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면 (山內面) 송백리(松栢里)
산내면(山內面)의 교통. 행정. 교육. 경제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 소재지이다. 중학교, 초등학교, 경찰지서, 보건소, 농업협동조합, 우체국, 시장 등의 공공기관과 경제시설이 모여 있는 동리이다. 동쪽으로 단장면(丹場面) 구천리(九川里)와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으로는 봉의리(鳳儀里)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에는 곤지봉(坤支峰)을 사이에 두고 가인리(佳仁里)와 대치해 있으며, 남쪽에는 건지봉(乾支峰)을 분수령으로 임고리(臨皐里)와 경계를 지었다. 마을의 동서를 관류하고 있는 동천(東川)(산내천(山內川))을 사이에 두고 양쪽 하천 가에 넓은 들판이 전개되어 면내에서도 가장 물자가 풍성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후기에 이 동리에 소속된 방리(坊里)로는 송포리(松圃里), 양송정리(養松亭里), 미라리(美羅里) 등이 있었으나, 그 후 백평(栢坪), 대촌(大村), 서당촌(書堂村), 옥정동(玉井洞), 용지(龍池), 노곡(蘆谷), 덕동(德洞), 대사(大沙), 팔풍(八豊) 등 여러 작은 땀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그 대표적 부락인 양송정(養松亭)과 백평(栢坪)에서 한자씩을 취하여 송백리(松栢里)라는 법정리를 구성했다. 1965년에는 송백리(松栢里)를 다시 3개의 행정리로 나누었는데, 일동(一洞)에는 면소재지인 팔풍(八豊)과 상(上). 하(下)땀으로 분리된 잣들(백평(栢坪))이 소속되며, 이동(二洞)에는 양송정(養松亭)의 두 땀에 해당하는 대촌(大村)과 서당촌(書堂村), 그리고 송포(松圃)의 두 땀인 옥정동(玉井洞)과 용지(龍池)가 이에 해당한다. 삼동(三洞)에는 고방(古坊)인 미라리(美羅里)를 비롯하여 갈밭(노전(蘆田)), 덕걸(덕천(德川)), 대사리(大沙里) 등을 소속시켰다. 또 송백리(松栢里)에는 구한말에 주사(主事) 장한상(蔣漢相)이 터전을 잡아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살았고, 사인(士人) 강대원(姜大源)이 입촌하여 진양 강씨(晋陽 姜氏)도 살았다. 조선조 말기이래 사인(士人) 이영선(李榮善)이 청도(淸道)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고성 이씨(固城 李氏)의 세거지가 되었다. ◆ 팔풍(八豊, 八風) 산내면사무소의 소재지로서 옛날의 장터 거리이다. 팔도(八道)의 풍각장이가 장판을 찾아 모여들고 북작거리는 곳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팔풍장(八風場)"이라 했다. 1931년에 이웃 마을인 임고리(臨皐里) 작평(鵲坪)에 있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긴 이후에 주민들이 시장으로서 풍족한 팔도(八道) 물산의 교류를 염원한다는 뜻에서 "팔풍(八豊)"으로 지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래는 주거지가 아닌 들판이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5일장이 서고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산내 초등학교, 농협단위조합, 산내 보건소, 산내 우체국 등 면내의 주요 공공기관과 문화시설이 들어섬에 따라 최근에는 산중 소도시가 되었다. 행정상으로 송백리(松栢里) 일동(一洞)의 중심부락이다. ○ 잣들(백평(栢坪), 백촌(栢村), 잣마, 잣숲) 팔풍(八豊)의 서쪽에 있는 들마을인데, 동천(東川) 강가의 충적토(沖積土)로 이루어진 비옥한 지대이다. 윗땀(上담)과 아랫땀(下담)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옛날 이곳에는 무성한 잣나무 숲이 있었으므로 잣마(백촌(栢村)) 또는 잣숲(백수(栢藪))이라고도 한다. 토성(土性)이 좋고 수리가 편리하여 옛날부터 면내에서도 일등 호답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했다. 윗 땀에는 면내에서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동강중학교(東崗中學校)가 자리잡고 있다. 