경찰서 기자실은 없애기로 했다.
이에 따라 중앙청사는 청사 인근에 있는 외교부 건물에 합동 브리핑센터를 설치해 총리실, 외교·교육·통일·행자부 등 16개 기관이 이용하고, 과천청사 브리핑센터는 재경·보건복지·예산처 등 10개 기관이 이용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와 관련, 기자들의 공무원 사무실 ‘무단 출입’ 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등록 기자에게 발급한 전자출입증 소지자에게만 브리핑룸 출입을 허가하고, 이 전자출입증으로는 청사나 각 부처 사무실 출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밝혀, 기자들의 공무원 접촉 및 사무실 출입통제가 철저하게 실시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는 2003년 6월 발표한 ‘사무실 출입금지’ 방안보다 강하게 청사 출입을 막는 것이다.
2007년 김영삼 전 대통령, 국립 5·18 민주묘지 첫 참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5·18 단체들의 초청을 받아 국립 5·18 민주묘지를 처음으로 참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22일 오전 11시 40분쯤 김무성·정의화·이경재·김기현 의원과 오정소 전 국가보훈처장 등 20여 명과 함께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자유(自由), 정의(正義), 진실(眞實)’ 이라고 쓴 뒤 5·18단체 회원 100여 명의 환영을 받으며 추모탑 앞에서 헌화·분향하고 묘역 마당에 금목서 나무를 심었다. 김 전 대통령은 유족들과 악수를 나누며 위로했으며, 박경순 5·18묘지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고(故) 홍남순 변호사의 묘 등 묘역 곳곳을 둘러봤다. 이어 5·18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유영봉안소를 둘러본 뒤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며 “묘지 조성 때 토지 매입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전국에서 가장 잘 정비돼 있는 것 같아 기쁘다” 고 말했다.
참배를 마친 김 전 대통령은 광주 남구 프라도호텔에서 이홍길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재임 당시 5·18특별법 제정, 국립묘지 승격 등이 이뤄진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감사패를 받았다.
이날 묘역 주변에서는 남총련 학생 50여 명이 김 전 대통령의 참배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였으며, 광주전남진보연대 등은 감사패 증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2007년 박수근作 ‘빨래터’ 45억2천만원에 낙찰
5월 22일 경매에서 45억2천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 박수근 화백의 1950년대 후반 유화 ‘빨래터’(37×72㎝)가 2007년 5월 22일 열린 제106회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서울옥션)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불과 두 달 전 자신의 기록 25억원을 훌쩍 넘기며 한국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빨래터’는 강가에서 나란히 빨래하는 여인 6명을 캔버스에 담은 작품이다.
이날 33억원에 경매가 시작돼 2000만~5000만원씩 높여 호가되다가 가볍게 45억원을 넘기며 전화 응찰자에게 낙찰됐다.
이 작품을 내놓은 사람은 80대의 미국인으로 1950~1960년대에 군수품 사업을 하며 한국을 드나들다 박수근을 알게 됐던 그의 후원자였다고 서울옥션측이 밝혔고, 산 사람은 국내 개인 컬렉터로 알려졌다.
2006년 AP 계열사 평양지국 설립
AP통신 계열사로, 영상뉴스 매체인 APTN이 2006년 5월 22일 북한 평양에 상설 지국을 개설했다. 평양 지국 개설로 APTN은 서방 언론으로는 최초로 북한에 상주하면서 뉴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개설식에 참석한 APTN의 총책임자 나이젤 베이커는 “이번에 전면적인 지국 개설로 인해 APTN은 북한에서 정기적으로 취재하는 유일한 서방 뉴스 매체가 됐다” 고 말했다
2006년 이종욱 WHO사무총장 제네바서 별세
이종욱(李鍾郁·61)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2006년 5월 22일 오전 7시43분(현지시각)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이 총장은 지난 20일 오후 제네바 사무실에서 공식 집무 중 구토를 일으키며 쓰러져 뇌에 생긴 혈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총장은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WHO 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과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WHO 남태평양 한센병 퇴치팀장으로 WHO와 인연을 맺은 이 총장은 2003년 7월 한국인 최초로 WHO사무총장에 취임한 뒤 에이즈 퇴치와 조류독감 예방에 힘을 쏟아왔다.
