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 / 구상
□ 9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山頂) 옹달샘 속에
한 방울의 이슬이 지각(地殼)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茫茫大海)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億劫)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悠然)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蒸化)를 거듭한 윤회(輪廻)의 강이
인업(因業)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現存)으로 이곳에 다시 만날
그날을 생각는다네.
□ 10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肉身)의 허물을 벗어
흙 한줌으로 남겨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막내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 16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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