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大路라는 명칭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인 崔永俊교수가 " 영남대로 : 부제 -
한국고도로의 역사지리적 연구"(1990. 1. 1 고려대학교 출판부) 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며
공식적 명칭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각종 논문과 저서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가는 9개 간선도로가 있었는데 그 중 경상도에는 3개의 간선도로가 있었다.
제 4대로 ; 약 960여리이며 동래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14일 걸리는데 이것이 소위 영남대로이다.
한양 - 죽산 - 충주 - 조령 - 문경 - 상주 - 구미 - 인동 - 대구 - 청도 - 밀양 - 양산 - 동래
제 5대로 : 경상 좌도를 통하는 길로서 서울까지 15일 걸린다.
.... - 문경 - 상주 - 현풍 - 함안 - 고성 - 거제 - ....
제 6대로 : 경상 우도를 통하는 길로서 16일 걸린다.
.... - 남원 - 함양 - 산청 - 단성 -진주 - 사천 -고성 - 거제 - ....
따라서 밀양을 지나는 간선도로는 " 제 4대로"로서 이것이 정식 명칭인 것이다.
이 길은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어서 실제로도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영남대로의 밀양부분은 작천잔도 - 미전리- 무흘역 - 화성동 - 입성동 - 임천 - 남포 - 삼문동 -
남문 - 서문 - 제사고개 - 신원(지금의 신안) - 유천(상동)으로 연결되었다.
다만 1895년 근대적인 郵政制度가 도입되고 1905년 경부선 열차가 개통됨으로 인하여
옛 영남대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의 기억밖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옛 영남대로의 상당부분에 경부선 철로를 가설함으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남대로의 미전리 구간은 비록 무흘역이 그 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저지대로
자주 침수되어 그 역할이 제한된 반면에 統倉, 漕倉이 모두 삼랑리에 있고 그로 인하여
시장, 상인, 배, 관리등 많은 사람이 들끓어 업무의 편리성 또는 침수 위기시의 대용성으로
인하여 삼랑성 밑 산등성이(이 길이 뒷기미 고개길이다)를 이용하였다.
이 길은 그 거리가 불과 1킬로미터 정도이고 걸어서 약 2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실제로 이 길의 옆에는 조창관련 관리들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고 오우진쪽 에는 당시 길손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도 남아 있다.
한편 영남대로중 밀양구간이 표시된 고지도는 그 노선이 無屹驛만을 표시한 것,
뒷기미 고개만 표시한 것, 양쪽 모두를 표시한 것으로 나누어 진다.
무흘역으로 표시된 고지도 ; 輿地圖書(1765년경)
八道輿地圖(18세기 중반경)
大東輿地圖(1861년)
朝鮮地圖(1750년에서 1768년사이)
八道地圖
뒷기미 고개로 표시된 고지도: 輿地圖
我東輿地圖
八道地圖(위의 팔도지도와는 다른 팔도지도이다)
東國地圖(영조때)
양쪽 다 표시된 고지도 : 密陽府地圖(1872년)
海東地圖
따라서 이 뒷기미 고개길도 예전에는 엄연히 영남대로의 일 구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그에 알맞는 지위 부여와 함께 연구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고려시대 스님 圓鑑,밀양부사 安宙의 시를 보면 현재의 여흥민씨의 오우정자리에는 三郞樓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三 郞 樓
호수가에 청산이요 산아래 누각이로다
아름다운 이름 언제나 물과 함께 흘러 왔네
모래톱가의 주점은 소라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
물결에 뜬 돛단배는 뱃머리가 일렁이네
뽕나무 사이로 짙은 안개 천리 먼 길에
연꽃이 만발하여 온 강이 가을을 알려 오네
지는 노을, 외로운 따오기는 이미 진부한 표현이라
일부러 새 시를 지어 좋은 놀이를 기록하노라.
원감(1226 - 1292)
속성은 魏이고 이름은 沖止, 元凱이다.