2005년 일본 제11회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 대우조선 근로자 심재덕씨 우승
호흡기 이상으로 남보다 떨어지는 폐기능을 향상시켜 보려고 달리기에 입문한 30대 직장인 마라토너가 일본에서 열린 울트라마라톤대회에서 일본 최고의 울트라 마라토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심재덕(36·생산지원팀)씨는 22일 일본 나가노현에서 열린 ‘제11회 노베야마 고원 울트라마라톤 대회’ 100㎞ 부문에서 8시간4분34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심씨의 우승은 일본 대만 한국 등의 철각 1100여 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거둔 영예여서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베야마 고원 마라톤대회는 해발 1355m 지점을 출발, 해발 880m에서 1908m에 이르는 고원지대 100㎞를 시종일관 오르락내리락하며 달리는 경기. 특히 노베야마 대회는 100여 개의 일본 울트라마라톤 대회 가운데 가장 코스가 험난해 ‘죽음의 레이스’로 불리고 있다. ‘고수’들만이 참가하는 울트라대회지만 워낙 심한 경사 탓에 오르막에선 뛰기는커녕 걷는 마라토너들이 부지기수이고, 국내 일반 울트라마라톤대회의 완주율이 90% 정도인 데 비해 이 대회의 완주율은 평균 60% 수준에 불과하다
심씨는 92년 말 폐활량이 일반인의 69.5%에 불과하다는 기관지 확장증 진단에 따라 마라톤을 시작했다. “수술을 받느니 차라리 운동을 통해 극복해 보자”고 마음 먹었던 것. 그러나 처음엔 호흡이 힘들어 제대로 뛸 수가 없어 걷기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훈련량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심씨는 지금까지 54차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울트라마라톤대회는 이번에 네 번째 참가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지난해 충주마라톤대회에서 수립한 2시간30분15초.
2005년 북한 화물선 21년만에 남한에 입항
2004년 스페인 펠리페 왕자 앵커 출신 레티시아 오르티스와 결혼
2004년 세계보건기구(WHO) ‘비만과의 전쟁’ 선포
비만이 세계적 관심사가 되면서 급기야 세계보건기구(WHO)가 2004년 5월 22일 ‘비만과의 전쟁’ 을 선포했다. 이날 제네바에서 폐막된 세계보건기구 제57차 연차 총회에서 각국 보사부 장관들은 ‘다이어트·운동·건강에 대한 세계 전략’ 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WHO는 전 세계 성인 가운데 10억명 이상이 과체중이며, 이들 가운데 최소한 3억명이 비만이라고 밝혔다. 또한 오는 2020년이면 비전염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의 73%를, 치료 비용의 6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비전염성 질병에는 심장혈관계 질환, 당뇨, 암 등이 포함되며, 주로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과일과 채소를 적게 섭취하는 식습관, 과체중과 비만, 운동 부족, 담배 등에서 야기된다고 WHO는 밝혔다.
이에 따라 WHO는 이번 세계 전략에 입각해 각국 정부가 비만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이에 맞춰 효율적이고 통합된 농업 및 보건정책을 수립해 국민들에게 널리 교육할 것을 권고했다.
WHO의 ‘다이어트·운동·건강에 대한 세계 전략’ 은 제목 그대로 균형 잡힌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지방과 소금 및 설탕 섭취를 줄이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을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회원국 간 논란도 있었다. 설탕 생산국인 브라질은 설탕 관련 조항이 어떤 형태로든 무역 거래를 왜곡하는 조치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 이번 WHO 세계전략에 동의하기도 했다.
2004년 일본-북한 제2차 정상회담, 국교정상화 교섭재개에 합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2일 평양에서 가진 정상회담을 통해 납북 일본인의 자녀 등 8명 가운데 5명을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것에 합의, 고이즈미 총리가 이들과 함께 이날 밤 일본으로 돌아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오전 전용기를 타고 북한으로 출발해 오후 8시 56분 도쿄에 도착하는 ‘당일치기’ 정상회담을 가졌고, 일본인 피해자들의 자녀들을 데려오기 위한 별도의 비행기도 북한으로 갔다. 5명을 태운 비행기는 고이즈미 총리의 전용기보다 20여분 늦게 도착했다. 일본 TV들은 도착 모습을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이에 앞서 일본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오후 4시 30분쯤 평양의 한 호텔에서 북·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재개에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북 일 정상은 이날 오전 11시 2분쯤 평양 근교 대동강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해 90분간 납북피해자 가족의 일본 귀국 문제 등 양국간의 현안을 논의했다.