또 아랫 땀에는 조선조 후기이래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입촌하여 살고 있다. 잣들(백평(栢坪))의 아래. 윗 땀을 흔히 동천(東川) 가에 있다고 하여 아랫 갱변 또는 웃갱변이라 부르기도 한다. ○ 장승들(長생평(長생坪)) 팔풍(八豊)의 면사무소에서 아랫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장승들이 있다. 옛날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나무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덕걸들(덕천평(德川坪)) 팔풍(八豊)에 있는 덕걸 앞의 들 이름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덕걸보라고 한다. ○ 횟대배미 잣들(백평(栢坪)) 가운데 있는 논배미의 이름이다. 물고기 종류인 횟대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당나무껄(당목가(堂木街)) 팔풍(八豊) 구면사무소(舊面事務所) 뒷편에 있는 당나무껄인데, 나무의 수령이 수백년이나 된다. 이 곳은 동신(洞神)을 모시는 곳으로 해마다 당제를 지낸다. ○ 덕걸(덕동(德洞), 덕천(德川)) 팔풍(八豊)에서 봉의리(鳳儀里)의 양촌(陽村)으로 건너가는 삼거리에 있는 땀 이름이다. 옛날에는 갈밭(노전(蘆田)), 대사리(大沙里)와 함께 미라리(美羅里)에 속했던 부락이었으나, 지금은 팔풍(八豊) 시장걸의 일부가 되었다. 이 곳 걸(천(川))이 홍수로 인하여 충적(沖積)되어 이루어진 땀이다. ◆ 양송정(兩松亭, 養松亭)) 송백리(松栢里) 이동(二洞)의 중심부락이다. 조선조 현종연간(1660∼1674)에 통정대장 손제겸이 산외면 다원동에서 이 곳으로 이거한 후 일직손씨 알파의 세거지로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그 후 후기의 양송정리(養松亭里)라는 방리(坊里)의 터전인데, 대촌(大村), 서당촌(書堂村), 옥정동(玉井洞), 용지(龍池) 등 네 땀을 합하여 양송정(養松亭) 두 땀 혹은 송포(松圃) 네 땀이라 일컬어왔다. 옛날 이 마을에 밀성 손씨(密城 孫氏)와 일직 손씨(一直 孫氏)가 이거해 살면서 양손(兩孫)의 마을이라고 하여 양송정(兩松亭)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있고, 이곳에 송포(松圃)가 있어 소나무를 기루었기 때문에 양송정(養松亭)이 되었다는 다른 일설도 있다. 그러므로 옛날 양송정(養松亭)의 터전인 지금의 큰마(대촌(大村))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에는 주로 양 손씨(兩 孫氏)가 집단촌을 이루어 세거지로 삼고 있다. ○ 큰마(대촌(大村), 양송정) 송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일반적으로 양송정이라 한다. 조선조 영조(英祖) 연간(1724 ~ 1776)에 산외면(山外面) 죽동(竹東)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밀성 손씨(密城 孫氏)의 일문이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 세거지가 되었는데, 정조(正祖)(1777 ~ 1800) 때에는 사인(士人) 손사홍(孫思弘)이 입촌한 선조를 위하여 만취재(晩翠齋)라는 재사를 지었고, 1914년에는 진사(進士) 손진수(孫珍秀) 등이 확장 중수하였다. ○ 서당마(서당촌(書堂村)) 큰마(대촌(大村)) 서북쪽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옛날에 통정 송제겸의 아들 오형제의 강학하던 서당(書堂) 오우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현종(顯宗) 연간(1660 ~ 1674)에 통정(通政) 손제겸(孫悌謙)이 산외면(山外面) 죽서(竹西)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일직 손씨(一直 孫氏) 일파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손 사인손진일이 통정공을 위하여 영구제를 건립하였고 사인여제당손 기덕이 다시 중수 확장하여 제호를 영언재(永言齋)로 고쳐 현액하였다. ○ 옥정동(玉井洞) 큰마 남쪽에 이웃한 송백(松栢) 이동(二洞)의 땀 이름이다. 부락 앞 산 밑에 있는 샘물이 맑기가 옥(玉)과 같다고 하여 옛날부터 옥정동(玉井洞)이라 했다. 