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서귀포에서 서쪽 해안을 돌아 제주로 가는 버스는 대정읍(大靜邑)에서 두 가지 길로 간다.
하지만 지나는 버스간격이 조금 크므로 그것을 가릴 여유가 없이 오는 버스를 탔다.
"대정읍성"(大靜邑城)이 있는 곳에서 내려야 하는데,
내가 탄 버스는 "대정읍사무소"앞에서 사계리(沙溪里)쪽으로 간단다.
지도로 "정난주마리아 묘"를 찾아보니 가는 차는 없고 걸어서 한시간 20분을 가야 한단다.
게다가 생전 처음 가는 길이라 자신이 없다.
"대정여자고등학교"앞 대로까지 가 보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읍사무소 앞 버스정거장에 앉아 궁리를 하는데 마침 택시가 와서 손님이 내린다.
얼른 다가가서 "정난주마리아묘"까지 가자하니 네비를 만지작거린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단다.
그래도 그 덕분에 목적지까지 도착을 했는데 택시 기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 다시 찻길로 가려면 한참을 가야하고 차도 없단다. 기다려 주겠단다.
입구에서 본 정 마리아의 묘.
이곳도 월요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어 쓸슬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이 세번째의 내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청(淸)의 황제인 가경제(嘉慶帝)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淸)의 감독과 보호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淸)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줄 것도 요청했다.
조선 조정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황사영이 외국의 군대를 요청했다는 점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서구 천주교 국가의 군함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명을 조선에 보내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자유롭게 천주교를 믿을 수 있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이 백서의 내용은 조선의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조선 조정은 이것을 역모(逆謀)로 간주했다.
황사영은 체포된 뒤 11월 서소문 밖에서 역모를 모의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인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또한, 숙부 황석필과 황사영의 부인은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황사영의 모친은 관노비(官奴婢)가 됐다.
역모를 모의한 사람은 그 집안 자체를 멸족시킨다는 당대의 형벌 원칙에 적용된 것이다.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정하상(丁夏祥, 1795-1839)"바오로"도 백서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신부도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의 몽상(夢想)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훗날 학자들 역시 이것은 “명백한 반란”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