1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翰林을 거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圓悟國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41세에 김해의 甘露寺에 있다가 원오국사가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曹溪 6세가 되었다.
諡號가 원감이고 塔號는 寶明이다.
원감의 시에 次韻한 안주의 시
三郞亭 자리에다 五郞樓를 지으니
인물과 강산이 가장 빼어나더라.
백조는 물가를 날며 부리로 수면을 쪼고
남은 안개 걷힌 곳에는 산봉우리가 드러나네
孤雲(최치원)이 신선되어 간 지 천년인데
우리들이 올라 가 본지도 어언 9년(9秋)이나 지났네
백리를 사양않고 멀리서 원님을 맞아 주니
타향풍속을 보며 즐거이 이 속에서 놀리라.
안주 ( 1500년 연산군 6년 - 1569년 선조 2년)
함안인으로서 호조정랑, 청도군수, 밀양부사, 홍문관부교리, 濟用 監正(정 3품)을 지냈으며 글을 잘 지었다.
安宙가 밀양부사로 있을 때 姜大丘라는 사람과의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사람이 응천의 배위에서 만났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강대구가 부사를 놀리면서
"密城이라면 다만 술만 있으면 되지 안주는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자,
안주는 즉시 응답하여 말하기를 " 비록 강한 대구의 목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안주가 없겠습니까?"라고 했다.
강대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안주선생의 문집인 恥庵先生逸稿에는 姜大邱의 이름이 栢年이라고 되어 있다.
李濟永(1799-1871)은 三郞江이라는 그의 시에서 옛날에 세 姓氏가 이 곳에 살았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三郞이라고 한다고 하나 그 자세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이제영은 號가 東阿이고 碧珍人으로서 칠곡 石田에서 태어나 밀양 竹院으로 옮겨 살았다.
또한 朴秀憲의 밀양지(1932년간행)에는 三郞曲이 세상에 전해 지고 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187C474F253E6B13)
상부마을에서 바라 본 아름다운 낙동강 철교
![](https://t1.daumcdn.net/cfile/cafe/190B53474F253E6F26)
상부마을 : 왼쪽 산위의 소나무가 낙락장송, 중간에 있는 재실이 오우사, 오른쪽 밑에 조창공적비가 있고
공적비 위쪽으로 뒷기미 고개길이 나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F1D474F253E7523)
조창공적비 : 특히 오른쪽 산비탈에 서 있는 비를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47개의 철비가 남아 있는데 그 중 2개가 이 곳에 있다.
철비는 녹이 쉽게 스는 것이므로 각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B88474F253E7828)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3D9474F253E7C02)
왼쪽 감나무 과수원 안쪽으로 옛길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0784474F253E8029)
![](https://t1.daumcdn.net/cfile/cafe/190D77474F253E8424)
배수지에서 내려다 본 船艙
![](https://t1.daumcdn.net/cfile/cafe/165993494F253E8814)
고개에서 본 삼랑성 : 그 아래부분으로 다녔다
고개에서 본 옛 뒷기미고개길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53A484F25413712)
고개에서 바라 본 오우진쪽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D39484F25413B33)
오우진쪽에서 바라 본 뒷기미 고개쪽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C20484F25413F24)
오우진 길가쪽에 있는 우물 : 상수도가 놀이기 전까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443484F25414327)
물이 맑아 보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0B1A484F2541460C)
오우진쪽에서 고개로 진입하는 초입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1D9484F25414A04)
이 계곡의 물이 응천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첫댓글 가신다더니 다녀 오셨네요.
저 오우진나루 흔히 뒷기미나루에는 근대까지도
상,하남,초동방면에서 삼랑장과 또 기차를 타고 대처로 가기위해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한의 소설 "뒷기미나루"의 배경이되기도 하였고 한길출판사 김언호사장의 자서전 "책의공화국에서" 첫머리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건너던
뒷기미나루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이야기 할 정도로 근대이전에는 교통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