또 이 우물에서 옥으로 만들어진 바가지(옥표(玉瓢))가 떠올랐다는 전설이 있어서 생긴 지명이라고도 한다. ○ 용지마(용지촌(龍池村)) 큰마(양송정) 북쪽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송백 이동에 속한다. 부락 뒷산의 형용이 큰 용과 같고, 산기슭에 있는 연못의 물을 마시기 위하여 용(龍)이 나타났다는 전설로 인하여 용지(龍池) 또는 용지마라 하였다. 용짐마라고도 한다. ○ 디딤말들(도지평(導旨坪), 도지평(道指坪), 도저평(導猪坪)) 큰마(양송정)와 팔풍(八豊) 사이에 있는 들 이름이다. 옛날에 눈이 많이 와서 온 들판을 뒤덮었을 때 근처 산의 이리(낭(狼))와 멧돼지들이 설친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짐승들은 양송정 앞에서 가인리(佳仁里)의 인곡(仁谷)까지 줄을 친 것처럼 발자국을 남겨 놓았는데 동민들이 하도 이상하여 그 발자국을 따라 눈을 치웠더니 그대로 봇도랑(용수로(用水路))이 되었다고 한다. 짐승들이 디딘 발자국의 들이라고 하여 이러한 지명이 생겼다. ○ 화랑고개(화령(火嶺)) 양송정에서 임고리(臨皐里)의 발례동(發禮洞)으로 통하는 고개의 이름이다. 옛날에 이 고개에는 숲이 울창하여 넘나들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숲속에 불을 질러 고개 길을 내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끝방재(말방령(末坊嶺), 안골) 양송정에서 단장면 구천리 정승동으로 통하는 재의 이름인데, 마을의 맨 끝 땀과 연결되는 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안곡이라도 한다. ○ 소동나무껄 양송정 큰마 어귀에 있었던 정자나무껄이다. 수백년 묵은 소동나무가 서 있었는데, 근처에는 홈통을 설치한 봇도랑이 있어 소동나무 수통껄이라고도 했다. ○ 삼봉산(三峰山) 양송정 큰마 뒤쪽으로 우뚝 솟은 산 이름인데 세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졌다. ○ 소등산골짝(우배산곡(牛背山谷)) 양송정 큰마 근처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소의 등줄기처럼 능선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 뒷골골짝(후곡(後谷)) 양송정 큰마 근처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 뒷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미륵골골짝(미륵곡(彌勒谷)) 양송정 큰마 뒷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옛날에 이 골짜기 안에 미륵불을 모신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 용짐등대 용지마 남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용지가 있는 등대배기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고,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용짐보(용지미보)라고 한다. ○ 대촌못(대촌지(大村池)) 양송정 큰마에 있는 못 이름이다. 양송정 근방에 있는 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 구실을 한다. ○ 고래논(항동답(항洞畓)) 양송정 큰마 서쪽 들에 있는 논배미이다. 논의 흙이 방고래(항동(洞)) 흙과 같이 새까맣고 비옥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개슴뚝 대촌(大村) 서남쪽에 있는 꾸불꾸불한 논배미를 말한다. 논배미의 양쪽으로 물이 흘러 섬처럼 되어 있으며, 그 양가에 둑이 쌓여 있다. ○ 기산(箕山, 其山) 양송정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산 모양이 키(箕)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칭이산이라고도 한다. ○ 디산골(후산곡(後山谷)) 대촌 뒤쪽에 있는 산골짜기의 이름이다. 뒷산골의 변음으로 디산골이 되었다. 대촌 뒤쪽에 있는 들을 딧골들이라고 하였다. ○ 바짓가래논 대촌과 팔풍 사이에 있는 도지평(導指坪) 서쪽 논배미 이름이다. 지형이 바지가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밭덕가래논 대촌과 팔풍 사이에 있는 도지평 동쪽 논배미의 이름이다. 