북한은 지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한국에 파견할 공작원 교육과 한국 침투 목적을 위해 일본인들을 납치했었으며, 지난 2002년에 열린 김정일·고이즈미의 첫 정상 회담 뒤 납치 피해자 다섯명을 일본으로 일시적으로 보냈었다. 이들은 이후 일본 정부의 설득에 의해 일본에 영구 귀국했고, 이에따라 일본 정부는 이들의 북한 체류 중 결혼해 의해 생긴 자녀의 일본 송환을 북한에 요구해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기자회견에서 양국이 북한측이 사망했다고 밝힌 납치 의혹자 10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재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 고이즈미 총리는 “핵포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국제 협력을 놓치지 말라”고 김 위원장에게 요구했고, 김 위원장은 “6자 회담을 활용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실험의 중단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고이즈미 총리는 말했다.
한편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일본이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에 쌀 25만t어치와 미화 10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구호품으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4년 야기라 유야, 제57회 칸 영화제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일본의 14세 ‘소년배우’ 야기라 유야(柳樂優弛)군이 2004년 5월 22일 제57회 칸 영화제에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평범한 학생에서 하루아침에 세계 최고 영화제의 수상 배우가 된 야기라군을 가리켜 일본 언론들은 ‘신데렐라 보이’라고 불렀다. 그는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내가 지금 속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나는 연기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이 영화도 정말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수상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홀어머니가 실종된 어느 가정에서 남겨진 4남매의 장남이 어린 동생들을 홀로 돌보는 스토리다. 장남 역을 맡은 야기라군은 연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칸에서 호평을 받았다.
놀랍게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야기라의 연기 데뷔작으로, 그는 2년 전 “TV에 나오면 멋지겠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연예 프로덕션을 노크했다가 연기자 오디션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눈에 띄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혔다.
2004년 ‘올드보이’ 제5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가 23일(현지시각) 막을 내린 제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Grand Prix)을 차지했다.
심사위원대상은 이 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 다음으로 큰 상으로, 한국 영화가 가장 권위있는 영화제인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은 것이 칸에서 한국 영화의 최고 수상 기록이었다.
황금종려상은 영화제 내내 최고 화제를 몰고다니며 찬사를 받은 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Fahrenheit 911)’에 돌아갔다.
임권택(취화선·칸 영화제) 이창동(오아시스·베니스) 김기덕(사마리아·베를린)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따내는 성과를 거뒀던 한국 영화는 이제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아냄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확고히 했다.
2003년 일본 스키어 에베레스트 최고령 등정
1998년 ‘비아그라’ 부작용 첫 공식 확인, 6명 사망
폭발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날개돋친 듯 팔리던 남성 발기불능 치료제 비아그라로 인한 사망자 발생 사실이 1998년 5월 22일 최초로 보고되면서 의학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비아그라 시판 후 복용자 사망사례가 보도된 것은 처음이다. 비아그라는 혈압강하 효과 때문에 원래 협심증 등 심장병 치료제로 개발됐다가 추후 발기불능 치료제로서의 효과가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이밖에도 비아그라가 일시적 시각저하나 두통 현기증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해왔다. 비아그라가 시판 될 당시부터 이 약은 혈압을 강하시키는 부작용이 있어 심장병 치료를 위해 혈압 강하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은 사용하지 말도록 의학전문가들이 권고해왔다. 이번에 보고된 사망자들도 심장질환과 관련된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고 화이자사는 발표했다.
1994년 사회운동가 장일순씨 별세
사회운동가 장일순 선생이 1994년 5월 22일 타계했다. 그의 생애는 `민주화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라는 말로 요약 될 수 있다. 6.25의 혼란중에 서울대 미학과를 중퇴하고 고향 원주로 돌아온 그는 안창호 선생이 대성학원을 설립한 뜻을 본받아 같은 이름의 학원을 원주에 세웠으나 5.16직후 혁신계로 몰려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60년대에는 오랫동안 농사꾼으로 지내다, 1970년대에는 고 지학순 주교와 손잡고 원주를 반 유신 운동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그는 원주 가톨릭 교구에 사회개발조직위원회를 발족, 가톨릭 농민회의 기초를 닦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거쳐 생명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한살림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사회 운동가로서 김지하 시인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타계하기 전까지 이현주 목사와 노자를 놓고 나눈 대담을 모아 노자이야기(전3권) 중 상-중권을 냈는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가 됐다. 그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1980년대 이후 6차례에 걸쳐 서예전을 개최, 수익금을 양심수와 민주인사를 돕기 위한 기금으로 희사하기도 했다.
