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Santiago]
산티아고는 칠레의 연방 수도이자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타나’ 지역의 중심지로 공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칠레이다. 산티아고는 칠레 중앙 계곡의 해발 52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산티아고 도시의 인구는 5,250,565명이고, 그란 산티아고(Gran Santiago) 지역을 아우르는 수도권의 인구는 6,562,300명으로 추산된다. 산티아고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수도권이라고 분류되는 그란 산티아고 지역은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타나 주(州)의 범위를 벗어나 4개의 주와 35개의 코무나(시와 비슷한 개념) 및 11개의 위성 코무나를 포괄한다. 따라서 그란 산티아고 지역을 정확히 담당하는 행정 부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란 산티아고 지역을 행정적으로 책임지는 가장 높은 지방정부 단위는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타나 주(州) 정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타나 주의 인근에 있는 코르디예라, 마이포, 탈라간테 주도 모두 그란 산티아고 지역에 걸쳐 있으므로, 이 지역의
행정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기관은 사실상 부재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티아고’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란 산티아고 지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산티아고라는 이름은 몇 가지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그란 산티아고 지역 안에 산티아고 코무나(시의 개념)가 존재하는데 좁은 의미에서는 이 곳을 산티아코로 부른다. 이 지역은 산티아고 시청의 관할이다. 산티아고 코무나는 구도심과 대통령궁인 라 모네다를 포함한 주요 정부 청사가 위치한 곳이다. 200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산티아고 코무나의 면적은 22.4㎢이고 인구는 200,792명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산티아고는 그란 산티아고 지역을 의미한다.
이 도시는 1541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에 의해 ‘산티아고 델 누에보 엑스 트레모’라는 이름의 도시로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원래 피쿤체 부족이 거주하였는데, 이후 이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통치 하에 놓였다. 독립 이후 도시로서의 발전은 더뎠으나 1900년대에는 소금 광산과 질산염 광산을 포함한 인근 광산에서 창출된 부가 산티아고에 유입되면서 산티아고는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였다. 도시의 팽창은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 겨울철에는 대기오염이 임계점 도달하였고 겨울이 지나고도 개선되지 않는 스모그 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칠레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산티아고는 동시에 가장 불평등한 도시이다. 산티아고의 지니계수는 0.47로 2020년 칠레의 지니계수인 0.45보다 높은 수준이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부경대학교 글로벌지역학연구소)
발파라이소 항구도시 역사지구
[Historic Quarter of the Seaport City of Valparaíso]
본문
발파라이소는 칠레 제2의 대도시로, 19세기 말의 세계화 초기 단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에서 100㎞쯤 떨어진 태평양 연안에 있는 발파라이소는 지리적으로 만과 좁은 해안 평야, 일련의 언덕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은 바다와 첫 번째 언덕 사이에 있으며, 바로 이곳에서 초기 도시가 발전했다. 도시는 평원과 주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고, 5개의 주요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1. 지역
라 마트리스(La Matríz) 교회와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광장이 언덕과 평야 사이에 있다. 산토 도밍고 언덕뿐만 아니라 에차우렌(Echaurren) 광장 및 그 주변과도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발파라이소의 초기 교회인 라 마트리스 교회는 해적과 지진에 의한 파괴된 이후 여러 차례 재건되었는데도 식민지 건축 양식와 공화국 건축 양식 간의 전형적인 과도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항구 도시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인 19세기 말의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라 마트리스 광장은 발파라이소에서 전통 종교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다.
2. 지역
에차우렌 광장과 세라노(Serrano) 거리는 대부분 상업 지구 성격을 띠고 있다. 항구의 시장과 상업 건물들, 활발한 길거리 노점상이 인상적이다. 건물은 3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4개의 거리에 면해 있는 ‘블록 빌딩’(또는 ‘섬 빌딩’), 3개의 거리에 면해 있는 ‘헤드 빌딩’, 그리고 2개의 거리에 면해 있는 ‘빌딩’이 있다. 블록 빌딩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1906년에 완공한 아스토레카(Astoreca) 빌딩으로, 대칭적이고 직각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상업과 거주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3. 지역
프라트(Prat) 부두, 소토마요르(Sotomayor), 후스티시아(Justicia) 광장과 해양 박물관 지구에는 지역의 주요 횡단축이 있고, 가장 넓은 공공 공간이 있다. 광장 주위에 다양한 시대와 양식을 보여 주는 행정 및 서비스 건물들이 있다. 해양 박물관은 코르디예라(Cordillera) 언덕 꼭대기의 산호세(San José) 성터에 있는데, 이곳은 도적떼와 해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구축한 요새이기도 하다.
4. 지역
프라트 거리와 투리(Turri) 광장 지역은 산기슭의 작은 언덕 주변을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소토마요르(Sotomayor) 광장으로 뻗어 나와 하나의 공공 공간인 투리 소(小)광장을 아우르는 에스메랄다(Esmeralda) 거리 초입으로 이어진다. 이 지역에는 2개 혹은 3개의 거리에 정면을 향해 있는 전형적인 빌딩뿐만 아니라 평야 지대 건물의 특징인 주로 사각형의 블록 빌딩들이 있다. 이런 빌딩들은 크기와 표현 형식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5. 지역
알레그레(Alegre) 언덕과 콘셉시온(Concepción) 언덕은 우리올라(Urriola) 거리로 분할되며, 하나의 단일한 이웃 지역을 형성한다. 대체로 이 지역은 19세기 초반에 독일과 영국 이민자들이 개발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추진했다. 이 지역에는 광장과 전망대, 산책로, 골목, 계단, 정상의 엘리베이터 정류장, 거리의 교차로와 분기점에 있는 피난소 등 다양한 형태의 공공 공간이 있다.
