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子光
1439년 ~ 1512년
조선 세조 ~ 중종 초기 때의 정치가. 전라북도 남원 출신.
조선시대 차별의 대상인 얼자로 태어나 당대의 권력의 계단에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던 인물이자 조선 초기 정치판을 크게 휘저은 풍운아.
업적의 공과를 제외하더라도 인생 자체는 파란만장했고, 이 말을 대변해 주듯
남이의 옥,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예로부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신들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는 간신이 맞다는 의견과 역사의 승리자에 의해서 간신으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는 불행한 인물이었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동시대의
남이나
구성군[1] 유자광은 겨우 노비신분에서 벗어난 얼자
[2][3]조광조유자광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유규(柳規)의
서얼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 꿈을 꾸고 난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유자광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이 말대로면 유자광은 그냥 서자도 아니고
홍길동[5] 어린 시절 유자광이 적자인 형들을 제치고 총명함을 드러내자 유자광의 친부는 이를 위험으로 판단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루는 장마철 물이 불어나자 유자광 친부는 유자광을 강으로 데려가 강을 헤엄쳐 건너에 있는 메밀밭을 확인하게 한다. 본래 어린이인 유자광을 급물살이 있는 강에 빠져죽게 할 생각이었으나 총명한 유자광은 큰 나무판자를 배를 삼아 무사히 강을 건넌다.
이후 가문의 견제를 피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었으나[6] 무술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가 되었다가
[7]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세조세조의 유자광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며, 다음해는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 별시
[8][9] 신숙주세조가 이토록 유자광을 밀어 주었던 것은 재위 기간 동안에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져버린 구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치르는 동안에
한명회[10]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에 존재했던 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남이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공신 세력에 붙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유자광이 남이가 유자광을 찾아와 정변을 일으켜
한명회,
신숙주이 '남이의 옥' 사건에는 유자광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유자광은 출신부터가 한미한데다가, 세조가 죽은 이후로는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세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신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11]야사에 따르면 유자광이 함께 싸우며 같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얻은
남이를
질투[12]비록 남이의 옥 사건으로 유자광은 본격적인 탄탄대로에 올랐다고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신임으로 버틸 수 있었는데 일례로 성종 1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박성간이 자신이 남이처럼 반역을 계획했다고 고변하여 유자광이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단 하루만에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실록(연산군 일기)에 사관이 써둔 일화로 유자광이 함양을 유람하다가 자신의 시를 현판에 적어 달아놨었는데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던 중 이를 보고는 불태워버렸고 이후부터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림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으나, 김종직이 워낙에
네임드김종직 문서 참조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성종 7년에는 괜히
한명회에게 개겼다가 파직되는
굴욕그러나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행실은 나빠서 1478년에는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서 조정을 더렵혔다 하여 공신적을 박탈당했다가 1481년에 다시 되찾았다. 이때부터 까칠하고
다혈질인 대간
현석규가 왕 앞에서 팔을 걷어붙인 일을 가지고
임사홍 등과 함께 "그 새끼 막나가는 거 아니야? 완전 소인이구만!"하고 몇마디 씹었던 게 화근이 되어 임사홍과 같이 나란히 쫓겨났다가
[13]서자 출신인데 세조의 총애 덕에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대신들에게도 사림 출신 대간들에게도 미움을 받아 사간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에서 이극돈이 김일손이 쓴 왕실 모독 사초를 발견하게 되고 내용이 거의 역모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대신들과 논의하던 중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극돈은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연산군연산군[14]연산군은 조의제문의 반체제적인 내용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부관참시당하였고, 그것을 실은
김일손무오사화훗날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15] 연산군에 붙어 권세를 누리다 다시 성공한
쿠데타유자광이 갑작스럽게 연산군을 배반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유자광이 믿을 것은 오직
연산군어쨌거나