1993년 현정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식 우승
1993년 5월 22일 밤 스웨덴 예테보리. 준결승서 루마니아의 강호 오틸리아 바데스쿠에 대역전승을 거둔 현정화 선수는 잔뜩 기세가 올라 있었다. 결승 상대는 대만의 첸징. 정신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현정화 특유의 전진속공이 살아나면서 반 박자 빠른 스매싱이 연속으로 테이블에 꽂혔다. 관중의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린 순간 스코어는 3대0. 첸징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올림픽보다 훨씬 어렵다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우승으로 현정화는 ‘세계선수권 그랜드슬램’ 을 이루며 탁구여왕에 등극했다.
1987년 양영자와 여자 복식에서 우승하며 기록사냥의 돛을 올린 현정화는 1989년 유남규와 혼합복식 정상에 올랐고 1991년엔 남북단일 코리아팀으로 출전, 만리장성을 넘어 단체전 왕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세계선수권에서 대망의 단식 우승을 차지해 극적이고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현정화의 우승으로 1973년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막강 한국 여자탁구의 신화는 정점에 올랐다.
1992년 재일교포 소설가 이양지 사망
1990년 남북예멘 통일 선포
1990년 루마니아 대통령선거에서 일리에스쿠 당선, 공산주의와 결별 선언
1990년 5월 22일 53년 만에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루마니아 대통령에 일리에스쿠가 당선됐다.
그는 동구 자유선거사상 최초로 공산당 전력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차우세스쿠 집권당시 정보선전담당 당서기를 지낸바 있는 일리에스쿠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혁명이후의 과도기를 어렵게 이끌어 온 경험을 인정받았고 또한 1989년12월 공산당 독재자 차우세스크가 타도된 직후 임시정부격인 구국위원회 의장을 역임하면서 그의 지도력을 국민들이 신뢰한 것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1996년 선거에서 패배, 권좌에서 물러난 후 1997년에는 1989년의 유혈반공민주화봉기 기간중 군에 발포를 요청한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1990년 한국-예멘, 국교수립
198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서울지하철 2호선중 잔여구간인 시청앞∼서울대입구간 19.2km가 1984년 5월 22일 개통, 운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바퀴 도는 순환선인 2호선의 48.8km 전구간이 개통돼 서울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완공된 2호선은 1978년 3월 착공, 6년2개월 만에 개통된 것으로 투입된 공사비만 8천7백80억원이었다. 이날 개통된 구간은 시청앞 충정로 아현 이대앞 신촌 홍대입구 합정 당산 영등포구청앞 문래 신도림 대림 구로공단 신대방 신림 봉천 등 16개 역으로 2호선 전체를 한바퀴 도는 데 83분이 소요됐다. 개통 당시 요금은 1백 10원에서 최고 1백 80원으로 현재 1구간 700원, 2구간 800원인 요금에 비하면 꽤 저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2호선은 영동, 잠실, 영등포, 신촌 등의 부도심권과 도심을 직결, 도시기능분산에 기여했으며 서울대, 연대, 이대, 서강대 등 서울시내 상당수 대학가 부근을 지남으로써 학생들에게 통학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1980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74년 남북적십자 제6차 실무회담 판문점에서 개최
1974년 아산만 방조제 완공
1972년 실론을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국호 개칭
1967년 브뤼셀 백화점서 대화재 280여명 사망
1967년 미국 흑인 작가 휴스 사망
1963년 아프리카 독립제국 수뇌회담 개최
1963년 한국-오스트리아, 국교수립
1960년 칠레 남부 발디비아(Valdivia) 규모 9.5 지진(관측 사상 최대)
1955년 주한미군, 원조고문단 설치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변영태 한국대표 14개 통한방안 제시
주요 내용=자유선거 불가능했던 북한지역 자유선거, 남한에서는 대한민국헌법 절차에 따라 선거, 유엔 감시하 6개월 이내 선거, 인구비례원칙, 선거 직후 전한국 입법부 서울에서 소집, 선거 1개월 전에 중국군 완전철수, 유엔군은 통일정부 수립의 완전달성 전까지 철수 안 됨
1947년 남북간 물자교류 허용
1946년 소련 만주에서 철수완료를 발표
1939년 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 체결
1930년 독립운동가 장인환 사망
1914년 농공은행령.지방금융조합령 공포
1911년 청. 철도국휴화 선포
1908년 라이트형제, 비행기계 특허 취득
1907년 이완용 이토히로부미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됨
1907년 무용가 조택원 출생
1907년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출생
1906년 명신여학교 설립(현 숙명. 엄귀비)
1905년 경성중학교 설립
1885년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 사망
위고는 위대한 작가이면서 열렬한 공화파 정치가였고 사형폐지를 주장한 인도주의자였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위고는 수사가 필요없는 `영웅`이었다. 왕당파ㆍ낭만주의였던 위고의 정치ㆍ문학적 경향이 공화파와 자유주의적ㆍ인도주의적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1830년의 7월혁명과 1848년의 2월혁명을 경험하면서였다.