논가에 밭둑이 있기 때문에 밭둑가래라고 했으나, 밭덕가래로 변하였다. ○ 솔끝(송말(松末)) 대촌(큰마)의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무성한 소나무밭이 이어져 있는 맨 끝 지점이라 하여 솔끝이라 하였다. 그 곳에 솔끝저수지도 있다. ○ 굴새미(굴천(窟泉)) 대촌과 팔풍 사이 도지평 가운데 있는 샘의 이름이다. 굴처럼 생긴 우물샘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배들배미(유야(柳夜)) 대촌과 팔풍 사이 도지평 가운데 있는 논배미이다. 논두렁에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사다리배미(제야(梯夜)) 대촌 아랫 쪽에 있는 논배미 이름이다. 논의 형상이 사다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부어배미(부어야(魚夜)) 대촌과 팔풍 사이 도지평의 서남쪽에 있는 논배미이다. 논배미의 모양이 붕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붕어배미 또는 부어배미라 한다. ○ 시리배미(증야(甑夜)) 대촌과 팔풍 사이 대지평 가운데 있는 논배미의 이름인데, 모양이 시루(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병배미(병야(甁夜)) 대촌의 도지평 가운데 있는 논배미 이름이다. 논배미의 모양이 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봉답(봉답(奉畓)) 대촌 서쪽에 있는 천수답 지대이다. 大村池에 저수된 물로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천둥지기 봉첩답이라고도 한다. ○ 푸신배미 대촌 마을 대지평 속에 있는 논배미 이름이다. 흙이 푹신푹신하고 비옥하다고 하여 푸신배미라 하였다. ○ 구시바위(사조암(飼槽岩)) 대촌 마을 옆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소나 말의 먹이를 담는 구유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구시는 구유의 사투리이다. ○ 눈섭바위(미암(眉岩)) 양송정 대촌 마을 남쪽 시루봉(일명 건지산(乾支山)) 꼭대기 근처에 있는 바위인데,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마치 눈썹같이 가지런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감나무골(시목곡(枾木谷)) 양송정 근처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감나무가 무성하다고 하여 붙인 지명인데, 지금도 몇 그루의 물감나무가 남아 있다. ○ 옻밭도가리(칠전(漆田)) 옥정동(玉井洞) 마을 뒷 골짜기에 있는 밭뙤기의 이름인데, 옛날 이곳에 옻칠쟁이가 살고 있었다. 목기(木器)를 다듬어 옻칠을 하여 판매하던 곳이다. 도가리는 토막밭이라는 뜻이다. ○ 사태골(사태곡(沙汰谷)) 양송정 뒷쪽에 있는 산골짜기의 이름으로 옛날에 산사태가 일어나 큰물에 씻겨간 골짜기이다. 약 1Km 정도의 언덕과 골짜기로 이루어졌는데 토질은 우수한 마사토(馬砂土)로 이루어져 있다. ◆ 미라리(美羅里, 미나리) 송백리(松栢里) 북쪽에 위치한 주산(主山) 곤지봉(坤支峰) 아래의 고촌(古村)이다. 조선조 후기의 방리(坊里)인 미라리(美羅里)가 바로 이곳인데, 행정상으로는 남쪽 들판 건너의 갈밭(노전(蘆田))과 팔풍(八豊) 근방에 위치한 덕걸(덕천(德川)), 대사리(大沙里) 등 4개 땀으로서 송백(松栢) 삼동(三洞)을 구성하고 있다. 미라리(美羅里)라는 지명은 본래 이 마을의 골짜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륵사(彌勒寺)라는 사명(寺名)에서 유래한 것으로 애초에는 미리 또는 미라로 불렀으며 표기를 미리(美里), 미라(美羅)로 하였다. 지금도 옛날 절이 있었다는 골짜기를 미륵골(미륵곡(彌勒谷)) 또는 미릿골(미리곡(美里谷))이라 한다. 조선조 숙종 연간(1675 ~ 1720)에 사인(士人) 박영권(朴永權)이 이 마을에 입촌한 이래 밀성 박씨(密城 朴氏)가 터전을 잡고 살았으며, 1915년에는 참봉(參奉) 박정권(朴正權)이 우경재(寓敬齋)를 창건하여 그의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 갈밭(노전(蘆田), 갈골) 미라리(美羅里)의 남쪽에 있는 들 가운데 마을이다. 