중종반정박원종, 유자광 등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일도 있었는데,
중종[16]그러던 중 창녕과 고창의 수령이 탐오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중종이 구언의 언지를 내리자 유자광은 그들에게 로비라도 받았는지 "창녕과 고창 사람들이 자기네 수령들이 자기들을 잘 다스렸는데 대체 뭘 잘못해서 쫓겨났는지 모르겠다네요."라는 말을 올렸다가 사림의 표적이 된다. 사림들로 가득한
대간들은 유자광이
폐주에게 빌붙어서
무오년에 그 많은 사림을 죽여놓고도유자광은 이것에 대해 적극 항변하고 당시 최고 실세였던
박원종박원종은 "지금 네가 위기에 처한 건 무신이어서가 아니라
악행을 많이 한 것 때문이거든? 무오년에 댁이 한 일 때문에 사림이 이를 간 걸 모르고 하는 말이냐?"라고 비웃으며 무시했고,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유자광은 결국 공신위를 박탈당하고
귀양늘그막에는 병환까지 앓는 바람에
장님향년여담으로 그를 외면하던 박원종은 유자광보다 먼저 병으로 죽었다. 박원종도 44세로 죽긴 했어도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지며 왕족 급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박원종의 외조카 딸과 수양 딸이 각각 왕비와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1년만에 죽어서 애통했을 듯[17]야사에 의하면 귀양간 지 얼마 안 돼 꿈에서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그의 눈을 벤 뒤부터 유자광이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는 시체도
부관참시자신이 저지른 죄가 많아 시체조차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보고 자신을 닮은 거지 노인을 발견해 시체를 대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유배당한 죄인으로서 이렇게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죽어서도 간사한 이미지로 전해오는 야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설로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에서는 자신이 부관 참시 당할 걸 예측하고
[18]유자광은 원래 천출(미천한 출신)이라서, 벼슬도 무관에서 출발했다. 그 때문에 세조 이후에 공신 집단이 형성한 관료층과는 꽤 달랐지만, 세조의 총애 덕분에 정5품 병조 정랑으로 벼락 출세했고, 마침내는 삼정승 바로 다음 고관인 종1품 숭정대부까지 차지했다. 이것은 문과에 급제한 양반도 노리기 힘든 자리다.
[19]최명희의 소설
혼불보통 그를
간신이시애의 난에서 과감하고도 타고난 무재로 공을 세운 남이에 대한 세조의 총애를 시기하여, 세조 사후
예종김종직이 자기 시를 불태워버리자 앙심을 품고 김종직 사후에
조의제문남이의 난에 대해서는 보통 유자광이 이시애 난 이후 정5품 밖에 승진하지 못해서 앙심을 품었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갑사(甲士)라는 한미한 직책과 서자라는 출신적 배경에 얽매여 있던 그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출세였다. 때문에 사실은 벼락 출세 이후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것을 우려했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유자광은 비록 정5품이긴 했지만 얼마 안가 치뤄진 과거시험에 급제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해 남이의 옥 당시엔 당상관이었다. 이정도면 서자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라고 해도 몇년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10년 이상은 벼슬생활 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자리에 앉은거라 이정도만 해도 인생역전 수준이다. 반면 남이의 경우 했던 짓으로 보면 유자광의 질투 대상이 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28세 병조판서의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가지긴 했지만, 왕에게도 공신에게도 견제받는 그의 신세를 보면
[20]남이의 옥이 터진 까닭은 바로, 남이 본인이 보여준 처신이었다. 예종에게 의심을 받아서
[21]그리고 무오사화 때 분명 유자광은
김일손[22]남효온유자광이 이런 행보를 보인 이유는 그가 등용된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조 때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기원은 세조의
계유정난과 관련된 구공신 집단인데, 유자광은 세조가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시애의 난남이나
구성군[23][24][25]결국 유자광은 당연히
왕권신이었지만 실제 그의 권력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으며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마지막에는
중종그리고 왕들이 유자광에게 권력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공신의 영애와 문벌, 좋은 출신 가문, 맑고 깨끗한 선비의 명성 같은 것들을 내세우는 신하들이 감히 할 생각을 낼 수가 없는 더러운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유자광은 세조에게 아첨하여 눈에 띄었던 것이고,
남이를 제거하고 싶어한 예종을 위해서 남이를 숙청했으며, 젊은 대간들
[26]을 숙청하고 싶어한
연산군게다가 중간에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과 결탁한 것도 결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다못해 연산군이 자신의 현조부(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
태종이숙번이나
하륜,
조영무연산군도 집권 초반에는 비교적 무난하고 괜찮은 왕이었으며, 예종 또한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모습의 군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자광과 예종,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못해 결국엔 유자광은 '폭군에게 아첨하는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맹꽁이 서당이나
고우영의 한오백년 만화,
신동우의 만화 한국사,
김삼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렇게 욕을 대차게 먹었어도, 노비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올라와서 봉양하던 효자였다고 한다.