1851년 제정(帝政)으로 복귀하려는 나폴레옹3세의 쿠데타에 항거, 망명길로 들어선 것은 위고의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때 ‘레 미제라블’ 등 숱한 작품이 발표돼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3세가 퇴위한 1870년, 19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 돌아와서는 정치인으로 빈민구제ㆍ언론자유보장ㆍ초등학교 의무교육 등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그 당시에 이미 유럽통합을 주창하고 유로화의 출현을 예고한 그의 통찰력과 혜안(慧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연히 위고지!`였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구차에 실려 무덤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볼품없는 수레에 실려 영웅들이 묻힌다는 팡테옹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길을 보기위해 200만명이 그를 찾았다.
1882년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체결, 최초의 쌍무협약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은 19세기 말 숨가쁘게 돌아가던 동아시아 국제외교의 산물이었다. 미국에 조선개항은 대(對)아시아 무역팽창정책을 펼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였다. 강제개항을 시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포기하고 청의 중재를 통한 개항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청의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침과 일본의 대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미국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대한(對韓)종주권 유지를 위해서였다.
이홍장은 조선에 밀서를 보내 조약의 긴요성을 역설한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소개돼 쇄국정책에 대한 인식전환이 조선에 막 싹틀 때였다. 조선책략은 아라사(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防俄)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결탁하고(結日) 미국과 연대(聯美)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
고종은 척사파의 반대를 피해 대청(對)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전권을 청에 위임한다. 미국과 청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속방(屬邦)조항을 조약에 명문화할 것을 고집한 청과 이를 반대하는 미국이 대립했지만 결국 별도 조회문에서 속방론을 밝히기로 하고 외교전을 마감한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강화도에서 체결됐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 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1877년 독립운동가 임용상 출생
1873년 이탈리아 소설가 만초니 사망
1859년 명탐정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영국의 작가 코넌 도일 출생
1813년 독일 작곡가 바그너 탄생
1602년 중국 남명의 황제 융무제 출생
1422년 경상도 성주(星州) · 김산(金山) · 합천(陜川) ·거제(巨濟)에 지진 발생
1388년 이성계(李成桂),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실정 장악
1388년(우왕 14) 5월 22일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했다.
당시 고려의 외교는 친명(親明)에서 친원(親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 이북 땅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관하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崔瑩)이 중심이 되어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5만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4불가론(四不可論)을 상서(上書)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4불가론은 첫째,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 넷째, 당시 장마철이라 무기가 온전치 못하고 전염병이 돌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그해 6월에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처음에는 종실 중에서 국왕을 택하려 했으나 조민수·이색의 주장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고 공양왕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성계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다음해인 1389년 그 아들 창왕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337년 비잔티움 제국 창시자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사망
비잔티움 제국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재위 중 이룩한 업적으로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불리었다.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인 모에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 궁정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복무했고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환호리에 부황제로 즉위했다. 그후 6년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황제의 부황제로서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를 장악해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323년에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명실공히 동-서로마를 통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해체를 막고, 영토와 문화면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로마를 떠나, 교역의 중심지이며 파르티아인의 침입에 맞서는데 적합한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은 330년 5월 11일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이름으로 엄숙하게 봉헌되었고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제국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속적인 토대와 영적 토대를 모두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로마의 위대한 정치적 유산과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유산,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융합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임을 공언한 최초의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향후 1123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여든 여덟 명이나 되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