지대가 낮아 옛날부터 일대에 갈대가 무성했다고 하여 노전(蘆田)(갈밭)이라 했으며, 옛날 미륵사의 가람(伽藍)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가람터 또는 갈골이라고도 불리었다. ○ 갈밭못(야지못, 노전지(蘆田池), 야지지(野地池)) 갈밭마을 동쪽에 있는 못 이름이다. 갈밭에 있는 못이라고 하여 갈밭 못이라 했으며, 들 가운데 있는 못이라 하여 야지 못이라고도 불렀다. ○ 미릿골(미륵골, 미륵곡(彌勒谷)) 갈밭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옛날 미라리(美羅里)에 있었던 절의 미륵불을 모신 골짜기라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지금도 높이 6m나 되는 마애불(磨崖佛) 형식의 미륵불이 있다고 한다. ○ 미라못(미라지(美羅池)) 미라리(美羅里)와 갈밭 사이 동쪽 산기슭에 있는 저수지의 이름이다. 야지 못과 함께 이 일대의 농업용수의 공급원이다. ○ 미랏곡(미라고개, 미라치(美羅峙)) 미라리(美羅里) 동북쪽에 있는 산 고개의 이름이다. 가인리(佳仁里)의 화봉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는 큰길에 속한 고개였다. ○ 외지말리(야짓들, 예지말리) 미라(美羅)와 갈밭 사이 서쪽 편에 있는 넓은 들 이름이다. 야지(野地)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야짓 들, 또는 야지 말(예지마, 외지마)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외지말리, 예지말리 등의 다른 이름도 있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외지말리보라고 한다. ○ 송골(손골, 협곡(峽谷)) 미라리(美羅里)에 있는 미릿골 동쪽의 좁다란 골짜기의 이름이다. 손 골짜기라고 하여 송골 또는 손골이라 한다. ○ 대문껄(대문가(大門街)) 미라리(美羅里)와 갈밭 사이에 있었던 지명이다. 옛날 일직 손씨(一直 孫氏)로서 육형제의 만석(萬石)군 부자가 살았는데, 이곳에 그 부잣집 대문이 있었다고 하여 대문껄이라 하였고, 이 일대의 전답도 거의 다 손씨(孫氏) 부자의 소유였다고 한다. 손부자(孫富者)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손진갑(孫鎭甲)이라는 이름이 전해온다. ○ 말미등(마총등(馬塚嶝), 주마터, 주마허(走馬墟)) 갈밭 동쪽에 있는 지명으로 옛날 손씨(孫氏)의 육 형제 부잣집의 말을 묻은 산등성이라는 뜻이다. 또 손부자(孫富者) 자손들이 말타는 연습을 했다고 하여 말미등 옆 지명을 주마터(주마허(走馬墟))라고도 한다. ○ 땅메산(당마산, 곤지봉(坤支峰)) 미라리(美羅里)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인리(佳仁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땅뫼 또는 땅메라고도 하며 당마산(唐馬山), 곤지봉(坤支峰)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곤지봉(坤支峰)은 양송정(養松亭) 남쪽, 임고리(臨皐里)와 경계를 짓고 있는 건지봉(乾支峰)과 대칭 되는 것으로 건지(乾支)는 하늘뫼이고, 곤지(坤支)는 땅 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곤지봉(坤支峰) 북쪽 너머에 가인리(佳仁里)에는 땅뫼라는 마을도 있다. ○ 수반들(수반평(水盤坪)) 미라리와 갈밭 사이 외지말리 남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지대가 낮아 물이 고이는 곳이라고 하여 수반(水盤)이라 했으며, 이 들판에 물을 대는 보(洑)를 수반보(水盤洑)라고 한다. ○ 대사(大沙) 땅뫼산 서쪽 기슭에 있는 들마을이다. 산내천(山內川)의 상류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강가의 큰 마을이라 하여 대사리(大沙里)라고 했다. 큰물이 지면 많은 모래가 쌓이기도 한다. 옛날 미륵사가 있었다고 하여 큰 중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사문리(大沙門里)라는 일설도 있다. ○ 낙산(落山) 땅메산 서쪽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고 하여 낙산(落山)이라 하였다.<옮겨 왔습니다> (자료출처 : 밀양문화원)내 고향 밀양 카폐에서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