발파라이소에는 30개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83년에 개통된 콘셉시온 엘리베이터이다. 일반적으로 엘리베이터는 2개의 나무 혹은 금속 몸체로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는 바퀴를 이용해 정거장에 오른다. 이 지역에 원주민은 창고(Chango) 인디언으로 원래 농업과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1536년 후안 데 사베드라(Juan de Saavedra)가 이곳을 발견했고, 1544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가 정착지를 발견했다. 1554년에는 이곳을 국가에서 최초의 항구로 지정했다.
1730년 지진으로 인한 재앙 이후 주민들은 산허리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이 오늘날에는 가장 돋보이는 도시의 특징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거주지는 언덕 위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주요 경제 자원은 밀에서 질산칼륨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발전 이후 도시는 상업 지구와 항구, 산업 단지, 사업 지구 같은 주요한 특징을 갖는 지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이 지역에는 원래 농업과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하던 창고 인디언이 살았다. 태평양 연안 퀸틸(Quintil) 계곡의 발파라이소 유적은 1536년에 후안 데 사베드라가 발견했다. 정착지는 1544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발견했고, 1554년에 국가에서 최초의 항구로 지정했다. 주거지는 처음에 후안 고메스(Juan Gomez, 지금의 카람팡게(Carampangue))와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산아구스틴(San Agustin) 주변 지역에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에는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 사이에 도로가 연결되었다. 스페인 이민자들이 가톨릭 신앙을 들여오고, 산프란시스코의 계곡 입구에 있는 정착촌에 최초의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1658년에는 라 마트리스 교회가 건설되고, 그 후 요새가 구축되었다. 동시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원 등 다른 종파들이 들어왔다. 정착지는 점점 모양을 갖춰 갔으며, 상업 중심지와 물류 창고가 주요 해안가에 들어섰다. 케이프혼(Cape Horn)이 개통되면서 18세기에 발파라이소와 엘카야오(El Callao) 간의 대규모 밀 무역이 성행했다. 도시의 외형은 2개의 중심지, 즉 상업 중심지인 항구와 농가를 비롯한 작은 기업들이 있는 알멘드랄(Almendral) 해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730년 지진으로 재앙을 겪은 주민들은 산허리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는 가장 돋보이는 도시의 특징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거주지는 언덕 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1810년 칠레의 독립과 함께 발파라이소는 곧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고,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도 상거래가 활성화되리라는 것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이로써 칠레는 스페인의 종속에서 확실하게 벗어났다. 1839년~1840년에 발파라이소는 인텐덴시아(Intendencia)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1842년에는 국가 재정 창고와 증권 거래소가 있는 발파라이소 주의 주도가 되었다. 당시 이 도시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미국의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선박과 상업의 발전에 공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은 영향은 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아르세날(Arsenal, 지금의 부스타만테(Bustamante)), 라플란차다(La Planchada, 지금의 세라노), 라아두아나(La Aduana, 지금의 프라트(Prat)), 그리고 델카보(Del Cabo, 지금의 에스메랄다) 거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발파라이소는 국제 도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며,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아두아나(Aduana) 광장과 두프라트(Duprat) 요새 사이에 더 많은 창고가 건설되었다. 1852년에는 지역의 여러 도시와 수도인 산티아고에 철도가 건설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주요 항구이자 상업 중심지가 된 발파라이소는 타라파카(Tarapaca)와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의 광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위상이 더 강화되었다. 주요 경제 자원은 밀에서 질산칼륨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발전 이후 도시는 상업 지구와 항구, 산업 단지, 사업 지구 같은 주요한 특징을 갖는 지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라플란차다(Planchada)와 아두아나 거리는 외교 업무, 금융, 국제기구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1847년~1870년까지 발파라이소는 상업과 금융 중심지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도시가 확장되었다. 언덕들은 1897년 페르민 비바세타(Fermin Vivaceta)가 입안한 계획에 기초해서 해발 100m 높이에 있는 신투라(Cintura)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다.
1903년에 전차가 개통됨으로써 19세기 도시 환경은 첫 번째로 변화되었다. 1906년에는 강력한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면서 특히 도심에 큰 피해를 주었다. 당국자들은 이후의 재건 계획을 세웠으며,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양질의 공공건물과 상업 지구, 민간 건물들을 더 많이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1914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자, 발파라이소는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입었다. 두 대양 간의 무역로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로 질산칼륨의 소비가 줄고 항구의 중요성이 감소한 반면, 수도인 산티아고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1929년의 세계 경제 위기는 이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런데도 발파라이소는 심각한 사회적 · 경제적 문제들을 딛고 줄기차게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도시는 해법을 찾았고, 새로운 건설 작업이 후안고메스와 산프란시스코, 산후안데디오스(San Juan de Dios), 데하이메(de Jaime), 그리고 지금의 프란시아(Francia) 거리를 포함하는 도시의 고지대로 확대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ⅲ) : 발파라이소는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의 항로에 있는 선구적인 상업 항구 도시로, 19세기 후반 세계화의 초기 단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출처:(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2023-08-2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